[불교사 명장면] 5. 인도 석굴사원의 발달
생명의 근원 ‘자궁’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다

데칸고원의 메마른 들판을 달려 와고라의 협곡으로 들어서면 아잔타의 석굴이 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현실 넘어 존재의 심원에 다가서는 느낌
부처님도 석굴서 명상…수행자들 본받아
자연 동굴 이용하다 BC 3세기부터 인공 조성
초기엔 불탑중심…아잔타 후기석굴부터 불상
인도를 찾는 불자들은 아마도 부처님의 성지 다음으로 아잔타의 석굴사원을 가장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데칸고원의 메마른 들판을 달려 와고라의 협곡으로 들어서면 긴 절벽을 따라 검은 암괴가 펼쳐지고 그곳에 장엄한 아잔타의 석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오래 존속하는 물성 덕분에 돌에 새겨진 석굴들은 수백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바위를 달구는 뜨거운 햇볕과 모든 것이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피해 석굴 안으로 들어서면 서늘하고 어두운 고요가 우리를 감싼다. 안쪽의 깊숙한 어둠 속에는 설법하는 모습의 부처님이 계시고 그 양 옆에 늘어선 승방 주위의 벽은 화려한 벽화들로 빛난다.
인도인들은 일찍부터 석굴을 종교적인 공간으로 활용했다. 비와 더위를 피하기에 알맞은 자연 동굴은 수행자들이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거처였다. 이러한 실용적인 이점 외에도 석굴은 인도인들의 무한한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빛에서 멀어지면서 형상 있는 것들을 해체하여 암흑으로 돌려놓는 석굴의 내부는 마치 현실을 넘어서 존재의 심원에 다가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석굴을 생명의 근원인 자궁에 비유하곤 했다. 이러한 석굴의 이미지는 불교뿐 아니라 훗날 힌두교 신전의 성소에서도 재현되었으며 인도 미술의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었다.
불전에는 부처님이 석굴에서 수행하셨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석굴에서의 선정이다. 깨달음을 얻으신 뒤 부처님은 여러 곳으로 장소를 옮겨 명상에 들어 깨달은 바를 음미하셨다. 그 중에는 제석천의 석실이 포함되기도 한다.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기 위해 인드라는 판차시카라는 천신에게 거문고를 타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부처님은 그 청에 응하셨다. 인드라와 판차시카가 시립(侍立)한 석굴 안에 앉아 계신 부처님은 마투라와 간다라의 초기 불교미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석굴을 파서 종교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야의 아쇼카 왕 시대이다. 부처님의 성도처인 보드가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라바르 힐에 있는 몇 개의 석굴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석굴사원의 초창기 예이다. 그러나 이 석굴들은 불교도의 것은 아니고 육사외도 가운데 한 파인 아지비카(사명외도)가 사용하던 것임을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불교석굴 가운데 가장 오랜 예는 기원전 2세기경의 것이다. 인도 서쪽의 뭄바이 인근에 위치한 콘디브테는 그 가장 초기 형태를 보여준다. 이 석굴은 안쪽에 원형의 방이 있고 그 안에 스투파(탑)가 놓여 있다. 탑 둘레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탑 주위를 돌며 참배할 수 있었다. 원형의 주실 앞쪽에는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의 전실이 놓여 있다.
<사진> 인도 마하라슈트라주(州)에 있는 바자석굴.
이렇게 앞뒤로 원형과 장방형의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된 평면은 기원전 100년경에 변화를 맞았다. 이 무렵 만들어진 바자 석굴에서는 탑을 원형으로 둘러싸던 벽이 없어지고 앞뒤의 방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석굴 당은 가장 안쪽이 둥글고 앞뒤로 긴 장방형의 평면을 갖게 되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러한 평면이 서양 건축의 앱스(apse)와 닮았다고 해서 앱스형 평면이라 부르기도 한다. 좌우 벽을 따라 둥근 안쪽 면까지 줄을 지어 기둥이 세워졌다. 엄밀히 말하면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든 것이다. 기둥과 벽 사이에 난 공간은 기둥 안쪽 부분의 성소 주위를 돌며 참배할 수 있는 요도(繞道)로 쓰였다.
초기 석굴은 지상에 세워지던 목조건물을 본뜬 것이었다. 당시의 탑당이 목조건물로 지어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바자같이 시대가 올라가는 예에서는 천장에 나무로 된 들보를 얹고 석굴의 정면은 아예 나무로 만들어 붙였었다.
탑이 안치된 석굴은 부처님을 참배하며 공양하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석굴은 봉헌명문에 따르면 ‘체티야-가라(차이티야-그리하)’라고 불렸는데, ‘탑당’이라는 뜻이다. 탑당과 더불어 스님들이 생활하고 수행하는 승방굴도 있었다. 승방굴 역시 지상에 지어지던 목조건물처럼 방형 평면으로 석실을 파고 안쪽의 삼면에 작은 방들을 하나씩 내는 형식이었다.
콘디브테와 바자 등을 필두로 뭄바이 인근의 인도 서부 해안과 데칸고원 서부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수백 개의 석굴들이 만들어졌다. 피탈코라, 아잔타(9굴과 10굴), 나식, 베드사, 칼리, 칸헤리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석굴에서 가장 중요한 예배대상은 불탑이었다. 아직까지 불상이 만들어져 보편화된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불상 조각은 일체 볼 수 없다. 벽화가 일부 그려지기도 했으나 매우 소박한 형식이었다.
초기 석굴 조성은 기원후 2세기 후반에 칸헤리 석굴의 차이티야 굴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멈추었다. 흥미롭게도 이때부터 약 300년간 거의 석굴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460년경에 아잔타에서 불교석굴의 조영이 재개되었다. 4세기에 흥기하여 북인도에 제국을 건설했던 굽타 왕조 휘하의 바카타카 왕조의 후원 아래 20여 년간 석굴들이 속속 조성된 것이다.
지금 아잔타 중심부에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차이티야 굴인 제9굴과 10굴, 이에 부속된 승방굴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좌우로 아잔타 후기의 석굴 20여 개가 조성돼 있다. 제19굴과 26굴은 이 때 새로이 만들어진 차이티야 굴이다. 앞 시기의 소박한 차이티야 굴들과 달리 이 두 굴은 외면부터 내부까지 벽화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엄되었다. 초기 석굴과 평면은 같으나 안쪽의 탑 앞면에 감(龕)을 만들고 불상을 새겼다. 무불상시대가 지나고 이제 석굴 불당에서도 불상에 대한 예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시기 석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승방굴은 통례대로 방형 평면의 안쪽 삼면에 방들을 낸 형식이었다. 초기 석굴과 다른 점은 입구와 마주보는 안쪽 벽의 중앙 깊숙한 곳에 불당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안치했다는 점이다.
승방굴의 내부는 대부분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되었다.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本生),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삶 이야기인 불전(佛傳),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화현시킨 천불, 보살과 천신 등 다양한 주제들이 승방굴 내부를 장식했다. 이 벽화들은 안료에 접착제를 넣어 그린 것으로 지금까지도 화려한 색을 생생하게 유지하며 남아 있다.
아잔타를 시작으로 데칸고원 서부의 곳곳에서 불교석굴 조성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특히 오랑가바드(7세기)와 엘로라(8세기)의 석굴들이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에는 이미 대승불교가 난숙한 형태로 발전하여 밀교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신들과 복잡한 구도의 주제가 조각으로 표현되었다. 엘로라의 남쪽에 위치한 10여 개의 불교석굴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제11굴과 12굴의 내부에는 불교의 신관(神觀)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구조가 석굴의 평면과 그 안에 새겨진 불보살상들을 통해 구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인도의 석굴사원이 주변 지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인도 서북부의 스와트에서는 인도 본토의 예들을 소규모로 본뜬 석굴사원들이 기원전후에 축조되었다. 물론 스투파만이 안치된 간소한 구조였다. 카이버르 패스를 넘으면 고대 인도의 서북단인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분지에 이른다. 이곳에는 나가라하라국이 있었는데, 이 나라는 부처님이 자신의 모습을 영상(影像)으로 남긴 석굴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기초하여 ‘관불삼매해경’이라는 경전이 중앙아시아에서 지어지기도 했다. 이 굴은 아마 자연 동굴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 일대에는 카불 강을 따라 많은 석굴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러한 석굴 조성 전통은 힌두쿠시를 넘어 바미얀에서 수많은 석굴들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인도의 불교석굴 전통은 북쪽의 중앙아시아에도 전해져 타림분지의 쿠차 등에서는 일찍부터 석굴사원이 만들어졌다. 또 불교가 전해진 길을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불교석굴은 부처님 성소의 가장 영험 있는 형식으로 동아시아의 불자들에게 알려졌다. 중국의 돈황에서는 4세기 후반부터 석굴이 만들어졌고, 5세기에는 병령사와 운강석굴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의 석굴암은 형식상 그 원류가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석굴에 있다고 보이지만, 궁극적인 의미로는 인도에서 융성한 불교석굴 조성에 유래한 것임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형/ 서울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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