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해녀회' '어촌회'라고 불리는 잠수회는 '민속지식'의 산실이다. 이러한 공동체조직은 한정된 마을 어장의 효율적인 이용이나 작업 또는 어업권의 획득에 의한 회원 자격 등을 규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 | '살아 있는' 공동체 가능하게 한 구심점해녀공로비 등 마을사업 의사 결정 상징 공금 모아 마을발전·이웃돕기 등에 사용 지역밀착력 높은 특유 '협업' 문화 중요 잠녀 공동체는 '민속지식'의 산실이다. 어떻게 물질을 하면 되고, 위험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 등을 공유한다. 멀리 바다가 하얗게 보이면 바다 일을 접고, 동쪽에서 바람이 불 때는 작업 장소를 바꾸는 것들도 굳이 정리하지 않아도 서로 안다. 고단한 시집살이며 도통 말을 듣지 않는 남편의 흉도 거들어준다. 권익을 위해 뭉친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게 얻은 수익을 마을을 위해 쓰는 일 역시 같이 했다. '잠수회'가 단순한 모임 이상의 의미를 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적 지위따라 위상 변화 '잠수회'는 '해녀회' 혹은 '어촌회'라고도 불린다. 물질이란 것이 시작되고 '불턱'이란 공간을 공유하며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1962년 수협법 시행령 제4조에 따라 어촌 계원의 공동 이익과 사업을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어촌계 내의 하부 조직으로 편입됐다. 경제적 측면이 부각된데 따른 변화다. 한정된 마을 어장의 효율적인 이용이나 작업 또는 어업권의 획득에 의한 회원 자격 등을 규정하기 위해 잠녀들만의 조직이 필요해졌다. 이런 사정들과 달리 이후 1975년 수산업법 개정으로 공동 어장 관리권이 어촌계로 위임, 잠수회의 역할은 더 좁아졌다. 어촌계로 편입되면서 잠수회의 자율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해산물 생산과 판매 등에 있어 어촌계의 지시에 따르게 되는 등 수동적으로 바뀌었다. '해녀의 집' 운영이나 탈의실 관리 등 일련의 사업들에 있어 잠녀들이 주체적인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활동'은 하지만 법률상으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정들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힘입어 잠녀가 어촌계장의 역할 맡는 사례들이 나타나는 등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흐름 역시 잠녀.잠녀문화 특히 공동체에 있어 '살아있는' '지속가능한'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오늘을 일군 '주역' 지금은 '소득 보전'과 '권익 확보'를 위한 목소리를 모으는 창구로 우선 인지되고 있지만 잠수회는 마을 발전을 위한 크고 작은 노력으로 '오늘'을 일군 주역이다. 어촌계에 편입되기 이전에는 마을의 공공적인 일에 있어 의사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가 '해녀 공로비'와 '학교바당'이다. 사실 잠녀들의 역할이 큰 마을들을 살피다보면 학교 운동장 구석이나 마을 한복판에 그 곳 잠수회(해녀회)에서 성금을 내고 학교 부지를 마련했다거나 마을 공공시설을 짓거나 길을 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도의 「제주의 해녀」(1996년)에서도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에도 해녀회의 공금은 큰 몫을 맡는다"는 그 역할을 인정했다. 그 사정은 마을지인 「추자도」(1999)나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2011) 같은 기록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사수도 '육성회바다'다. 추자도의 부속섬인 사수도는 추자도 교육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추자초등학교의 전신인 최성학교 때부터 학부모들이 섬을 사서 관리했다. 지금도 '육성회' 이름으로 등기가 돼 있다. 사수도 물질 자체는 일제 시대부터 시작됐다. 학교와 연관 지어진 것은 1961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당시 추자국민학교 교장과 학부모 회장이 사수도에서 얻은 물질 수입을 학교발전기금으로 삼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후 1967년 추자교운영위원회가 제주 세무서에 7만3500원을 주고 매입 등기를 했고 입찰을 통해 작업권을 줬다. 아직도 대서리와 영흥리 잠녀들이 2년에 1번 돈을 모아 섬에서 작업하는 권리를 산다. 우도에도 '기성회바당'이란 것이 있었다. 우도의 경우 해안 공동어장의 일정 지역을 소위 '기성회바당'이라고 이름하고 공동노력으로 공동출자하는 형식으로 그 지역을 관리함으로써 학교운영 자금을 마련했다. 기성회바당은 1970년 초등학교 육성회비가 폐지되기 전까지 10여년 간이나 운영됐다. 학교운영회 자금 모금이 금지된 이후에는 이들 재원을 마을공동사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쓰임이 바뀌었다. 이밖에도 '마을에서 전기를 들여온다든지, 수도를 시설한다든지 하는 공동어장 개발사업을 벌이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해녀 공동어장의 어업권을 팔았다'는 내용을 신문 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수익 나눔, 이웃사랑 실천 등 특유의 공동체 의식은 단순히 수익을 나누는데 그치지 않는다. 1970년대 신문기사 등을 살펴보면 어한기를 이용한 협동재배를 통해 마을 살림을 키웠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새마을운동 등 개발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부지런함은 '물질'을 부업으로 한 반농반어의 확산과도 연관 있다. 최근 읍면 여성조직을 중심으로 한 수익사업의 모델이기도 하다. 1970년에는 '어촌협업화사업'의 일환으로 잠녀들의 협동재배 기사가 유독 많이 등장했다. 어촌계 잠녀들 또는 잠수회를 중심으로 1인당 얼마씩 돈을 모아 밭을 임대, 고구마나 무, 유채 등을 심어 수익을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비식용 해조류'를 채취해 수익을 올렸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이들 사업들이 성공하면 기금을 마련, 규모가 큰 협업사업을 벌일 계획" "현대적인 잠수복 개량을 비롯, 어촌계발전을 위한 사업" 등의 구상이 등장하지만 이후 자치단체를 통한 지원이 확대된 것을 보면 기대만큼 성과를 얻지 못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공동수익사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는 이웃사랑으로 이어졌다. 1994년 남원읍 태흥2리의 '사랑의 소라 모으기'나 1995년 조천읍 신흥리의 공동채취수익 마을 운영 기금 쾌척 등은 단순한 이벤트성 행사에 그치지 않았다. 최근에도 연말 잠수회 이름으로 성금을 기탁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고 미 기자 해산물 판매로 사회봉사·헌신 | | | | | | ▲ 온평리 해녀공로비 | | | 온평리 학교바당과 해녀공로비
온평리는 잠녀들이 지역에 미친 영향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마을이다. 여기에는 '학교바당'과 '해녀공로(덕)비'가 있다. 공덕비에는 잠녀들이 학교바당에서 채취한 미역을 팔아 학교 신축공사와 재건, 전기가설과 같은 일들 했다는 사회봉사와 헌신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배경에는 잠녀들의 교육열이 있다. 자신들에게는 '물질'밖에 더 선택할 일이 없었지만 바깥물질 등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수탈 등 상대적 홀대를 겪으며 교육을 통해 보다 나은 선택이나 입지를 굳힐 수 있음을 깨우친 경과다. 1946년 개교 인가를 받은 온평국민학교는 교실이 4개 밖에 없어 학생들은 공회당 자리 등을 옮겨 공부를 하거나 심지어 한 교실에 4학년까지 합반 수업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기성회에서 일본에 나가 있는 재일교포들에게 모금하고 재력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학교부지밖에 구할 수 없어 고심하던 차에 잠녀들 사이에서 미역판매 대금을 기부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덕분에 학교 건립이 가능했다. 1950년 화재로 목조건물이 전부 소실되었을 때도 잠녀들이 미역판매 대금을 내놔 이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게 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