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복추(張福樞, 1815~1900)는 자가 경하(景遐)이고 호는 사미헌(四未軒), 또는 녹리산인(甪里山人)이며 본관은 인동(仁同 옥산(玉山))이다. 그는 1815년 예천 용궁현(龍宮縣) 개안리(開岸里) 외가에서 아버지 굉(浤 호는 서산(棲山))과 동래 정씨(東萊鄭氏) 일희(日熙)의 따님인 어머니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세 살 때 조부 주(儔 호는 각헌(覺軒))의 명으로 백부 관()에게 출계(出系)하였다. 향리는 경북 칠곡군 기산면(岐山面) 각산리(角山里)이다. 그의 선계로 장안세(張安世)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불사이성(不事二姓)의 절의를 지켰다. 8대 조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백세(百世)의 종사(宗師)로 이름이 높았으며, 7대 조부 청천당(聽天堂) 장응일(張應一, 1599~1676)은 세상에 명절(名節)로 중망이 있었다. 6대 조부 소매당(訴梅堂) 장벽(張銢, 1622~1705)은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을 지냈다. 5대 조부는 장만중(張萬重, 1646~1715)이며 고조부 장대열(張大說, 1678~1747)은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창의하였고 증조부는 장지목(張趾穆, 1726~1754)이다. 성품이 지극히 효순한 사미헌은 태어날 때부터 골상이 비범하고 오른손에 인(仁) 자 모양의 문양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어릴 때부터 조부를 통해 가학으로 내려오는 학문적 전통을 접하게 되는데, 조부는 매양 타이르기를, “오선자(吾先子)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의 교훈에 천하제일(天下第一) 사업(事業)을 할 수 있어야만 천하제일(天下第一) 인물(人物)이 된다고 하였으니, 너는 공명을 다투지 말고 삼가 가학을 지켜 막중함을 기약하라.”라고 하였다. 13세에 사서(四書)를 두루 읽어서 명리에 뜻을 끊고 대업을 궁구해 나갔다. 가학을 통한 학문전수는 17세 때 상주 모동 수봉리의 장수 황씨(長水黃氏) 집안에 장가들면서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황씨 집안은 문헌(文獻)의 대방(大方)으로, 장인인 수와공(守窩公) 황호선(黃浩善)과 그의 아우 장원공(藏園公) 황원선(黃源善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은 당시 중망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사미헌은 이들 내지 처남들과 자주 왕래하며 학문의 의난처를 질의하였는데, 이 때문에 장수 황씨와 주고받은 글이 문집에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21세에 황씨 부인을 잃고, 22세 때 인천 채씨(仁川蔡氏) 채국표(蔡國標)의 딸과 재혼하여 석빈(錫贇)과 석찬(錫贊)을 두게 된다. 이때 전후로 한때 과거 시험에 뜻을 두었던 것을 그만두고 경서와 예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특히 23세 무렵에 《심경》, 《근사록》, 주자서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이웃 고을에 사는 이정상(李鼎相), 이진상(李震相), 정삼석(鄭三錫) 등과 경지(經旨)를 강론하며 자신만의 학문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25세 때 자신을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어 구학의 입지와 학문적 지향이 확고함을 밝혔다.
성현의 가르침에 침잠하고, 예법의 터전에서 조용하게 노니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항상 빨리 이루려고 하다가 달성하지 못할까를 걱정하고, 참됨이 쌓여 체득하고 증험하여 도가 은은하되 날로 드러나기를 바라네. 어찌 한순간도 공부가 끊어짐이 있으리. 감히 고인의 울타리를 엿보네. 능히 공경하고 능히 정성을 다하며, 조장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라.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성현의 학문종지를 탐구하고 그런 바탕 위에 몸소 실천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고인이 남긴 학문은 한순간의 간단이 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니, 성실하게 차근차근 해 나가되 욕속(欲速)하거나 조장(助長)해서는 고인의 학문적 성취를 터득할 수 없음을 경계하였다. 27세 때 《주자서절요》를, 33세 때 《성리대전》을 읽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였다. 30세 전의 사미헌의 삶이 가학적 전통 위에 인근의 사우(士友)들과의 학문을 강마한 시기였다면, 이후의 삶은 더욱 성숙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제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적 저술을 편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30세 때 신광사(神光寺 선석사(禪石寺))에서 《소학》을 강론하고, 31세 때 모원당(慕遠堂)에서 제생들을 강학한 이후, 39세 때는 장승원(張升遠)과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서 《심경》을 강하고, 40세 때 정오석(鄭五錫), 송인호(宋寅濩)와 만나 《역학계몽》을 강하였다. 45세 때 “효제충신(孝悌忠信) 네 가지는 아직 내가 다하지 못한 것으로 잠시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시 거처하는 곳에 붙여서 출입기거(出入起居)와 좌와어묵(左臥語默) 시에 사람이 되는 도리를 터득하기 위하여 당호를 사미헌(四未軒)이라 한다.”라고 하여 자신을 채찍질하는 징표로 삼았다. 이 ‘사미(四未)’라는 말은 《중용》에서 공자(孔子)가 자신에게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도 능함이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와 같이 사미헌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독신(篤信)하고 역행하니 원근에서 배우려는 학자들이 모여들었기에, 46세 때 여헌의 문강지규(門講之規)를 본떠서 학규(學規)를 정하고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62세 때 송인각(宋寅慤)과 《태극도설》을 논하였고, 64세 때 이진상과 신광사에 모여 《중용》을 강하였으며, 70세 때 모원당에서 제생들을 강학하였다. 71세 때 봄에 도동(道東)의 경덕사(景德祠)를 배알하고 하산(夏山)의 낙빈재(洛濱齋)와 월천(月川)에서, 72세 때 청천서당(晴川書堂)에서, 79세 때 동락서당(東洛書堂)에서, 80세 때 묵방(墨坊)의 송단(松壇)에서, 85세 때 구욱재(求勗齋)에서 강회를 여니 먼 지방의 인사들이 답지하였다.특히 이진상과 함께 한 신광사에서의 강회는 당시 이 지역의 유수한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이를테면, 김진호(金鎭祜)ㆍ곽종석(郭鍾錫)ㆍ이종기(李種杞)ㆍ송내흠(宋來欽)ㆍ이만응(李萬膺)ㆍ송홍규(宋鴻逵)ㆍ허훈(許薰)과 그의 아들 허용(許墉), 이만수(李萬洙)와 그의 아들 이덕후(李德厚), 송진익(宋晉翼)과 그의 아우 송종익(宋宗翼), 이승희(李承熙)와 종제(從弟) 이건희(李鍵熙) 등이 참여하여 며칠동안 머물며 학문을 강토(講討)하였다.뿐만아니라 80세 때 통정대부 벼슬을 받자 기세도명(欺世盜名)한다고 하면서 가야산에 은거하였는데, 이때 오히려 묵방의 송단에서의 강회에서 수백 명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81세 때 사미헌은 묵방에서 더 깊은 곳으로 숨기 위하여 경남 거창군 가조면 당동(唐洞)으로 우거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이 일대 많은 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게 된다. 이 때문에 문집에 이 지역에 있는 인사들에 대하여 지은 글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 이에는 물론 사미헌의 장남이 가조에 사는 변씨(卞氏)에게 장가든 것이 한몫을 하고 있기도 하다. 사미헌의 강학공간은 한 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 지역의 선현들의 자취가 배어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단순히 현장에서의 강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강회의 내용을 〈모원당강의(慕遠堂講義)〉ㆍ〈묵방강의(墨坊講義)〉ㆍ〈월천강의(月川講義)〉 등으로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그의 강학활동은 현장에서의 강회뿐만 아니라 편지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강학활동의 구체적 내용은 《소학》ㆍ《사서》ㆍ《심경》ㆍ《역학계몽》ㆍ《태극도설》 등 주로 성리설과 경학, 예학에 치중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사미헌은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학문적 여가를 이용하거나 학문의 연장선에서 주위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선현의 유적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안음(安陰)의 모리(某里)와 수승대(搜勝臺)는 27세에, 경주와 남쪽 지방인 동래와 해운대는 30세에, 금오산은 37세에, 가야산은 42세에, 속리산은 44세에, 팔공산은 45세에, 합천의 황계폭포는 60세에, 황악산은 65세에, 금릉산수는 78세에 유람한 곳이다. 산수 유람을 하고 난 뒤에 감회를 시로 짓기도 하고 유산록(遊山錄)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사미헌은 벼슬의 진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학문이 뛰어나고 명성이 크게 높아짐에 따라 조정에서 67세 되던 해에는 경학으로 천거되어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와 통훈대부(通訓大夫)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등 1년 사이에 3번이나 벼슬이 연이어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80세 되던 해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으며, 82세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서(陞敍)되었으나 역시 받지 아니하였다. 사미헌은 86세까지 장수하였다. 술은 한 잔으로 족하였고 식사는 하루에 한 끼였다. 몇 숫가락 먹는 정도의 엄격한 소식가였으며 반찬도 대단히 소박하여 몇 가지 정도였다. 그러나 만년으로 갈수록 기력이 강하고 맑았으며 학문에 전일하였다고 한다. 86세에 3월에 노환으로 중병을 얻어 미음을 넘기지 못하였음에도 하루 2, 3십 명씩 찾아오는 문병객을 일일이 맞이하자 보다 못한 자제들이 이를 만류하니 “붕우가 상봉하는 즐거움에 소홀함이 있을 수 있으면 어찌 다음날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도리어 나무라기도 하였다. 4월에 급속하게 병이 깊어져 미음을 겨우 삼키게 되자 자제들과 문생을 불러서 “친상(親喪)시에 예를 다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면서 장례를 간소히 할 것과 “실지(實地)에다 마음을 두고 분수대로 힘씀이 옳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인들에게는 “성실하게 면려(勉勵)하라.”라고 이르면서 “입심(立心)을 강철같이 굳게 하여 박실하게 행동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4월 8일에 고종(考終)하였다. 2. 문집의 구성과 내용
《사미헌집》은 사미헌의 아들과 문인들에 의해 정리되어 간행되었다. 문인 송준필(宋浚弼)의 《공산집(恭山集)》에 실린 1904년에 지은 시에는 장승택(張升澤), 허훈(許薰) 등과 신광사(神光寺)에서 선사(先師)의 유문을 교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1904년에 유문의 정리와 교정을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결과 1906년에 11권 6책의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사미헌은 문집 이외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것들을 1972년에 현손 장지윤(張志允)과 유림들의 주도로 《사미헌전서(四未軒全書)》 2책을 영인하여 출판하였다. 거기의 제1책에는 문집 원집,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 《문변지론(問辨至論)》, 《사서계몽(四書啓蒙)》, 《역학계몽(易學啓蒙)》, 《성리잡의(性理雜儀)》가 수록되어 있고, 제2책에는 문집 속집, 《가례보의(家禮補疑)》, 《연보(年譜)》, 《부록(附錄)》, 《녹리급문제자록(甪里及門諸子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 《삼강록간보(三綱錄刊補)》가 있다. 문집에 실린 작품은 원래 저술에 비하면 극히 적은 양으로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사미헌이 79세 때 쓴 《사미헌집》 권8에 실려 있는 〈제녹리나일후(題甪里懶一後)〉에 있다. 이글은 사미헌이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글을 총정리하여 극소수의 작품만 남겨 책으로 만들고 거기에 쓴 발문이다. 사미헌은 자기의 작품이 도를 실은 문(文)도 아니고 덕을 담은 언(言)도 아니므로 모두 버리고 싶지만, 자손들이 자기의 작품을 통하여 선조의 성격과 기질을 파악할 수 있는 계제로 삼기 위하여 이 책을 만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원래의 많은 저술에서 대대적으로 산삭하여 《녹리나일후》 원고로 만들었을 것이며,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사미헌집》의 저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문집 11권 6책 외에 속집 2권이 더 있지만, 속집은 《한국문집총간》에 실리지 않으므로 이번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본집은 11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이 없고, 권수(卷首)에 목록(目錄)이 있다. 권1에는 시(詩) 107제(題) 130수, 소(疏) 2편이 실려 있다. 시는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주로 실용적인 화차운시(和次韻詩), 증별시(贈別詩), 만시(輓詩) 등이 많은데, 그중에 만시는 73수로 전체의 56%에 해당한다. 사미헌은 “매양 친구들의 다그침으로 글을 지은 것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작품들이 텅 빈 수레를 꾸민 꼴이다. 그러므로 뜻에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아 문득 스스로 아끼지 않고 버려서 장독의 덮개와 벽을 바르는데 사용하였다.”라고 하였듯이 거개가 실용적 목적에 의해 창작되었던 것이다. 실용적인 시 외에 감회와 승경을 읊은 시로는 〈묵방유감(墨坊有感)〉과 〈묵방십영(墨坊十詠)〉이 주목된다. 묵방은 성주군 금수면 염속봉(厭俗峯) 아래에 있는데, 장현광(張顯光)이 병란을 피해 숨어들었던 곳이다. 장복추는 한편으로 선조의 얼이 깃들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천석(泉石)의 승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사랑하여 집 한 채를 사서 ‘묵방’으로 편액했다. 때는 1892년 그의 나이 78세 되던 해였다. 그는 그곳에 ‘자언정(玆焉亭)’이란 현판을 걸고 강학을 하였다. 자언(玆焉)이란 송나라 주자의 〈복거(卜居)〉 시 중 ‘여기에서 늘그막을 마치려 하노라.〔玆焉畢暮景〕’라는 구절에서 취하여 왔다. 현재는 묵방서당(墨坊書堂)으로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위에 자언정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묵방십영의 소제목은 멱진탄(覔眞灘), 수등간(垂藤澗), 쌍류추(雙流湫), 세심연(洗心淵), 반타석(盤陀石), 현운대(玄雲臺), 필암(筆巖), 연반(硯磐), 고폭(鼓瀑), 평천(平川)이다. 2편의 소(疏) 중 〈의청우산서원복설소(擬請愚山書院復設疏)〉는 1869년에 지은 것으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모셔져 있던 우산서원(愚山書院)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한 상소문이고, 〈청물개의제소(請勿改衣制疏)〉는 1884년에 지은 것으로, 그해 윤5월에 내린 복제(服制) 변경(變更)의 명(命)을 거둘 것을 청하는 상소문이다. 권2~권5에는 모두 257편의 편지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이 경학과 성리학 그리고 예학에 대해 논한 것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편지가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인데 아마도 문집을 편집하면서 앞뒤 수식의 말을 잘라 내고 꼭 필요한 내용만 실은 것으로 추측된다. 권2에는 장석우(張錫愚), 황원선(黃源善), 이진상(李震相), 이종기(李種杞) 등 52인에게 보낸 편지 73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장승택(張升澤), 정지선(鄭趾善), 정재선(鄭載善), 김진호(金鎭祜) 등 47인에게 보낸 편지 6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에는 이상익(李相翼), 이석균(李鉐均), 이기승(李基升), 하겸진(河謙鎭) 등 62인에게 보낸 편지 73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송준필(宋浚弼), 조긍섭(曺兢燮), 장석영(張錫英), 장남 장석빈(張錫贇) 등 41인에게 보내는 편지 49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6에는 잡저(雜著) 15편이 실려 있다. 〈태극도설문답(太極圖說問答)〉은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에 대하여 초수(楚叟)라는 가상적인 인물을 내세워 사미헌과 문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모원당강의(慕遠堂講義)〉는 앞 부분에서는 《논어》와 《맹자》에서 몇 구절을 인용하여 자문자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중간부터 끝까지는 《심경》의 수장에 나오는 ‘윤집궐중(允執厥中)’에 대하여 희원(希元)과 문답한 것이다. 〈월천강의(月川講義)〉는 《논어》와 《맹자》의 몇 조목에 대하여 문답한 것이다. 〈묵방강의(墨坊講義)〉는 《중용》의 4조목과 《대학》의 7조목에 대하여 문답한 것이다. 〈독서쇄록(讀書瑣錄)〉은 1840년에 지은 것이다. 내용은 《대학》의 경 1장 처음부터 전 10장까지 전체의 글에 대하여 문답없이 자술로 세밀하게 분석한 거대한 한 편의 논문이다. 치밀하게 분석하여 의미를 부여하였기에 《대학》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어서 《논어》의 일삼성장(日三省章) 등 모두 5장과 《맹자》의 허행장(許行章) 등 모두 3장을 분석하였다. 이어서 《중용》 1장부터 33장까지 전체를 각장과 연계시켜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분석하여 하나의 논문처럼 엮어 놓았다. 그 외 《주역》의 3획과 6획 및 8괘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어 64괘가 형성되는 과정을 언급하였다. 그중에 건괘를 설명하여 나머지 63괘를 여기에 적용하면 《주역》을 만든 본의를 알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 외에는 여러 가지에 대하여 7조항에 걸쳐 논의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척유록(摭幽錄)〉은 세속의 백성 중에 선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헌에 드러나지 않고 묻혀있는 것을 드러낸 것으로, 1889년에 지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박문숙(朴文叔), 이만응(李萬膺), 황재호(黃在昊), 유우석(劉遇錫), 이인엽(李仁燁), 이기욱(李基煜), 서도치(徐道致), 최씨(崔氏) 처, 이만철(李晩喆), 최임술(崔任述), 김성손(金聖孫)이다. 여기에는 사대부도 있지만, 주로 평민과 천민인 가노(家奴) 등의 인물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금오산유록(金烏山遊錄)〉은 1852년에 금오산을 유람하고 지은 것이다. 그 외 〈불개명설(不改名說)〉, 〈관계(冠誡)〉, 〈긍재설(兢齋說)〉,〈성재설(惺齋說)〉, 〈서증이성오경균(書贈李星五璟均)〉, 〈서증허명현(書贈許明現)〉, 〈서증장자홍익신형국봉상(書贈張子洪翼臣衡國鳳相)〉,〈양정부상지자사(梁定夫象止字辭)〉가 있다. 권7에는 서(序) 23편과 기(記) 21편이 실려 있다. 서문에는 자신의 저술에 대한 《가례보의(家禮補疑)》와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의 서문이 있다. 그리고 타인의 문집(文集)과 실기(實記)에 대한 서문이 많은데, 여효증(呂孝曾)의 《서암집(西巖集)》, 김천일(金千鎰)의 《송천집(松川集)》, 윤동야(尹東野)의 《현와집(弦窩集)》, 이일협(李逸協)의 《이와집(螭窩集)》, 여팔거(呂八擧)의 《성암유집(聖巖遺集)》, 이속(李涑)의 《한천유집(寒泉遺集)》, 변시관(卞時瓘)의 《허생당유고(虛生堂遺稿)》, 안찬(安鑽)의 《치사유고(癡史遺稿)》, 정삼석(鄭三錫)의 《유하유고(柳下遺稿)》, 도응(都膺)의 《청송당실기(靑松堂實記)》, 권용현(權龍見)의 《월암실기(月巖實記)》, 이장원(李長源)의 《초당실기(草堂實記)》, 윤경남(尹景男)의 《영호실기(瀯湖實記)》, 심이문(沈以汶)의 《용계실기(龍溪實記)》 등이 그것이다. 또 세고(世稿)에 대한 서문으로 《야성세고(冶城世稿)》, 《연성세고(延城世稿), 《성산세고(星山世稿)》가 있다. 그 외 〈화순최씨족보서(和順崔氏族譜序)〉와 〈공암서당중수계첩서(孔巖書堂重修契帖序)〉가 있고, 송서(送序)로 〈증장군성유성규서(贈張君聖維性奎序)〉와 〈송장성초지학산소서(送張性初之鶴山小序)〉가 있다. 기문에는 중건기인 김우옹(金宇顒)의 고반정사(考槃精舍), 임훈(林薰)의 갈천서당(葛川書堂), 이희규(李熺奎)의 백곡정사(白谷精舍)가 있다. 정자와 서재의 기문에는 이견간(李堅幹)의 산화재(山花齋), 김숙자(金叔滋)를 추모하는 추원당(追遠堂), 아홉 분 늙은이의 구로재(九老齋), 박 의사(朴義士) 14분을 사모하는 모의정(慕義亭), 이수원(李秀元)의 수족당(睡足堂), 심자광(沈自光)과 심일삼(沈日三)을 추모하는 이락재(伊樂齋), 여훤(呂烜)과 여욱(呂煜)의 합경당(合敬堂), 장두형(張斗衡)의 석금실(石琴室), 이치천(李稺千)의 민와(敏窩), 김연진(金鍊璡)의 기항(棄巷), 최원근(崔元根) 4형제의 사우당(四友堂), 이정기(李貞基)의 일강재(日强齋), 여망규(呂望奎)의 열호재(悅乎齋)에 대한 기(記)가 있다. 효자 열부 정려각기(旌閭閣記)는 효자 김언상(金彦祥)과 그의 처 효부 노씨(盧氏)를 기리는 〈증판서김공정효각기(贈判書金公旌孝閣記)〉, 임경원(林慶源)의 〈도정임공정효각기(都正林公旌孝閣記)〉, 이만번(李晩番)과 이만경(李晩景)의 〈이씨충효쌍정기(李氏忠孝雙旌記)〉, 권 유인(權孺人)의 〈권씨표열비기(權氏表烈碑記)〉, 열부 최씨의 〈열부최씨정려기(烈婦崔氏旌閭記)〉가 있다. 권8에는 발(跋) 9편, 잠(箴) 2편, 명(銘) 7편, 찬(贊) 2편, 상량문(上樑文) 3편, 축문(祝文) 10편, 제문(祭文) 16편, 뇌문(誄文) 2편, 애사(哀辭) 7편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훈가구잠(訓家九箴)〉은 1855년에 지은 글로, 사부모(事父母), 우형제(友兄弟), 근부부(謹夫婦), 교자손(敎子孫), 경제사(敬祭祀), 접빈우(接賓友), 돈친척(敦親戚), 면독서(勉讀書), 권농상(勸農桑)의 9항목으로 되어 있는 글이다. 상량문은 3편으로 어필각(御筆閣),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 원회당(遠懷堂)에 관한 것이다. 축문은 이견간(李堅幹), 장안세(張安世), 장현광, 장벽(張銢) 등에 대한 것이다. 제문은 황원선(黃源善), 이의수(李懿秀), 정삼석(鄭三錫), 장선추(張鮮樞), 송인각(宋寅慤) 등에 대한 것이고, 애사는 신상현(申相賢), 변지석(卞芝錫), 이돈후(李敦厚) 등에 대한 것이다. 권9~권10에는 비(碑) 4편, 묘지명(墓誌銘) 17편, 묘갈명(墓碣銘) 61편이 실려 있다. 비문은 김숙자(金叔滋), 오건(吳健), 노필(盧㻶), 강재중(姜在重)에 대한 것이다. 묘지명은 이의잠(李宜潛), 이두원(李斗元), 송희철(宋希哲), 장두빈(張斗斌), 채국렬(蔡國烈), 정주욱(鄭周郁), 허양(許壤), 5대조 장만중(張萬重), 고조부 장대열(張大說), 증조부 장지목(張趾穆), 종조부 장주(張鑄), 생부 장굉(張浤), 생모 동래 정씨(東萊鄭氏), 숙부 장한, 재종제 장시표(張時杓), 망실(亡室) 인천 채씨(仁川蔡氏), 장지복(張趾馥)에 대한 것이다. 묘갈명은 이철균(李鐵均), 김대진(金大振), 이여량(李汝良), 변벽(卞璧), 여욱(呂煜), 박인량(朴寅亮), 김경근(金景謹), 박유립(朴有立), 강기룡(姜起龍), 여효주(呂孝周), 도세옹(都世雍), 이여익(李汝翊), 이동례(李東禮), 변우함(卞友諴), 안구(安救), 이시격(李時格), 송세제(宋世濟), 송세빈(宋世彬), 손전(孫佺), 도세순(都世純), 송현석(宋玄錫), 정일(鄭鎰), 이이항(李爾沆), 노점(盧坫), 김시락(金是洛), 여대익(呂大翊), 하주(河柱), 이의관(李宜觀), 윤억(尹檍), 김성유(金性儒), 변초민(卞楚珉), 김계선(金繼善), 여익행(呂翼行), 문치권(文致權), 송천흠(宋天欽), 안목(安沐), 장봉우(張鳳羽), 이원구(李源求), 송응시(宋應時), 박정기(朴鼎基), 송홍익(宋鴻翼), 이재균(李在均), 장봉의(張鳳儀), 이정상(李鼎相), 이언부(李彦富), 최창락(崔昌洛), 장석환(張錫煥), 조광유(趙光鍒), 이치모(李致模), 이원후(李源煦), 송인각(宋寅慤), 이순(李舜), 허찬(許贊), 이진락(李鎭洛), 이종성(李宗性), 이이린(李以麟), 최태진(崔台鎭), 조화승(曺華承), 정지선(鄭趾善), 정복대(鄭復大), 5대조 장만익(張萬益)에 대한 것이다. 권11에는 행장(行狀) 19편, 유사(遺事) 6편, 전(傳) 1편이 실려 있다. 행장은 이두연(李斗然), 이지화(李之華), 노훈(盧壎), 김립(金立), 노석빈(盧碩賓), 김세명(金世鳴), 최익대(崔益大), 김상락(金相洛), 노광리(盧光履), 황원선(黃源善), 장석규(張錫奎), 여응규(呂應奎), 신지정(辛志鼎), 윤병구(尹炳九), 정종훈(鄭宗薰), 권정복(權正馥), 안효완(安孝完), 김기수(金基洙), 이이구(李以矩)에 대한 것이고, 유사는 변청(卞淸), 임동익(林東翊), 6대 조부 장벽(張銢), 조부 장주(張儔), 선고 장관(張), 선비 광주 이씨(廣州李氏)에 대한 것이다. 전(傳)은 장병덕(張柄悳)의 처 열부 평산 신씨(平山申氏)에 대한 것이다. 3. 사미헌의 학문 - 경학과 예학 -
사미헌의 학문은 경학과 예학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저술에서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 《문변지론(問辨至論)》, 《사서계몽(四書啓蒙)》, 《역학계몽(易學啓蒙)》, 《성리잡의(性理雜儀)》는 경학에 해당하고 《가례보의(家禮補疑)》는 예학에 해당한다. 사미헌은 학문을 함에 있어서 《소학》과 사서(四書)를 중심에 두며, 주자와 퇴계가 제시한 독서법을 그대로 따랐다. 그는 《소학》으로 학문의 근본을 삼고, 《대학》으로 간가(間架)를 삼으며, 《논어》ㆍ《맹자》는 그 칸을 채우는 내용으로 삼고, 정자(程子)ㆍ주자(朱子) 및 퇴계ㆍ대산(大山)의 글로 우익(羽翼)을 삼으며, 《중용》ㆍ《주역》을 통해 궁극의 진리를 회통한다는 성학과정(成學過程)을 제시하였다. 그는 특히 퇴계의 학문을 극도로 존숭하여 “근래에 영남의 여러 집안들이 각각 한마디 주장을 내세워 후생들로 하여금 발 놓을 곳을 미혹되게 하는데 이르는 것이 참으로 보내 준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우리 동방의 퇴도(退陶)의 논의는 곧 정주(程朱)의 논의이며, 정주의 논의는 곧 공자와 맹자가 서로 전하는 지결이다. 유교 문로(門路)의 정도를 구하려고 하면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는가?”라고 하여 퇴계의 학문이 바로 정주(程朱)의 논의이며 공맹(孔孟)의 지결이라고 강조하였다. 주자학과 퇴계학의 핵심은 수양론을 중시하는 경(敬) 공부이다. 이 때문에 사미헌은 모든 경전에 담긴 핵심을 ‘경’ 한 글자로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숙흥야매잠집설서(夙興夜寐箴集說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성현의 천 가지 법도와 만 가지 가르침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정성을 다하여 그 기미를 구하였으니, 그것은 하나의 ‘경(敬)’ 자에 벗어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서경(書經)》의 정일집중(精一執中)과 《주역(周易)》의 한사존성(閑邪存誠)과 공자와 안연(顔淵)의 이른바 박문약례(博文約禮)와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의 이른바 선을 밝히고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 경(敬)에 전일하여 시종의 요체가 되지 않겠는가.
이처럼 그는 모든 성현의 말씀과 경전에 담긴 내용이 경(敬)에 연결된다고 하였다. 〈묵방강의(墨坊講義)〉에 경(敬)의 뜻에 대하여 묻자, 사미헌은 답하기를, “이천(伊川)은 ‘정제엄숙(整齊嚴肅)하며,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다른 곳으로 감이 없는 것〔主一無適〕’이라고 하였고, 상채(上蔡)는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법〔惺惺法〕’이라고 하였고, 화정(和靖)은 ‘그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외물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일컫는 명칭이 다양하다.” 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경’은 노자의 청정(淸靜)과 선종의 좌선(坐禪)의 영향 아래 새로운 의미로 전환되어 심성수양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주희는 위와 같이 ‘경’의 4개 조목을 제시하였다. 즉 정이(程頤, 1033~1107)의 ‘주일무적(主一無適)’과 ‘정제엄숙(整齊嚴肅)’, 윤순(尹焞, 1071~1142)의 ‘기심수렴불용일물(其心收斂不容一物)’, 사량좌(謝良佐, 1050~1103)의 ‘상성성법(常惺惺法)’이 그것이다. ‘주일무적’은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는 말이고, ‘정제엄숙’은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으로 정신의 전일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의 외적 성격이다. 그리고 ‘기심수렴불용일물’은 그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잡념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상성성법’은 정신을 맑고 또렷이 하는 각성의 상태를 말한 것이다. 이 4개 조목은 그 표현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하나의 의미, 즉 ‘경’으로 귀납된다. 경을 공부하는 데 선후 순서를 묻자, 사미헌은 “경을 잡는 것〔持敬〕을 반드시 정제엄숙으로부터 시작하면 자연히 마음이 늘 깨어 있게 되고, 자연히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다른 곳으로 감이 없게 되고, 자연히 그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외물도 허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안과 밖을 서로 기르는 공부이니, 아마도 칼로 자르듯 선후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미헌은 경공부가 잘못하면 선학(禪學)으로 빠진다고 하면서 경계하였다. 사미헌의 재종질 장석영(張錫英)이 육상산(陸象山)이 “일에 따라 이치를 토론하면 정신이 쉽게 피폐해지니, 다만 본심의 밝음을 구하게 되면 이치를 비추지 않음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한 것에 문제점을 묻자, 사미헌이 “궁리하고 격물할 때 혹 생각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않음이 있으면 이것은 지경(持敬)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경의 공부가 지극하다면 어찌 이런 걱정이 있겠는가? 생각이 어지러운 이런 때는 단연코 마땅히 경(敬)을 하여 스스로 마음을 잡아야 한다. 만약 경을 일삼는 것이 없이 다만 본심의 밝음을 구한다면 아마도 공부할 곳이 없게 되어 본심의 밝음을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 혼미하게 되니, 체험해보면 알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사미헌은 이진상과 같이 공부하는 등 가까운 사이지만, 한주가 독창적으로 내세운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해서 선학적 기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마음이 곧 이다.〔心卽理〕”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자(朱子)는 “심(心)은, 성(性)에 비하면 조금 자취가 있는 편이고, 기(氣)에 비하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령한 것이다.”라고 했다. 퇴도(退陶)는 “무릇 심(心)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이(理)와 기(氣)를 아울러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만약 “마음이 곧 이다.”라고 하면, 불교도들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하는 것과 왕양명(王陽明)의 “양지(良知)에 이르는 것이다.”라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미헌은 이진상과 성리학적 견해는 같지 않지만, 이진상의 학설을 존중하여 자신의 제자들이 함부로 비판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진상의 학설에 동의는 하지 않아도, 이진상의 학설을 존중해 주는 사미헌의 학자적 태도가 돋보이는 점이다. 사미헌은 ‘경’을 기본개념으로 한 수양론에 입각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으므로, 당연히 그는 문학이 마음의 울림이라고 생각했으니, ‘시문은 마음의 소리’라고 하고 ‘말은 심성(心聲)의 표현’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때문에 그는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재도적 문학관은 문식으로만 흐르는 문학을 부정하고 인간의 삶에 건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도덕을 강조하는 것으로, 달의정신(達意精神)에 근간을 둔다. 따라서 형식적 아름다움을 지양(止揚)하고 내용 위주의 문학관을 갖는다. 다음 글을 보자.
대저 세상에서 문장을 멋지게 구사하는 자의 경우에 그의 시는 찬란하게 빛나고 그 문(文)은 번쩍이며 화려하니, 처음에 읽을 때는 분명히 마음에 기쁘지 않음이 없다가 두세 번 읽음에 미쳐서는 읽기 싫은 기색이 따르게 된다. 이런 현상은 대개 문장에 화려한 말이 넘쳐나는 까닭에 이치는 숨어 버리고, 이치가 숨어 버리는 까닭에 그 맛이 절로 적어지기 때문이다.
이 글은 변시관(卞時瓘)의 문집인 《허생당유고(虛生堂遺稿)》의 서문 가운데 일부이다. 문장을 짓는 데 도를 싣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고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데 역점을 두게 되면 훌륭한 글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변시관의 글이 훌륭한 것은 ‘효우인명지성(孝友仁明之性)’과 ‘측달감개지기(惻怛感慨之氣)’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효우’와 ‘인명’이 내적이고 이성적이라면, ‘측달’과 ‘감개’는 외적이고 감성적이다. 이 둘의 온전한 함의야말로 문학의 성공을 담보하는 중요한 길임을 깊이 인식한 결과라 하겠다. 한편 사미헌은 예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편지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예학에 대한 토론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52세에 완성한 《가례보의》저술이 그 단적인 예이다. 《가례보의》는 《주자가례》가 상례(常禮)는 상세하지만 변례(變禮)에는 소략한 점에 착안하여, 《주가가례》를 근간으로 하되 명시되지 않은 변례에 관한 제설(諸說)을 채집해 보충한 것이다. 장복추는 《주자가례》가 예가(禮家)의 법도이기는 하지만, 복잡한 단서가 많은 인간의 일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나 인간사의 일은 복잡다단하여 상례와 반대로 하는 것이 변례가 되니, 그 변례에 나아가 의심이 생기는 것이 천 갈래 만 갈래이다.…… 다만 《주자가례》는 산출(散出)되어 취사(取舍)에 다른 점이 있고, 그 설은 조목이 같으나 호환에 한결같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넉넉한 재주와 박식한 견해를 가진 사람도 진실로 급박한 상황에서 일일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만약 오래도록 강론한 공부가 있지 않으면 어긋나거나 잘못 행할 걱정을 면할 수 없는 점이 있다.
사미헌이 쓴 〈가례보의서문〉을 보면, 《주자가례》는 그 당시의 예법에서 첨삭을 가해서 만든 것이기는 하나, 주자 자신이 다시 교감(校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심나는 곳이 있고, 또 특수한 경우의 예법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즉 《주자가례》가 다양한 일상의 변례를 다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미헌이 실제의 변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이 책의 편찬의도이다. 사미헌은 《주자가례》를 가정 일상의례의 상경(常經)으로 보고, 이를 근간으로 하여 거기에 명시되지 않은 변례(變禮)에 대한 제가의 견해를 채집 보충하여 이 책을 편성한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주자가례》의 본문에 따라 항목을 배열하고, 각 항목 아래에 관련된 각종 변례(變禮)에 대한 제가의 설을 채록하여 넣었으며, 《주자가례》에 제시되지 않았으나 행례(行禮)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일부 절차는 다른 가례서(家禮書)의 전례에 따라 보충해 넣었다. 《주자가례》의 본문과 본주(本註)를 분절(分節)하고 그 순서에 따라 절차와 의미를 설명한 《가례보의》 편차 형식은 사미헌 앞 시대에 있어 왔던 가례주석서에 통용된 체제를 따른 것이기는 하나, 각 절(節)마다 다양한 변례의 조목을 설정하고 여기에 중점을 두어 정리한 점이 《가례보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종류의 가례서에도 상례(常禮) 외에 변례(變禮)도 채록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초부터 각종 변례(變禮)를 널리 채록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편찬되었다는 점이 《가례보의》의 큰 특징이라는 말이다.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나 유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常變通攷)》가 《주자가례》의 상례(常禮)와 변례(變禮)를 두루 채록하여 상세하게 설명한 데 비하여, 《가례보의》에는 상례에 대하여는 되도록 간결하게 정리하고, 예학가들 사이에 시비가 있어 논란이 되어 온 문제나, 각종 변고에 대처하는 변례의 사례를 중심으로 조목을 설정하였다. 《가례보의》에서 보이는 변례의 고증은 문집의 글 중에서도 많이 보인다. 사미헌의 문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편지이다. 편지가 전체의 11권 중에 4권의 분량으로 총 257통이며, 이에는 예학에 관한 문답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세 유학자들의 학문적 토론은 대부분 편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사미헌이 편지에서 토론한 예학 특히 변례의 고증은 그대로 《가례보의》에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편지에서 보이는 예학 가운데 변례 조항을 보자. 같은 날에 두 분의 신위에게 제사를 지내야 할 경우는 상례(常禮)에는 없는 변례이다. 《사미헌집》의 편지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몇 곳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질문 선비(先妣)의 상제(祥祭)와 망형(亡兄)의 기일이 같은 날입니다. 이때 망형의 기제사부터 먼저 지내려고 하니, 다른 학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식이 부모에 앞서서 흠향하는 것이 된다.’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빈소의 상제(祥祭)와 다른 기제사가 같은 날일 경우에 예(禮)의 뜻으로 헤아려 보면, 이에는 신구(新舊)의 봉향(奉享)에 구별이 있고, 의절(儀節)의 번간(煩簡)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존비에 얽매여 상제(祥祭)를 먼저하고 기제사를 뒤로하기보다는 차라리 편순(便順)을 따라 기제사를 먼저하고 상제를 뒤로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잘 헤아려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는 어머니의 소상 내지 대상의 날짜와 망형의 기제사 날짜가 같은 경우에 어느 신위에게 먼저 제사를 올려야하는지에 대한 장승택(張升澤)의 질문에 사미헌이 대답한 것이다. 혹자가 제시하였듯이 망형의 기제사를 먼저 지내면 자식이 부모 앞에 흠향하는 것이 되니, 옳지 않은 것이 아닌가라고 조심스러운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사미헌은 이것은 사자(死者) 선후에 따라 봉향(奉享)에 구별이 있고, 또 상제(祥祭)와 기제사라는 번간(煩簡)도 다르다. 때문에 존비에 얽매여 어머니 상제(祥祭)부터 먼저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사망의 편순(便順)을 따라 망형의 기제사를 먼저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처럼 《가례보의》는 《주자가례》에서 상례(常禮)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변례(變禮)에 대한 미비한 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집필된 책이다. 그러므로 사미헌의 예설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간으로 시의에 적합한 의식 절차를 변통하여 강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가 각종의 변례를 수집하고 정리한 데는 이런 의도가 있었다. 사미헌은 예의 다양성에 대하여 대단히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주자가례》의 원칙을 준수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면서도, 《주자가례》에 채택되지 않은 관행과 통규(通規)를 정식의 의절로 보충하여 넣었다. 이런 의절의 채택은 고금의 의례를 하나의 체계로 집성하려는 관심과 당대의 현실을 학문체계에 반영하려는 학자의 태도로 당연한 것이나, 또한 《주자가례》의 성법(成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확대 심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변혁의 시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미헌의 예설은 기본적으로 이미 이루어진 전범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다양한 변화에 대해 그 틀 속에서 대처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 사미헌은 동시대의 허전(許傳)이나 이진상(李震相)과 같이 독특한 예설을 주장한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접하면서도 이들과 대응하는 예설을 특별히 입론하지는 않았다. 허전의 예학이 성호(星湖) 이래 근기실학(近畿實學)의 실용성(實用性)을 바탕으로 예서(禮書)의 재편성을 시도하고, 이진상이 《의례(儀禮)》를 근간으로 한 엄정한 예론의 체계를 강구하려 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었음에도, 사미헌은 이미 이루어진 통행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그 속에서 변통(變通)을 구사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미헌은 《주자가례》의 규범을 지키면서도 조선 후기 영남 사대부 가문의 의례 관행과 통규를 하나의 성헌(成憲)으로 준수하면서, 후덕하고 융숭한 절차를 중시하였던 온건한 예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미헌이 영남유학에서 차지하는 위상
사미헌의 학통은 영남학파 내에서 찾을 수 있다. 장현광의 8대손으로 조부 장주(張儔)에게서 글을 배우는 등 가학적 전통을 성실히 계승하지만, 그의 학문적 성숙은 영남학파의 자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위로는 공자와 주자, 이황과 정경세, 그리고 정구와 이상정 등의 저술을 탐독하면서 사상적 진폭을 넓혀 갔고, 옆으로는 이정상(李鼎相), 정삼석(鄭三錫), 이진상 등과의 학문적 토론을 통해 학문세계를 깊게 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학문적 성과는 장승택(張升澤), 조긍섭(曺兢燮), 송준필(宋浚弼), 장지연(張志淵) 등 735명이나 되는 다양한 제자들에게 전수되면서 조선 유학의 마지막 봉우리를 형성했다. 제자들의 분포를 보면, 인동(仁同), 성주(星州) 칠곡(漆谷)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제일 많고, 김천(金泉) 고령(高靈), 선산(善山) 등지에도 걸쳐 있다. 경남 지역에서 배우러 온 제자들도 180명에 이르는데 특히 거창 출신이 많으며, 전라도에서 온 제자도 8명에 이른다. 그러나 경북 북부 지역인 안동(安東), 예안(禮安), 영주(榮州), 상주(尙州) 등지에서는 제자로 입문한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제자 가운데서 조선 말기에서 일제 초기에 걸쳐 경상도 유림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들이 많이 들어 있다. 사수(四秀), 십군자(十君子)라는 일컬음이 있는데, 사수로는 선은(鮮隱) 김창현(金昌鉉), 승재(繩齋) 김진학(金鎭學), 하강(下岡) 김호림(金頀林), 응와(應窩) 오치인(吳致仁) 등을 친다. 십군자로는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을 비롯하여, 이학(理學)에 교우(膠宇) 윤주하(尹冑夏), 예학(禮學)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도학(道學)에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문학에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역학(易學)에 야촌(野村) 장윤상(張允相), 의리에 성와(惺窩) 이기형(李基馨), 위명(偉名)에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효행에 횡계(橫溪) 장석빈(張錫贇), 창주(蒼州) 장시택(張時澤) 등을 친다. 1919년 전국 유림대표(儒林代表) 137인의 연서(連署)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낼 때, 사미헌의 제자로 유림대표에 든 인물이 26명이나 된다. 한 선생의 문하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는 그 유례가 없다. 사미헌은 벼슬한 적이 없고 임하(林下)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교육하며 일생을 보냈지만,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늘 관심을 갖고 상소를 하는 등 국가와 민족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이런 정신이 제자들로 하여금 구국의 대열에 헌신하도록 한 것 같다. 특히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은 파리장서(巴里長書)를 기초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미헌 장례 때 만사(挽詞)나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와서 애도를 표한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복을 입은 이도 장승택, 이종기, 여진규, 최헌식, 도원상, 홍재겸, 이현문, 장상학, 여영회 등 100여 명이 넘었다. 조선 후기 영남 지방의 삼징사(三徵士) 즉 장복추, 김흥락(金興洛), 유주목(柳疇睦) 가운데 한 사람이며 삼학자(三學者) 즉 장복추, 이진상(李震相), 김흥락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미헌은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이며 당시 최고의 학단을 이끈 교육자이다.
2013년 6월 10일 [주-D001] 성현의 …… 말라 : 《사미헌집》 권8, 自警箴 沈潛乎聖賢之訓 從容乎禮法之場 精思力踐常患欲速而不達 眞積體驗庶幾闇然而日章 寧有一息之間斷 而敢窺古人之門牆 克敬克誠 勿助勿忘 [주-D002] 85세 …… 답지하였다 : 《사미헌전서》 하 부록 〈言行記聞〉, 366쪽. 己亥春 設講會于求勗齋 遠方人士 前期沓至 先生 隨接隨應 雖後生少輩 必起而答拜 未嘗坐而受之 其在煩擾之中 不失禮容 無些子倦苦色 時先生年八十五矣(宋鴻來의 기록) [주-D003] 특히 …… 강토하였다 : 《사미헌전서》 하 〈연보〉 319쪽. 十五年戊寅(先生六十四歲) 八月 與李寒洲會神光寺 講中庸 寒洲先至寺 爲書邀先生 是時 金鎭祜郭鍾錫 自大浦來 李種杞 從高山來 又有宋來欽李萬膺宋鴻逵許薰與子墉李萬洙與子德厚宋晉翼與弟宗翼李承熙與從弟鍵熙來參 講討累日 [주-D004] 뿐만아니라 …… 이루었다 : 《사미헌전서》 하 〈연보〉 322~323쪽. 三十一年甲午(先生八十歲) 四月 講諸生於墨坊之松壇 遠近學者 來會者數百人 [주-D005] 모원당강의ㆍ묵방강의ㆍ월천강의 : 《사미헌집》 권6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주-D006] 그의 …… 있으며 : 《사미헌집》은 11권 6책인데 그 가운데서 편지글이 4권을 차지하며, 그 내용도 일상사의 안부편지나 한수작(閒酬酢)이 아니라 학문에 관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주-D007] 사미헌은 …… 하였다 : 題甪里懶一後 謂之文可乎 文非載道之文也 謂之言可乎 言非有德之言也 非文非言 無名可名 名之曰懶一 凡爲吾子孫者 觀此二字 庶可知乃父乃祖之性氣而爲一分面目矣 [주-D008] 매양 …… 사용하였다 : 題甪里懶一後 每爲知友所迫而作 不爲不多 擧皆虛車之飾 故意不自滿 輒不自惜而棄之 爲覆甁而塗壁矣 [주-D009] 소학으로 …… 제시하였다 : 《사미헌전서》 하 〈부록〉 권2 行狀(張相學 撰) 小學而爲其本 大學而爲間架 語孟而塡補之 洛閩陶湖之書而羽翼之 會極於中庸大易 [주-D010] 근래에 …… 구하겠는가 : 권5 答李孟舜鐸英 近來嶠南諸家 各樹一言 至使後生 迷所着跟 果如來諭之云 然我東退陶之論 卽程朱之論也 程朱之論 卽孔孟相傳之旨訣也 欲求門路之正 舍此而何求哉 [주-D011] 이 때문에 …… 않겠는가 : 권7 夙興夜寐箴集說序 是以 聖賢千謨萬訓 皆從心上惓惓 而要其幾 則不越乎一箇敬而已 書之精一執中 易之閑邪存誠 孔顔所謂博文約禮 思孟所謂明善誠身 何莫非一於敬而爲始終之要也哉 [주-D012] 이천(伊川)은 …… 다양하다 : 권6 墨坊講義 問 敬之一字 伊川曰 整齊嚴肅主一無適 上蔡曰 惺惺法 和靖曰 其心收斂不容一物 多般名目 [주-D013] 경을 …… 듯하다 : 권6 墨坊講義 持敬 必自整齊嚴肅始 則自然惺惺 自然主一無適 自然其心收斂不容一物 此內外交養之工 恐非有次第先後之截然也 [주-D014] 마음이 …… 않겠는가 : 《사미헌전서》 하 〈부록〉 권2 29~31장 張相學所撰 行狀 [주-D015] 시문은 마음의 소리 : 권7 松川集序 詩文 心之聲也 [주-D016] 말은 심성의 표현 : 권7 寒泉遺集序 夫言也者 心聲之發也 [주-D017] 대저 …… 때문이다 : 권7 虛生堂遺稿序 夫世之擅文章者 其詩爛然而光 其文燁然而華 初讀 無不犂然悅於心 及之再三 怠氣隨之 盖以詞溢故理隱 理隱故其味自小也 [주-D018] 변시관의 …… 하였다 : 권7 虛生堂遺稿序 若虛生堂卞公詩文 流出孝友仁明之性 惻怛感慨之氣 [주-D019] 효우와 …… 하겠다 : 문학에서 내용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형식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사미헌은 ‘文質彬彬(〈松川集序〉, 권7)’, ‘質文彬彬(〈祭宋楚叟文〉, 권8)’이라 하며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강조하였고, 인물평에서도 문장과 덕행이 함께 온전한 사람을 높였다. ‘文章德行 竝稱于世(〈東萊鄭公墓碣〉, 권10)’라 한 것이 그것이다. [주-D020] 그러나 …… 있다 : 권7 家禮補疑序 然而人家事爲多端 反於常而爲變 卽其變而生疑者 不幸千歧萬端 …… 第其爲書也散出 而有取舍之不同 爲說也同條 而有交互之不一 雖贍才博解 誠難一一領會於急猝之中 苟無宿講之工 有不免舛做錯行之患 [주-D021] 주자가례를 …… 하였다 : 〈家禮補疑〉 總目, 凡例에 家禮之書 詳於常禮 而略於變節 今依常變通攷例 逐節之下 別立條目 使不幸而遭疑變者 有所考據 [주-D022] 선비(先妣)의 …… 어떻겠습니까 : 권3 答張羲伯 升澤 別紙 問; 祥 與亡兄忌同日 而欲先行忌祭 則說者以爲子先父食 未知何如 答; 忌祭 揆以禮意 新舊之奉享有別 儀節之煩簡又異 與其拘尊卑而先祥後忌 寧從便順而先忌後祥也 酌處之如何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 2013 한국고전번역원 가기PC버전 110-804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길 1 TEL : 02-394-8802 COPYRIGHT 2016 BY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