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이제는 남부럽지 않은 자동차들을 가지게 되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요원할 것만 같았던 ‘그 언젠가’가 바로 현실이 되었다. 현대 쏘나타가 6세대까지 성장한 데 이어, 그랜저도 벌써 5세대가 된 것이다. 새로 나온 그랜저가 정말 남 부럽지 않은 차라는 이야기는 아직 미뤄두자. 다만 현대자동차가 5세대, 혹은 6세대에 걸쳐 한가지 모델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혁신 시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다.
글, 사진 / 박기돈 (RPM9 팀장)
그 동안 그랜저의 위상도 많이 변했다. 요즘 우리가 ‘각 그랜저’라고 부르는 1세대 그랜저가 등장했을 때, 그랜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좋은 자동차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랜저는 대중적인 패밀리 세단인 쏘나타보다 그저 조금 더 고급스러운, 프리미엄과 대중의 그 어느 경계쯤에 있는 모델이 되었다. 그 가치가 낮아졌다고 볼 수도 있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높은 가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랜저가 과거의 화려했던 명성과 위상을 되찾기는 힘들어 보이며, 지난 시절, 쏘나타를 좀 더 고급화했던 마르샤 정도의 위치로 내려왔다고 볼 수밖에 없겠다. 마르샤가 쏘나타와 그랜저 사이에서 존재감을 각인시키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의 그랜저도 제네시스와 쏘나타 사이에서 자칫 헤매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네시스와 쏘나타 사이에는 충분한 갭이 있다는 것과 쏘나타에서 그랜저로 옮겨 갈 여지도 충분하다는 점이다.
한편, 최초의 그랜저가 미쓰비스의 데보네어를 그대로 들여와서 만든 차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현대 자동차에 그 멋진 데보네어를 건네줬던 미쓰비시는 오늘날 그 존재감을 거의 상실한 반면, 현대 자동차는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와 경쟁할 만큼의 기술력과 자금을 쏟아 부어 새로운 그랜저를 선보였고, 현대 브랜드 차체도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2011년 들어서 정초부터 대형 신모델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올 해 최고의 이슈메이커가 될 5세대 그랜저를 부산 김해 공항에서 거가대교를 넘어 거제도 옥포대첩 기념 공원까지 구간에서 시승했다. 갈 때는 직접 운전을 하면서 그랜저를 체험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승하면서 사진 촬영을 겸했다. 시승 구간의 절반 정도는 시내 구간이었고, 그 나머지는 거가대교와 가덕 해저터널을 포함한 고속도로 구간이었다.
며칠 전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그랜저를 만난 후로, 주차장에 가득 도열해 있는 그랜저들을 태양광 아래서 처음 만났지만 마음이 어수선했다. 화려한 칼질(?)로 빚어낸 쏘나타의 디자인이 처음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호평을 해 줬지만, 단아하면서도 선을 아주 멋지게 사용한 K5가 등장하자, 쏘나타는 그 오랜 세월의 명성이 무색하리 만치 맥을 못 추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새 그랜저가 또 다시 화려한 칼질(?)을 선보이는 것이 약간은 못 마땅해서다.
그나마 그랜저의 어쩔 수 없는 경쟁 차가 될 K7은 K5만큼 멋지지 않아 새 그랜저가 더 우위에 설 것은 자명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복잡한 그랜저의 디자인을 환영할 수는 없다.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디자인이 아니라 마음에 감동을 주는 디자인이 절실히 필요하다.
쏘나타와 에쿠스의 모습이 살짝 오버랩 된 듯한 디자인이지만 굳이 유전자를 따지자면 쏘나타에 더 가깝다. 초대 에쿠스와는 달리 지금의 에쿠스는 뒷바퀴 굴림의 럭셔리 라인업을 지향하고 있어 앞바퀴 굴림의 그랜저로서는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그랜저의 존재는 과거 그랜저가 되고 싶었지만 겨우 쏘나타의 형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던 마르샤의 환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많은 이들이 신형 그랜저에서 쏘나타를 떠 올리는 것을 봐도 그렇다.
분명 그랜저는 잘 빠졌다. 차체 크기가 전장 4,910mm, 전폭 1,860mm, 전고 1,470mm에 휠베이스 2,845mm다. 휠베이스가 TG보다 65mm 늘어나, K7과 함께 동급 최대가 되었지만, 전장은 TG와 동일하게 유지해 동급에서 가장 짧다. 또한 폭은 가장 넓고, 키는 가장 낮다. 이는 실내 공간을 최대한 확대하면서 다이나믹한 스타일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랜저는 더 이상 뒷좌석 사장님을 위한 차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환영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실내로 들어서면 우려 보다는 환영과 만족감이 좀 더 커진다. 물론 다양한 첨단 편의 사양이 적용되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단순히 디자인만 놓고 보더라도 외관보다 덜 복잡하고 더 화려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테리어를 선보여 온 현대 차답다. 모든 버튼과 다이얼의 질감과 조작감이 고급스럽다. 트림의 마무리와 질감도 뛰어나다. 그랜저는 실내에 앉아 있을 때 더 고급차답게 느껴진다.
인테리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날개 형상의 센터 페시아로 화려하면서 조화롭다. 실버 트림 아래 피아노 블랙 부분이 강렬한 대비를 나타낸다. 하지만 피아노 블랙 사용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어 보인다. 이 센터 페시아는 정면 보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더 멋지다. 볼보처럼 비스듬히 내려가는 센터 스택 뒤로 공간을 만들었다. 사실 그 공간의 활용도가 크지는 않겠지만 옆에서 바라보는 스타일은 아주 멋지다.
운전석 시트는 방석의 허벅지 부분 길이 조절이 가능하고 통풍기능에다 마사지 기능도 더했다. 그런데, 시트 각도 조절은 도어 상단에서, 마사지와 럼버 서포트 조절은 방석 옆부분에서, 열선/통풍 기능은 센터터널에서 조절하는 등, 시트를 조절하기 위한 버튼들이 3곳에나 분산되어 있다. 이전 TG에 비해서 시트는 단단한 느낌이다.
천정에는 대형 파노라마 루프가 달렸다. 블라인드가 2분할 되어 커튼처럼 앞 뒤로 동시에 열리면 상당히 넓은 면적의 유리 지붕이 나타나는데 유리 가운데 부분의 두툼한 프레임을 제거해 시원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실내 공간에서도 그랜저 다운 여유를 갖추었다. TG보다 휠베이스가 많이 커진 만큼 여유가 더 커졌지만, 키가 낮아지면서 머리 위 공간에서 약간 손해를 보긴 한다.
신형 그랜저에는 두 가지 직분사 엔진이 얹힌다. TG의 3.3 엔진을 대체할 람다 II 3.0 GDI 엔진은 최고출력 270마력, 최대 토크 31.6kg.m를 발휘하며 6단 자동 변속기와 어울려 연비 11.6km/L를 실현했다. 수치 상으로 봤을 때 단연 동급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오늘 시승한 차도 이 엔진이 장착된 HG300 모델이다. 쏘나타와 함께 사용하는 세타Ⅱ 2.4 GDI 엔진은 최고출력 201마력, 최대토크 25.5kg.m의 파워와 12.8km/L의 뛰어난 연비를 실현했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면 가장 먼저 뛰어난 정숙성에 놀란다. 그랜저에 어울리는 확실한 방음과 함께 직분사 특유의 엔진 소음도 최대한 억제했다고 한다. 아이들링 상태뿐 아니라 주행 중에도 조용함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제 조용한 실내는 렉서스 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준대형 세단에 270마력은 강력한 달리기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수치다.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과거 BMW 530i가 231마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530i의 달리기 실력을 기억한다면 270마력의 그랜저에 대한 기대는 커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차가 늘 그래왔듯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분명 예전 모델들에 비해 잘 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270마력의 달리기다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특히 그랜저의 특성상 엔진 응답성이나 VDC의 개입 시기 등 다양한 세팅들이 부드럽게 설정되어 있어 체감 동력 성능은 더 낮아진다. 현대차의 엔진 출력 인플레이션이다. 이는 엔진 출력을 높이는 것은 가능한데, 그 출력에 상응하는 기타 하드웨어 기술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바로 독일 명차들이 명차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이 직분사 엔진이든, 270마력이든 상관없이, 어쨌든 3리터 엔진을 장착했고, 이 만큼 달릴 수 있으면,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한가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현대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비싼 외국 기술을 도입해 개발한 자동차여서, 소비자에게도 그 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자동차라면, 그에 상승하는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풀가속을 하면, 정확히 50km/h에 한번씩, 즉, 50, 100, 150, 200km/h에서 변속이 이루어진다. 6단 변속기는 변속 충격이 없고, 상당히 매끄럽게 작동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가속력이 기대에는 못 미친다. 전반적으로 토크감이 부족하다. 긴 직선에서 엑셀을 끝까지 밟고 있으면 속도는 꾸준히 올라가지만 경쾌한 맛은 없다. 엔진 회전 질감도 제네시스에 장착된 3.8 엔진보다 덜 매끄럽다.
수동 모드로 전환해도 별로 재미를 못 느낀다. 270마력이나 되지만 3단과 4단의 고회전 영역에서도 토크가 시원하지 못하다. 전반적으로 부드러움을 강조하느라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수동모드에서 변속기 레버 조작감도 깔끔하지 못해 재미를 떨어뜨린다.
서스펜션 세팅, 흔히 말하는 승차감은 상당히 고급스럽다. TG의 출렁거림과는 차원이 다르다. 충분히 안락하면서 충격을 걸러주는 반응이 듬직하다. 럭셔리 세단으로서의 그랜저 본연의 성격에는 잘 맞다. 하지만 역시 고속이 문제다. 눈에 띄게 불안정한 부분은 없지만 고속 주행에서 노면에 착 달라 붙는 안정감이 부족해, 코너링 중 브레이킹에서는 좌우 하중 이동으로 인해 불안감이 증폭된다. 승차감 위주의 타이어 세팅도 고속 주행에서의 안정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보인다. 결국 그랜저는 그냥 일상적인 주행에서 고급스러운 주행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빠르게 장거리를 달릴 수 있는 세단이 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없는 주행성능 향상에 비해 다양한 전자 편의 장비 적용은 손쉽게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부분이다 보니, 그랜저에도 많은 신기술들이 적용되었다. 역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ASCC)이다. 앞차와의 차간 거리를 유지하며 정속 주행할 뿐 아니라, 교통 흐름에 따라 자동으로 정지와 재출발까지 가능한 최신형 ACC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디스트로닉 플러스에 해당하는 기능으로 아우디 A8을 비롯한 몇몇 모델에만 적용된 최고급 사양이라 할 수 있는데, 국내에서는 에쿠스도, 제네시스도 아닌 그랜저에 가장 먼저 적용되었다.
작동 방법은 스티어링 휠 우측 스포크에 있는 버튼으로 속도와 차간 거리를 설정하면 운전자가 엑셀과 브레이크를 전혀 조작하지 않는 상태에서 교통 흐름에 따라 정속주행하기도 하고, 앞차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주행하기도 하고, 또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하기도 한다. 다만 앞차가 정지해서 함께 정지한 경우 3초 이내에 앞차가 재출발하면 따라서 자동으로 출발할 수 있지만 3초가 지나면 오토 홀드로 전환된다. 이 상태에서 다시 출발할 때는 엑셀을 가볍게 한 번 밟아주거나 스티어링 휠의 ‘RES’을 눌러주면 원래 세팅을 회복해서 다시 자동 주행이 가능하다.
아우디 뉴 A8의 ACC와 같은 장비이지만 A8이 스티어링 칼럼 좌측의 레버로 조작하는 것과 달리 그랜저는 스티어링 휠의 버튼으로 조작해 재출발 시 ‘RES’ 작동이 좀더 편리하다. 한편 응답성은 A8보다 느린 편이다. 교통 흐름이 좋아져서 앞차는 벌써 저만치 가속해 가는데 그랜저의 가속은 느리고 부드럽게 진행돼,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든다. 시내에서라면 많은 차들이 그 사이로 끼어들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여유를 가진다면 ASCC는 아주 편리한 기능임에 틀림없어서 많은 운전자들이 수시로 이 기능을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끼어들기나 급차선 변경, 급코너 주행 상황 등에서 ASCC가 가진 한계가 무엇인지, 어떤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경고가 명확하지 않은 점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대목이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뛰어난 정확성을 보이므로 충분히 신뢰할 만하지만 운전자가 결코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5G 그랜저는 정말 잘 만든 차다. 국산차, 수입차를 막론하고 동급 경쟁모델 중에 가장 탁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약판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판매 역시 현대차 측에서 기대하는 수준을 무난히 달성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쏘나타의 내수 판매 부진을 반드시 교훈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랜저 구매 가능 고객들이 이제는 다양한 수입차 경험등으로 눈 높이가 예상보다 훨씬 높아져, 비싸진 가격과 그랜저라는 명성에 거는 기대도 아주 높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그랜저가 과연 그 기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지는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그랜저 1호차의 주인공이 된 현빈의 극중 대사를 인용하자면, “뉴 그랜저, 새로 선보인 이 모습이최선입니까? 제가 보기에 최선은 아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