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확
그녀의 뇌에 멍이 들었다
밖이 세찰수록 안으로 파고들었을 그녀의 허방
혹이 자라고 있었다
빠진 머리카락을 걷어낼수록
패인 서사는 그림자 쪽으로 깊어졌다
키 작은 지붕 아래 더 작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집
외판 가방을 든 그녀의 처진 발걸음이 골목에 달강이면
써보지 못하고 팔기만 하던 화장품 냄새가
기다림보다 녹슨 대문을 먼저 밀고 들어섰다
그런 날이면
종일 약 올리던 신작로 달고나 냄새와
세상에 속하지 못해 늘 만취였던 아비의 구린 입냄새
가난의 내력처럼 번지던 곰팡이냄새까지
골목의 서러운 냄새란 냄새는 다 따라들었다
돌확은 오래 견뎌왔을 것이다
천천히 구멍을 키웠을 것이다
모르핀에 취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
안으로 품는 일에만 익숙했던 엄마
아직 귀는 살아 있다기에 불러보면
무량 사랑하다 무량 이별을 고하는
받아낸 만큼 깊어졌을 저 움푹한 홈
외상장부에 올려진 이름처럼
갚을 길 영영 없어 천지가 캄캄하다
세상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식이라는 이름의
혹이 자라고 있다
2. 엄마의 손톱
간혹 시들지 않는 꽃도 있다
마른 장밋빛 그녀의 눈이
병동의 매캐한 공기에 성성하게 변해가는 중에도
검붉은 손톱은 단호하게 피어있다
그녀가 무성했을 때 즐겨 심던 흑장미 색
심장을 베낀 간절한 저 핏빛은 살아있다
스스로 달아오르지 못하는 날이 오면
바스라질 내 손톱도
총천연색으로 발기될 수 있을까
링거 줄을 타고 오르는 푸른 잎을 그려 넣을까
절절한 주술처럼 오방색 꽃뱀을 새겨 넣을까
누구에게나 절정의 시절은 있고, 타오르다 사그라지고
저렇게 가쁜 호흡만 남아 생명줄에 기대는 동안
내 손톱도 마른 장미처럼 빛이 바래겠지만
그때도 손톱만큼은 붉디붉게 타오르면 좋겠다
불사조처럼 지고서도 다시 피면 좋겠다
나 지금 당신의 꺼져가는 화로에
눈물의 시간을 벼리며 최후의 요염을 새겨 넣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 시들지 않는 꽃을 기억하기 위해
3. 가벼운 여행
엄마 하늘나라 가시고
홀로 나선 여행
바람이 퇴적의 구름 침상을 접었다 펴는 동안
비행기 푸른 날개 사이로
울컥 기억의 산란이 시작된다
활주로를 지나 창공에 들면
세파의 난기류를 벗어난 여행객들의 안도와 설렘이
추억의 지근을 들었다 놓는다
“나중에 꼭 비행기 태워 드릴게요”
지키지 못한 약속만 남겨두고
지킬 수 있을 땐 이미 곁에 없는 당신
지나간 시간들이 창밖 빗방울로 죽죽 그려진다
커튼이 걷히자 저 아래 다닥다닥 늘어선 지붕들과
지붕 아래 더 작은 아이들이 기다리던 집이 떠오르고
가족들의 도란소란이 지붕을 뚫고 구름을 뚫고
다시 비행 창에 어린다
“야~야! 이젠 그만 구름 위를 날고 싶데이~”
빗방울 현을 튕기며 자맥질하는 비행기는
무겁게 살아내시느라 땅만 보다 가신 이의 마지막 음성을
넌출넌출 쉼 없이 뱉어내고 있다
떠나고 싶을 때마다 떠날 수 있었다면
가시고도 거듭 오시는 이, 어머니일 수 없었을 테지
익숙했던 풍경마저 이리 와락 무너져 내릴 수는 없을 테지
구름 아래 살다 구름 꽃으로 구름 관에 드신 당신
이제 더는 무겁지 않으시지요?
고도에 들자 물기 젖은 창을 어루만지는 꽃구름
운무를 가르며 햇살 쪽으로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다
하늘 가락을 영접한 환한 얼굴로
“엄마, 우리 함께 가요”
가볍게 더 가볍게
4. 갈마들다
꽃은 미로처럼 피거든요
사실 둘 다 절실해요
꽃이 피는 건 앞으로도 꽃으로 살겠다는 다짐이고 미로처럼 난감하죠
가끔 삶과 죽음이 철쭉과 영산홍처럼 헷갈리지요
마냥 기쁘다가도 슬픈 표정이 닮았거든요
삶과 죽음은 동시발아중이죠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마치
미로네요 입구와 출구가 닿았으니 내내 헷갈리는 건 당연해요 이 길이 내 길인지 저 길이 내 길인지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가면 비교적 안전하죠 어쩌면 꽃이 지는 건 새로 필 꽃을 예비하는 거라서 더 안전하죠
선택은 여러 갈래고 길도 여러 갈래입니다 정신 차려보면 요람과 무덤의 주소가 같을지 몰라요 꽃이 피고지기를 반복하듯이 길을 찾다 잃은 사람들의 방황은 계속 됩니다 장마가 와야 꽃이 피고 지고 다시 말간 길이 열리고 햇살 더욱 반갑고요
마냥 아름다울 수만 있나요
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으니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하는 거죠
더러는 꽃을 들이지 말 걸 후회도 되지만
그건 뭐 신의 영역이니까 이왕 핀 거니까
어차피 인생은 내가 가꾸는 꽃길 여행이니까
우리가 미로 앞에서 절규하며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5. 13월의 층층나무 달력
모든 삶은 시나브로 길들어가고
시간을 조련하는 달력은 부피를 잃는다
층층나무처럼 늘어진 숫자들
저 겹겹의 다짐들
닿기 위해 뻗어가는 닿지 못해 더 무성한 가지들
내밀한 계절의 수피(樹皮)에서 당신을 읽는다
탁자 위 스프링에 매달린 소리들 총총 몰려나와
나이기도 한 당신과 당신이기도 한 내가 뭉텅뭉텅 걸어 나와
한때 살아서 술렁이던 꿈들을 즈려밟고 있구나
어긋나기 마주나기 지었다가 허물다가 울다가 웃다가
끝없는 고리의 사원을 짓고 있구나
등걸처럼 나이테처럼
당신의 표정은 당신이 살아낸 삶의 결이기에
한 장 한 장 뜯어져 가벼워, 피고 지는 흔적들
몸피를 비우고 키워낸 절절한 서사를 함께 묻었으니
느닷없이 시나브로 13월을 창조한 층층나무 아래
그러니까 그리움이란 익숙함이 떠나간 자리
뿌리 앞에서 서서 죽는 이가 있다
<시작노트>
24년 1월 인연 중 나의 가장 강력한 인성(印星)이었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발병 후 2여 년간의 투병을 하시다 돌아가시고 나니 나는 간병하는 동안 잘 해드리지 못한 것들만 떠올라 극심한 후회와 자책으로 한동안 슬픔과 우울의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준비 없는 이별 앞에서 캄캄한 허방을 걷는 듯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생의 마디가 느닷없이 폐부 깊숙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마음으로 엄마를 보내드리기 위해 엄마에 관한 詩만 썼다. 그 망연자실의 시간을 13월이라 부를까?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그리움이 되고 그 모든 생의 슬쁨*을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힘은 시간의 힘이란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느닷없이 창조된 13월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를 가르쳐준 신(神)을 신뢰하게 되었다. (끝)
<약력>
201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 신인상 당선
시집 『시인하다』 『삼국유사대서사시-사랑편』
저서 『문두루비법을 찾아서』 『울진대왕소나무本 발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