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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혜문 소설집 『대암의 하늘』 작품론
서로 다른 존재는 함께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샤니와 라우나」의 타자·문명·폭력과 예술의 기원
「샤니와 라우나」는 홍혜문의 소설집 가운데 가장 먼 과거를 배경으로 한다. 불을 지키고, 돌을 깨뜨려 주먹도끼를 만들며, 계절을 따라 이동하던 선사시대의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묻는 질문은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 모습과 언어가 다른 존재가 처음 만났을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낯선 존재를 적으로 규정할 것인가.
서로의 기술과 삶을 나눌 것인가.
아니면 상대를 제거하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을 것인가.
이 질문은 선사시대의 종족 사이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인종과 민족, 국가와 계급, 종교와 문화의 차이로 갈등하는 오늘의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샤니와 라우나」는 인류의 기원을 상상하는 소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폭력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우화이다.
작품의 첫 장면에서 라우나는 주먹도끼를 만든다. 둔탁한 돌덩이는 그의 손을 거치며 얇아지고 날이 선 도구로 변한다. 그 도끼는 사냥감의 숨을 끊고 가죽을 벗기며 나무를 자르는 데 사용된다.
주먹도끼는 작품에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문명의 상징이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면서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생존의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 도구는 처음부터 양면성을 지닌다. 주먹도끼는 음식을 얻고 옷을 만드는 생존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다른 생명을 죽이는 무기이다.
홍혜문은 문명을 선과 악 가운데 어느 하나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인간의 기술은 생명을 지키기도 하고 생명을 해치기도 한다. 문제는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다.
라우나는 좋은 도끼를 만들었을 때 힘이 솟는 것을 느낀다. 샤니가 지닌 흑요석을 보았을 때도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 지점에서 도구는 생존의 필요를 넘어 힘의 감각과 연결된다. 더 날카로운 무기를 가진 존재는 다른 존재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곧 힘의 불균형을 만들어내며, 그 불균형은 약탈과 지배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샤니와 라우나」는 문명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찬양하지 않는다. 새로운 기술을 발견하는 일과 그것을 독점하려는 욕망이 동시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두 번째 핵심은 ‘타자의 발견’이다.
라우나는 호수 건너에서 처음 샤니를 발견한다. 몸에 털이 거의 없고 하얀 피부를 지닌 여자는 그에게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듯한 낯선 존재이다.
그 순간 라우나의 마음에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긴다.
그는 샤니에게 끌리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생존의 법칙도 떠올린다.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먼저 발견했다면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없애야 한다는 법칙이다. 낯선 존재는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위협의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것이 작품이 보여주는 폭력의 가장 원초적인 기원이다.
인간은 상대가 실제로 자신을 공격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차이를 이해할 언어가 없을 때 상상은 쉽게 공포가 되고, 공포는 선제적 공격을 정당화한다.
라우나와 샤니는 서로를 바라보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손짓과 표정, 그림과 소리로 마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소통 속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라우나는 샤니의 노랫소리에 이끌린다. 줄을 튕겨 만들어내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그는 그 소리를 따라 호수 건너편으로 향한다.
이때 음악은 언어보다 먼저 타인에게 다가가는 소통의 방식이 된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지만, 소리는 감정의 거리를 좁힌다. 샤니의 음악은 라우나에게 낯선 존재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음악은 아직 제도화된 예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는 최초의 언어이다.
처음 두 사람이 직접 만났을 때 샤니는 라우나의 목에 날카로운 도구를 들이댄다. 라우나 역시 무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불씨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인다. 그제야 샤니는 경계를 풀고 손을 내민다.
이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가운데 하나이다.
두 사람은 상대의 언어를 모르지만, 무기를 내려놓는 몸짓의 의미는 알아본다. 대화는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이 상대를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먼저 보여주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샤니의 손이 라우나의 손을 감싸는 순간 그는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고 느낀다. 그 세계는 단지 다른 종족의 거처가 아니다. 자기 씨족의 법칙과 경험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 세계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인간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기 전에 자기 세계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
라우나는 자신이 가진 주먹도끼가 가장 뛰어난 도구라고 믿었다. 그러나 샤니의 씨족은 더 가벼운 슴베찌르개와 흑요석을 사용하고, 꺼진 불씨를 나무판과 막대로 다시 만들어낸다.
특히 불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라우나에게 충격적인 발견이다. 그의 씨족에게 불씨가 꺼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밤새 불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샤니의 종족은 필요할 때마다 불을 새로 피울 수 있다.
불은 이 작품의 중심 상징이다.
라우나의 씨족에게 불은 자연이나 우연이 내려준 신비한 힘이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생존의 자산이다. 반면 샤니의 씨족에게 불은 인간이 기술을 통해 반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불을 지키는 단계에서 불을 만드는 단계로의 변화는 문명의 도약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 역시 주먹도끼와 마찬가지로 양면성을 지닌다. 불은 추위를 막고 음식을 익히며 들짐승을 쫓아낸다. 동시에 샤니를 태워 죽이기 위한 장작더미에도 붙는다.
생명을 지키던 불이 타자를 처형하는 불로 바뀌는 순간, 문명은 야만과 분리되지 않는다.
홍혜문은 여기에서 중요한 역설을 보여준다.
불을 만들 줄 안다고 해서 더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더 날카로운 무기를 사용한다고 해서 더 문명적인 것도 아니다.
문명은 기술의 수준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샤니의 종족은 더 뛰어난 발화 기술과 무기를 가졌지만, 라우나의 씨족을 ‘원숭이 인간’이라 부르며 노동력으로 부리거나 제거하려 한다. 반대로 라우나의 씨족 역시 샤니를 짐승처럼 취급하고 장작더미에서 태우려 한다.
서로는 상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부름으로써 폭력을 정당화한다.
‘맨살 인간’과 ‘원숭이 인간’이라는 호칭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이름이 아니다. 차이를 과장하고 경계를 세우는 이름이다. 이름을 통해 상대를 자신과 다른 종으로 밀어내면 죽이거나 빼앗는 행위에 대한 죄책감도 줄어든다.
이러한 언어의 폭력은 오늘날의 사회와도 맞닿아 있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미개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규정할 때 학살과 식민 지배, 착취와 차별은 쉽게 합리화된다.
「샤니와 라우나」는 폭력이 본능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어떻게 부르고 분류하는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라우나와 샤니는 서로의 이름을 직접 말한다.
“샤니.”
“라우나.”
두 사람은 상대를 종족의 명칭이 아니라 고유한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이름을 교환하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아니다. 한 사람의 얼굴과 몸, 기억을 가진 존재가 된다.
타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인간화의 시작이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육체적 끌림이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라우나는 샤니를 통해 새로운 기술과 음악, 그림과 언어를 만난다. 샤니 역시 라우나의 돌도끼와 작업장, 그의 몸과 삶의 방식을 호기심 있게 바라본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 같은 존재임을 확인하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가까이 가보려는 시도이다.
샤니는 라우나의 손길을 막으며 “우리는 달라. 서로 다른 종족이야”라고 말한다. 이 말은 관계의 거부이면서 동시에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선언이다.
홍혜문은 사랑이 차이를 없애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해서 언어와 몸, 문화와 공동체의 차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은 차이를 지닌 채 상대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 과정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샤니와 라우나가 가까워질수록 두 씨족의 불안은 커진다. 기술의 교환은 약탈의 욕망으로 바뀌고, 가죽옷과 발화도구를 둘러싼 협상은 무너진다. 샤니의 형제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죽옷을 원하고, 라우나의 씨족은 불을 만드는 도구를 원한다.
이 장면에서 갈등의 원인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다.
두 집단 모두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몸에 털이 적은 샤니의 씨족에게 가죽옷은 생존의 문제이다. 라우나의 씨족에게 불을 만드는 기술 역시 겨울을 견디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부족한 자원을 둘러싼 공포가 상대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이것은 작품이 폭력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폭력은 인간이 본래 사악하기 때문에만 발생하지 않는다. 생존의 불안과 자원의 부족, 의사소통의 실패, 집단의 분노가 서로 얽힐 때 폭력은 급격히 확산된다.
처음의 오해는 보복을 낳고, 보복은 다시 더 큰 공격을 불러온다. 쑤와가 샤니를 죽이려 하고, 샤니의 형제들이 쑤와와 라우나의 가족을 공격한다. 라우나는 어머니 슈앙이 살해되는 것을 보고 샤니의 형제들을 죽인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점점 의미를 잃는다.
모든 집단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믿고, 자신의 폭력은 방어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게 폭력은 정당화되고 반복된다.
라우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죽는 순간 복수한다. 감옥에 갇힌 뒤 그는 자신이 다시 누군가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 자기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작품은 라우나를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호기심과 사랑을 지녔지만 욕망과 폭력성도 지닌다. 샤니의 흑요석을 탐내고, 쑤와를 구하려다 사람을 죽이며, 자신이 속한 집단의 생존을 먼저 생각한다.
그럼에도 라우나는 자신의 폭력을 돌아본다.
자신이 옳았다고 확신하지 않고, 또다시 해칠 수 있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두려워한다. 바로 이 성찰이 그를 다른 존재로 만든다.
인간성은 폭력성을 전혀 갖지 않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의 폭력을 알아보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데서 시작된다.
샤니는 작품에서 이 윤리를 가장 분명하게 말한다.
“다른 부족이라고 해서 서로 죽이는 건… 인간이 할 일이 아니야.”
이 문장은 「샤니와 라우나」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말이 문명의 가장 초기 단계에 놓인 인물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기준은 역사적 발전의 끝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타자를 죽이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는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는 순간부터 이미 요구된다.
그러나 샤니의 말은 여왕과 씨족을 설득하지 못한다. 집단의 분노는 개인의 윤리적 목소리를 압도한다.
샤니는 결국 라우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겠다고 한다. 라우나는 다리를 잃고, 샤니는 가족과 씨족을 잃는다.
두 사람의 결합은 낭만적인 사랑의 완성이 아니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양쪽 공동체에서 추방되고, 가족과 신체의 일부를 잃는다.
그런데 바로 이 상실 이후에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 시작된다.
샤니는 잘린 라우나의 다리를 대신할 나무를 깎아준다. 그것은 완전한 다리를 되돌려주는 치료가 아니다. 불완전한 몸으로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돌봄이다.
이 장면은 앞선 「비행하는 자전거」의 장애와 의족의 이미지와도 이어진다. 홍혜문 소설에서 상처 입은 몸은 실패한 몸이 아니다. 타인의 돌봄과 자신의 의지를 통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몸이다.
라우나는 다리를 잃었지만,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다시 걸어간다.
작품의 후반부에서 두 사람은 어느 종족에도 속하지 않는 오지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다. 그곳에서 라우나는 돌도끼와 망칫돌을 부딪쳐 불꽃을 만들어낸다.
이 불은 앞선 불과 의미가 다르다.
처음의 불은 씨족이 독점한 생존의 힘이었다.
중간의 불은 샤니를 처형하려는 폭력의 불이었다.
마지막의 불은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함께 밝히는 불이다.
불은 소유와 지배의 도구에서 환대의 도구로 변한다.
그 변화는 낯선 남녀가 동굴에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라우나는 지치고 얼어붙은 이들에게 물과 열매를 건네고 불을 피워 손을 녹이게 한다.
과거의 라우나라면 먼저 상대의 공격 가능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씨족, 다리와 사랑하는 이들의 가족을 잃은 뒤 그는 낯선 존재를 먼저 먹이고 쉬게 한다.
그가 얻은 가장 위대한 기술은 불을 피우는 기술이 아니다.
낯선 존재를 환대하는 능력이다.
물론 작품은 이 환대를 낭만적으로 끝내지 않는다. 라우나가 돌본 낯선 남자는 오히려 그의 창을 빼앗아 공격한다.
이 결말은 매우 중요하다.
작가는 선의를 베풀면 반드시 선의가 돌아온다는 단순한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타자를 환대하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낯선 존재는 실제로 나를 해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라우나의 환대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함께 온 여자는 라우나를 공격하는 남자의 등에 돌칼을 꽂아 그를 구한다. 한 사람 안의 폭력은 또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제지된다. 집단이나 종족 전체를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드러난다.
같은 종족 안에도 공격하는 사람과 구하는 사람이 있다.
다른 종족 안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은 종족에 의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인간이 된다.
이 작품의 마지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의 의미도 살펴보아야 한다.
샤니는 무른 돌로 별과 두 존재의 모습을 그린다. 라우나는 훗날 동굴 벽에 죽음과 사냥, 인간과 짐승이 서로에게 남긴 상처, 살아가는 모습과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 그려 남기고 싶어 한다.
여기서 그림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림은 기억을 보존하고, 경험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폭력으로 사라진 존재를 다시 불러오는 행위이다.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림은 다른 시간의 인간에게도 남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샤니와 라우나」는 예술의 기원을 상상한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을 장식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사라질 존재와 잊힐 상처를 남기기 위해 시작된다. 죽은 이들의 삶이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벽에 새기는 행위가 곧 예술이 된다.
라우나는 자신이 겪은 비극을 복수의 명령으로 남기려 하지 않는다. 인간과 짐승이 서로에게 남긴 상처까지 모두 그리고 싶어 한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영웅담이나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삶과 죽음, 가해와 피해가 뒤섞인 인간의 진실을 남기려는 욕망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라우나는 사냥꾼과 전사, 도구 제작자를 넘어 이야기하는 인간이 된다.
도구는 자연을 바꾸지만, 예술은 인간의 내면을 바꾼다.
주먹도끼가 돌을 쪼개고, 불이 어둠을 밝히며, 발화 기술이 생존을 연장한다면, 그림은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고 그 기억을 미래에 건넨다.
이것이 작품에서 문명의 가장 높은 단계이다.
더 강한 무기나 더 정교한 기술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이 겪은 고통을 기억하고 다음 인간에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샤니와 라우나」는 서로 다른 인류의 사랑을 그린 원시시대의 로맨스가 아니다. 이 작품은 문명이 무엇으로 시작되고 무엇에 의해 무너지는지를 묻는다.
문명은 도구에서 시작되지만 도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문명은 불을 만드는 능력에서 발전하지만 불은 사람을 태울 수도 있다.
문명은 교환을 통해 성장하지만 욕망이 개입하면 약탈이 된다.
문명은 언어로 연결되지만 언어는 타자를 짐승으로 규정할 수도 있다.
결국 문명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이다.
「안개그물」에서 타인의 고독을 이해하는 일이 인간성의 시작이었다면, 「샤니와 라우나」는 그 질문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시간으로 밀어 올린다. 인간은 처음부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낯선 존재를 두려워했고, 가진 것을 빼앗았으며, 가족의 죽음에 복수했다.
그러나 같은 인간은 무기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으며, 기술을 가르쳐주고, 다친 몸에 나무다리를 만들어주고, 낯선 이에게 물과 불을 건넸다. 그리고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벽에 남기려 했다.
폭력과 돌봄, 약탈과 교환, 망각과 기록은 인류의 처음부터 함께 존재했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샤니와 라우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은 자신과 닮은 존재만을 사랑할 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다른 몸과 언어, 다른 기술과 기억을 가진 존재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고, 그가 겪은 상처를 자신의 기억 속에 받아들일 때 인간이 된다.
샤니와 라우나는 두 종족의 전쟁을 멈추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가족을 살리지 못했고, 모든 폭력을 끝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된 생존 법칙 하나를 깨뜨렸다.
다른 종족을 먼저 보았다고 해서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손을 내밀 수도 있다.
불을 나눌 수도 있다.
상처 입은 다리를 함께 받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그림으로 남겨 다음 인간에게 건넬 수도 있다.
그 순간 인류는 단지 살아남는 종족에서, 타인의 삶을 기억하는 인간으로 나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