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 7,9-10.13-14; 2베드 1,16-19; 마태 17,1-9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9월 14일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데요, 거룩한 변모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사십 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전승 때문에 8월 6일에 이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는데, 이 세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항상 연관이 있습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후에 베드로가 나서서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만류하였고, 세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신 뒤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높은 자리를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신 제자들인데,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이 세 제자를 게쎄마니 동산에 데리고 가십니다. 거룩한 변모 때와는 달리 가장 약한 모습을 드러내시는, 하지만 그 약함 속에서 가장 위대하심을 드러내시는 그 현장에 세 제자는 동행합니다. 이 세 제자가 우리 자신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주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고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 대해서도 잘 알아듣지 못하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여러 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과 비교되는데요, 오늘은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있지만, 십자가의 예수님 곁에는 두 강도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옷은 빛처럼 하얘지지만,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옷은 모두 벗겨집니다. 모든 것이 빛나던 거룩한 변모와 달리, 십자가에서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두 신비 모두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됩니다. 오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데, 십자가에서는 백인대장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거룩한 변모와 십자가는 이렇게 예수님의 참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수난과 영광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서 함께 지내자고 말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또다시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느님 뜻을 실행하기보다, 삶에서 잠깐씩 체험되는 하느님 체험만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매일 부딪히는 가족과 이웃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기보다 한적한 곳에서 그분을 나만의 예수님으로 붙들어 놓고 싶은 마음,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기보다 영광의 그분 곁에서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그만 들켜버리고 맙니다.
저는 작년 7월 가족 여행을 갔다가 밤에 아버지 기침 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끼고 큰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폐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고 이후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건강검진 결과를 제게 보여 주지 않으셨던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건강검진을 제가 모시고 갔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제가 본당에 조금 더 빨리 나왔더라면 어땠을까 등등 많은 가정법의 말들이 머릿속을 오갔습니다.
병원을 오가는 수많은 시간 동안 묵주기도와 함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말씀을 되뇌며 주님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겼고, 적어도 몇 년은 더 살게 해 주시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다섯 달 만에 세상을 떠나시고 바로 그다음 달에 저는 인사 발령을 받고 본당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 여름이 되니 일 년 전 이맘때쯤 있었던 일들이 더욱 기억납니다. 작년 거룩한 변모 축일에 저는 일주일째 입원 중이시던 아버지와 함께 병원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본당에 와 보니 아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한 분 한 분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어떤 분들은 가족이 아파서,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낫지 않아서 성당을 나오시지 않습니다. 이해되고 공감됩니다. 그런데, 내가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된 그 일이, 바로 내가 다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아서, 내 고통을 보아주시지 않는 것 같아서 하느님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궁극적 희망은 하느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도 압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을 찾습니다.
오늘 감사송의 말씀이 오늘 축일의 의미를 잘 드러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
제자들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걸림돌을 없애 주셨으며
머리이신 당신에게서 신비롭게 빛난 그 영광이
당신 몸인 온 교회 안에도 가득 차리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셨나이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변모하신 까닭은, 우리 모두 그렇게 변모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감사송 3양식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지금은 비천한 몸을 보고 있지만, 우리 모두 성자 예수님을 닮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딸, 내 마음에 드는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