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의 <드가>
대개는 바쁘다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것이 우리 일반 사회인들의 일상이다. 부모 역할, 자식 역할, 형제자매 역할에서부터 친구 역할과 선후배 역할, 동료 역할을 거쳐 모임이나 조직, 기구, 단체 내에서의 구체적인 어떤 역할, 또 그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할 등 대체로 한 사람에게 수없이 많은 역할들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싫으면 애당초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
하여간 이런 게 몸에 익어서인지 어쩌다 좀 바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가끔 또 이런 생각도 든다. 대체 이런 방식으로 살아서 무얼 어쩌자는 것인지… 일하는 사이 잠깐 쉬거나 노는 게 아니라 쉬는 사이, 노는 틈틈이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건 아주 아주 특수한 계층의 사람이나 대단히 출중한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나 허용될 뿐 보통사람에게는 그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뿐인 것일까? 원래 그런 것일까?
학창시절, 소풍도 '수업의 연장'이라는 선생님의 훈시를 들을 때마다 난 속으로 완강하게 저항했었다. 무슨 소리? 소풍을 나왔으면 노는 것처럼 놀다 가야지 수업은 무슨 빌어먹을? 머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난 그런 '삐딱한' 신념을 고수했었다.
그러다 회사생활, 종종 술조차 난 의무적으로 마실 수밖에 없었다. 부서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현실 앞에 속으로조차 옛날처럼 그렇게 저항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릎을 꿇곤 했었다. 그날따라 혼자이고 싶더라도, 질펀한 회식같은 조직이 베푸는 그 어떤 특전이나 영광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더라도 난 그럴 수 없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저녁 노을과 맞닿은 수평선을 그린다.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끝없이 펼쳐진 은빛 모래 위를 맨발로 닫는다. 이윽고 불타던 노을도 사라지고 하늘에 은하수가 강처럼 흐르면 야자나무 아래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바다거북의 연한 살을 구워먹어야지. 배가 부르면 모닥불 주위를 돌며 온몸이 진한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춤추다가, 광기가 잦아들 때쯤이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누워 쏟아지는 별빛을 맞는 것도 좋겠지.
아! 그러나 지금 내 몸은 중국땅 어느 사무실 모퉁이의 네모진 책상 앞에 바퀴벌레처럼 딱 붙어있다. 하긴 요즘같은 세태에 내 책상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얼마나 감격스런 축복이랴만, 쉴새없는 전화응대에다 온갖 통계수치, 계획과 실천, 기획과 결재, 타협과 조정, 계약과 규정, 수많은 질문과 답변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노을과 오렌지 향기와 야자수 그늘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난 이것들에 매우 익숙하며, 내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비교적 잘 처리해 나가는 편이다.
그러나 궁금하다. 나를 구성하는 두 사람의 나. 남태평양의 무인도를 벗은 몸으로 질주하는 상상 속의 나와 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다소곳이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주시하는 현실 속의 나, 이 중에서 과연 어느 녀석이 진짜 내 모습일까?
영화 <빠삐용>에서 '스티브 매퀸'은 자유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상황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과의 타협을 결연히 사절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을 기도한다. 무수한 실패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황은 더욱 열악해져 가고, 급기야는 절해고도의 섬에 갇힌다. 비록 외부와 차단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섬이라는 제한된 자유라도 보장된 환경, 마음만 먹으면 꽃도 기르고 돼지도 칠 수 있는 환경을 마다하고 결국에는 보다 큰 자유를 향해 바닷가 절벽에서 몸을 날린다. 야자열매 껍질로 가득 채운 자루에 올라탄 그는 출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마음껏 소리친다. "야, 이놈들아, 난 아직 살아있다! 하하하"
이 영화에서 '스티브 매퀸'이 영웅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건 이 시대 불후의 명배우 '더스틴 호프만'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빠삐용(스티브 매퀸)'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가진 동료 죄수 '드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드가'는 영웅이기를 내면으로부터 거부한다. 겁 많고 다소 비굴한 면도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므로써 제한된 자유나마 누려 보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위조 지폐범답게 잔머리 굴리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타의 모범'이 되기도 하므로써 죄수들 가운데 비교적 '할랑한' 보직을 독식하고 있다.
현실은 그에게 어느 정도 참을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더 큰 자유에 목숨 거는 따위의 영웅 행각은 감히 엄두도 못낼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불필요한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빠삐용'이 탈출해 나온 그 섬에서 '드가'는 농사도 짓고 돼지도 기르면서 평생을 보낼 작정을 한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어차피 자유라는 것도 마음 먹기에 달린 거라면, 정말로 달관에 이른 사람은 주어진 만큼의 자유만을 향유하며 나머지는 적당히 체념할 줄도 알았던 '드가'가 아니었을까…
'빠삐용'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을 내던지는 동안 '드가'는 현실의 한 모퉁이에서 다리뻗을 곳을 찾고 있었다. '더스틴 호프만'은 이런 '드가'의 성향을 완벽히 표현했다. 그 영화를 본 이래 내게는 '더스틴 호프만'이 늘 '스티브 매퀸'보다 한 수 위의 배우로 남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이 땅의 많은 사회인들에게서 방금 언급된 두 인간형이 공존하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빠삐용'과 '드가'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편에도 완전히 정착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바로 이 점에 우리네의 딜레머가 존재한다. 즉 우리가 상상 속에서나마 온전한 '빠삐용'이 되어 보기를 원한다면, 그럴수록 일상 속에서는 더욱 철저한 '드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실제로 '빠삐용'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직장에서 잘리거나 가족이 나를 떠나는 등 우리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많은 것들을 잃을 것이다. 꿈 속에서조차 '드가'에 안주하려는가? 그렇다면 그건 아마 살아 숨쉬기는 할지언정 살아있는 인간도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