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19] 유광렬(柳光烈) - 임의 날에, 나의 날에 4. 산에서 갖내려온 빨치산 같아
1 그때 당시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선배 여학생들의 처음 인상담에 의하면 산에서 갖 내려온 빨치산같이 무서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찍이 1946년 늦가을 기독학생회의 어느 심각한 간증 집회에서 신앙 간증을 듣다가 충격을 받고 뛰쳐나와 많은 옷을 벗고 떨며 그 겨울을 지낸 이래 벌써 6, 7년째나 헌 옷만 걸치고 지냈으며 그것도 무어나 한번 몸에 걸쳤다 하면 영 갈아입을 줄 모르고,
2 예를 들어 양복바지를 한 가지 어디서 얻어 입었다면 그 무릎과 궁둥이를 하도 더께더께 기워 입어서 호떡같이 빵떡같이 두툼하여 집사람이 걱정하면 ‘왜 이게 어때서, 춥지도 않고 좋은데’ 하고 대답하였고, 그러면 ‘잘도 좋겠수다’ 하고 대답하곤 하였다.
3 그런 사람이 이발을 자주 하겠나 목욕을 자주 하겠나 되는 대로 살아가는 자연 인생이었다. 그러니까 무서운 모습일 수밖에. 수도가 수복이 돼서 2학년 여름 방학 때 서울로 올라왔다.
4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흔히 거지꼴을 해가지고 거리에 나와 서서 곧장 세상을 점치곤 하였다. 서울 거리의 한 점은 곧 세계의 움직임을 집약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당시는 아직 전시요, 휴전이 되어지기 직전이었다.
5 따라서 세계의 움직임은 대한민국에서 초점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렇다면 또 그 중심적인 역사의 핵(核)은 서울이고, 또 서울 거리의 한 단면은 곧 세계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나는 스스로 거리의 시인을 자처하여 곧잘 티끌 속에서 시의 착상(着想)을 하곤 했다.
6 대학 4년간 우산이란 걸 몰랐다. 그래서 그 당시 영문과 선배이며 운영위원장이었던 숭전대의 김이철 교수 같은 이는 오늘도 만나면 말한다. ‘그 무렵 유광렬, 참 멋있더라.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유유히 걸어가는 모습이……’라고.
7 나는 당시 동대문 감리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나는 주일학교 중등반을 맡는 한편 청년회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 교회는 감리교 호헌파 발상지였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