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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최고봉이 연이어 산맥이 되는 삶>의 줄거리:
최고봉은 한 지방이나 어느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삶은 이렇게 단 하나뿐인 최고봉이 연이어지게 함으로써 최고봉만으로 이루어지는 산맥이 되는 삶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이 세상 안에서 출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탈출합니다. 세상 탈출이 진정한 최고의 출세인 것이지요.
최고봉이 연이어 산맥이 되는 삶
(누가복음 23장 26절~31절)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최고봉이 연이어 산맥이 되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최고봉이 연이어 산맥이 되는 삶’
최고봉(最高峰)이란 특정한 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나 혹은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최고봉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이러한 최고봉의 개념은 흔히 인생에 대해서도 비유적으로 사용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최고봉을 향해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삶은 한순간의 최고봉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최고봉이 계속 이어지는 산맥과 같은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최고봉에서 최고봉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동일시의 결과는 최고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을 탈출하는 별세의 사건입니다. 이 탈출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저주 속에 던져지셔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체포당하시고 모욕과 희롱을 당하시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가시기 위한 준비는 차곡차곡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탈출하는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삶의 최고봉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어유희적인 표현을 통해 이를 쉽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탈출(脫出)과 출세(出世)에는 똑같이 날 출(出)자가 들어있습니다. 출(出)은 “태어나다, 나타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떠나다, 나가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 대한 탈출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출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출세하는 때를 인생의 최고봉의 시간으로 여깁니다. 이 세상에서의 출세란 높은 지위에 이르거나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출세’라는 말 자체가 탈출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탈출하는 것이 곧 출세하는 것이고 최고로 출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는 최고봉이 연달아 이어지는 산맥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최고봉을 맞이하고 싶다면 오늘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에서 탈출로서의 출세를 이루면 됩니다. 세상을 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출세이자 인생의 최고봉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이때 예수님께서는 로마병사들에게 죽도록 채찍질을 당하신 후였습니다. 말꼬리 끝에 낚싯바늘 같은 쇠붙이를 붙인 채찍은 몸에 감기면서 살에 박히고, 당겨질 때는 살점이 뜯겨져 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스스로 매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셔서 더는 나아가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로마병사들은 시골에서 올라오던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사역의 또 하나의 단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선 말씀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앞에서 체포당하심은 있음의 느낌 때문에 지정의와 언행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됨으로 세상에 손을 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즉 세상의 있음을 느끼는 것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희롱을 당하심은 세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 없는 자로써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의 좋음을 느끼는 것에 대한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과 동일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공유해야 할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있음의 느낌을 갖는 나, 이 세상에 대해 좋음의 느낌을 갖는 나를 죽이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지는 삶의 구체적인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슬피 우는 여인들에 대한 말씀을 통해 드러내 주십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쉽게 말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봉의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 있음에 대한 느낌과 좋음의 느낌에 대해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세상에서 대단하게 여겨지는 일을 해내는 것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있음에 대한 느낌과 좋음에 대한 느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있음의 느낌과 세상 좋음의 느낌을 적용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출세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고 인생의 최고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슬피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상황을 정리해 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통용된 형벌 중에서 가장 참혹한 십자가형을 받아서 죽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추종하던 사람들 중에서 일부 무리와 여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슬픔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이 약간의 마음의 위로가 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상황에서 그나마 여자들이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였다는 점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이 여인들이야말로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기에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고마워하심이 아니었습니다. 28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나를 위해 울지 말라’고 하셨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보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 처해있는 형편이 훨씬 더 참혹하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상황에 처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상황을 보고 우는 여자들을 향해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어서 29~30절을 보면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들의 처한 상황이 산사태에 깔려 죽는 것을 최고의 소원으로 바랄 정도로 참혹하다는 의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인류역사상 통용되던 형벌 중에 가장 참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한 형벌을 받으시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슬피 우는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슬퍼할 일이 아니며 너희와 너희 품에 안겨서 평화롭게 젖을 먹는 자녀들이 십자가를 지는 나보다 훨씬 더 참혹한 상황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슬픔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처지가 예수님보다 낫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러한 전제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마음의 괴로움과 슬픔은 겟세마네의 기도 때에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그 슬픔의 순간이 지나고 저주 속으로 던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태도는 결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당하시고 희롱당하시고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고달프고 괴롭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주에 떨어진 이후의 예수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저주받은 세상을 빠져나가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목요일 밤에 체포되셔서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집니다. 24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들은 분명 괴롭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있어서 이러한 시간은 저주 바깥으로 나가는 부활과 승천이라는 영광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잠깐 떨어지는 것을 땀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괴로워하셨지만, 실제로 저주에 떨어진 후에는 그 과정을 희망과 영광의 길로 받아들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다가 여인들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시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여인들의 슬픔에는 자신들의 처지가 예수님보다는 낫다는 전제가 깔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적용하지 못한 채 여전히 세상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저주받은 세상에 속해 있는 여자들이 저주의 세상을 빠져나가고 계신 예수님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는 자가당착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저주에 빠져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주의 익숙함에 매몰되어 머물러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여인들의 슬픔이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시면서 기도하신 이유는 잠시라도 저주에 던져져서 하나님과 떨어지시는 것이 싫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저주의 순간에 던져진 후에는 이 순간만 지나면 부활하고 승천하여 그토록 좋으신 아버지 곁으로 가시겠다는 희망과 영광이 가득한 미래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예수님의 희망의 성취 또한 가까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에 독일 나치에 의해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곳에서 독가스로 유대인들이 죽어갔습니다. 만약 이곳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들어와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 속에 섞여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정체가 밝혀져 수용소에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유대인들이 이 사람을 보고 어디를 가냐고 슬퍼합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입장에서는 그 슬픔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느끼셨던 감정은 이보다 더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죽음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봉의 일입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출세는 곧 세상을 탈출하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슬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000년 전 이 여인들의 처지는 지금의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라는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세상에 적용하는 것을 중단하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압니다. 세상을 붙잡고 있는 마음을 놓을 줄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하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울었던 여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시 29절을 살펴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잉태한 여인이 해산하여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키웁니다. 엄마의 관심은 온통 아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기의 있음을 느끼고 아기에게서 좋음의 느낌을 갖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기가 없는 엄마가 복되다 여겨지리라는 것은 그 대상이 비록 아기일지라도 세상에 대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삼습니다. 아기를 통해서 엄마가 되듯이 세상을 통해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없어지면 내가 없어지는 줄로만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제거해야만 세상을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아이 때문에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죽이려야 죽일 수 없게 된 여인과 같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이기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출세입니다. 그런데 아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여인처럼 세상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갖고자 떠나지 못한다면 출세는 막히는 것입니다. 화가 임하는 것이고 저주가 곱빼기로 임하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셨던 관점이었습니다. 지금도 75억 인구가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고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관점이 바로 오늘 말씀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인생관 세계관의 관점이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와 달랐는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과제는 마음의 채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세상에서 좋음을 느낌으로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정말로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면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삶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 하면 30절에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망합니다만 이 한 가지 사건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의 있음의 느낌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세상에서 좋음을 느끼고자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산사태에 깔려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세상 안에 있는 것들에 적용하며 사는 것은 당장 산사태에 깔려 죽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든 모르든 모든 인류에게 최선은 바로 저주받은 세상에서의 탈출입니다. 배우자와 함께 있는 순간에 최선은 배우자의 있음에 대한 느낌을 죽이고 마음이 빠져나가서 하나님 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배우자와 사이가 좋아지기 위해서 많은 대화를 하고 비위를 맞춰주고 외식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당장 산사태가 나서 깔려 죽기를 소원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있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있음을 느끼고 자녀에게 좋음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것은 저주받은 세상에 속한 일이기에 차라리 산사태가 나서 깔려 죽기를 바라는 것이 낫다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철저하게 동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에 대한 관점과 예수님이 가지신 세상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회사에서는 모든 직원들이 승진에서 좋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또 모든 직원들은 사장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하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회사빌딩이 무너져서 깔려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부모라고 해서 자녀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느낌에 지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녀에게 지정의와 언행이 지배당하는 삶은 죽는 게 낫습니다. 배우자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며 지정의와 언행이 지배당하는 삶도 죽는 게 낫습니다. 회사에서 사장님과 승진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며 지정의와 언행이 지배당하는 삶도 죽는 게 낫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참혹하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혹한 것은 오히려 저주의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어서 31절을 보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푸른 나무는 뿌리를 땅에 잘 내려서 수액을 빨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즉 수액의 근원과 연결이 확고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대로 마른 나무는 수액의 근원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사람은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수액처럼 빨아들이는 나무와 같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대상으로부터 있음의 느낌을 통해 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느낌을 가져 마음이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느낌이 연결되지 않으면 마른 나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몸과 의식이 세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다만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서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자들은 푸른 나무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느낌이 하늘에 적용되는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탈출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세상으로부터 탈출이기에 최고의 출세이고 인생의 최고봉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최고봉에 오르는 것이고 출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적용하는 사람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푸른 나무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마음을 하늘로 보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최고로 기쁜 사건입니다.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참하고 슬프게 본다면 최고의 일을 가장 슬픈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최고의 일조차 슬프게 여기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얼마나 더 극심할지 모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만이 기다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는 동안에도 괴롭고 삶이 끝난 후에도 괴로움이 계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인생의 최고봉입니다. 만약 예수님께 우리처럼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세상의 좋음을 느끼는 삶을 살아보시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산이 무너져서 깔려 죽기를 소원하실 것입니다. 빌딩이 무너져서 깔려 죽기를 소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적용하며 살아야 될 처지가 운명적으로 주어진다면 예수님이 바라실 유일한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이 볼 때 가장 복된 일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을 인간으로 보내주셔서 내가 주님과 동일시하고 또 주님이 나와 동일시했을 때를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며 받아들여서 오늘도 십자가에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이 세상을 향해 적용되는 상황이 끝없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인생의 최고봉을 이어가는 것임을 기억하며 끝내 최고봉만으로 이루어지는 산맥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