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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풍수의 비조라 하면 당연히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년)다. 그는 신라 흥덕왕 2년 전남 영암군의 김씨 성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옥룡자다. 도선국사는 15세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은 신라뿐만 아니라 조선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에 명풍수가 많이 탄생했다. 무학대사, 일지대사, 일이대사, 일견대사, 학조대사, 성지대사, 박상의, 남사고, 이의신, 박문수, 이지함 등 이름만 들어도 역사적 인물로 기록된 이들을 여럿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보아 알겠지만 초창기 우리나라 풍수는 처음 승(僧)에서 승(僧)으로 전수되었다.
조선시대의 많은 명풍수 가운데 경북 군위군에서 출생해 월영사에 입산한 성지대사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성지대사 역시 15세에 입산했다. 성지(聖智 또는 性智)는 본관이 남양이며, 용궁현감을 지낸 홍석귀와 고씨 성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서얼(庶孼)로 태어났다. 15세에 월영사에 입산해 선사의 대경을 공부하고 구계(九戒:불교의식)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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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지대사가 출가한 월령곡 월령사 옛 터에서 본 국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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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에 의하면 성지대사가 15세 때 입산한 월영사는 소보면 봉소리 연방산 월령곡에 있는 옛 사찰이지만 지금은 없다. 현장을 답사해 살펴보니 옛 선사들이 사찰터를 선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입지 조건을 알 수 있었다. 위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소보면 하소리 마을을 통과해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골이 바로 월령곡이다. 좁은 농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우측으로 넓은 국세가 눈에 들어왔다. 우거진 잡초를 헤치며 자취를 찾아 월령사가 있었던 곳에 도착하니 풍수적 국세가 다소 좁긴했지만 그야말로 와혈형의 국세가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월령사를 위해 온갖 풍파를 이겨낸 기왓장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잡초가 많이 우거져 있어 월령사가 있었던 정확한 지점은 확인이 어려웠지만 월령사 당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옆에 어느 분의 선조가 모셔진 묘소가 3기 자리하고 있었다.
성지대사는 서얼이다 보니 괄대를 많이 받아 어머니 고씨와 부황리 골짜기에 들어가 살았다. 여기에서 산을 넘어 월령사로 수학을 위해 다녔다. 월령곡과 부황리 골짜기는 연방산(290.3m) 아래에 있는 골이며 서로 반대편에 있는 계곡이다.
성지골이라는 곳은 현재 연방골로 통하고 있으며,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안락정사의 사찰이 자라잡고 있다. 성지대사는 풍수술법에 능통했다. 그의 풍수법은 바로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장지법을 숙독해 적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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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령곡 월령사 옛터와 영천 이씨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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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군 소보면 봉황리에 나은 이려(羅隱 李麗·1384~1455년)의 묘소가 있다. 이 묘소는 바로 성지대사가 점혈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월령사는 와혈형 명당이나 흔적뿐
이려는 고려가 망한 이후 군위로 낙향해 이름마저 려(麗)로 바꾸었다. 이곳에 경북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돼 있는 광석재(廣石齋)는 이려의 애국충절과 그의 증손인 우암 이세헌(牛巖 李世憲·1476~1555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 만옹 이정기(漫翁 李廷機·1613~1699년)가 건립한 재사가 있다.
재사 옆을 휘감고 내려오는 산줄기 끝자락 부근에 영천 이씨 묘역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 묘역 제일 상단에 이려의 묘소가 놓여 있으며, 그 아래로 후손들의 묘소가 여러 기 조성돼 있다.
현장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과연 정확한 혈자리에 재혈돼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 의해 당시의 현장 상태가 많이 변질돼 지금의 상태와는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다.
도선국사의 지리법을 통달해 도안(道眼)을 가진 유명한 성지대사가 점혈했으니 올바른 자리가 잡혔을 것이라 믿고 싶을 뿐이다. 이유는 필자가 풍수지리학을 현장에 적용하는 방법이 바로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술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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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 이씨 이공 려의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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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지형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지금의 묘소보다 조금만 올려진 곳에 보면 혈증이 약하게 나타나 있다. 물론 주변을 훼손시켰기 때문에 가증(假證)일 수는 있다.
이곳에 대한 설화에 의하면 성지대사가 묘소를 점지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도저히 더 올라갈 수가 없어 이곳을 점지했다고 한다.
또 이려를 시조격으로 하는 영천 이씨 묘역을 살펴보면 주산의 역량에 넘칠 정도로 많은 묘소가 한 묘역에 만들어져 있어 안타까움이 있다. 이런 것은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것으로 성지대사와 같은 유명하신 분이 풍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산천정기를 못 받아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해서 영원히 지배할 목적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제도였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풍수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봄이 되면 과실나무에 많은 꽃이 피고 이 꽃이 지고 나면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열매들을 모두 수확하기 위해 그냥 두면 상품가치가 높은 열매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자연을 아는 농부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한 가지에 몇 개의 열매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제거해 버린다. 나무의 역량에 한계가 있고 또한 한 가지가 열매를 키우기 위한 역량도 한정돼 있으며 과일들이 서로 너무 가까이 있으면 영양부족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