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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어느 대기업이 매년 연말 소모적인 송년회 대신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초청해 따뜻한 정을 나눈다는 취지로 사랑의 음악회를 개최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12월 27일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제 10회 <사랑의 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는 그룹 임직원들과 초청받은 600여 명의 어린이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나란히 앉아 공연을 즐겼다고 합니다.
자원 봉사에 나선 이 대기업 직원 30여 명은 행사장 곳곳에서 어린이들에게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고 풍선을 나눠주며 행사 분위기를 한껏 띄웠고, 행사장 곳곳에서는 산타 복장을 한 직원들이 참석 어린이 전원에게 의류와 책, 학용품 등 푸짐한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이날 초대된 어린이들은 서울과 대구지역 저소득층 가정, 다문화 가정, 새터민 가정의 어린이들이었고 뮤지컬 '목 짧은 기린 지피', '제빵왕 김탁구 빵쇼', '어린이 합창' 등의 공연을 즐겁게 관람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꼈을까요? 이 아이들은 평생을 통틀어 이런 감동과 특별한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닌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 받는 특별한 사랑이야말로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이 느끼는 감동은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바로 이런 특별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보내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에게 오셨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어떤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 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서 저와 여러분이 받은 특별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특별한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다짐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멸망에서 벗어나는 사랑입니다.
16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분이십니다. 신이신 하나님께서 왜 이 땅의 인간들을 사랑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만드신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손을 거친 어떤 작품이나 물건들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자기의 영향을 받은 것은 소중하게 여기고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키시고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이 인간에 대한 무한책임을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범했지만 그 죄를 용서하고 어떻게든 하나님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 성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서 32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줬는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받아서 모두 가지고 가출하여 먼 나라로 여행을 갔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둘째 아들은 돈을 다 써버리고 살 길이 없어 어느 집 돼지치는 일꾼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돈이 모아지지 않고 날로날로 궁핍하여 굶다가 돼지사료를 먹으면서 배를 채웁니다.
그 때 그 아들은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하고 품꾼들도 잘 먹고 잘 지내는데 자기는 돼지에게 돼지밥이나 얻어먹고 굶주려 죽게 되었다는 한탄을 합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죄를 빌고 아버지 집의 종이라도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고 재산을 다 들고 가출해서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 아들을 용서해줄 뿐 아니라 값비싼 의복과 보석을 가져다주고 성대한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을 자랑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아무리 못된 짓을 많이 한 아들이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는 돌아온 아들로 인해 한없이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을 아십니까? 어렸을 적, 한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1964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원제는 'The Giving Tree' 인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소년이 나무와 친하게 지내면서 나무로부터 많은 것을 제공받게 됩니다. 나무는 이 소년에게 친구이기도 하고 휴식이 되어주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나무주위에서 나무를 친구삼아 즐겁게 뛰어놀던 소년은 커가면서 나무를 자주 찾지 못하고 무슨 일이 생길 때에만 나무를 찾아옵니다. 하루는 오랜만에 나타난 소년이 나무에게 돈이 없다고 돈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사과를 팔면 돈이 될 것’이라며 사과를 가져다 팔라며 사과를 줍니다. 나무는 소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행복해 했습니다. 또 오랫만에 나타난 소년은 집을 요구했고, 그 다음에는 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마다 나무는 가지와, 줄기까지 모두 소년에게 주었고 소년은 나무 재목으로 집과 배를 만들었습니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와 줄기를 주어서 소년이 필요했던 것을 채워가는 것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한참 후에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 노년이 되어 나타난 그 소년에게 나무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노년의 소년도 나무에게 더 이상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이 필요한 것은 앉아서 쉴 공간이 필요했고 나무는 이제 그루터기만 남은 자기의 몸을 소년의 쉴 공간으로 제공하였습니다. 제목 그대로 아낌없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책의 제일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And the tree was happy."
“그 나무는 행복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죄를 가진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가 없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의 습성과 죄로 인해 생겨난 멸망의 인생을 끊어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의 문제 해결을 위해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 즉 나를 창조하신 신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멸망에서 건져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멸망에서 건져냄을 얻고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서 멸망과는 거리가 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특징 둘째는 심판을 받지 않도록 만드시는 사랑입니다.
17절과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누릴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29장 1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고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즐겨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며 우리가 더 좋은 길을 가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가진 인간으로 이 땅에 온 이상... 그리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온 이상 우리는 육신이 가지는 한계.. 즉 물리적인 죽음과 죽음이후에 찾아올 내세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내세... 즉 천국과 지옥이라는 세상을 가는 인생이라면 우리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심판의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이 세상의 삶을 근거로 하나님앞에 서게 되는 날.. 심판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고 공의로 세상을 평등하게 대하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하고 깨끗하게 살아야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정직하고 깨끗하게 지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귀한 상을 내리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도 양심으로부터 외면에 이르기까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시기와 질투와 거짓말과 사기치는 것과 욕망과 사치, 허영심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과 살인까지 가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우리는 우리와 경쟁하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살인하고 싶은 마음을 먹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보면 이미 폭력을 휘두른 자요, 살인한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모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든 죄인들입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 죄의 평가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할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이 세상의 죄를 모두 통과시켜주시고 하나님앞에서 심판의 과정을 생략해 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받는 무리가 있다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어주신 사랑의 메신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닮아가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죄인인 것은 맞지만 죄를 사면받은 사람들이기에 따로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왕이나 대통령같은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사면권’을 가지고 사면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념일 때에 ‘사면권’을 행사합니다. 우리나라같은 경우 삼일절, 광복절, 석가탄신일, 성탄절 등에 사면이 이뤄지는 예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사면’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어 죄의 형벌을 계속 받아야하지만 용서를 해주고 죄가 없어졌다고 인정해줄 뿐 아니라 남은 형기를 다 치뤘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죄인이 맞지만 죄를 없애주고 형벌을 더 받아야하지만 남은 형벌이 없어졌다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법치주의국가에서 최고지도자의 ‘사면권’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많고 사법부의 권한에 대해 행정부의 역할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의 죄악에 있어서는 우리 하나님의 ‘사면권’이 논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 하나님앞에 나와 용서를 빌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처리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고 심판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인간에 대한 화해와 용서의 메신저이신 것을 믿고 그 분을 따를 때 나는 죄의 용서함을 얻고 천국갈 영혼이 되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죽은 이후에 있을 심판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나는 심판에서 벗어나 이미 천국으로 인도될 영혼이라는 믿고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심판이라는 역을 거치지 않고 천국으로 직행하는 차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마지막 세 번째는 빛가운데 행하는 빛의 사랑입니다.
19절에서 2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우리에게 빛으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가 빛의 인생이 됩니다. 어둡고 캄캄한 밤에 빛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아주 어두운 시골길을 갈 때 조그마한 호롱불 하나만 있어도 길에 어떤 위험이 있는 지 보게 됩니다. 조그마한 돌이나 웅덩이 하나에 큰 낭패를 볼 수 있지만 조그마한 빛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잘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빛이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을 살면서 빛이 없이 인생을 살면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 죽음의 구렁텅이 속에 수없이 빠지고 뒹굴고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27편 1절에“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죄의 어두움을 사라져버리게 하시고 의의 광명이 비치게 만들어 주십니다. 죄 가운데 빠진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죄에서 허덕이고 방황하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의의 빛인 예수님이 마음속에 비춰서 죄의 어두움을 밝히 보여주시면 우리가 회개할 수 있고 주님을 찾아 나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내가 얼마나 옷이 더러운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았는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이 비치게 되면 내가 얼마나 발이 더럽고 옷이 더럽고 추하고 씻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야 죄의 어두움이 우리 눈에 나타나서 예수 보혈로 씻고 의롭게 깨끗하게 될 수 있는 의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7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있으면 우리는 어두움을 씻어낼 수 있는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국민들에게 가로등을 설치하자고 했을 때 온통 가로등 설치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습니다. ‘등’이란 집 안에서 켜면 되지 어째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느냐’라고 말하며 협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러면 가로등설치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집 대문밖에 등을 좀 달아보자.’라고 했고 극소수의 찬성하는 사람들의 집 문 밖에만 등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등을 달고 난 뒤에 사람들이 밤에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횟수도 적어지고 밤길에 방황하는 사람도 적어지고 밤 손님들(?) 누군지 아시죠... 그런 사람들도 사라지고 많은 점에 있어 유익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야~ 가로등을 켜는 것이 참 좋구나.’라는 의견으로 여론이 모아지고 집 대문에 붙이던 등을 길거리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등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온 시내가 밝고 맑고 환해져 밤을 대낮고 같이 밝혀서 사람들이 강도의 위험, 길을 잃어버리는 위험, 사고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글이 미국 국가기록정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밝히 비춰줍니다. 진리의 밝은 빛은 절대 가려지지 않고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의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진리의 빛으로 밝히 비춰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슴속에 들어오면 어두운 것이 밝히 드러나고 빛이 무엇인가 보여주기 때문에 어찌할 수없이 어두움을 떠나서 빛으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므로 우리는 주님을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빛으로써 허무와 무의미의 암울한 삶속에서 가치와 즐거움을 환하게 비취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살고 노동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한줌의 흙으로 돌아갈 때는 빈손 들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면 사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의미가 있느냐.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을 받아서 하늘에 올라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무의미하고 짓밟힌 진흙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요 영생천국을 얻어서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앎으로 삶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9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예전에는 우리가 어둠에 거하였지만 이제는 빛에 거하는 빛의 자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에 넘어지고 죄로 인해 인생이 망신창이가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빛의 자녀이기에 죄가 뭔지 깨닫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참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멸망에서 벗어나 인생을 즐기며 기뻐하며 행복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빛가운데 거하는 특별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빛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밝은 상태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또한 죄의 어두움으로 인해 좌절하고 낙담하던 것을 벗어나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빛의 자녀로 항상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만들어주셨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고백할 수 있는 담대함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특별한 사랑을 받아 멸망에서 벗어나고 심판을 받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멸망에 두려워하지 않고 심판을 걱정하지 않으며 빛을 사랑하고 어두움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아직도 여전히 멸망의 인생으로 내가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앞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판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직하고 성실하며 착하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빛의 자녀의 모습보다 시기와 질투와 거짓말과 욕망을 가지고 어두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특별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고 강하게 어떤 세상의 유혹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야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번 한 주간도 특별한 사랑에 감격하여 빛의 자녀로서 우리의 품격을 잃지 않고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당함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