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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참된 의의-부활절특강-(2)
말씀: 고전15:17.
세상에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을 피한 사람도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자신이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그 누구나 피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삶과 죽음의 간격은 한걸음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0:3에서 이르기를, ..........그러나 진실로 [주]께서 살아 계심과 네 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 사이는 단 한 걸음만 있느니라.(삼상 20:3b).
우리는 늘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저는 하루하루의 삶이 기적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영원이 시작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순간입니다. 이 세상에 너무 바빠서 자기 장례식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바쁨은 없습니다. 죽음은 나이와 건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죽을 수 있습니다. 건강할 때든, 병들었을 때든, 나이가 들었든, 젊든 상관없이 죽습니다. 우리는 잠시 하나님께서 빌려준 시간 속에서 살아 갈 뿐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강한 권세를 가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람이 죽어 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누가 죽음을 이긴 사람이 있습니까?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선포한 미국과 이라크는 아직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웃한 시리아의 여러 곳에서 연일 죽음의 소식이 TV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신밧드의 고향이요, 알라딘의 램프와 같은 신화와 전설의 고향입니다. 잠시 바그다드에 내려오는 상인에 대한 전설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상인이 자신의 종 하나를 시장에 보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 종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며 돌아왔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초조하게 간청하기를 "시장에 갔다가 어떤 여자에게 밀쳐져 돌아섰을 때 사람들 가운데 서있는 죽음의사자를 만났습니다. 죽음의사자는 정말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저를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주인님, 제게 말을 한 필 내어 주십시오. 저는 급히 죽음의 사자를 피해 멀리 도망가겠습니다. 저는 사마라로 가서 거기 숨어 있겠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저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상인은 종에게 말 한 필을 내어 주었고 종은 전력 질주하여 도망쳤습니다. 주인은 시장으로 가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죽음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주인은 죽음의 사자에게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어찌하여 나의 종에게 그리 겁을 주었소?" 그러자, 죽음의 사자는 "제가 겁을 준 것이 아닙니다. 바그다드에서 그를 보고 놀란 것은 오히려 접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 사마라에서 그를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보았으니 말입니다."” 그 종이 도망한 곳이 어디입니까? 죽음이 기다리는 곳 사마라입니다.
<The Soul- Winner's Handy Guide 부록에서 발췌, Y.T. Wee 著,>.
이같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바로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롬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히9:27).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다름 아닌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올 때는 반드시 미리 알려 주도록 약속했습니다. 수년 전에 알려주고, 마지막에는 죽기 전 바로 앞에 서 있도록 약속했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은 자기 앞에 갑자기 나타난 죽음을 보고 질려서 쓰러지며 소리쳤습니다. "왜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요. 당신은 분명히 미리 말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이 사전에 나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오면 어쩌란 말이요?"
그러자 죽음이 말하기를 '물론 여러 번 경고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에게 생긴 흰머리가 바로 경고였소. 당신에게서 빠지는 이가 바로 경고였소. 눈이 침침해지는 것도 경고였소. 육신의 힘이 쇠해 지고 정력이 감퇴하는 것도 경고였소. 모든 것이 경고였소. 나는 수차례 끊임없이 찾아 올 것을 경고했소이다!">
-<The Soul- Winner's Handy Guide 부록에서 발췌, Y.T. Wee 著>.
죽음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실수로 어떤 사람을 띄어 넘는 법도 없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냉철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회교도의 본 고장에서 만들어진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어느 종교를 믿든지 죽음을 부정하거나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종교의 기원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에만 죽음을 이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 가운데 오직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주님은 죽어 장사한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권능을 가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그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능을 가장 잘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자연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데서도 자신의 권능을 보이셨지만 하나님도 죽을 수 있을까? 하나님도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어린 아이 같은 질문이지만 인간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 정확무오한 해결책을 몸소 보여 주신 사건이 바로 주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죽음이 없는 분이시지만 스스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지만 사람들과 같이 사셨고, 육신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시고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하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을 하셨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세 가지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의 죽음의 의의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1,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히2:14).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원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부활의 권능을 소유한 분이신데 반해 마귀는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죽음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으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이기신 것입니다.
2, 죽음에 매인 사람들을 건져내신 것입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 (히2: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고, 평생토록 죽음의 속박에 매인 자들을 건져내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통제하려고 할 때 어릴 때부터 가장 효과적이고도 무서운 말이 ‘죽여 버린다.’, 혹은 ‘너 죽어’란 말입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 용감한 척 해도 막상 죽음 앞에서는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3,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법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첫 상속 언약 아래 있던 범죄들을 대속하시고, 부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상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죽으신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선한 목적으로 시도되었지만 비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이루셨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활의 참된 의의는 무엇일까요?
첫째,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것입니다.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4). 주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 있게 선포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믿었던 제자들에게도 의심과 불신을 던졌습니다. 그를 따르던 여인들에게도 심한 슬픔과 눈물, 통곡만을 뿌려주었습니다. 한 때 그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깊은 좌절감과 강한 배신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주님의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보고, 그분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는 모습을 통해 모든 것은 끝났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이전에 고백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확신으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 집회의 설교 주제는 항상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 역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의 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근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은혜를 끼쳤던 것입니다. 행4:2,그들이 백성을 가르친 것과 또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선포한 것으로 인해 근심하여(행4:2).
부활의 소식이 근심이 된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덮여지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패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할 자녀가 없듯이, 마귀의 자녀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반면 부활의 자녀들은 이 소식을 영원히 자랑스러워하는 위대한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행4: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우리는 부활의 소식을 통해 날마다 죽음의 권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은혜를 누립니다.
어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이제 비로소 내 아들이 되었구나!” 처음부터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어떤 어려운 일을 기필코 완성했을 때, 고통을 견뎌내고 승리했을 때 그런 말을 합니다. 연속되는 패배에 굴복하지 않고 일어섰을 때 아버지는 ‘오늘 너는 내 아들로 온 세상에 알려졌구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부활을 통해 온 세상에 권능 있게,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 시시하게 죽고 그래? 죽는 자는 사람이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야? 죽었는데 알게 뭐야? 어떻게 믿음의 영원한 생명을 증명해? ........ 그러나 부활로 인해 이런 의심에 찬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은 인간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로 육신을 입으신 성육신이 입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모든 이적과 권능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셨음이 확증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이란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그분의 다시 오심에 관한 약속 또한 분명히 성취될 약속임이 증언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받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둘째, 부활의 참된 의의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 더러운 죄 씻음과 용서를 받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 죄로 더럽힌 육신을 처리 받고, 부활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받습니다. 벧전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이 주님의 부활의 결과란 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는 것은 살아 계신 말씀을 통해서입니다(약1:18, 벧전1:23). 그 말씀이란 바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복음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의 거듭남, 구원의 핵심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거듭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 자신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라 바로 믿는 자들의 영을 거듭나게 하는 생명을 주는 부활이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제거해 주신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삼일 동안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분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지고 우리 대신 지옥에 가셔서 거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내려놓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 하나 주님이 그것을 처리하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의 죄를 지시고 지옥에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사해졌고 주님은 자신의 죄가 없으시므로 죽음의 권능이 그분을 잡아 둘 수 없었기에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회들이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이라는 것으로 신앙고백을 하는데 그들의 고백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남들이 하니까 뜻도 모르고 암송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이 죽은 몇 백 년 후 천주교회에서 만든 것을 그대로 도입하면서도 믿음이 없어 주님이 지옥엘 가셨다는 말은 쏙 빼버리고 주문 외듯 암송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다 같이 아시는 분들은 사도신경을 암송해봅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가] He descended into hell;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The Holy Catholic Church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면 주님이 지옥에 가셨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까?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만약 그분이 우리의 죄들을 가지고 지옥에 내려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를 지옥에 버렸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땅의 심장부” 즉 지옥에 밤낮으로 사흘 동안 있게 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40). [땅의 심장부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곳이 바로 불타는 지옥입니다.
엡4:9, “(이제 그분께서 올라 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엡4:9)
한문으로 지옥(地獄)은 땅속의 감옥을 말하며 베드로도 주님께서 성령으로 감옥에 있는 자들에게 가셔서 선포하신 것을 증언했는데 그들은 노아홍수 때 한꺼번에 죽은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벧전3:19-20, “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
그러나 그분의 몸은 지옥에 남겨지지 않으시고 올라와 부활하셨습니다.
행2:27,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행2:27) 이는 주님의 탄생과 고난과 죽으심과 지옥에 가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시편기자와 여러 대언자들의 예언 중의 하나입니다. 31절도 봅니다. “또 이것을 미리 보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육체도 썩음을 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느니라.”(행2:31)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하려면 우리 죄를 지옥에 두시려고 주님이 지옥에 가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져야 그나마 올바른 신앙고백이 될 것입니다. 주님이 지옥엘 가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미 없이 중얼거리는 신앙고백이라는 것은 염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두 영이 죽은 채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범법과 죄들 가운데 영이 죽어 있었습니다. 엡2:1, 또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에서 죽었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영이 서로 교통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의 핸드폰이 어느 지역에서는 터지지 않습니다. 기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나 기지국이 없어 수발신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도 거듭나지 못하면 영이 있어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사야59:1-2,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고전15: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우리의 몸은 아직은 구속받지 못했지만 거듭난 우리의 영은 살아나 주님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믿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본연의 기능을 회복했습니다.
셋째, 부활의 참된 의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들에게 더 이상 죄의 권능, 사망의 권세 아래 종처럼 부림을 당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게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더 이상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않고, 세상의 조류대로 살지 않고 정복하는 삶을 충분히 가능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도 이길 수 없었던 마귀를 몰아내고, 그들의 궤계를 멸하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단지 2,0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믿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일 년의 어느 한날을 부활절로 정하여 잔치하고 삶은 계란을 선물로 나누어 주는 이교도의 행위들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간절히 알고 싶어 했던 한 가지는 바로 부활의 권능이었습니다. 빌3:10-11,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빌3:10-11).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으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마다 부활의 권능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과 부활은 한번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영적인 여정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하는 그런 삶의 연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아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성도가 살아 있는 것은 육신이 죽고 영이 거듭나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결코 다함이나 끝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서 나는 음식으로 육신의 힘을 키우고, 종교적 신념과 교육을 통해 혼의 능력을 기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죽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영이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부활의 권능은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고, 강건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고후4:16,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저는 여러분들이 부활의 권능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무지는 우리를 암흑 속에 가두어 둡니다. 무지는 동시에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들은 법이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어떤 판사의 판결처럼, 성도로서 성도의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영적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현재 우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그 부활을 통해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권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탓에 이름만 그리스도인일 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아무런 은혜도 누리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걸고 다닐 목걸이라도 있고, 장식이라도 있고, 성화(聖畵)속에 라도 있지만 부활은 목걸이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해마다 부활절에만 연례행사처럼 삶은 달걀을 선물하고 칸타타를 하고 관련된 설교를 들을 뿐 도무지 부활의 참된 의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부류에 합류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서 그치지 말고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의 모든 죄들을 지옥에 버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현재, 지금 바로 내 안에 살아 계시며, 영원히 함께 하고 있다는 임재(臨齋)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고후13:4,그분께서 약하심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살아 계시며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살리라.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죄에 대한 좋은 실화가 있습니다. 옛날에 영준이란 애가 있었습니다. 몸이 약하고 성격이 소심해서 늘 또래 아이들한테 맞고 다니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맞고 다니기는커녕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갑자기 힘이 세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완전히 바뀐 것도 아닌데 어찌된 노릇일까? 알아 봤더니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영준이는 자기 아버지가 동네 어른들 가운데 싸움을 제일 잘하는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강함을 안후로는 누구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깡패들과의 패싸움에서 칼에 맞고도 일어나서 그들을 때려눕힌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힘이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영준이 에게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일 년 365일 매일 잘 나가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신나게 얻어맞았습니다. 대장 노릇은 고사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는데, 사람들이 모두 죽을병이라고 수군거릴 때였습니다. 그동안 영준이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준이 아버지가 기적같이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사정이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에게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준이가 다시 동네 애들의 가방을 메고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영준이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름 어느 날 동네에 아이스크림 장사가 왔는데, 그게 먹고 싶어서 아버지 돈 50원을 슬쩍해서 사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알려져 약점이 잡힌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그것을 네 아버지에게 일러바친다고 겁을 줬습니다. 자기의 힘이 되고, 든든한 방패가 되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과 도둑질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대장 노릇도 끝나고 다시 그들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이 이야기는 죄의 권능에 대해 기가 막힌 영적 교훈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
성도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롬6:16,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을 때나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았을 때, 거짓말을 했을 때에 주어진 영적 권세와 능력은 소멸되고 맙니다. 원수들은 그것을 잘 이용합니다.
영준이가 속박의 생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딱 한 가지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몸도 약한 아이가 또래들의 가방을 메고, 용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친구 하나가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다 말하고 용서를 빌어라. 맞을 때 맞더라도 그렇게 하고 나면 동네 애들에게는 편할 것 아니냐?”
그래서 영준이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한테 자신의 죄를 다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아버지가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그것 때문에 그 마음고생을 하고, 힘든 생활을 한 아들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아이스크림을 마음대로 사먹으라고 500원을 줬습니다. 당시에는 그 500원이 매우 큰돈이었습니다.
용서의 기쁨만 얻은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용돈까지 듬뿍 받았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동네 애들의 괴롭힘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겠습니까? 야, 가방 매! 하는 소리에 ‘내가 미쳤나, 자식아. 네 가방을 왜 내가 메냐?’ 이 아이가 용서를 받고, 용돈까지 얻은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이 약점을 잡고 협박을 했지만, 영준이 하는 말...‘그래 가서 입 아프도록 일러라!’ - 이미 끝난 것입니다. 영준이가 지은 죄를 그 아버지가 알면 신나게 맞고 터질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용돈까지 듬뿍 받았다는 말에 아무도 다시 그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의 영적 생활, 영적 원리를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해준 예화입니다. 여러분들이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백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고 자백한 뒤에는 마귀가 더 이상 그 문제로 참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힘없이 죽어 버리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았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활약과 능력은 바로 주님의 부활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힘이요, 권세입니다. 할렐루야!!
네 번째 부활의 참된 의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증인’으로 세우시며,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1:8,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증인은 본 것과 들은 것을 양심에 거리낌 없이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듣고 기록된 말씀을 읽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영적인 삶을 통해서입니다.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나고, 성령의 권능을 소유하고, 날마다 삶 가운데 그분의 부활의 권능을 통해 소생하는 경험으로 우리는 부활의 목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행5:32,우리는 이 일들에 대하여 그분의 증인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님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5:32).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바로 우리 입술을 통해 증언하시고자 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바로 주님의 부활의 증거가 됩니다. 나의 삶이 주께서 부활했다는 진리의 열매가 됩니다. 내가 부르는 주님의 이름, 내가 찬양하고 감사하는 입술이 바로 거룩한 희생물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부활 성도의 신앙은 어느 한 날에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은 거듭났고 우리의 혼은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앞으로 올 것을 바라고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의 부활은 약속된 것이므로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한 날에 매여 절기를 지키고 예표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피 흘리심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듯이 주님의 부활 역시 영원한 부활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말로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전파요, 증거입니다. 입술로 드러내지 않고 삶으로만 드러내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먼저 입술로 증언한 다음에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우리가 증언한 말을 뒷받침해 줄 것입니다. 행동은 말에 힘을 더해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행동이 엉망일 때 말은 증거의 능력을 잃게 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의 증거를 효력 있게 하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를 빛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부활의 참된 증인이 되는 비결은 1년에 한 번씩 부활절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살아나신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몸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몸에 주님의 생명이 드러나면, 누구라도 그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이 자연스럽게 증언됩니다.
고후4:10-11,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11).
이것은 부활의 권능이기도 하고, 부활의 증인이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부활의 증인이 되고,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 이 교회와 곳곳에 넘쳐 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썩어질 육신의 혈기를 날마다 죽음에 넘겨주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부활을 확실히 믿고 부활의 소망의 말씀을 간직하고 산다면 여러분들이 스스로 이기지 못하는 혈기도 여러분에게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 같이 날마다 죽음으로 가정에 평화를 이루고 서로를 세워줌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일 년에 어느 한 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들보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하는 삶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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