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이 가장 사랑했던 곳
화순·순천 모후산(944m) 한바퀴
화순과 순천에 걸쳐 있는 모후산은 지리산을 제외하고 전남에서 광양 백운산, 화순 무등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동쪽으로는 주암호를 사이에 두고 조계산이 솟아 있고 사방으로 능선을 퍼뜨려 수많은 골짜기와 마을을 품고 있다. 산의 서쪽,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는 ‘방랑시인’ 김삿갓(김병연, 1807~1863)이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큰 삿갓에 짚신과 죽장만으로 팔도를 주유한 그와 달리 현대의 방랑자는 화려한 복장에 eMTB를 타고 그와 대면했다
“삿갓 형님! 지팡이와 짚신으로 방랑한다고 고생하셨수! 이제 자전거로 편하게 돌아보시구려!” |
“삿갓 형님! 짚신 신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후배는 자전거 타고 왔습니다!”
조금은 슬픈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동상 앞에서 ‘현대의 방랑자’ 이윤기 이사는 자전거를 동상에 기대놓고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연배를 따지면 160살이나 더 많으니 5대조는 될 텐데 천연덕스럽게 “형님”이란다. 김삿갓이 57세에 작고했으니 동상이 만년의 모습이라면 현재의 이 이사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아서 형님이 맞기도 하겠다.
순천과 화순 사이에 첨봉으로 솟은 모후산(944m) 서쪽 자락에서 우리는 김삿갓 최후의 무대를 만났다. 김삿갓을 형님이 아니라 ‘선배’로 오랫동안 경모해온 나로서도 반가운 조우였다. 전국을 떠돌던 김삿갓이 만년에 화순 동복에서 지내다 숨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확한 장소는 몰랐는데 모후산을 일주하면서 구암리에 있는 압해 정(丁)씨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모후산과 유마사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모습의 모후산에 마음이 끌린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뾰족하게 돌출한 봉우리는 국내에는 흔치 않아서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산 동쪽은 온통 주암호 호반인데, 주암호를 일주하면서, 혹은 조계산 자락에서 모후산은 단연 빼어난 산세로 하늘을 찌른다. 높이와 산세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낮은 것은 인근에 있는 무등산과 조계산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어느날 모후산 일대 위성사진을 보다가 놀랍게도 정상까지 임도가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급경사의 첨봉에 어떻게 정상까지 길을 뚫었을까 의아했지만 정상의 레이더 시설 관리를 위해 길을 낸 것 같았다. 사진으로 볼 때 길은 너무나 선명했고 이 이사도 동감해 우리는 모후산 코스를 구상했다.
남쪽의 유마사를 기점으로 정상에 올랐다가 용문재에서 동복 방면으로 내려가 시계 방향으로 모후산을 크게 일주하는 여정이다. 거리는 45km 정도지만 정상 외에도 운암터널(고개), 남방재, 후곡리 고개, 막걸이재 등 넘어야 할 고개가 많고 겨울철이라 배터리 성능이 저하되는 것을 감안하면 배터리 절약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모후산(母后山)이라는 이름은 고려말인 136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이 왕비와 태후를 모시고 이곳까지 피난을 왔다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안아주는 산세라고 해서 모후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마사는 남쪽으로 길게 패인 계곡 최상류의 해발 300m 지점에 있는데 도로가 나기 전에는 정말 첩첩산중의 오지였을 것이다. 627년 중국에서 건너온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했다고 하니 시초는 중국 사찰이라고 해야 할까. 6·25 때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중건한 것이다.
627년 중국 도래인이 세웠다는 유마사. 하얀 강우레이더가 선 모후산 정상이 보인다 |
강우레이더 관리용 모노레일이 설치된 도마치재에서 서쪽 다산리로 내려서는 임도는 수풀에 길이 거의 막혔다. 사진은 그나마 상태가 좋은 하부 구간 |
대착오
유마사로 들어서면서 다시 보니 정상부의 주능선 경사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길을 낼 수 있는 지형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저런 능선을 따라 길을 냈을까 감탄과 의혹이 혼재하면서도 eMTB라면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유마사 아래에서 임도로 진입해 도마치재 방면으로 올라간다. 초반인데도 경사가 대단하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어시스트 2단에 두고 최대한 페달링으로 오른다. 대번에 진땀이 나고 다리가 팍팍해진다.
그런데 이게 뭔가! 힘들게 1.5km를 올랐건만 눈앞에 있는 건 정말 뜻밖에도 모노레일! 위성사진에서 봤던 길은 임도가 아니라 모노레일이었던 것이다. 정상에 있는 강우레이더를 관리하기 위해 직원들이 오르내리는 용도로 설치한 시설이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원래는 관광 모노레일까지 계획이 되었지만 화순군과 협의가 잘 안 돼 그 사업은 미정이라고 했다.
정상에 등대처럼 서 있는 강우레이더는 2009년 전남지역의 홍수 방지를 위해 설치되었고 모노레일은 도마치재에서 정상까지 3.2km를 연결한다. 강우레이더는 비가 형성되는 지상 4.5km 아래, 반경 100km 이내 지역을 관측할 수 있어 3시간 전에 전남지역 전역의 강우량을 정확히 예측해 홍수의 조기예보가 가능하다니 매우 유익한 시설이다. 하지만 이렇게 잘 만들어놓고 관광용으로 활용하지 않다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했는데 맥이 풀렸다. 지도와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도마치재에서 서쪽 다산리로 내려가는 희미한 임도의 흔적이 있었다. 모노레일 뒤편의 철문 너머로 보이는 길인데 수풀에 거의 막혀 겨울 아니면 통과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길로 가기로 했지만 사람이 다니지 않은 지 오래여서 길은 관목과 덤불에 가려 겨울에도 돌파가 쉽지 않다. 겨울이 아닌 때는 절대 진입하지 말기를 바란다. 애초에 도마치재를 넘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15번 국도로 남면을 돌아 동복 방면으로 북상하는 길을 추천한다. 하여튼 우리는 덤불을 뚫고 다산리로 내려섰다. 임도를 벗어나자 진창까지 나타나 자전거와 옷은 흙탕으로 엉망이 되었다.
김삿갓이 만년에 머물다 운명한 화순 동복면 구암리의 정씨 종가. 김삿갓은 화순 적벽과 인심 좋은 정씨 가문에 반해 동복에 오래 머물렀다 |
김삿갓 시비를 모아놓은 구암리 김삿갓 동산. 뒤편 산자락은 모후산 서쪽 줄기다 |
김삿갓 특유의 재치와 애상이 어우러진 시 ‘이별.’ ‘가련’을 운으로 맞춘 착상이 기발하다 |
김삿갓은 왜 여기서?
다산리에서 동복 방면으로 822번 지방도를 타고 가는 도중에 김삿갓 시비를 만났다. 오래전부터 김삿갓을 동경해온 내게 ‘화순 동복’은 그의 집터가 있는 영월 노루목과 함께 특별한 지명으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시비 안내판을 보자 반가움과 설렘이 더한다. 근처에 그의 흔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본명이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인 김삿갓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0세 이후에는 영월에서 살다 22세부터 죽을 때까지 전국을 떠돌았다. 겨우 100여년 전 사람이라 그의 행적과 시는 많이 남아 있고 영월의 집터와 묘소는 관광지로 관리되고 있다.
그의 극적인 인생은 잘 알려져 있지만 간략히 소개한다. 할아버지 김익순이 황해도 선천부사로 있을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이 들이닥치자 김익순은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고 마는데, 난이 진압된 후 역적과 싸우지 않고 투항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받는다. 다행히 멸문지화를 피했으나 남은 가족은 후과를 피하기 위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 강원도 영월의 산골에 숨어 살며 김익순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그러다 김삿갓이 20세 때 영월도호부 백일장에서 할아버지인지도 모르고 김익순을 통탄하는 글로 장원에 오른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조상을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평생 벼슬길을 마다하고 얼굴을 가리는 큰 삿갓을 쓴 채 주유천하 하게 되는 것이다. 가출 당시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고 방랑 중에도 몇 번 집에 들러 지내면서 두 아들을 두었다.
김삿갓은 전국을 떠돌면서 특유의 천재성과 재치로 수많은 시를 남겨 민간에 유명해졌다. 일대기를 보면 무작정 방랑한 것은 아니고 산천경계 좋은 곳이나 지인들을 찾아다니다 마음에 맞으면 장기간 한 곳에 머물기도 했다. 오가다 만난 여성과의 염문도 적지 않았다. 그야 그렇게 세상을 비웃으며 한평생 자유롭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영월 산골에서 평생 그를 기다리던 아내와 자식들에게는 최악의 아버지였다.
방랑시인이 선택한 최후의 길지
그런 그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 바로 화순 일대였다. 지금은 호수로 변했지만 동복호에 잠긴 적벽을 특히 좋아해 동복을 여러번 들렀고 총 6년간 머물렀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기탁한 구암리 압해 정씨 집안은 대대로 ‘내집에 오는 손님을 즐겨 맞으라’는 가훈을 내걸 정도로 과객에 인심이 후했다. 김삿갓도 이 집안의 가풍이 마음에 들고 적벽까지 좋아해서 이곳에 오래 머문 것으로 보인다.
1728년 이래 11대가 살아온 정씨의 고가는 김삿갓 유적지 조성으로 공원으로 꾸며졌다. 김삿갓 운명 당시에 살았던 정시룡(1837~1909) 선생은 김삿갓의 장례를 치러주고 시신은 집근처에 초분(草墳, 짚풀로 만든 임시 무덤)을 만들어 모셔두었다. 3년 뒤 김삿갓의 아들(익균)이 와서 영월로 시신을 옮겨가 지금의 노루목에 무덤을 만들었다.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이 마지막으로 고른 곳이라면, 국내 최고의 길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형, 풍경, 인심, 물산 등등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화순 동복, 곧 모후산 자락은 그런 곳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정씨 고가 옆의 작은 언덕은 김삿갓의 시비가 수십개 서 있는 ‘김삿갓 동산’으로 꾸며져 있다. 하나하나 돌아보느라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역시 김삿갓답게 당시 양반이라면 상상도 못할 반골기질의 시가 여러 수 보인다. 노골적인 성표현을 적당히 애둘러서 번역해 놓았지만 지금 보아도 낯 뜨거운 내용도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도 있어 빙그레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방랑자 그리고 김삿갓의 시다. 제목부터 ‘이별’이다. 그의 심사, 방랑자의 본색, 여성 편력 등등 모든 것이 이 28자에 들어 있다. 그리고의 그의 시적 천재성과 재치도.
이별(離別)
가련문전별가련(可憐門前別可憐)
가련행객우가련(可憐行客尤可憐)
가련막석가련거(可憐莫惜可憐去)
가련불망귀가련(可憐不忘歸可憐)
가련의 집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하게 떠나는 이 몸을 슬퍼마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모후산을 돌아 유마사로 복귀하는 마지막 고비, 막걸이재(해발 450m). 시원한 막걸리가 연신 떠오를 정도로 높고 힘든 고갯길이다 |
멧돼지는 돼지가 아니었다
동복과 주암댐을 거쳐 모후산 북쪽을 돌아 대광리에서 남방재로 들어섰다. 인적은 없고 숲은 짙은데 해까지 뉘엿하니 이 이사와 떨어져 혼자 가는 길이 왠지 섬뜩하다. 정말이지 모퉁이 저편에서 뭔가 나타날 것만 같은 직감이랄까.
고갯마루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20m 정도 떨어진 산자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검은 몸통이 선명한 멧돼지가 움직이는 게 아닌가. 덩치는 크지 않았지만 이 깊은 산 속에서 단 둘이 마주치니 순간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몸이 굳었다기보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녀석을 자극할까봐 사진 찍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녀석은 도망가지 않고 숲에 몸을 가린 채 그르렁 거렸다. “꿀꿀”이 아니라 고양이과 야수나 맹견에서 듣던 경고의 신음이었다. 역시 멧돼지는 돼지가 아니라 야수였다. 움직이면 공격해올까 싶어 꼼짝 않고 있으면서 만약 달려들면 어디로 피할지를 궁리했다. 자전거를 기대둔 나무 위로 올라가야겠다 싶었다.
사진 촬영 때문에 뒤처진 이 이사가 빨리 나타나기를 그렇게 기다린 적이 없다. 불과 2, 3분이 흘렀을까. 이 이사가 올라왔다.
“이사님! 조용히요. 바로 저기 멧돼지 있어요!”
“멧돼지요?”
이 이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자전거를 내 옆에 세우더니 오히려 멧돼지가 있는 산쪽으로 다가섰다.
“야~이 돼지 새끼야~!”
멧돼지보다 더 야수 같은 모습의 이 이사가 벽력같이 고함을 치자 멧돼지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새끼를 낳는 봄철 아니면 멧돼지는 지가 먼저 도망쳐요. 걱정 마세요!”
그참~. 역시 멧돼지는 돼지인가? 나는 좀 무색해졌다. 혼자서 수없이 이런 산길을 다녔지만 이렇게 멧돼지와 조우한 것은 처음이다. 역시 현대판 김삿갓은 나 같은 서생이 아니라 이 이사 같은 ‘마초’가 어울리는가 보다.
주암댐을 지나 남방재로 오르는 한적한 길. 잠시 후 남방재 정상에서 멧돼지와 조우하게 된다 |
고지대에는 잔설이 남아 있고 일부 구간은 질척해서 자전거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
[ 여정 ]
유마사를 기점으로 15번 국도→남면→김삿갓 동산→동복→주암댐→대광리→남방재→후곡리→막걸이재→유마사로 일주해도 좋지만(약 45km), 유마사→막걸이재→후곡리→주암호반길→월산리→복교리→유마사로 도는 한적한 호반길 코스(약 38km)도 멋지다. 하지만 여기까지 가서 김삿삿 동산만은 빼놓지 말자. 숙식은 주암댐 아래 광천리나 송광사 사하촌이 그나마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