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이/무반주 첼로 소나타 작품 8
엄정한 균형미에 충실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와 달리 이 곡은 헝가리 농민의 노래와 민속음악을 소재로 작곡된 작품이다. B음을 개방현으로 내기 위해 G현과 C현을 반음씩 낮게 조율해 독특한 효과를 내고 있다. 스타카토, 더블스톱, 아르페지오 등 첼로 기교의 모든 면을 구사하지만 그것이 과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효과로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더욱 인기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에 삽입되어 일약 유명해진 졸탄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소나타 8번 1악장입니다. 바흐의 규격화된 무반주 첼로모음곡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지만 코다이는 바흐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헝가리 민속음악을 결합하여 이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
Les Amants du Pont-Neuf(퐁네프의 연인들), 1991
de Leos Carax/1960/11/21
avec Juliette Binoche et Denis Lavant
일루미시나옹, 절망의 쓴맛이 흐르는 곳에도...
여행은 일상을 깨우는 일종의 진동 장치일까요. 얼마간의 진정 기간을 거치고도 여전히 그 파동의 끝을 느낍니다. 차로 달리며 바뀌는 풍경도 항상 신기했지만, 비행기로 번쩍 들어다 옮겨놓는 일은 현실의 무대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마치 어릴 적 동화나라에 푹 빠져 맛보던 황홀경이나 수정구슬 속 이야기 같은 경험의 잔상이 망막 안에 깊이 남아
아쉬운 몽환의 여진을 줍니다.
비행기... 그 인간 발명품의 힘과 능력에 대해 많이 감탄하면서 하늘에 오래 머무는 동안 피어오르는 구름과 대기의 조화, 낮게 엎드린 땅의 지형과 물의 흐름, 그리고 기대되는 새로운 도착지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슴이 망망대해처럼 풀어질 때, 문득 이 칼럼의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하바비여... 네 단어의 나열과 조합이 이루어낸 독특한 분위기 속에는 알 수 없게 묻어나는 하얀 고독, 가슴속을 회오리 치는 쓰라림 혹은 붉은 진물...
은빛 차가운 금속의 미소는 항상 허무한 것에 대한 방어였을까요.
손에 쥔 단 한 권의 여행 가이드북, 쟝 그리니에의 <섬>에는 啓示(계시, L'Illumination)라는 소제목 아래 이런 말들이 쓰여있었습니다. <플로티누스는 두 가지의 죽음을 구분한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죽음에 앞서 올 수 있는 철학적인 죽음이다... 현실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또 다른 세계와의 사이에 새로운 다리가 놓여진 것이다. 그리고 生과 死라는 저 영원한 雙의 소멸을, 그리하여 마침내 얻게 되는 啓示를 상상해 보라.>
<그가 부러워하는 대상도 아니고 혐오하는 대상도 아니다. 욕망의 대상도 증오의 대상도 아니지만 感知할 수 있는 대상, 마음에서 가까운 그 무엇도 아니고 數를 셀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恒久的이지 않은 것을 통해서 항구적이며 不在속에 존재하며 空속에 散在한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나는 그것을 만져 보기만 하면 된다. 비록 내가 그것에서 헤어난다 한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니 내가 헤어날 수 있기나 한가?>
세계는 주어진 구경거리이며 그 곳에서 느껴지는 가벼운 존재의 움직임을 느낄 뿐입니다. 나의 思考와 나의 욕망들은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그것(계시)에 비한다면 幻影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잠들면 나는 그것과 가까워지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려 합니다. 나는 돌이 우물 속 깊이 떨어지듯 그의 속으로 떨어집니다. - 그러기에 우리는 여행에서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념품, 사진, 여행기 등속의 무엇도 여행이 우리 안에 던져준 저 춤추며 다가온 빛의 잔치를 고스란히 붙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그 빛 속에 초라한 내 영혼의 색과 맛을 되새길 뿐입니다. 램브란트, 그는 일찌기 나름의 깊은 빛과 그늘을 창조하였습니다. 색이나 모양 모두가 빛 그 자체이며, 명암이야말로 생명의 흐름임을 파악했지요.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성의 움직임을 정확한 뎃상의 구도 속에 옮겨 논 대단한 기술의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빛이 항상 선하고 아름다운 것의 계시가 아니었듯이 랭보(Jean Arthur Rimbaud)의 산문시 <일루미시나옹,Illuminations)도 지옥 같은 참담함의 생활을 청산한 그가 37세에 관절염으로 사망하기까지
바라 본 어두운 계시의 글 아닐까요.
알렉스와 미셀의 <퐁네프 다리> 역시 모든 연인들이 만나고 또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서성거리던 여늬 다리들처럼 그 아래 물줄기를 무심히 흘러보내며 항상 거기에 있겠지요. 램브란트와 랭보가 혹은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세기를 넘어 와서, 그들의 누추한 사랑의 모습을 절망의 쓴맛이 넘치는 붓질로 그리고 쓴다 하더라도... 오늘 날 우리 앞에 흐르는 빛은 또 다른 새로운 계시의 의미를 던져줄 것입니다. 모든 물질의 표면에서처럼 우리의 감각에도 빛과 파도와 자연의 향기가 침투하며 서로 반응하고 풍화되어 남겨 논 흔적이 있습니다.
나는 때로 유희에 말려들 듯 덧없는 것에 시간을 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때로 사랑과 동의어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세상 어디에서나 되풀이되는 따스하고 어리석은 화해의 동작입니다. 더 커다란 명상이나 철학은 멀어지고 오직 찰라의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 위에 서리 처럼 내리는 밤, 싸느란 대리석의 난간을 쓰다듬으며 집으로 향합니다. 세피아 톤의 절망이 쓰디쓴 탕약처럼 흐르는 화면은 영화 속에 영원히 남겨져 있겠지만...
'01.02.02
다리를 건너서 푸른샘 씀
===================================================================================
부랑자들의 절망적인 사랑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타이틀에서부터 암울한 첼로음악과 함께 푸른 조명의 긴 지하 터널을 카메라가 빠져나갑니다. 거리에서 불뿜기 곡예를 하며 살아가는 도시의 부랑자 알렉스(드니 라방 분)는 빠리의 밤거리, 차도 위를 술에 취해 걷다가 거리에 쓰러집니다. 빡빡민 머리... 이마를 아스팔트바닥에 짓이기듯 문지르면서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지요. 무서운 속도로 차가 달려오고 그는 다리를 치어 길바닥에서 널브러져 있습니다. 부랑자 보호소로 실려가는 알렉스... 그곳에는 대도시 빠리의 밑바닥 인생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비틀린 인간의 추한 육체들, 불구, 남편에게 사정없이 얻어맞는 여자... 하층민들의 본원적인 추한 모습을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 제목에서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지요.
알렉스가 차에 치이는 것을 보았던 미셀(줄리에트 비노쉬 분)... 미셸은 실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적 불안감과 애인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집을 나와 거리를 방황하는 화가지요. 한쪽 시력이 희미해져가는 미셀... 그녀는 퐁네프다리에서 노숙하며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더러운 얼굴로 미친 듯이 웃습니다. 영화속의 그녀 모습에서 여성스런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알렉스가 부랑자보호소에서 나오고 퐁네프 다리에서 미셀과 그는 만납니다. 미셸을 돌보아주며 같이 지내게 된 알렉스는 미셸을 사랑하게 되고 잠시 보내는 즐거운 시간...
알렉스의 미셸에 대한 집착은 커져 갑니다.
알렉스는 사람들 앞에서 불을 뿜으며 곡예를 합니다. 불... 미셀에게 직접 말할 용기가 없는 알렉스의 강렬하고 시각적인 유일한 사랑의 표현... 혁명 200주년 기념일의 화려한 불꽃놀이에서 극치를 이루는 불의 이미지... 밤하늘의 불꽃 아래 두 사람의 격정적이고 과장된 동작의 춤은
그들의 처지에 대한 몸부림이지요.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현실에서 마냥 비틀거립니다. 미셸을 찾는 가족에게 미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렉스는 미셸을 찾는 포스터에 불을 지르고... 미셸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알렉스는 방화죄로 투옥됩니다. 세월이 흘러서 면회를 오는 미셸...
둘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면서 완성된 퐁네프 다리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합니다.
이 영화에서 까락스는 상처받은 영혼의 이미지와 렘브란트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램브란트(Rembrandt Van Rijn : 1606~1669)... 많은 초상화를 그린 네덜란드의 화가... 그는 자신의 여러가지 표정, 주름, 머리 장식, 피부의 질감 등을 미화시키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미(美)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듯 심지어는 노골적인 추(醜)의 모습도 그대로 화폭에 그려내었습니다. 퐁네프 다리도 매우 더럽고 거기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에게선 아름다움이란 찾아볼 수 없지요. 세상의 모든 절망을 한 몸에 지닌 듯 보이는 그들... 미(美)를 추구할 엄두도
못내고 삶 그 자체에도 미련을 갖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또한 이 영화는 절망적으로 추락한 밑바닥 인생의 남녀 사이의 연애담이라는 면에서 랭보적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선남선녀들의 러브스토리가 갖는 고정관념, 그 엘리뜨주의적인 관념을 파괴합니다. 이러한 소재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절망적인 알콜중독자 벤과
라스베가스의 거리의 여자 세라의 사랑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알렉스의 모습에서는 랭보의 단편적인 초상화가 엿보입니다. 고향 샤브로빌에서 빠리로 오는 기차에 무임승차 했다가 감옥에 가는 랭보... 마르세이유 시립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다리 하나를 절단 당한채 죽어가는 랭보의 모습은 바로 알렉스의 모습인 것이지요.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는 고통
화가였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걸인처럼 거리에서 살아가는 미쉘과 곡예사 알렉스가 파리 세느강의 9번째 다리인 퐁네프다리에서 만난다. 마음 속의 상처와 가난으로 더러운 모습을 한 이들은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다리와 거리에서 함께 지내던 알렉스는 미쉘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미쉘은 화가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실명 직전에 사랑했던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알렉스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럴 수록 알렉스는 더욱더 미쉘에게 집착을 하고 불을 지른 알렉스는 감옥에 들어간다. 거리에서 걸인처럼 생활하던 미쉘은 결국 눈 수술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후 크리스마스, 둘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재회한다.
소위 "누벨 이마주"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80년대 프랑스 영화를 이끌던 레오스 카락스의 세 번째 작품 <퐁네프의 연인들>의 남녀 주연으로는 남자 거지인 알렉스 역에 데니 라방이
여자 거지인 미셀르 역에는 줄리에트 비노세가 맡아 열연하였다.
주요 무대 및 배경은 지난 1989년에서 1991년 사이의 퐁네프와 세느 강 및 주변 여러 곳이다. 수용소를 탈출해 퐁네프에서 노숙하던 알렉스는 어느 날 다리 한 가운데서 잠든 미셀을 만나게 된다. 미셀은 사랑을 잃고 시력까지 서서히 잃어가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리를 헤매게 된다. 불을 뿜는 묘기의 스턴트맨 출신인 떠돌이 청년 알렉스와 실연과 실명 위기의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 여자 화가인 미셀이 퐁네프와 그 아래에 흐르는 세느강을 무대로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이별하는 등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무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두사람은 이 다리 위에서 지독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미셀은 화가로서 치명적인 실명 직전에 첫사랑인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거리로 나와 자신의 존재감을 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알렉스가 기대하는 만큼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진 못한다. 더욱더 알렉스는 미셀을 소유하려하고 기어코 방화로 인하여 알렉스는 감옥으로 가고 미셀은 눈 수술을 위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후 크리스마스에
둘은 퐁네프에서 재회한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는 역설적이게도 세느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다리 이름과 역사가 지닌 역설은 사랑의 의미에 대한 역설이기도 했다. 진로와 퇴로를 미리 모색해두는 허다한 사람들 사이에서, "잊는 법을 배우지 못해"라고 말하며 권총으로 손가락을 날리는 알렉스의 낡은 사랑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랑이라는 테두리를 보여준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엽기적이야"라고 수근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지을 땐 새로운 다리였지만, 어느새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고만 퐁네프의 운명처럼 새로움을 기약한 그 많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쉽게 군내 풍기는 사랑이 되고 마는가. 갈증을 호소하는 미셀과 불면증에 괴로워하는 알렉스. 누가 더 슬픈 항해자였을까? 해를 희망이고 잠을 안식이라 할 때, 휴식없이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둘의 비참함은 다리 위에서도 마침내 사랑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랑이란 뭘까? 이별과 재회, 과거와 미래, 혹은 삶과 죽음 사이를 끝없이 오가면서도 종내 강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자의 고단함. 아무리 행복한 미소를 지어도 미셀과 알렉스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 한 퐁네프의 모든 연인들은 슬프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황홀한 영상들이다. 폭죽을 그림물감처럼 써서 파리의 밤 하늘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 그림 아래에서 춤을 추고 센 강에서 훔친 모터보트로 수상스키를 타는 것, 지하도의 벽을 덮은 포스터에 불을 붙여 불타는 통로로 만들어버리는 것 등등이 "새로운 영상(nouvelle image)"을 추구하는 감독으로 불리는 레오스 카락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꿈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런 인상적인 장면들보다는 우리 돈으로 약 250억 원이나 들었다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다. 87년 레오 카락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꼭 퐁네프 다리 위의 실제적인 모습을 배경 삼아 찍겠다고 선언했다. 잠정 제작비는 3600만 프랑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중심가를 횡단하는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을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파리시 당국에서는 퐁네프 다리위에서의 촬영은 절대 허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 예술인들은 카락스로 하여금 퐁네프 다리위에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연대 서명을 하여 당국에 올렸고, 이 문제는 프랑스인들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결국 프랑스의 인기 시장인 쟈크 시락은 88년 여름 3주 동안 카락스에게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퐁네프 다리 위에서의 촬영은 시작되었고, 한쪽에서는 밤장면의 촬영을 위해 몽페리에 근처에 인공 세트(Decor)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락스는 어렵게 주어진 3주라는 시간 동안 단지 5분 분량 정도만을 촬영하는데 그쳤다. 제작자는 세트를 설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고, 카락스는 이 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실제 퐁네프 다리의 크기 및 다리에 사용된 돌의 원료와 똑같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다리 주변에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아주 까다로운 원칙으로부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퐁네프 다리의 세트는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8년 12월 처음으로 촬영은 중단되었다. 45분을 찍는데 무려 6000만 프랑이 초과되었던 것이다. 제작자는 파산했고, 더이상 제작비를 댈 수가 없었다. 1989년 7월 스위스의 부호 Van Buren의 제정 지원으로 촬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1800만 프랑을 추가 투자하고 6주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무수한 구설수와 루머들이 떠돌았지만 카락스는 이 부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소문은 더욱 불어났고, 한편에서는 퐁네프의 다리가 완성되지 못한 채 프랑스 영화 역사 속에 그냥 묻혀버리지 않을까 걱정의 소리들이 차츰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일년이 흘렀고, 문화성 장관 쟉끄 랑(Jacques Lang)은 세계의 부호들을 불러모아 지금까지 러쉬 필름을 보여주며 제작자를 물색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마지막 총제작자 <까미유 끌로델>의 제작자인기도 한 크리스티앙 푸쉬네가 7000만여 프랑을 재투자하여 1990년 8월 재개된 촬영은
7개월 동안 모든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1991년 3월, 제작기간 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났다. 총제작비 1억 9000만 프랑(한화로 25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된 끝에 이 <퐁네프의 연이들>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30여 만평 규모의 퐁네프의 다리를 재현한 세트는, 길이 100여 미터, 폭 15여 미터의 실제 퐁네프 다리를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원료는 모두 대리석이 사용되었으며, 수심의 깊이는 실제 세느강의 깊이와 똑같이 15~20여미터 깊이로 땅을 파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맨땅을 물로 채워 넣었다. 이 세트를 짓기 위해 20,000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티앙 마지 외에 설계사, 조각가, 연극무대 디자이너 등이 함께 참여하여 1년 7개월의 제작 기간과, 1억 9천여만 프랑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놀라는 것이 단순히 제작비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많은 돈을 들였음에도 그런 스펙터클 영화들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줄거리가 서사적인 아니며, 주요 등장인물도 세 명에 불과한데, 그나마 한 명은 중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보면 <퐁네프의 연인들>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소품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곧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들였단 말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스펙터클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할리우드 식의 스펙터클이라는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감독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는 점이 놀라는 것이다. 자본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예술 분야가 바로 영화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퐁네프의 연인들>은 볼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세느 강의 퐁네프에서 잠을 자는 부랑아 알렉스와 애인으로부터 버림받고 거리의 화가로 떠돌다가 퐁네프로 오게 된 미셀의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기만성과 끔찍한 소유욕이다. 부르주아 출신인 미셀이 거리에서 떠돌게 된 것은 사랑의 상실, 곧 첼리스트인 줄이앙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셀의 일기를 훔쳐보고 그녀가 줄리앙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알렉스가 미셀과 줄리앙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도 그녀를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미셀에 대한 알렉스의 소유욕은 너무나도 지독해서 미셀로 하여금 돈을 강에 빠뜨리게 하고 시치미를 떼거나, 미셀을 찾는 포스터에 불을 지르고, 급기야는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이 불에 타 죽게까지 한다. 줄리앙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해 그를 죽이려고 총까지 갖고 다니는 미셀이나,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미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렉스나 광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광적인 사람은 또한 기만적인데, 그것은 미셀과 알렉스가 소매치기를 한 돈으로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자는 알렉스에게 미셀은 사랑을 나누면 수면제가 없어도 잠을 잘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바닷가에서 둘이 몸을 섞은 뒤에, 알렉스는 미셀 몰래 수면제를 꺼낸다. 사랑이 불면증의 치료제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려니와, 미셀에게 뿌리 깊게 박인 "사랑은 만병 통치약"이라는 기이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또다른 고정관념 때문에 알렉은 미셀을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미셀 또한 알렉스를 기만하는데, 자기를 찾는 방송을 듣고 알렉스에게서 떠날 때 그녀는 알렉스에게 주는 술에 수면제를 탄다.
그러나 미셀의 기만은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어서 알렉스의 기만과는 다르다. 미셀은 화가에게는 생명 그 자체인 눈의 치료와 부르주아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알렉스를 속인다. 알렉스가 미셀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을 때, 그 또한 사랑의 상실로 인해 거리의 생활을 하고 있는 늙은 한스가 알렉스와 미셀은 속한 세계가 다르므로 둘의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사랑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렉스에 대한 미셀의 감정이 거짓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미셀이 다리의 벽에 알렉스를 사랑한 것은 거짓이었다고 써놓고 떠난 것은 또하나의 기만으로 알렉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알렉스의 상실감은 미셀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미셀에 대한 알렉스의 광적인 집착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의 소유욕은 그만큼 강하다. 그러나 미셀의 집착은 알렉스보다는 덜해서 줄리앙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 죽이지는 못한다. 미셀에게 사랑이 열병이었다면 알렉스에게는 생명이었다. 알렉스는 총을 쏘아 자신의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마음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끝났어야만 했다. 알렉스가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눈을 고친 미셀이 알렉스를 면회하고, 알렉스가 출옥한 뒤에 수리가 끝난 퐁네프에서 다시 만나 강에 빠졌다가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어 함께 떠난다는 해피엔딩은 불필요한 덧붙임이며, 관객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꿈을 꾸었고, 레오스 카락스는 그 꿈을 통해 사랑이라는 광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했지만, 우리가 본 것은 씁쓸한 환상일 뿐이었다. 심하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가 본 환상이 결국 우리의 초상이기에 더욱 씁쓸한 생각이
뇌리에 남을 뿐이다.
1. 1992년 European Film Awards Best Actress (Juliette Binoche), Best Cinematographer (Jean-Yves Escoffier), Best Editor (Nelly Quettier)를 수상하였다.
2. 국내 상영시 상영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5분여 삭제되었다. 사회 저변계급의 생활을 솔직하게 살리려한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는데 알렉스가 경찰보호소로 이송된 전반부이다.
3. 첫장면에 시작된 흑백화면을 기억하는 분은 얼마 없을 것이다. 사실 5분 가량되는 그 장면은 극장상영시는 잠시 동안만 제시되었고, 행려들의 실상을 담은 처절한 모습은 삭제되었다. 그 일부 장면들이 비디오판에 들어있다. 과도한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레오스 카락스가 굳이 그 장면을 영화 시작 에 넣은 것은 뒤에 컬러로 된 장면이 시작되면서 대비적인 것을 통해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비디오를 볼 수밖에 없다. 흑백의 현실 세계와 컬러의 신화적 세계. 이것은(퐁네프의 연인들)의 원래 의도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해답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