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의 검은 색 리본과 완장은 일제의 잔재인가”
글쓴이 : 한국장례신문 칼럼
ㅡ손남숙 (사)예지원 원장
올해,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강점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지도 7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서 일제의 잔재라는 말이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 올해의 의미를 기념하여
각계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다양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세계 어느 국가나 민족도 모두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고정불변이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다양한 방법의 교류를 통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한다.
우리가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 시기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전 세계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일본의 간섭과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1910년부터는 본격적인 지배체제 하에 들어가 35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따라서 그 시기의 변화는 일제의 잔재라는 잣대로 저울질되고 인정받지 못하여
유구한 문화전통이 현대와 닿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상장례 문화 중에서 일제의 잔재로 가장 많은 지적과 논란이 있는 부분은
삼베 수의(壽衣)와 영정의 검은색 리본, 완장(腕章)인데
이 중에서 검은색 리본과 완장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정착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상을 당한 상주와 가족이 입는 상복과 상장에 대해서는 현행 「건전가정의례준칙」에
“상복은 따로 마련하지 아니하되,
한복일 경우에는 소색으로, 양복일 경우에는 검은색으로 하고,
가슴에 상장(喪章)을 달거나 두건을 쓴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평상복으로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ㅡ소색 (素色); 무색의 상징색으로 장례 때 주로 입는 소복의 색.
특별히 염색을 한 색이 아닌 무명이나 삼베의 고유색 을 말한다.ㅡ
그러나 현행 상복으로는 흰색 한복보다는 검정색 한복을 더 많이 입는다.
그리고 가슴에 상장을 달기 보다는 완장을 쓰는 경우가 더 많고
건전 가정의례준칙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여성의 경우 흰색 천을 나비모양으로 접어서 머리에 꽂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전통상복을 입기도 하고,
삼베로 만든 건과 행전을 두르는 경우도 있다.
이 중 일제의 잔재로 지적 받는 부분이 검정색과 완장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상례에는 흰색을 쓰고 길한 일에 검은색을 써 왔다.
또한 완장은 우리 복식에는 없던 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장례에 있어서 검은색의 사용, 완장등을 일제의 잔재로 볼 것인가는
조선시대 후기 우리 옷의 변화, 양복의 수용과정을 살펴본 후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18세기 말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고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은 물론 미국, 러시아, 프랑스등
유렵 국가와의 교류로 인해 의생활에도 변화를 요구하는 기류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기류를 바탕으로 고종은
우리옷의 변화를 도모하는데 1884년 갑신의제 개혁에서는
복식제도의 간소화와 관리의 예복을 흑단령으로 하도록 한다.
고종의 이러한 의제 개혁에 반대하는 상소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올라왔으나
고종은 의제개혁의 필요성을 들어 설득하기도 하고
파직의 법을 시행하기도 하면서 개혁을 밀고 나갔다.
만일 혹 위로 조종(祖宗)의 법을 어기고 아래로 평민의 심정을 언짢게 한다면
내가 비록 지식이 얕고 사리에 어둡지만 어찌 이렇게 단연히 행하겠는가? ..............
지금 나라의 형세가 문약(文弱)하고 군사 제도가 해이하여
모두 구차하게 편안히 지낼 생각을 품고 모든 일을 하기 싫어한 결과
위의 명령이 아래에서 시행되지 않고 아래의 사정이 위에 보고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에 어찌 옛 습관에 물젖어 나태하게 지내면서 진흥시킬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이해하라."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친 의제 개혁에서는
관리와 백성 모두 검은색 두루마기로 통일하도록 하면서
더욱 거친 반대에 부딪치지만 의제개혁을 계속해 나간다.
반대의 이유는 반상의 구분을 없애는 것에 대한 부당함이 대부분이지만
신분의 구분이 철폐되고 백성을 존중하는 기류를 거스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의제개혁에 대한 내부 고시의 내용이다.
"개국(開國) 504년 칙령(勅令) 제67호로
이제부터 공사(公私) 예복(禮服) 중에서 답호(褡護)를 없애고
대궐로 들어 올 때에는 모(帽), 화(靴), 사대(絲帶)를 하며
주의(周衣)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가 관리와 백성을 똑같이 보는,
넓게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신성한 덕으로,
의복 제도에서조차 관리와 백성들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며
또한 검은색으로 한 것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신성한 뜻이다.
우리 대군주 폐하의 신하와 백성 되는 모든 사람들은
훌륭한 뜻을 받들어 관리와 백성이 꼭같은 의복 제도를 쓸 뿐만 아니라
가슴 속에 충군 애국하는 마음이 충만하고
관리와 백성 사이의 차별이 없도록 하기를 바란다."
육군 복장규칙과 경무사 이하의 복제규칙이 1895년 4월에 반포되는데
이 때 제정된 육군과 경무사 이하의 옷이 서양복식이다.
그리고 8월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이로 말미암아 육군복장과 경무사 이하 복장의 상장(喪章)제도가 정해지는데
그 내용이 기(旗), 검(劍)의 손잡이,
팔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검은색 완장〕이다.
그리고 1900년에 대례복이 서양복식으로 바뀌면서
그에 따른 상장제도가 1905년에 제정 공표된다.
이러한 표상식은 영국이나 러시아 미국에도 있었고
일본도 양복을 입었을 때는 그와 같은 표상식을 했다.
천막에 검은 천을 드리우는 것이라든가 팔에 검은색 완장을 한 모습은
1865년 미국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로서 양복에 따른 제도임을 알 수 있다.
1884년에 시작된 우리의 의제개혁은 1910년 경술국치일 보다 앞이기는 하지만
이미 1876년 제물포 조약부터 일본의 간섭을 받아온 터라 일본의 영향이 있었거나
아니면 우리가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식(表喪式)을 참고했을 것이라고는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입고 있는 서양복장은 어떻게 할 것이며 단발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종의 장례식과 김구 선생의 모친상 사진을 보면 완장을 착용한 모습이 있다.
고종의 장례행렬은 일본식과 우리 전통식의 2중으로 진행되었는데
아래 사진은 우리 전통식의 행렬로서 여기에 검은 색 완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검은색 완장은 일본에 의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김구선생은 모친상에 직접 완장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때는 의례준칙이 반포된 이후로서 완장이 일본에 의한 강요나 의도된 정책이 아니라
조선 시대 후기 의복제도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미 실생활에서 수용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지금은 영정이나 빈소 장식에는 검은 리본으로 장식하는 경우는 있으나
완장의 경우 검은색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1970년대에 소색 또는 흰색이 나오면서 점차 검정색은 없어지고
소색이나 흰색에 검은 줄이 하나에서 셋까지 있는 상황인데
완장이 일제의 잔재라는 끊임없는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널리 보급된 이유는
완장이 상주임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장이 서양의 영향인지 일제의 잔재인지를 떠나
완장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이 부모에 대한 은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슬픔등
우리가 상례를 통해 이어온 핵심 가치를 수용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수의는 가족에게 국한된 일이지만
상장은 상을 당한 가족, 조문객, 그리고 공동체 사회에서
서로의 소통과 교감이 있어야 함을 생각할 때
현대사회의 삶의 양식, 품격 그 상장례의 의미 등을 바탕으로 한 제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하겠다.
"개국(開國) 504년 칙령(勅令) 제67호로
이제부터 공사(公私) 예복(禮服) 중에서
답호(褡護)를 없애고 대궐로 들어 올 때에는
모(帽), 화(靴), 사대(絲帶)를 하며
주의(周衣)는 관리와 백성들이 똑같이 검은색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가
관리와 백성을 똑같이 보는, 넓게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신성한 덕으로,
의복 제도에서조차 관리와 백성들의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며
또한 검은색으로 한 것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한 신성한 뜻이다.
우리 대군주 폐하의 신하와 백성 되는 모든 사람들은
훌륭한 뜻을 받들어 관리와 백성이 꼭같은 의복 제도를 쓸 뿐만 아니라
가슴 속에 충군 애국하는 마음이 충만하고 관리와 백성 사이의 차별이 없도록 하기를 바란다."
육군 복장규칙과 경무사 이하의 복제규칙이 1895년 4월에 반포되는데
이 때 제정된 육군과 경무사 이하의 옷이 서양복식이다.
그리고 8월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이로 말미암아 육군복장과 경무사 이하 복장의 상장(喪章)제도가 정해지는데
그 내용이 기(旗), 검(劍)의 손잡이, 팔에 검은 천을 두르는 것〔검은색 완장〕이다.
그리고 1900년에 대례복이 서양복식으로 바뀌면서 그에 따른 상장제도가 1905년에 제정 공표된다.
이러한 표상식은 영국이나 러시아 미국에도 있었고 일본도 양복을 입었을 때는 그와 같은 표상식을 했다.
천막에 검은 천을 드리우는 것이라든가 팔에 검은색 완장을 한 모습은
1865년 미국 링컨 대통령의 장례식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로서 양복에 따른 제도임을 알 수 있다.
1884년에 시작된 우리의 의제개혁은 1910년 경술국치일 보다 앞이기는 하지만
이미 1876년 제물포 조약부터 일본의 간섭을 받아온 터라
일본의 영향이 있었거나 아니면 우리가 일본의 근대화된 표상식(表喪式)을 참고했을 것이라고는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을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입고 있는 서양복장은 어떻게 할 것이며 단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래 고종의 장례식과 김구 선생의 모친상 사진을 보면 완장을 착용한 모습이 있다.
고종의 장례행렬은 일본식과 우리 전통식의 2중으로 진행되었는데
아래 사진은 우리 전통식의 행렬로서 여기에 검은 색 완장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검은색 완장은 일본에 의한 것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김구선생은 모친상에 직접 완장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때는 의례준칙이 반포된 이후로서 완장이 일본에 의한 강요나 의도된 정책이 아니라
조선 시대 후기 의복제도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이미 실생활에서 수용된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