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성전 정화는 몇 번 있었나?-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공관복음(마21:12~17, 막 11:15~19, 눅 19:45~48)과 요한복음에(요 2:13~22)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사 내용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성전 정화가 한 번 있었는지, 혹은 두 번 있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견해는 두 곳에 사용된 용어가 현격히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공관복음 및 요한복음에만 있는 용어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참고. 톰슨Ⅲ 성경주석).
공관복음에만 있는 표현 |
매매하는 사람 |
사 56:7, 렘 7:11의 인용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렘 7:11) |
강도의 소굴 |
나귀 타고 입성하신 후의 사건임 |
‘호산나’ 찬양을 유대인들이 금지시키고자 함(마태, 누가) |
요한복음에만 있는 표현 |
소와 양 |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심 |
장사하는 집 |
나귀 타고 입성하신 사건을 따로 다룸(12:12~19) |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하고 예수께서 성전을 사흘 동안 일으키신다는 말씀을 하심 |
성전 정화가 한 번 있었다고 보는 견해는, 요한이 상징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 사건을 앞에 배치했을 거라는 것이다. ‘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들을 보면 약 2, 3년 뒤에 또 한 차례의 성전 정화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이지만, 요한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 일어난 사건들의 좀 더 깊은 의미들이었으며, 그 의미들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의 자료를 배치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도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한 번 있었다는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본다. 요한복음이 복음서 중에서 기록 연대가 가장 늦고, 내용 면에서도 공관복음서를 보완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해석을 풍부하게 제공하려는 목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공관복음에만 있는 용어와 요한복음에만 있는 용어들이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는 오히려 유사성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라는 것,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과 종교 지도자들의 거부반응, 그리고 백성들의 환대 등의 내용은 동일한 사건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이 사건이 요세푸스가 말한 대로 주후 27년에 있었다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다고 말한 요한의 주장이 신빙성을 얻게 된다(통상적으로 예수님은 주전 4년에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전 정화 사건 기사를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마지막 주간에 배치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배치한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승리한 메시아의 영광으로 성전에 들어가셨으며, 성전에서 사 56:7과 렘 7:11을 인용하여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신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전을 두 차례 저주하였다(렘 7:1~15, 26:2~6).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렘 26:6)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면서 큰 소동이 일어나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선동하는 장면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성전 뜰에서 말씀을 외침, 예레미야와 같은 내용을 예언한 우리야를 실제로 죽임. 참고. 렘 26장 전체).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에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심으로 백성들은 따랐으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 짓는다. 요한복음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로 공관복음에서와 같은 구약을 인용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시 69:9의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의 말씀을 추가한다. 그리고 적대적인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일(성전 정화)을 하는 근거로서 표적을 요구할 때,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너희가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말씀으로 응수하셨음을 전한다. 물론 예수님의 진의를 당시에는 제자들도, 유대인들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성전- 하나님의 집, 아버지의 집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솔로몬이 거의 천 년 (주전 949년) 전에 동일한 위치에 첫 번째 성전을 세웠지만,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다(왕하 25장). 이 성전은 주전 515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재건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전은 다시 퇴락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고대사, 15.380)에 의하면, 헤롯 대왕의 통치 18년째(BC 19년경)에 성전 재건(확장)에 착수하였고, 헤롯 아그립바의 통치 때(AD 63년)까지 완공하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도 공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음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성전을 46년 동안에 지었다고 말한 것을 토대로 볼 때, AD 27년에 성전 정화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집’으로 여겼다. 예수님은 유년 시절에도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의식이 있었다(눅 2:49).
성전을 청결하게 하심
유월절 의식은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졌다.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순례를 하게 되어 있었다(신 16:16). 이것은 일주일간 계속되는 축제였다. 유월절 의식에 사용되는 제물용 짐승 매매가 성전을 올라가는 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보통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예루살렘 성 동쪽 시장 지역에서 거래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 일을 이방인의 뜰 안까지 끌어들여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거래를 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성전 안의 이방인의 뜰은 제물용 짐승들과 사람들로 북적여서 외국에서 온 예배자들이 기도하기도 어려운 환경이 되고 말았다. 성전에서 판매되는 제사용 짐승은 다른 곳보다 훨씬 비쌌다. 해마다 유대인 남자들이 내야 하는 성전세는 (참고. 마 17:27)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이교도들의 화폐(드라크마)를 받을 수 없어서 유대인의 화폐인 세겔로 환전해서 내야 했다. 환전상들은 외국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환율을 높게 매겨 엄청난 이득을 올렸다. 이처럼 예수님 당시에 유월절은 영적인 실체가 결여된 형식적인 절기가 되어버렸고, 더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관습으로 전락했다. 요한이 “유대인의 유월절”(2:13)이라고 한 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이미 분리해 나왔기 때문에 기독교와는 무관한 절기임을 말하는 것이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를 몰랐던 독자들을 위해서 유대 지방에서 유월절을 지켰음을 알려 주려는 목적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성전 청결은 유월절 기간에 의미심장하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유월절 기간은 모든 유대인들이 자기 집에서 누룩을 일체 제거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교절 기간 동안은 누룩 없는 빵을 만들었고, 이스라엘 집에서도 누룩이 발견되어서는 안 되었다(출 12:17~20). 예수께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들어오셨을 때,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겠는가? 예수께서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돈과 상을 엎으신 일을 두고 일각에서는 기독교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버린 유대인들의 신앙 행태를 되돌리고, 성전을 본래의 목적대로 회복시켜야 하는 아들로서의 본분을 염두에 둔다면, 성전을 청소하는 것은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누군가는 나서서 이방인의 뜰을 깨끗하게 비워내야 하는 정당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신 것은 짐승들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가 되기 때문이지, 폭력을 휘두르는 무기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성전 경비대가 금하고 있었음을 감안해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환전상들의 돈과 상을 엎으신 것은 그 일을 멈추게 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는 ‘비둘기를 여기서 가져가라’고 말씀하시고, 비둘기를 날려 보내거나 하지 않으신 것을 보아서도 예수님의 행위는 폭력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죄악을 미워하시고 분노하셨지만 흔히 알려진 바대로 폭력을 행사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말 3:1~4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었다.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
예수님은 더럽혀진 이방인의 뜰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경건한 이방인들이 모처럼 예배와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게 되었다. 이 부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 준다.
사 56:6~7.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다음 회에 계속...
<참고 도서>
강병도․전봉준 편집책임, 『톰슨Ⅲ 성경주석』(서울: 기독지혜사, 2017).
브루스 B. 바톤 외, 그랜트 오스본 책임편집, 전광규 역, 『LAB 주석시리즈 요한복음』(서울: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05).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출판부, 김진운 외 4명 역, 『개혁주의 스터디 바이블』(서울: 부흥과개혁사, 2021).
존 월튼 외, 『IVP 성경배경주석』(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21).
J. A. 모티어 이외, 김재영․황영철 역, 『IVP 성경주석 복음서․사도행전』(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9).
첫댓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복음의 이름이 암시하듯 view point가 서로 조금 다르군요. 기다리던 좋은 포스팅입니다. 올리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공감합니다33
코람데오님 덕분에 저도 성경을 읽고 칼빈주석을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님의 포스팅과 더불어 함께 보면 좋을 내용, <칼빈주석> 마21:10-22 중에서 아래 내용을 찾아 타붙하여 올립니다.
<칼빈주석> 마21:10-22 중에서
한편,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사건에 관한 기사에 있어서는 마가가 마태 및 누가와 더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고 보도하는 반면에, 마가는 바로 그날에는 그리스도께서 성전구석구석을 둘러보기만 하셨을 뿐이고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고 보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가 처음에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 일을 원래의 위치가 아닌 곳에 끼워 넣은 것이라고 보면, 이러한 차이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마가는 첫 날에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뭔가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실 목적이 없으셨다면, 굳이 이렇게 성전 구석구석을 유심히 둘러보실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에도 종종 성전을 찾으셨던 까닭에, 성전이 그에게 새롭고 신기해서 그가 성전을 유심히 둘러보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마가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는 말씀을 거기에 즉시 덧붙였어야 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 밖으로 나가셨다고 말한 후에, 꼭 기록해야 할 내용을 빠뜨린 것이 생각나서, 그 내용을 나중에 원래의 위치가 아닌 곳에 끼워 넣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기사와 관련해서도 다른 두 복음서 기자들은 시간적인 순서를 무시한 반면에, 마가는 그 시간적인 순서를 지켜서 보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마태와 누가는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을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들이 일어난 날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은 까닭에, 그들의 글들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나누어서 이틀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첫 번째 견해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세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이 일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셨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쨌든 복음서 기자들이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구체적인 때에 대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이 기사와 관련해서 복음서 기자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차이 또는 다양성이 결코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마21:10-22
@장코뱅 칼빈의 마태복음 주석을 같이 보니 새삼 칼빈이 성경을 속속들이 잘 파헤쳐서 알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되네요. 감사합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22
코람데오님의 포스팅과 칼빈주석의 내용을 함께 보니 저의 성경을 보는 안목이 깊어졌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