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는 삶의 동반자다. 피 끓는 청춘과 늙음을 함께해서 그렇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해서 그렇다. 앞서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지만 길게 보면 자기발전의 디딤돌이 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오늘은 현직에 있을 때 부산의 또래들을 중심으로 발족한 친목회의 정기모임 일이다. 당초 20명으로 시작했으나 고인이 되거나 자진 탈퇴한 회원이 있어 현재는 18명이다. 국가 공무원의 특성상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 평소 참석률이 좋지 않다. 그래서 신임 총무가 참석이 어려운 회원을 배려하자며, 은퇴해서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내려간 회원을 1박2일 일정으로 직접 찾아가는 길이다.
지하철 2호선 냉정역 앞에서 차를 렌트해 온 총무까지 일곱 명이 길을 나선다. 휴게소 2곳을 들르는 외에는 4시간여를 숨 가쁘게 달려 고창의 풍천장어구이 집에 도착한다. 부안 사는 절친한 친구가 중후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다. 무려 4년 만의 만남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코끝이 찡해온다. 모두 들 둘러앉아 민물 장어와 복분자주로 쌓였던 회포를 풀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허리띠를 느슨히 하고 찾아 나선 곳은, 철은 지났지만, 동백꽃이 유명한 천년 고찰 선운사,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을 따라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을 들렀다, 오니 취중이라 땀이 비 오듯 한다. 선걸음에 부안군청으로 이동하니 진주에서 기관장으로 근무하는 회원이 와 있다. 합천 집안 결혼식과 고교 동창회에 들렸다 온다고 늦었단다. 이렇게 모이기로 한 아홉 명의 성원이 이루어진다. 정회원의 딱 반이 모여 정식 모임으로 인정됨과 동시에, 총무가 경비 지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순간이다. 아무도 항의할 회원은 없겠지만,
뒤에 합류한 회원들의 차는 휴일이라 텅 빈 부안군청 앞 주차장에 세워뒀다. 렌트한 15인승 승합차만 움직여 인근의 어패류 시장에서 이것저것을 사서 오늘 밤을 지낼 마을회관으로 이동한다. 산골 입구에 자리한 마을회관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번듯했다. 화장실이 딸린 방 두 칸에 20명도 너끈히 누울 수 있는 넓은 거실, 잘 갖추어진 주방기기들까지, 모두 들 대만족이다.
잠시 짐 정리를 하고 준비해 간 횟감으로 술판을 벌인다. 지나온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바람을 쐬러 잠시 밖으로 나섰다. 도시에서는 사라진 세계를 찾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거의 11시가 다 된 시간에 옛날 고스톱 멤버들이 모처럼 작당을 하고, 나와 회장은 바둑을 둔다. 알파고의 영향으로 훈수 두는 관중까지 있다. 새벽녘이 다 돼서야 남자들의 수다도 끝이 났다.
거실과 방에서 대략 선잠을 자고 6시쯤 기상했다. 어제 사 온 대합으로 국을 끓여 해장을 한 후, 차에 짐을 싣고 바로 지척에 있는 내변산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아침 산보로는 적당한 거리를 걸어 직소호, 직소폭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물안개가 신비롭게 피어오른다. 산에서 내려와 차로 장소를 옮겨 바지락죽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겹겹이 층을 이룬 채석강과 넓게 펼쳐진 새만금, 거대한 풍력 발전기를 보고 난 뒤, 친구의 새 보금자리를 보러 갔다. 아담한 2층 주택, 앞면의 텃밭에는 갖가지 채소들이 심어져있고, 뒤뜰의 오디나무에는 검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전원생활(田園生活)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다시 내소사로 이동하여 건축양식이 정교하다는 대웅전을 둘러보고 내려오다가 목이 칼칼하여 주차장 인근의 식당에 잠시 들렀다. 막걸리를 앞에 놓고 회장이 건배사를 하겠다고 기세 좋게 일어선다.
“자, 잔을 높이 들고 내가 당나귀 하면 따라서 ‘당나귀’ 하시오.”
우리는 무슨 특별한 건배사를 할 줄 알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다가, “에이”하고 김빠진 소리로 마지못해 ‘당나귀’ 한다.
“이거 뜻풀이 한번 해보쇼.”
오 회장께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답을 요구한다.
누가 볼멘 톤으로 핀잔을 준다.
“그거 당신과 나와의 귀중한 만남을 위하여 아니오.” 회장이 그 보란 듯, 약간 술이 취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새 버전을 소개한다.
“당신과 나와의 귀신도 모르는 만남을 위하여!” 모두들 한 방 먹은 표정이다.
“그럼 남자끼리 방금 한 ‘당나귀’는 뭔데.”
“뭐긴 뭐겠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지.”
이로써 손잡기 예술(춤)의 고수인 오 회장 덕분에 여행의 피로가 싹 날아가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기가 빠져가는 중 늙은이들의 마음에 바람 불어 넣는 소리가 난무했다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소고기 비빔밥 집에서 육회를 넣은 돌솥비빔밥을 고별식(告別式) 삼아 한 그릇씩 뚝딱했다. 다시 차를 주차해 놓은 부안군청으로 이동하여 친구와 작별을 고한다. 언제 만날지 기약이 없다. 틀에 갇힌 생활을 하다가 회원들 여행 뒷바라지로 신경을 쓴 탓인지 하루 새 얼굴이 핼쑥하다.
이별을 아쉬우하며, 문학도로서 친구에게 시 한 수를 남긴다.
〈부안 기행〉
부안의 밤하늘엔 / 어릴 적 내 친구 / 북두칠성이 떠 있고 / 그 밑 마을회관 거실에는 / 30년 지기들이 / 도란도란 술잔을 기울인다.// 힘센 풍천장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 내변산 직소폭포 선녀탕 / 채석 강, 새만금 내소사 당나귀// 친구야 언제 또 이렇게 만나 / 옛이야기 하며 술잔을 기울일꼬.
우리 차와 진주 회원의 차를 움직여 부안을 떠나간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마이산 휴개소에서 잠시 만났다가, 산청휴게소에서 다시 만나 진주 회원과도 헤어진다.
이제 마지막 갈 곳, 부산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각자 집으로 향한다. 우리 역마살 많은 총무 덕분에 모처럼 친구의 건재함을 보고는 왔지만 정말 피곤하다. 나도 그새 많이 늙은 모양이다.
길벗들이여 건강하게 영원히 함께 사세나. 다시 만날 때 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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