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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반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류성룡을 이해할 수 있다.
류성룡은 의성출신으로 동인이지만 정유재란 칠천량해전 이후부터 남인을 대변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칠천량해전 패전이후 시기부터 동인 주리학파에서 분열하여 남인 대변]
동인 주리학파의 거두 이산해, 김성주, 류성룡 등은 김성일에게 서인이었던 조선 통신사 장수출신
황윤길의 말에 반대급부적으로 보고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호남 동부지역은 서인, 동인 혼재지역 황윤길은 서인)
류성룡은 동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할때 여기에 끼지않고 남인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남인으로 활동한 김성일이,사형선고를 받기전 구명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가
경상우도 초유사로 일하게 하여 목숨을 구명해 주었다.
김성일은 나주목사로 오래있으면서 류성룡과함께 남인을 대변하는 당파색을 가졌다.
진주성 제2차전투에 들어가서 병사한다.
김성일 자신도 진주성 제1차전투에서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양으로 돌아간다.
그후 다시 쫓겨나듯이 하여 경상우도 초유사로 내려가면서 죽음을 감지하였다.
정유재란후 정인홍은 동인에서 대북,소북으로 나뉠때 대북영수가 되어
이이첨을 휘하로 두며 정권을 잡고 물러나서도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정유재란 이후는 동인중 가야파에 해당하는 대북파(합천,산청,고령,거창,성주)가
정권을 잡고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몰락하게 된다.
호남동부지역은 가야파로 동인세력의 중심지였다.
영남의 가야파가 힘을 못쓰던 시기에 가야파를 대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며 영호남 동인을 대변하던
당파였으나,정여립의 기축옥사로 2천여명이 희생되면서 호남 동인세력은 힘을 잃었다.
남명 조식학파로 대변되는 정인홍,곽재우등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
김면,정인홍,곽재우,정기룡,이달등 경상도를 대표하는 의병들은 진주성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외곽에서 피리를 불며 군세가 많은것으로 위장하여 심리전만 펼친다.
그동안 동인은 양광도를 중심으로하는 동인 주리학파가 동인권력을 독식해 왔기 때문에,
호남동부지역과 영남지방(낙동강 서안)의 권익이 소외되어 권익을 대변하고자 정여립이 진안으로 들어가
대동계를 만드면서,합천의 조식학파와 연합하여 동인권력이 정여립학파,조식학파연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양광도 주리학파의 앞잡이 역활을 하는 황해도 안악군수 이축,재령군수 박충간의 역모고변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 의해 올라오면서 와해되고,동인권력은 양광도 이산해,류성룡파가 다시 독차지한다.
정여립(부산정씨)의 대동계는 1587년 조선을 침공하기위해 정찰나왔던 지리정탐대를
서인 주기학파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을받고 토벌하여, 동인권력이 정여립,조식학파 연합으로
급속히 이전되는 시기였다.
조식은 합천에서 산청으로 옮겨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정여립에게 보내 가르침을 받도록하였다.
정여립의 기축옥사로 호남동인,영남 낙동강서안 경상우도 동인 1천여명이 희생당하고
1천여명이 유배또는 삭탈관직 당한다.
진주성 제2차전투때도 선조는 경상도 의병을 소집하였으나
진주성 전투를 치루라는 명령을 모두 거부하고 이탈한다.
그 덕분에 전주성,남원성의 전라도 병력이 진주성으로 들어가 제1,2차전을 치루는 것이다.
동인세력의 기축옥사 앙금이 왜란에 까지 미친것이다.
진주성 1차전투에 경상도 의병들이 들어가지 않자,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이 다시 내려가 전라도 병력을 진주성안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진주성 제2차전에서도 경상도 의병들은 성밖에서 심리전도 펼치지 않고
왜군의 10만 대군에 놀라 모두 이탈해서 사라졌다.
관군도 모두 도망가고 전라도 출신 김해부사 이종인에 의해서
진주목사 서예원등 일부군수, 현감, 현령 등이 잡혀 전투에 참여한다.
이때 잡힌 거제 현령 김준민은 체념하고 돌아서서 가장 먼저 전사하였다.
김성일이 삼장사인 황진, 최경회, 김천일을 입에 마르도록 칭송하며
삼장사시를 남기고 진주성 제2차전투 2개월을 앞두고 죽음을 맞는다.
김성일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어서 체념하고 책임질 명분을 찾아
2차전투가 벌어지기전까지 진주성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류성룡은 남인을 대변하였지만 전라도 관의병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좋지 않게 평하였다.
특히 진주 제2차전투를 이끌었던 김천일을 평할때,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패한 장수라고 격하시켜 놓았다.
모두 달아난 관의병들 중에 내놓으라하는 영남 의병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 유학자 출신들이 이끄는 병력들이라 유약했으며,
감히 왜군의 대군을 상대로 진주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1,2차전 모두 거부하였고 그자리로 전라도 의병들이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서에 가장 맹활약을 펼친 삼장사 이름 하나없다.
이치, 웅치, 슬치전투에서 패주하는 왜군을 전라 의병들이 쫓아가 패퇴시키면서
동복현감 황진의 전주 안덕원전투,
김제군수 정담(지휘관),나주판관 이복남의 완주군 용진 안골포전투,황박 의병군,방정영,박석,
강운,박형길,해남현감 변응정,편장 위대기,공시억등이 진안 웅치전투를 치뤘다.
1592년 7월7일 1차방어선 김제,전주 황박 의병부대.2차방어선 이복남 나주부대.
3차방어선 정담부대 vs 적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瑗)와 싸워 격퇴시킴.
1592년7월8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제6군이 합류하고 지원하여,
왜군이 총4군으로 나누어 임실 관촌 슬치,완주군 상관면,소양면으로 돌아
전주성으로 진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7월7일 2차방어선까지 뚫렸으나 3차방어선에서 다시 격퇴시켰다.
7월8일 다시 2차방어선까지 뚫렸으나 화살이 떨어져갔다.
이때 웅치에서 상관면으로 우회하여 소양면으로 돌아나온 왜군이 완주군 용진면으로 진격해가자,
나주판관 이복남부대가 전주 안덕원으로 철수하면서 황진은 안덕원 전투에서 승전하고,
이복남은 완주군 용진면에서 부터 유격전을 벌이면서 안골포전투에서 승전하였다.
황진은 전주시내 안골입구로 들어온 안덕원전투에서 왜군 선봉장수를 사살하고 왜군을 대파시켰다.
아중리 저수지가 없었을때는 큰천이 있어서 천을 사이에 두고 안골천에서 교전을 벌였다.
고려병원앞 기린천[아중천]을 사이에 두고 제1차방어선에서 황진이 막고,
2차방어선은 우아2동사무소 뒷편 진버들길에 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활과 화포로 지원사격하여
왜군을 막아냈다.
웅치 제3차방어에서 제1차방어선 주장 황박이 전사하고 3차방어선의 여러 주장들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웅치전선은 지켜낸 것이다.
만약 웅치전투에 패했더라면 안덕원전투,안골포전투는 패하고 말았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정담,강운,박형길등은 웅치에서 전사하거나 진안,무주전투중에 전사하였다.
방정영,박석,변응정등은 왜군을 무주로 추격하는 과정에서 전투중 전사한다.
이후 왜군적장 안코쿠지가 웅치에서 이치로 퇴각하는 도중에 조 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
조선의 충신(충간)과 의병들의 기개(담력)에 조의를 표한다.-
=조선의 충인 영을 조산(弔散-죽어서 흩어진 영령에 조의를 표함) 한다]를 세워
조선군과 황박,정담의 충절을 기리는 표지석을 세워놓고 퇴각하였다.
웅치전투의 승전으로 전세가 극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진안 웅치전투,안덕원 전투,안골포 전투,금산 전투,진안산성 전투,죽산성 전투,
진안 성주봉 성주성 전투, 동향면 성산전투, 진안 안성전투,무주 설천, 무풍 전투
거창 고제,지레 사랑암 전투,상주 전투,고령 개령 전투,창녕 성산 전투,
합천전투,성주군 성주성전투,함안전투,영덕,영해전투,울산전투 등은 모두 전라 관의병들이 추격하며
패주하는 적을 섬멸하는 전투이다.
진안 웅치전투.1592년음력7월7~8일. 정담 VS (안국사 혜원)
왜군 제6군 소조총융경(고바야카와 다카카게),안국사혜원(안코쿠지 에케이),
복도정측(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진격루트.
제3군으로 나누어 세갈레길로 전주성으로 공격한다.
진안 웅치전투(1592.음력7월7~8일)
임실 슬치전투.
왜군 제6군 소조총융경(고바야카와 다카카게),안국사혜원(안코쿠지 에케이),
복도정측(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진격루트VS 호남의병 부총대장 부창의사 양대박,의병장 지장군.
(사령관 소조총융경vs양대박.진안군 성수 월평산성,임실군 관촌 성미산성/각산산성,신덕전투,신평전투)
김면,정인홍,곽재우,정기룡등은 주력이 아니라 협력자였다.
정인홍의 무계,초계,고령역 전투등은 보급수송병들로 왜주력군의 보급수송부대였다.
김면,정인홍,정기룡,곽재우등은 적은 의병으로 주력군을 상대하지 못했다.
정유재란이후나 되어서야 활약을 하게된다.
영덕,영해전투,울산전투등도 황진,최원,최경회,전라도의병들이 1593년 거창 지레 사랑암 전투이후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며 주도하여 승리한 것이다.
전임 전라병마절도사 최원과 최경회가 영덕,영해전투에서 승리하고
최원은 왜군 200명을 포로로 잡고 돌아와 강등된 직급에서 다시 상호군(정3품)으로 승진하고
최경회가 남원부사겸 영덕,영해부사에 오른다.
전라도 관의병들은 대개 전멸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뿐이다.
류성룡이 전라도 육군 관의병들과 영남의병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유독 이순신만 평가해 놓은 것은 잘못이 있을지 모르지만,
승전의 주역은 이순신이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보기때문에 그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특히 류성룡은 전라도 장수 김천일등을 비하해 놓고있다.
임진왜란에서 세명의 가장 뛰어난 장수라고 하면 당연히 김천일,황진,최경회 3장사이다.
여기에 한둘 더 추가하자면 진주성1,2차전을 모두 뛰었던 무관출신 사천현감/순천부사 장윤이다.
일단 죽을 자리인 진주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밖에 이복남,김덕령,고득뢰등이 있었다.
특히 이복남은 정유재란때 남원성전투까지 성안으로 들어가 치루다가 불더미속에서 전사한다.
김면이 김시민을 찾아가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치자고 건의했을때
장윤이 전라좌의병부장 병력300명을 이끌고가서 김면과함께 고령,거창의병 800을 모집하여
황진,최경회,이복남,고득뢰,임계영등이 추격하여 거창 사랑암,고령개령,창녕 성산등에서
격파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력은 당연히 황진,최경회,이복남이 이끄는 부대다.
이복남은 1592년7월7일 조선군 지휘권자인 정담과 황박,황진과 함께
웅치에서 적을 3차방어선에서 격파한후 전주 안덕원으로 철수하였다가 안골포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나서
반격하여 진안산성을 탈환하고, 7월8일 이치에서 퇴각하던 왜군에게 정담,황박이 전사한것에 격분하여
황진과 함께 화약이 떨어진 왜군을 무섭게 추격하고 있었다.
여기에 놀란 적장 후쿠시마는 진안군 동향면 손죽도로 들어가 죽산성을 쌓고 1593년3월까지 웅거한다.
최경회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장수 장계 천천면에서 동향면으로 협공해 들어가자
후쿠시마는 동향면 성주봉으로 2군을 보내 성주성을 쌓고 웅거에 들어간다.
황진,이복남,최경회는 무주군 안성면(그 당시는 진안군 안성면)으로 들어가 진을 치고
적의 퇴로를 막은후, 금산군 이치에서 횡천면을 거쳐 퇴각하는 적을
설천면 무풍(그당시는 무풍현)에서 대파하였다.(여기에서 무풍지대라는 말이 유래됨)
이때 박석,방정영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일명 무풍대첩이다.
설천의 라제통문지역에 적들이 얼마나 설쳐됐는지 너무 설쳐댄다고 해서 설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가,
훗날 영조때 이봉상(이순신의 5대손으로 이인좌의 난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이인좌에 의해 피살)의
호를 따서 설천(雪川)이라고 이름을 붙인것이다.
즉,이봉상이 설천에 거주하면서 임진왜란때 이야기를 듣고나서 자신의 호를 그렇게 지은것으로 판단된다.
설천면(무풍현)일대에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져 무풍지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치,웅치,슬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이 무주,진안,장수로 집결하여 너무 많아서 "무진장 많다" 라는
말이 붙게되었다.
야간이 되면 피아구분을 못할정도로 뒤섞여서 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인홍이 합천에서 의병을 이끌고 들어왔을때도 고령의 김면,정인홍등은
모두 조선 주력군이었던 충청도 병마절도사 조방장 황진과 최경회의 지휘를 받아 움직였다.
상주전투는 황진이 이복남,고득뢰등과 함께 쳐들어가서 상주전투를 마무리한다.
김면 의병부대중 300을 배정받은 정기룡도 이때 상주전투에 참전하는것이다.
황진은 전주 안덕원 전투에서 부터 웅치의 정담장군,황박,이복남과함께 진안산성을 탈환한후,
최경회와 함께 왜군 후쿠시마를 진안 동향면 죽산성과 성주성에 가둬놓고,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전주 안덕원,진안에서 부터 추격하여 대파하는 작전을 펼쳤다.
웅치의 승전장이었던 정담 장군과 황박이 이치에서 무풍대첩을 치루고 퇴각하는 적을 치다 전사한후,
황진은 부대를 이끌며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2년7월8일 이치에서 고경명 총대장 창의사와 6,000명이 전사하면서 부터
왜군도 타격을 받아 무주 무풍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화약이 떨어진 틈을 이용해 무서운 기세로 복수전을 펼치며 추격해갔던 부대가 황진,최경회,이복남 부대였다.
최경회의 2진부대는 육십령을 넘게하여 고제면으로 들어가서 격파하고,
거창 지례면 사랑암으로 몰아낸후,김면,장윤부대와 협공하여 대파하고,고령군 개령면으로 몰아낸다.
그후 정인홍 의병부대가 합천에서 고령으로 들어와 합류하여 개령전투를 치룬후,
적은 창녕군 성산으로 퇴각시키고 연합작전을 벌여 토벌하게 된다.
이때 남원성에서 도착한 보성/진보군수 임계영,박광전등이 합천으로 퇴각한 왜군을 추격하여 섬멸한다.
1593년3월 진안군 동향면 손죽도의 죽산성과 성주봉의 성주성에 퇴로가 막혀 갇혀 있었던 왜군은
죽산성과 성주성을 나와 무주군 안성면(당시는진안군안성면)으로 진격하여
최원,황진,최경회 부대를 치고 탈출하려다가,
최경회가 적장 후쿠시마를 상대하는 사이에 최원(2천),황진이 죽산성과 성주성을 탈환하였다.
이때 최경회가 후쿠시마를 활로 쏘아 죽이고 그가 가지고 있던 언월도를 획득한다.
선조와 함께 문관 관료 활쏘기시합에서 최경회가 문관중에서 장원을 하였다고 한다.
언월도는 한쌍으로 반쪽은 일본 국보로 현재 지정되어있다.
한쪽은 일제시대 일본군이 언월도를 찾으려고 최경회 일가를 잡아다가 고문하고 취조하였으나,
땅에 묻고 발설하지 않았다가 해방후 도검류로 압수당하였다.
경찰에서 난로 불쑤시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본 후손이 가서 항의하여 되찾아왔다.
더군다나 황진부대는 선전관 출신이었고,이복남,고득뢰등 상당수가 현직무관이었다.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는데 출중한 실력을 발휘했던 선전관 출신들이 고향으로 좌천당했던 관계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이들이 전투를 주도하였기 때문에,합류했던 김면,정인홍등이
쉽게 승리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영남의병들이 치룬전쟁이 아니라 전라도 의병들이 패주하는 왜군을 쫓아
화약이 떨어진 틈을 이용하여 대패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선전관은 조선에서 가장 실력있는 인재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전략연구,무관 교육훈련,왕명전달,왕의 호위시위군으로 활동하는 무관중의 무관들이었다.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했던 선전관 출신들이 많아서 대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용인전투 패전으로 인한 값비싼 댓가를 교훈삼아 화약이 떨어진 틈을 십분활용하였다.
실력뿐만 아니라 출신성분이 좋아야 들어갈 수가 있었던 곳이 선전관이었다.
조선에서 선전관은 20여명 남짓이었는데 호남 주기학파 세력이 장악하고 있다가
1591년2월 동인 주리학파 정권으로 교체되자 모두 고향지방으로 좌천되고 나서
이치,웅치,슬치에서 싸우다가 전사도 하고,맹추격하며 격퇴시키는 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이로 부터 이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선전관청으로 확대 개편 되었다.
1591년2월까지 호남인들이 선전관 요직과 비변사의 참모조직인 비변랑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가
정철이 주색에 빠져 국사를 그르쳤다며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의 공작으로 유배를 가면서
동인으로 교체되며 호남파들이 호남으로 직급강등당하며 좌천되었다가 임진왜란후
서인정권 시기만 되면 맹활약을 펼치고 동인정권 시기에는 전략적 연전연패를 하게 되는 것이다.
황박은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 신립의 핵심참모였으며 1591년2월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 이산해파가
정권을 잡고 직급 강등시키고 좌천을 시키자 부임하지 않고 김제로 낙향을 해버린다.
이때 이순신도 선전관 요직과 비변사의 비변랑을 거쳐 활동하다가
종3품 장군급에서 7품계 강등당하며 정읍현감[종6품]으로 좌천된다.
류성룡은 진주성으로 들어간 호남의병들 마저 비하했는데,
영남 의병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뭐라 할수는 없다.
훈련원 봉사였던 상주판관 정기룡이 김성일 경상우도초유사로부터 임명받은 자리라면,
합천,고령,상주,거창,창녕,함안일대에서 치룬 호남 관의병 황진,최경회
이복남,고득뢰,임계영,장윤등은 선조로 부터 가장 높은 벼슬을 받았다.
이때 이미 논공행상이 끝이 났다.
활약에 따라 관급이 주어지는데,
황진은 충청 조방장에서 정3품 병조 참의직과 함께 전주 부윤을 거쳐 충청도병마절도사(종2품),
최경회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이복남은 충청 조방장에 이어 전라도방어사,남원부사에 올라
남원성으로들어갔다.
사천현감겸 전라좌 의병장 장윤은 순천/승주부사(순성장),
고득뢰 해남 어란만호는 해남 방답 첨절제사를 제수받는다.
이때
김면은 관직이 없다가 최경회가 경상도병마절도사(종2품)가 되었을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제수받은후 성주성전투 10개월후,산속에서 병이 들어 병사한다.
정인홍은 진주목사가 되지만 사임한다.
곽재우도 진주목사가 되지만 사임하였다.
이때 훈련원 봉사 정기룡은 별장에 이어 상주판관(종5품)이 된다.
왜군이 처들어오자 지리산으로 피신했던 진주목사 이경과 김시민은
지리산에 숨어있다가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찾아갔을때 이경은 병사하였다.
아마 실제로는 김성일이 이경을 참수한것으로 판단된다.
김성일은 판관 김시민을 임시목사로 임명하고 진주민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간다.
김시민은 진주성을 보강하고 전쟁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1592년10월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기전, 김면이 김시민을 찾아가서
금산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치자고 건의하는데,이것을 받아들여 사천현감 장윤의 전라좌의병부장
병력 300명을 보내 김면과 함께 고령,거창에서 의병 800명을 모집하여
이치에서 퇴각하는 적을 격퇴시킨다.
정기룡도 이때 따라가는데 김면의 고령,거창 의병 300명을 배정받아 상주전투에 참여한다.
상주전투는 전주 안덕원 전투에서 부터 웅치,이치,슬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조선에서 가장 용맹한 선전관 출신인 정담장군,황박,황진,이복남,고득뢰등이 최경회와 함께
이치에서 퇴각하는 적을 격퇴시킬때, 훈련원 봉사 정기룡도 300명을 배정받아 참여한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의 주도권은 호남 관의병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주목사를 사임하는 이유가 진주성으로 들어가는것을 기피하기 위함이었다.
영남의병들이 진주성 제1차전투 당시 모두 성밖에서 심리전만 펼쳤다.
그곳에 정기룡이 이끄는 300의병도 심리전을 펼쳤다.
진주성 안은 당연히 죽을자리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고,
남명학파 김면,정인홍,곽재우등이 유학자 출신으로서 전략적 판단을 그렇게 한것이다.
또한 모두 동인세력으로 정여립의 기축옥사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이 몇몇 영남의병을 칭송했지만,황진,최경회,김천일은 그의 생명줄과 같았다.
그들이 승리하면 자신도 살고 그들이 죽으면 자신도 죽어야하는 운명이었다.
진주성 2차전투에서 패할것을 짐작이라도 하였듯이,
그는 전쟁을 앞두고 전투가 벌어지기 2개월전에 병사하고 말았다.
영남 의병들이 진주1차전에 이어서,2차 전투에서도 모두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죽어야할 사람은 이산해,김성주,류성룡 이었는데,
그책임을 김성일에 떠넘기고 징비록에서 김천일을 두번 죽이는 짓을 하였다.
창의사겸 수원부사 김천일은 강화도에서 왜수군이 한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적 후방을 교란하고
전주성에서 차출한 사수부대를 가지고있어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스님 병력
1000여명과 합류하여,2,800여명으로 조선주력군으로 활동하며 왜군1만5천을 섬멸시킨다.
권율이 지휘를 잘해서 그런것이 아니라,강화도에서 1만대군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의 군대를 김천일,황해도방어사 김경로[남원]가 회유하여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것이며 김천일 2대 창의사가 전주성에서 특별사수를 차출하여 이끌고 간
호남 관의병 병력으로 승리시킨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면에 나서서 사수부대로 높은고지를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화포에 폭탄을 달아 발사할 수 있는 비격진천뢰,
변이중(장성)이 고흥에서개발한 화차부대 투입으로 초대승
왜군사상자 1만5천vs 아군사상자 130여명 중대대병력(당시 대대급)]
신임 임시 전라병마절도사 선거이[진도]가 전주성에서 6천을 이끌고 수원에서 주둔하다가
한양을 탈환하기위해 시흥으로 전진배치했다가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이 명나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선제공격 하기 위해서 우희다수가군이 행주로 출병하자
시흥에서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대승을 거둔다.
이후 정식으로 전라수군절도사로 옮긴 선거이가 황진과 함께 진주 제2차전투가 벌어지기
일주일전에 함안으로 들어오는 왜수군을 격퇴시켜 함안전투에서 승리하고
황진은 진주성으로 입성한다.
행주대첩은 관군을 승전장으로 해야한다면 신임 임시 전라병마절도사 선거이가 승전장이 되어야 한다.
전라병마절도사 최원이 강화도에서 1만대군중 8천여명을 선거이에게 주어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승리한다.
(아군130여명사상vs우희다수가(우끼다 히데이에),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군 3만중 왜군 1만5천 섬멸)
최원은 2천을 이끌고 전주로 들어와 진안 상전면 죽산성과 동향면 성주봉에서 성주성을 쌓고 웅거하던
후쿠시마군을 최경회 남원부사와 함께 영덕,영해까지 추격하여 대파하고 포로 2백여명을 잡아 개선한다.
최경회는 울산까지 추격하여 울산전투에서 잔당들을 궤멸시키고 영덕,영해부사를 겸해 돌아왔다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경상도병마절도사에 올라 진주성 제2차전투를 치루기위해 들어간다.
김천일은 호남의병총대장 창의사(비변사로부터 종2품예우)였고,
권율은 전라도 관찰사였는데, 모든 공은 권율에게로 돌아간것이다.
창의사라는 직책은 종2품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도원수급(정2~종2품),순찰사,관찰사급이었다.
이때 모든 의병은 김천일 창의사겸 수원부사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의병들은 자기 지역의 대표를 지휘관으로 인정을 하고 지휘를 받은것이다.
전주성과 남원성에서 의병10만이 집결해 있을때 특별 차출된 사수부대였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최원과 함께 한강방어작전도 함께하였기때문에 최원 병력을 강화도에서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도록 설득시킨것도 김천일과 김경로였다.
김천일은 근대이성철학을 깨우쳤던 주기학파 이항의 제자였고 이항은 정읍 태인에서
호남에서 주기철학을 배우기위해 몰려든 후학을 가르쳤다.
이순신 역시 정읍현감으로 있었다.
이항은 주기학파의 대부격으로 정신적 계승자중 한명이었다.
이렇게 모든 공과에서 잘못 기록된 모순이 엄청나게 많다.
충청순찰사 신경행도 고경명 밑에서 따라다니다가, 고경명이 죽자,
고경명 병력을 김덕령이 인수하였을때도 김덕령 밑에서 종군하였다.
훗날 부여(홍산)로 돌아간 신경행은 지휘권이 없자, 한현,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을때
반란수괴총사로 김덕령을 지목하여 김덕령이 정강이 뼈가 부러지는 고문을 당하게 하고
장독으로 죽게만들었다.
곽재우도 연루시켜 잡혀갔으나 풀려나 대북(광해군지지)을 반대하고 낙동강 동안지방의
소북(영창대군지지)을 지지해주는 상소를 올리고 은둔생활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고해도
류성룡의 이순신 기록은 사실 아닌가?
해전에서 패하면 지상전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므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당대를 살았다고 해도 지상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전황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의성출신의 동인 류성룡이 남인이 되어 남인을 대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인을 기반으로 우두머리에 앉아서 호남의병을 좋지 않게 평가했다.
임진왜란중 1593년 6월21~29일에 벌어진 진주성 2차전투 이전까지는
영남 의병들의 영웅담을 과대평가해서 모순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정유재란 이후에 활동했던 맹활약 부분에서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이롭다.
전투경험이 전무한 의병들이 하루아침에 군사무기를 만들어 주력군을 상대한다는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호남 관의병들은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했던 선전관,무과급제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있었고,
용인전투와 이치,웅치,슬치전투에서 주력군을 상대한 경험으로 왜군이 화약이 떨어진 약점을 이용하여
대패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대평가 하려고 하니까,
청주성,전주성,금산이치,진안웅치,임실슬치에서부터 맹추격을 하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무관 선전관 출신인 황진,이복남,황박,정담,장윤,최원,이광,고득뢰,임계영과
문관 최경회등의 전공을 가로채는 것밖에 안된다.
유학자 김면과 정인홍이 의병을 이끌고 와서 주도적으로 치룰수있는 역량은 없었다.
정기룡은 황진,이복남,고득뢰,임계영등이 이끄는 부대를 따라가 협력했던 전투가 상주성 전투다.
황진이 이 전공으로 충청 조방장에서 전주성에서 모집한 병력으로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오른다.
조방장이라는 직책은 정(종)3품 품계로 조선군 육군주력부대에 소속된 자에게 임명하는 직책이다.
수군에서도 삼도수군통제사 밑에서 통제사를 보필하다 통제사가 죽으면
임시로 그자리를 대신하는 자리였다.
그러므로 누가주도하였고, 누가 주력군 이었는지 알것이다.
정기룡은 정유재란때 맹활약하는 인물이다.
영남의병을 평가할때 임진왜란사 부분에서 함안 이북지방에서 의병활동 부분은
신중히 평가해야 할것이다.
이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한것이 아니라,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함안전투에서도 황진은 임시 전라병마절도사 선거이와 함께 해상에서 적을 격파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해남,통영,사천,마산,함안,거제등에서도 김덕령과 겹치기때문에 평가를할때 신중을 기해야한다.
김덕령이 김천일 사후부터 3대창의사 전국의병총대장 이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 성리학자였던 류성룡은 지상군들이 어떻게 전쟁을 치뤘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징비록을 남겨 놓았다.
그의 눈으로 볼때 수군전투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고,이순신 전투 부분은
제대로 평가해 놓은 것이 맞다.
당연히 지상군 3장수는 김천일,황진,최경회다.
굳이 한두명을 더하라면 남원성 전투까지 치룬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과
진주성 제1,2전투에 참여한 장윤(순천/승주부사겸 진주성 임시목사/순성장)이다.
진주성 수성전투를 치룬 삼장사가 조선육군 3대장수가 아니면 누가 진정한 명장이란 말인가??
호남의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있어도 다들 쉬쉬하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므로 양심있는 분들이 제대로 가르쳐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삼장사와 장윤,그리고 여기에 한명을 더 포함시키자면 남원성전투를 이끌었던
이복남 전라병마절도사이다.
조선 의병군은 이미 조선 육군에 편제되어 활동하였던 것이다.
호남병력은 대병이었고,
정기룡300명,정인홍800명,곽재우200명,김면800명(장윤300/정기룡300포함)......
1593년 6월21~29일이전 병력은 이렇다.
김면의 병력중 300명은 전라좌 의병부장이며 사천현감 장윤의 병력이었다.
300명은 정기룡 병력에 배속되었다.
진주성 제1차 전투때도 호남병력이 없었으면 진주성은 함락되었을 전투였다.
남원성에서 진주성으로 들어올때 특별사수를 차출하여 투입하였는데,
수천 병력의 황진, 최경회, 임계영이 이끄는 병력만 2천명이다.
임시목사이자 판관 김시민의 진주성이 함락되기전 수천을 거느린 황진,
그리고 최경회, 임계영이 이끄는 2천병력[특별사수부대]이 진주성 살천으로 들어와
살천에서 적을 대파한후 적후방을 들이쳐서 왜군이 퇴각한다.
이때 장윤은 다시 진주성안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펼친 장수였다.
이런 것이 진짜 장수가 아니면 누가 진짜 장수란 말인가?
다들 몸사리고 진주성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외각에서 피리를 불며 꽹과리 치고
심리전만 벌이는 것은 진짜 전쟁하는게 아니다.
그런것은 그냥 협력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남의병 전병력은 진주성 외곽에서 심리전을 펼치며 군세가 많은 것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정기룡이 이끈 병력은 고령 의병장 김면이 고령, 거창에서 장윤과 함께 모집한 병력이고
논공행상에서 이미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현직 선전관 출신과
김제군수 정담장군,황박,황진,최경회,이복남,김면,고득뢰,임계영,장윤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면이 대표로 논공행상에서 최경회가 물러난후 경상도우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고,
장윤은 사천현감에서 순천/승주부사로,정기룡은 상주전투이후
훈련원 봉사에서 별장으로 제수되었다가 후일 상주판관으로 제수된다.
곽재우는 김덕령이 전국의병총대장에 임명되자, 절친이 되어 활동하면서
반란에 연루되어 잡혔다가 김덕령은 죽고 자신은 살아남자, 그의 죽음을 한탄하고,
평생 은둔하며 초야에 묻혀 살게 된다.
진정한 영웅들의 영령을 모신곳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진안 웅치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금산 이치로 적군을 추격하면서
적군에게 대패를 안겨준 정담,황박,이복남(李福男)을 기리는 곳을 한번 보라.
황박,정담은 정말 초라하기 짝이없다.
일제시대 일본군들이 조직적으로 황박,정담을 모시던 곳을 황폐화 시켰다.
왜군 안코쿠지(안국사혜원)와 소조총융경(고바야카와)이 정담과 황박(웅치제1방어선주장)의
용맹에 대해 표지석을 세워 기렸을 정도였다.
1594년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나주목사가 되어 진주성 전투까지 치루고,
1597년 남원성으로들어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함락당할때 까지
온몸에 불에 타면서 까지 왜군과 싸웠던 조선의 진정한 전사였다.
1597년 8월초 5천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의 5만군사를 대적하다가 패하고,
조방장(助防將)겸 전라도방어사 김경로(金敬老),산성별장(山城別將)신호(申浩)등과함께 전사하였다.
진정한 전사는 죽을 자리인줄 알면서도,성안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펼치며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장수가 진짜 전사인것이다.
남원성전투(1597년음력8월12일~16일)
이복남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이춘원 광양현감.
이원춘 구례현감.
김경로 조방장.전라도방어사
마응방 진암현감.(웅치전투의 마응정 동생)
오응정 전라도우방어사겸 전라도방어사.
임현 남원부사.
이덕회 판관
정기원 접반사.
황대중 의병장.
신호 산성별장.
조경남 의병장.
임사미
명나라
양호 명나라부총병
이신방 중군장
장표 천총
생승선 천총.
전라병마군 5,000명
명나라군3,000명
군민7,000명
총병력1만1천명.
이원춘,조경남등 생존하고 전원 전사및 살해당함.
명나라 부총병 양호가 50~100여명을 이끌고 탈출함.
이복남,김경로,오응정,신호등은 8월16일 남원성에서 자신들만 살아 나오자 인근 들판에서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 종사관에게 불을 지르라하고 불속에서 산화한다.
불에타죽는 이복남,김경로,오응정,신호등은 조선의 진정한 전사였다.
(김경로 전라도방어사가 조방장이 되었기때문에 전라도 부병마절도사이고,
전라우방어사 오응정이 전라도방어사를 겸해 방어사 병력을 이끌었다.)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소 요시토시.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
총병력5만8,000명.
왜군피해불명.
석주관전투(1597년음력9월~11월)/구례전투.
이원춘 구례현감.
왕득인 의병장.
왕의성 의병장.
이정익 의병장.
한호성 의사.
양응록
고정철
오종
조경남.
의병3.500명.
승병253명
총병력3,653명.
왜군에게 잡힌 포로 200명 구출후, 2차전투에서 전원 전사함.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시마즈 요시히로
우키타 히데이에.
총병력 3만4,000명.
피해불명.
남원성 전투에서 살아나온 구례현감 이원춘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구례에서 왕득인등과 함께 왜군에 대항하였다.
남원 충렬사에 배향하고 만인의 총을 세워 기렸다.
구례 석주관에는 석주관 칠의사 묘가 세워져 있다.
남원의 조경남은 호남 동인으로 난중잡록에서 동인중에서는 정인홍의 공이
으뜸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정유재란 남원성전투와 울산성전투가 벌어지기전 도원수 권율은 대구 팔공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부러 피해다닌 것인가? 알면서도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인가?
임진왜란당시 휩쓸고간 대구로 왜군이 재침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명,조선,왜와의 강화실패후,남원성과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왜군이 총력을 다해
공격해 올것 이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진주성 제2차전투에서 남강을 헤엄쳐 탈출해 나온 의병들은
남원의 변사정,임계영등이 살아나온 최억남을 부장으로 삼고 하동에 주둔하며
사천,고성,통영,곤양등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왜군을 격파한다.
해남의 방답첨절제사 고득뢰(남원)는 진주성에서 살아나온후 얼마후 부상으로 죽음을 맞았다.
변사정은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도망간 도원수 권율과 영남의병들을 소환하여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병력은 광주,담양에서 모집한 병력과 함께 김덕령이 인수하여 진주성에 주둔한다.
충청순찰사로 오른 신경행은 김덕령 휘하에서 불만을 품고 부여(홍산)로 돌아갔다가
마침 한현,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나니 양광도 동인정권은 강화시기에 왜군을 토벌했다며
반란수괴총사로 김덕령을 엮어 죽게 만들었다.
p/s
주기학파 이항의 제자였던 김천일 창의사겸 수원부사가 진주성 총사령관이 된것은
김천일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종6품 주부직으로 첫 출사를 했기 때문이고,
천거로 정계에 진출한 자는 정3품이상 진출할 수가 없었으므로 창의사[종2품예우]직위를 주어
도병마절도사[종2품]와 동등한 지위를 얻게 한것이다.
진주 제2차전투시 진주성 우도절제사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현역병인 도병마절도사 군대가
다수 전사하여, 방위예비군[징집된 농사병행병]과 자원의병들로 채워져서 절제사라 한것이다.
경상도병마절도사 최경회의 주력군은 이치전투에서 살아나온 호남의 고경명 휘하
800여명이 주력군이며 각각 현역 무관들과 의병장들이 붙어 구성되어 있었고,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의 주력군은 전주성에 5만의병이 집결해 있을때 차출되었던 병력이었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일은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일본 중동부를 장악하고 있어
경도[교토]를 장악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혈통 성질이 가장 비슷한 일본 중서부의
가야,백제,부여,신라,오월족의 후예를 임진왜란,정유재란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중동부는 주로 고구려,발해,후발해,여진,거란,홍건적,북위출신 망인들이 몰려 사는 곳임.
정유재란후 일본 동경(도쿄) 에에도막부를 장악한 덕천가강이 동경으로 에도(경도/교토)의
백제인들을 끌어가고, 요코하마,가마쿠라 주변지역으로는 가야인들을 집단 강제이주시켜
형성되는 곳임].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천민, 부곡, 향, 소로 천대를 받았지만 호남동부의 철기, 도기 도자기분야등,
경남 진주성의 공학기술분야의 인력들이 대거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어야하는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