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난 6월 25일, 춘천시와 화천군에 걸쳐 있는 용화산에 오름으로써 산림청 100대 명산 도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산이 좋아 주말마다 가깝게는 북한산, 멀게는 지리산을 찾아다녔지만 애초부터 100대 명산 완등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산림청에서 2002년에 지정해 놓은 100대 명산이란 것이 있기에 이 명단에서 내가 간 곳을 하나 둘 지우다 보니 어느새 100개가 다 지워진 것뿐이다.
내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돌이켜보니 초등학교시절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진달래를 따러 다니던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진달래가 지천이던 뒷동산에 올라 정신없이 연분홍 꽃잎을 따먹다가 문득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 그곳에 보광산과 백마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아래로 평화로운 봄날의 초록 들판이 있었다. 청주 쪽으로는 산 너머 산이 있고 그 산 너머 또 산이 보이는 산그리메가 파란 하늘 아래 아련했다. 운이 좋은 날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들판을 지나 산속으로 사라지는 기차를 볼 수도 있었다.
제대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다니기 시작했고 그 첫 산행지는 대둔산이었다. 그때 출렁거리는 금강구름다리(지금은 튼튼하지만 그때는 약했고 심하게 흔들거렸다)를 지나고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며 느낀 스릴, 마천대에서 굽어보는 기암괴석의 장엄함과 첩첩이 이어진 아득한 산군의 아름다움에 반해 나는 그만 ‘등산’이라는 올가미에 단단히 엮여 버렸다.
처음에는 직장 등산동호회에 가입해 한 달에 한 번 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5~6년 전부터는 주말마다 거르지 않고 산행을 했다. 그 많은 산 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산도 있고 썩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산도 있다. 설악산을 특별히 좋아해 스물다섯 번 올랐고, 속리산은 열 번, 지리산도 일곱 번을 다녀왔으며, 가까우면서도 매력 만점인 북한산은 수시로 갔다.
등산처럼 고상한 취미도 없다. 세상에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것이 산 아니던가? 혹여 우리가 지루해 할까봐 철따라 고운 옷으로 갈아입으니 사시사철 어느 때 가더라도 산은 아름답기만 하다. 봄에는 연둣빛으로 돋아 오르는 잎사귀가 어여쁘고, 여름에는 계곡을 돌돌 쏴 돌아 흐르는 옥수가 시원하다. 가을이면 만산이 홍엽으로 물드니 장관이요, 겨울에는 하얀 눈을 소복이 덮은 은세계로 변하니 이 또한 별천지다.
나는 하루 중 해가 뜰 무렵의 산 풍경을 가장 좋아해 무박산행을 곧잘 간다. 헤드랜턴을 밝히고 어두운 길을 더듬어 가다 보면 주위가 환해지고 동녘 하늘이 꿈틀거린다. 드디어 함지박만 한 태양이 이글거리며 동쪽 뫼에서 솟아오르고 겹쳐진 산들과 하늘이 붉은빛으로 타오르니 조물주가 만든 풍경 중에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랴. 운이 좋아 운해라도 깔리면 그곳은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이 된다.
아쉬운 것은 백두대간 곳곳과 설악산의 능선이나 계곡 여러 곳이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출입을 금지시키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을 보호하고 위험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어느 곳은 부분적으로 개방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설악산의 화채능선 같은 곳은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고 서북릉과 비교해 볼 때 자연보호라는 명분이 약해 보인다.
공룡능선과 동해 조망이 시원한 이곳은 한때 대청봉을 오르는 주등산로여서 ‘대청봉옛길’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출입을 금하고 있다. 오색에서 끝청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은 허용되고, 배낭을 메고 화채능선을 걷는 것은 금지되니 산을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인 것은 출입이 허용된 곳도 아름다워서 가고 또 가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와 함께 산 오르고 싶어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아내와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가엾은 나의 아내는 연분홍빛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 오월의 황매산도 가보지 못했고, 하얀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섣달의 태백산에도 올라보지 못했다. 잔잔한 운해를 비집고 솟아오르는 설악산의 태양을 보지 못했고, 장터목 밤하늘을 수놓은 수천수만의 별보석도 구경하지 못했다.
허리가 좋지 않은 아내는 몸에 무리가 가는 운동보다는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는 것을 더 좋아해 함께 산을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주말마다 산으로 떠나는 남편에게 짜증내지 않고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산림청 100대 명산을 모두 올랐지만 나는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다. 대신 쉼표를 찍고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다시 배낭을 메고 산으로 떠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