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 14, 11 - 20 |
11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앞의 1절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고 궁리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하나가 자기 발로 찾아와서 예수님을 ‘넘겨 주겠다.’ 고 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음모가 잘 진행된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한다. 유다는 예수님의 움직이는 동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 계실지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 모르게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마태오복음 26장 15절에는 유다가 먼저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제들이 먼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학자들은 마르코복음을 마태오가 고쳐 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제들이 유다에게 주기로 한 돈은 ‘은화 서른 닢’이다(마태 26,16).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라는 말은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하게 할 수 있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는 뜻이다. 유다는 예수님이 체포되고 재판받는 과정에서 계속 뒤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판 때에 유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유다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을 배반했고, 유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겼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한 죄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유다 자신에게 있다.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결심하고, 실행한 것은 유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선행으로 하느님의 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악행 때문에 벌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선한 쪽으로 갈 것인지, 악한 쪽으로 갈 것인지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 일이다. 따라서 선행의 공로가 우리 것이라면 악행의 책임도 우리 것이다. 자신의 행동의 책임을 하느님이나 마귀 탓으로 돌릴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지을 자유를 주셨지만 죄를 지으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 마귀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긴 하지만 그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 은 성주간 목요일에 해당된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최후의 만찬을 하셨고, 체포되었다. 안식일은 주간의 마지막 날, 즉 토요일이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 즉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안식일 다음날, 즉 주간의 첫날(주일)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요일은 분명하다. 그러나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과월절은 니산달(3월 - 4월) 14일-15일로 정해져 있고(탈출 12,18), 무교절은 니산달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해의 과월절과 안식일에 겹쳐졌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금요일은 안식일 전날이면서 동시에 과월절 준비일 이었다고 말한다.(요한 19,31).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목요일의 최후의 만찬은 과월절에 이루어진 만찬이 아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에서는 목요일 밤이 무교절 첫날이었고, 최후의 만찬은 곧 과월절 만찬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니산달은 양력 3월-4월에 해당하는데, 니산달 15일은 춘분이 지난 후에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이렇게 양력과 음력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과월절도 그렇고, 오늘날의 예수님의 부활절도 해마다 날짜가 크게 바뀌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 30년, 또는 서기 33년 봄, 과월절 무렵의 어느 금요일에 사형을 당하셨다. 요일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연도나 날짜는 알 수 없다. 유대인들은 니산달 14일 오후 3시경에 성전에 파스카 양을 잡고, 해가 진 다음, 즉 니산달 15일이 되면 예루살렘 시내에서 과월절 만찬을 먹었다.
마르코는 로마식(현재식), 시간 계산법대로 ‘무교절 첫날’이라고 했지만, 유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하면 ‘무교절 전날’이다.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적당한 크기의 방을 마련하고,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을 준비하고, 식탁과 그릇등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야만 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특정 지파에 분배되지 않고 이스라엘의 공동소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순례자들에게 과월절 장소를 빌려줄 때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이 있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매우 관대 해서 그런 전통을 잘 따랐고, 침대와 방석에 대해서도 임대료를 받지 않았다. 방을 빌리는 순례자들은 임대료는 내지 않았지만,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가죽을 방의 주인에게 주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제자들은 마치 하인들이 주인에게 묻듯이 예수님께 과월절 음식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질문하고, 예수님께서는 두 명의 제자를 보내신다. 그래서 11장의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빌렸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
13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루카 복음에서는 ‘제자 두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루카 22,8). ‘도성’은 예루살렘이다. 당시에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물동이를 메고 가면 눈에 잘 띄였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 남자를 쉽게 만났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시내에서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남자를 따라가라고 하시는데, 아마도 그 남자와 제자들이 만나게 될 시간과 장소가 미리 약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왜 처음부터 준비된 집을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중간에서 접선을 하면서 첩보영화 같은 상황이 진행될까?
그것은 아마도 만찬 장소를 미리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즉 만찬 전에 체포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만찬이 시작될 때까지 그 장소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지금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시하시는 것은 방을 빌리라는 것이 아니라 파스카 음식을 먹기 위해서 미리 예약한 방을 미리 가서 보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즉 그 방은 예수님께서 이미 빌리신 것이다. 여기서 ‘스승님’으로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선생님’으로 되어 있다. 어떻든 집의 주인에게 ‘선생님께서… 물으십니다.’ 하고 말하라는 지시는 그 집의 주인도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방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 집주인에게 ‘부탁’ 하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명령’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선생’ 으로 자처하시고, ‘내 제자들’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내 방’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집주인이 예수님의 열렬한 제자였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고, 새끼 나귀를 가져오라고 하실 때처럼 주님으로서 전권을 행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집주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미리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준비되어 있는 방에 음식을 차리기만 하면 됐다. 새끼 나귀를 가져오라고 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도시 가옥은 보통 이층에 가장 큰 방이 있었고, 거기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했고, 그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 방석이 준비된 자리가 깔려 있었다. 두 제자는 모든 것이 예수님 말씀 대로라는 것을 확인하고, 과월절 음식을 준비한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보낼 마지막 시간들을 매우 신중하게 준비하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17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가셨다. ‘저녁때가 되자’라는 말은 유대식 시간 계산법대로 하면 니산달 14일에서 15일로 날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제 과월절 만찬을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타니아를 떠나 최후의 만찬을 하실 장소로 가신다. |
18 그들이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해가 지면서 과월절 저녁이 시작되었다. 과월절 축제는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식사의 형태로 진행되는데, 가장은 가족에게 어린양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로 식사를 하는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과월절 만찬에 반드시 있어야 할 어린 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과월절 만찬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떻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의 배반을 예고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엄숙하게 강조하실 때 사용하는 관용어로, 여기서는 제자의 배반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 유다를 ‘너희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 지칭하면서 사도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강조하신다. 이것은 그 배반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 라는 말은 시편 41편 10절,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라는 구절에서 온 표현인데, 식사 공동체, 즉 가족과 같이 친밀한 공동체를 배반하는 배반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팔아넘길 것이다.’ 라는 말은 원문대로 하면 ‘넘길 것이다.’ 이다. 넘긴다는 말은 배반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것은 그가 이제라도 뉘우치고 마음을 바꿀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의 배반 계획을 예수님이 알고 있다는 것만 말씀하신다. |
19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하며 차례로 묻기 시작하였다.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놀라고 당황하고 동요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고 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말은 ‘나는 그럴 리가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혹시 그게 저입니까?’ 라는 뜻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제자들 모두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 즉 스스로 자신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2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다. ‘그는 열둘 가운데 하나’ 라는 말은 앞의 18절의 ‘너희 가운데 한 사람’과 같은 뜻이고, 제자이면서도 스승을 배반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앞의 18절의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자’라는 말과 같은 뜻이고,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인데도 배반을 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채소와 빵 등을 대접에 담긴 소스에 적셔 먹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같은 대접에 빵을 적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 온 표현으로 ‘나와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가 열두 사도 안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것은 유다에게 거듭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