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이기현
파란시선 0153
2024년 12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67쪽
ISBN 979-11-91897-93-7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당신과 평생 이야기할 장소가 필요해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은 이기현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물소리」 「유일무이」 등 49편이 실려 있다.
이기현 시인은 2019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을 썼다.
「당신의 장소」에서 화자는 국적을 가지는 것보다 “당신과 평생 이야기할 장소가 필요해”라고 고백한다. 그가 국적이 없는 세계를 탐닉한다는 것은 ‘이곳’에 대한 부자유일 수도 있고, 환멸일 수도 있다. 국적이라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펼쳐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디아스포라 주체를 떠올린다면 국적의 세계는 허물어진다. 그러나 시인은 자발적으로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한마디로 말해 개념에 대한 자유이고, 엮임에 대한 자유이고, 관계에 대한 자유라는 몽상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독한 자유인이 도달하는 곳이 “당신과 평생 이야기할 장소”이다. 이처럼 사소하지만 위대한 장소는 그와 함께 곁에서 걷는 시간의 장소이다. 무엇보다도 이 장소는 개인적으로는 삶에 대한 탈출구이자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독자들도 모두 알겠지만, 유토피아 같은 것은 없다. 당신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으로 간다. 환상의 힘을 빌려서든 척박한 현실이든 우리는 견디고 걸어서 뛰면서 온몸으로 부딪친다. 이것이 이기현 시인이 품고 있는 문학의 윤리이다. (이상 문종필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이기현의 시들은 “슬픔이 번성한 나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곳은 “슬픔도 여러 취향으로 나”뉘고, 명세서를 받아 “무엇을 슬픔으로 지불했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빛이 물드는 소리」) 슬픔을 화폐처럼 지불해야 한다니, 시인은 우리 영혼의 국적이 실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한 세계에 속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로운 일상도, 찰나의 기쁨도,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차가운 규칙을 헤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쩐지 그가 데려간 나라에서 나는 좀 더 머무르고 싶어진다. “관람차가 윤슬처럼 일렁거리”고(「난연」) “혼자 흔들리고 있는 그네의 등을 조용히 밀어 주”는 정경을 보며(「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그가 이토록 고통에 천착하고 우리로 하여금 비감을 일깨우는 이유는 무얼까 짐작해 본다. 시인이 새삼스레 “나는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는(「선고」),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선고’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감정이 있음을 자주 잊고 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때로 슬픈 일이다. 누군가로부터 떠나는 일은 때로 괴로운 일이다. 눈물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메마른 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 진실을 너무 쉽게 잊는다. 그것이 온전한 인간으로 삶을 사는 데에 중요한 기관인 줄 모르고 편리하게 감정의 통각을 잘라 내 버린다.
그때 이기현의 시는 통점이 사라진 환부를 애써 건드리며 이렇게 말을 건다. “어쩌겠는가. 불우한 친구여”(「암순응」). 우리는 모두 슬픔의 나라에 함께 속해 있다고. 만일 이런 삶을 견디기 힘들다면, “내가 너의 슬픔까지 슬퍼하겠”노라고(「사랑의 외벽」). 시인은 “내가 사라진 세상은 여전히 말끔하고/아름다울 거”라고 말하지만(「휘슬블로어」), 글쎄, 그가 없는 세상을 떠올리면 아무런 정취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풍경밖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그가 시인으로서 우리 곁에 오래도록 있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에게는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현실을 떠나 설움과 기쁨을, 고독과 다정을 주고받으며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나라로 데려다줄 시인이 필요하니까.
―조온윤 시인
•― 시인의 말
빗질을 한다
몸이 없어서
슬픈 몸을 가진 것들이
떨어진다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
더는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것들
검은 밭 위를 걸었다
나 아닌 것들의 군집
나 아닌 것들의 불신
육체 하나 가지고 있을 뿐인데
나와 무관하게
무성히 자라나는 감정들이
슬프도록 무서웠다
•― 저자 소개
이기현
2019년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슬픔을 더 이상 기억으로 만들지 말자
빛과 사랑과 당신 – 11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 14
머미브라운 – 15
야간 해루질 – 18
자애의 흔적 – 20
빛이 물드는 소리 – 24
미래의 종 – 27
당신의 장소 – 30
난연(難燃) – 32
제2부 그림자에도 그을리는 마음
선고 – 37
변방의 요리사 – 40
혈육애 – 42
휘슬블로어 – 44
암순응―변방의 시작 – 46
이상한 천국 – 50
수박이 미래였던 – 52
처단의 밤 – 55
건축된 숲―변방의 종교 – 58
제3부 다시, 사랑의 외벽 안에서
물소리 – 63
사랑의 외벽 – 67
여름의 가장 끝쪽 – 70
공원을 배회하는 감각 – 73
유실물 – 76
건설적인 서정 – 79
환절기 – 81
놀이터를 향해 – 83
종말이 정말로 – 86
제4부 우리는 우리를 마음껏 잊을 수 있다
헤이하이즈 – 91
풀잎들 – 93
하이 볼 – 95
유일무이 – 97
폴터가이스트 – 101
춘곤증 – 103
침잠 – 105
그저 세상의 끝 – 108
허공의 집 – 110
월동지 – 113
제5부 철골 같은 양각 문자를 문지르며
자유사격지대 – 117
해후 – 119
테이블 데스 – 121
섬은 바다의 마음 – 123
투광층 – 126
깡통 차기 – 128
또 – 130
계절감 – 132
퇴거 – 134
쌍두사 – 137
웃음 배우기 – 138
노이즈 캔슬링 – 140
해설 문종필 사소하지만 찬란해서 새들한 이방인의 언어 – 142
•― 시집 속의 시 세 편
슬픈 토우는 고래만큼
우리 놀이터 가서 놀자 손잡고 두꺼비 집을 짓자 누가 손 빼면 무너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그러나 우리 적요를 발설하진 말자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우리는 침묵에 대해 잘 아니까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을 모조리 소모하자 서로 구겨진 얼굴 사이사이에 낀 모래를 훔쳐 주자 샌드아트처럼 훔친 모래만큼 표정이 생겨나도
슬프니? 묻진 말자 슬픔을 더 이상 기억으로 만들지 말자 우리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는 향유고래의 등 위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자 석고를 뜨는 기분으로 우리 절대 손 놓지 말자 우리 약속들이 기항지에 정박한 선박들처럼 목적지가 모두 다르더라도
혼자 흔들리고 있는 그네의 등을 조용히 밀어 주자 얼굴부터 입수하기 시작하는 고래만큼 부서지자 우리 잉여의 빛이 머무는 해변이 되어 온종일 섞여 있자 우리 그러고 있자 ■
물소리
슬리퍼를 끌며 우리는 애월을 걸었다
많이 걸었고 솔직해졌다
뙤약볕 아래에서 물통을 건네는 네가
모자챙 그림자 안에서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소해
해변을 질주하다
바다에 입수하는
사람을 향해 하는 말처럼
물이 증명하는 것이
몸을 온전히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라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올 때
눈앞에서 사라진 것들은 분명
다른 어딘가에 입장했을 거라고
믿어 볼 수 있게 되어서
나는 어느 선사박물관에 있었다
수천 년이 지나 발굴된 물건들은
자신을 만지던 손길을 기억하고 있을까
손이 닿으며 생기던 음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정말 사소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기억할 수 있어서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은 누굴 보고 있습니까?
역시 그가 나는 아니겠지요
이런 질문은 어떤 목소리로 내야 할지
그렇지만 사소한 일이야
바다에 들어갔다가
젖은 몸을 이끌고 나와
다시 애월을 걷는 것쯤
누군가를 불러 보고 싶어서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잘 보존된 물통을 매만진다고 해도
단지 그곳엔 바다가 있을 테고
우리가 슬리퍼를 신고 걸었던
길목이 있을 테고
우리 둘만 기억되는 세상은
얼마나 어리숙할지
얼마나 사소할지
물통을 건넬 때
흔들리며 났던
수천 년 전의
물소리를 알아듣는 일처럼
그날 우리가 바다에 있었던 건
바다가 우리를 기억해 낸 일이었지 ■
유일무이
내 마음에만 내리는 줄 알았는데
온 세상에 눈이 쌓여 있었다
이불을 덮으면 덥고
맨몸으로 누워 있으면
사는 건 지겨운 일
나를 찾아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끈적거리는 침을 흘리며
씹을 것을 찾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절벽처럼
유일무이하고 싶다
유일무이하고 싶어
지겨운 사람들을
끝없이 지겨워했는데
오징어 다리를 뜯으며 너는
나에게 시간 따윈 쓸모없어 보이니까
내 시간을 가져다 쓴다고 했다
오래 살고 싶다면
그래도 되는 거야
누구도 날 평생 사랑해 줄 순 없는 것
온 세상이 눈에 덮여 있는데도
아무도 눈 속에 파묻혀 살고 싶진 않은 것
녹는 건 다 점성이 있어 보였지
일말의 감정 같은 것이
섞여 있을 테니까
내가 웃으면 너는 긴장을 했다
내가 행복을 말할까 봐
사람들이 한 가지 이야기만 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무서워졌다
다들 눈이 오면 밖으로 나가
변명처럼 눈사람을 만들었다
잘못 만들어진 건 아무것도 없어
신이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라면
신도 가끔 인간을 위해 기도를 할 거야
자신이 하는 기도를 들어주려고
그러니까 사는 건 지겨운 거다
세상이 단 한 사람이었다가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게
네가 가져간 내 시간을
되돌려 받을 수 없다는 게
무슨 기도를 하든
신밖에 들어줄 수 없다는 게
침을 삼켰다
겨울이었고
눈에 파묻힌 마음속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