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교과서 속 장소로만 기억되고 있는 유적지가 여전히 많다. 아무리 비틀어도 물 한방울 나올리 없는 마른 행주처럼 건조한 설명 자료와 그보다 더 '무감정한' 흑백사진이 덩그러니 배치되어 있는 교과서 속 유적지(그나마 사진이라도 있는건 다행이다) 는 학창시절 나에게는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유적지는 그저 역사 과목의 시험문제일 뿐이었다.
요즘은 인문학 열풍으로 교과서에 담겨있지 않은 재밌는 역사 이야기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역사는 말그대로 '이야기'인데, 왜 우리는 이제껏 '이야기 없는 역사'만 공부했을까. 좀 더 재밌게 공부했다면 아마 역사 과목은 늘 100점이었을텐데(물론 이는 변할리 없는 과거에 대한 너스레지만)
어찌됐건 그동안 머리속에 굳어있던 유적지를 내 발로 직접 다니며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답사여행의 목표다. 충주 탄금대 또한 그런 유적지 중 하나다.
탄금대 하면 연상되는 글귀는 단 한줄이다. '우륵이 가야금을 켜던 곳'
물론 맞다. 정확한 설명이다. 가야금의 장인 우륵은 탄금대에서 열심히 가야금을 켰다.
하지만 무미건조하다.
당대 뛰어난 음악가가 음악을 연주하던 곳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그리고 우륵이 자신의 조국 대가야를 버리고 신라로 망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탄금대를 둘러싼 재밌는 이야기가 한줄도 없다.
그리고 탄금대는 우륵 뿐만 아니라 또 한명의 걸출한 인재와도 관련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끝까지 결사항전했던 신립장군이다. 그럼 이제 탄금대에 얽힌 이야기를 찾으러 가보자.
우륵,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망명하다
얕은 언덕 주차장에서부터 탄금대가 시작된다. 탄금대 노래비부터 대흥사까지 잘 조성된 소나무 숲길까지 총 1시간 코스다. 봄날의 싱그러운 햇살과 연두색 잎사귀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나같은 고음불가 음치 조차도 이 평온한 분위기에 음악을 흥얼거리는데, 우륵 같은 대 음악가에게는 얼마나 음감을 자극하는 곳이었을지.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탄금대 입구

노래비에는 충주 출신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이 새겨져있다.
감자꽃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신경림은 권태응 시인을 '헐벗은 아이들의 가슴에 별을 심은 시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서른 넷 짧은 생애 동안 일본 제국주의와 병마와 맞서 싸우며 370여편의 동요를 남겼다. 짧은 시구절을 몇번을 읖조리본다.

우륵은 490년경 대가야 직할 현인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우륵은 30대에 가실왕에 의해 발탁됐다. 당시 대가야는 백제의 공세로 불안한 상황이었고, 가실왕은 신라와 동맹으로 백제에 맞서고자 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고 우륵도 그 중 한명이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고, 우륵이 12곡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중국의 쟁을 토대로 가야국의 천문관이 담긴 독특한 방식으로 가야금을 제조했다고 설명했다. 위가 둥근 건 하늘을, 아래가 평평한건 땅을 상징한다. 가운데가 빈 것은 천지와 사방을 본받고 열두개의 줄은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 가실왕은 우륵의 12곡을 통해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가야 세력을 결속시키고자 했다.
이렇듯 가실왕의 측근 세력이던 우륵은 어떻게 신라로 망명하게 됐을까.
대가야는 신라와 동맹을 맺었지만 양국간의 동맹은 깨졌고, 이 상황에서 대가야는 친백제계와 친신라계로 분열됐다. 이런 와중에 가실왕의 사망으로 우륵 또한 더이상 조국에 머물기 어려운 입지가 됐다.
결국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망명했다. 하지만 가실왕을 도운 우륵이 신라의 환대를 받긴 어려웠다. 우륵은 신라에 맞게 12곡을 5곡으로 줄여 편곡했다.
진흥왕은 우륵의 진가를 알아봤다. 551년 진흥왕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예비 답사로 충주(당시 낭성)를 방문했다. 이때 우륵과 그의 제자가 불려갔고 이곳에서 새롭게 지은 노래를 연주했다. 진흥왕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후 10년간 우륵은 진흥왕의 명에 따라 신라인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수했다. 신라는 가야금을 통해 신라의 예술을 보다 승화시켰다.






탄금대에서 바라본 남한강 물줄기
대흥사까지 함께 둘러보면 좋다



신립장군,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순국하다
탄금대에 얽혀있는 또 다른 인물은 신립장군이다. 신립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삼도도순변사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신립은 이곳에서 8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웠지만 결국 패전의 기미가 보이자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신립설화'에는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전하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신립은 어렸을 적부터 호랑이를 부리고 귀신도 알아보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관상을 잘 보는 권율은 신립이 삼국대장 재목이라고 사위로 삼는다. (실제로는 권율과 관련이 없지만)


신립장군과 8천병사를 기리는 탑
여기부터 가장 신비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신립은 사냥을 나갔다가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한 인가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소복을 입은 한 여인이 홀로 있었다. 그 여인은 자기 집에 종의 아들이 있었는데 주인과 종을 모두 죽여 자신만 홀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처녀는 종의 아내가 되든지 죽던지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립은 그녀를 도와주고자 그 집에 머물며 화살로 종을 쏘아죽였다. 여인은 살아남았고 신립에게 자신을 데려가라고 청한다. 하지만 이미 처자식이 있는 신립은 그 청을 거절했고, 그녀는 이튿날 집에 불을 지르고 자결을 한다.
결국 원한을 품은 여인으로 인해 신립이 조령이 아닌 탄금대에 진을 쳐서 왜군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신립은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로 조령에 포진을 했다. 하지만 꿈에 그 여인이 나타나 "장군님, 어찌 이렇게 험한 산에 포진을 하십니까. 저 넓은 충주 평야로 적을 유인해서 섬멸시키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탄금대에 진을 쳤고, 결국 일본에 패하고 만다.
신립이 충주전투에서 패한 건 지략 부족때문이지만, 구비설화는 원귀로 인해 실패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물론 사실 여부를 가늠할수는 없지만, 안타깝게 일본에 패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립장군의 원통함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열두대를 무심히 지나는 남한강 물줄기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탄금대에 남아있는 열두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