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은 고 오근재 교수 (홍익대 )가 한국 패키지 디자인 40년 역사에 대하여 협회 책자에 기고한 글의 일부로서 완성본은 아니고 책이 편찬 되기전 돌아가셨다.
한국의 포장디자인 태동기.
한국 포장디자인의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국의 인쇄 기술의 발전과정을 먼저 고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포장 디자인은 인쇄술에 맞춰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 인쇄기술의 발전 과정.
1)목판 인쇄
중국에서는 서기 220년경 암흑 시대를 거쳐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천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때 불교가 가장 뿌리 깊이 내리고 있었으며 이 불교가 인쇄술 발생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목판인쇄는 대개 7세기 중엽부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40~50년에는 작은 불상, 경전, 지폐 등을 인쇄하였으며, 그 기술은 동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세계 최고의 오래 된 현존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서기 751년 간행, 신라)
1967년 9월 16일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었다. 두루마리 1축(軸)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이 경문은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되던 1966년 10월 13일 탑신부(塔身部) 제2층에 안치된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때 석탑 내부에서 함께 발견된 총 28점의 일괄유물이 67년 9월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경문은 한 폭(幅)에 55~63행, 한 행에 7~9자씩으로 되어 있으며, 상하(上下)는 단선(單線)이고, 필체는 힘찬 해서(楷書)로서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 특히 북위(北魏)의 서법(書法)을 연상하게 한다.
이 《다라니경》의 출간연대 상 ․하한(上下限)은 700년대 초에서 751년 사이로 추정하는데, 그 까닭은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집권한 15년 동안에만 주로 통용되고 그후에는 자취를 감춘 신제자(新制字) 4자(注[證] ․澍[地] ․全[授] ․葺[初])를 이 경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최소한 석가탑의 건립연대인 751년을 그 하한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인경(印經)으로 알려진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770년 인쇄)보다 20년이 앞서는 셈이고, 지질(紙質)이나 인경의 형태를 보더라도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조판(雕板)되었음이 확실하므로, 한국 고인쇄문화(古印刷文化)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백만탑다라니경 (百萬塔陀羅尼經, 서기 770년 간행, 일본)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서기 868년 간행, 중국)
1986년 10월 15일 보물 제877호로 지정되었다. 1축(軸)이며 권자본이다. 서울 김종규(金宗圭)가 소장하고 있다. 금강경을 주경(主經)으로 하고, 설법도(說法圖)․보공양진언(普供養眞言)․발원문(發願文)․반야심경(般若心經)․묘법연화심경(妙法蓮華心經) 등을 수록하였다. 권자본 형식으로 판각하고 34.5cm×32cm 크기의 전지(全紙) 71장에 찍어 권축(卷軸)과 표죽(竹) 없는 두루마리의 것이며, 지질은 자색닥종이[楮紙]이다.
권말(卷末) 간기에 의하면, 1357년(공민왕 6) 전주에서 우파새(優婆塞) 김저(金貯)가 입수한 책에 의거, 덕운사사문(德雲寺沙門)인 지선(志禪)과 조환(祖桓)이 간역(刊役)을 맡고, 성주(省珠)․법굉(法宏) 등의 각수(刻手)가 새겨 완성한 것이다.
[목판 인쇄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
이 거대한 역사(役事)는 불교를 흥왕(興旺)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문화국으로서의 위력을 이웃나라에 선양하고,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타개함으로써 호국(護國)하겠다는 대발원(大發願)에서 이룩된 것이다.
이의 조조(雕造)는 오랜 시일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제일 처음 조조된 것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또는 《초판고본대장경(初板古本大藏經)》이라고 하는데, 1011년(현종 2) 거란(契丹)의 내침을 계기로 시작되어 1087년(선종 4)까지 7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초장경(약칭)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송(宋)의 개보판(開寶板) ․거란본(契丹本)과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국내본(國內本) 등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대반야경(大般若經)》(600권) 《화엄경(華嚴經)》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의 경판(經板)을 만들었다.
그 후 문종(文宗)의 제4왕자인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송나라에서 각종 장소 3,000여 권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1073년(문종 27)부터 1090년(선종 7)까지 이 교장(敎藏)과 불서(佛書) 모은 것을 엮어 이를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이라 하고 이 목록에 의하여 차례대로 인간(印刊)한 것을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그 후로도 흩어져 있는 불서를 모아 간행하였는데, 그 일은 그가 죽기 2년 전인 1099년(숙종 4)까지 계속되어, 모두 1,010부 4,740여 권이 인간되었다.
제1차로 완성된 이 정장(正藏)은 그 경판이 부인사에 이관, 소장되어 있었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초조대장경》은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사[南禪寺]에 1,715권이 남아 있고 《속대장경》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및 일본 나라[奈良]의 도다이사[東大寺], 나고야[名古屋]의 신후쿠사[眞福寺] 등에 각각 흩어져서 겨우 47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고려는, 호국(護國)을 위한 부인사의 《대장경》이 소실되자, 이 외침을 물리치기 위하여 다시 대장경을 조조하여 불력의 가호를 빌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새로이 설치하고, 1236년(고종 23)부터 1251년(고종 38)까지 재조(再雕)대장경을 완성시켰다. 이것은 처음 강화도성(江華都城) 서문(西門) 밖의 대장경 판당(板堂)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후에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고, 그 후 조선 초기에 서울의 서대문 밖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다시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로 옮겨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 《재조대장경》은 구목록(舊目錄)의 천(天)~동함(洞函)에 이르기까지 639함(函)에 엮어져 부수는 1,547부(部), 6,547권(卷)이며, 추가목록의 동(洞)~무(務) 및 중복된 녹(祿)~무함(務函) 24함에 들어있는 15부, 231권(혹은 236권)을 합하면, 모두 663함 1,562부, 6,778권(혹은 6,783권)이며, 경판의 수는 8만 1258판이 되고, 이것이 안팎으로 새겨져서 16만여 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세칭 《팔만대장경》이라고 한다.이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그대로 다시 조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저본으로 한 것은 사실이나, 송 ․거란본과도 대교(對校)하여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고쳤고, 빠진 것은 그것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초장경 때에는 없었던 《송조신역경(宋朝新譯經)》과도 대교(對校) ․고감(考勘)하였고, 《개원록(開元錄)》 《속정원록(續貞元錄)》 등의 불서목(佛書目)도 참고하여 본문을 다양하게 보완하였다. 이런 노력 끝에 이루어진 이 대장경은, 중국 북송(北宋)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 이후 각종 《대장경》이 잇달아 조조되었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본문이 충실하며 오탈(誤脫)이 적다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정평(定評)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축쇄장경(縮刷藏經)》을 만들어내었고, 잇달아 중국에서도 청나라 말에 《빈가정사장판(頻伽精舍藏板)》을 내놓았다.
《대장경》의 조조는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국난의 시기에 초조판부터 헤아려 실로 240년이라는 장구한 시일을 통하여 이룩한 거국적 대사업으로, 대장경의 인쇄를 둘러싸고 경쟁하였던 송 ․거란에 대해 문화국으로서의 위신을 드높였을 뿐 아니라, 인쇄술과 출판술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2)찰흙활자
중국 송나라 필승은 1041~1048년에 걸쳐 찰흙에 문자를 새겨 이것을 구워서 활자를 만들었다. 조판할 때는 철판에 밀랍과 송진, 종이 가루를 혼합한 것을 깔고 여기에 활자를 배열하여 한 판이 되면 아래서 열을 가해 밀랍이 녹으면 위에서 평면의 판자로 눌러서 지면을 고르게 하였다.
이것을 냉각, 고정시킨 다음, 여기에 잉크를 묻혀 종이를 놓고 문질러 인쇄하였다.
인쇄가 끝나면 다시 철판에 열을 가해서 활자를 빼내어 찾기 쉽도록 정리하여 나무 상자에 보관하였다. 나무 활자로 못한 이유는 나무에 결이 있고 물을 흡수하면 높이가 달라지고 판면이 평면으로 되지 않으며, 한번 접착제로 부착시키면 떨어지지 않는 결함이 있었다 한다.
3)나무활자
필승의 찰흙활자를 발명한 때부터 약 270년이 지난 1312년에 중국 원나라의 왕정이 나무활자를 만들어 자신이 쓴 농업에 관한 책을 22권 간행하였다. 나무활자를 만들 때에는 목판에 문자를 새겨 그것을 가느다란 톱으로 한 자씩 잘라내어 작은 칼로 4면을깨끗이 깍아서 크기와 높이를 일정하게 하였다
4)동활자
1234년(고려 고종 21년) 부터 41년 사이에 동활자를 사용하여 상정고금예문 50권을 인쇄하였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 이상국집에 이책을 고종 21년 금속활자로 인쇄하다라 기록이 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1400년경 조선시대 태종은 전용주자소를 설치하여 1403년 서울남산의 왕립주자소에서 조선최초의 주조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선보였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계미자는 경자자, 초주갑인자, 재주갑인자를 거치면서 보다 아름다운 필서로 다듬어졌으며, 한글이 창제된 세종조에는 국한문 혼용의 석보상절(釋譜詳節)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5)금속활자
1445년 구텐베르크가 납활자를 발명하여 포도 짜는 목제 압착기를 개량하여 인쇄기로 사용하였다. 또 그는 활자의 납에 주석과 안티몬을 넣어 납활자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었다. 한편, 1234년(고려 고종 21년)부터 41년 사이에 동활자를 사용하여 상정고금예문 50권을 인쇄하였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 이상국집에 이책을 고종 21년 금속활자로 인쇄하다라 기록이 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만 당시 유물이 전해지지 못한 것이 애석한 일이다 고려 우왕 3년 (377년) 에 충주 교외에 흥덕사에서 주자 간행한 책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현존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철이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5. 세계의 인쇄역사
처음에는 모든 문서가 사람의 손에 의해 일일이 필사되었는데, 인쇄술은 그러한 문서를 용이하게 복제하는 수단으로서 발명되었다. 인쇄술이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이미 고대에 발명되어 많이 이용되고 있던 인장의 압인(押印)․날인(捺印)이나 석각비문(石刻碑文)의 탁인(拓印)등이 그 발명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쇄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종이는 105년에 중국의 채윤(蔡倫)이 발명하였다. 최초의 인쇄방법은 판재(板材)에 문자나 그림을 새기고 그 표면에 잉크(먹물 등)를 묻혀 그 위에 종이를 놓고 문질러서 찍어내는 목판인쇄로서 중국에서는 이미 당(唐)나라 때에 실용되어 작은 불상․경전․지폐 등을 인쇄하였으며, 그 기술은 점차 다른 나라로 전파되었다. 한국의 목판인쇄도 7세기경인 삼국시대 말경부터 통일신라시대 초에 걸쳐 실용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현재 남아 있는 인쇄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인쇄물인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 속에서 1966년에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인데, 이것은 751년(통일신라 경덕왕 10) 이전의 목판인쇄물로 보고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770년에 인쇄된 《햐쿠만토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과 중국에서 868년에 인쇄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과 같은 인쇄물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오래 된 인쇄물이다. 고려시대에 각판되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판목도 목판인쇄에 쓰이던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목판인쇄술은 유럽에도 전해져서 카드나 성화 등을 인쇄하는 데 많이 이용되었으나, 15세기 중엽에 활판인쇄가 발명되면서 미술 분야에서 주로 이용하게 되었다. 1423년의 《성크리스토퍼의 도하(渡河)》와 1560년의 《알브레히트 뒤러》 등은 목판인쇄물의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목판인쇄물에서 판화를 볼 수 있는데, 1434년의 《삼각행실도(三綱行實圖)》, 86년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등의 삽화가 알려져 있다.
금속활자는 한국에서 일찍부터 발달하여, 고려시대 1234년에 동활자(銅活字)를 사용해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50권을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403년(태종 3)부터 수년 간에 걸쳐 동활자 수십만 개를 주조하여 서적 인쇄에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계미자(癸未字)이다. 1945년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납활자의 주조에 성공, 이것을 조판해서 포도압착기를 응용하여 만든 평압식(平壓式)인쇄기로 성서를 인쇄하였다.
이것은 인쇄기를 이용한 최초의 볼록판인쇄로서 수년 사이에 유럽 각지에 퍼졌다. 60년경 이탈리아의 피너게라는 금속판의 표면을 부식시켜 오목판을 만들어서 오목판인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였으며, 1798년에는 독일의 A.제네펠더가 자기 고장에서 산출되는 대리석(석회석의 일종)에 인쇄잉크(쇠기름을 원료로 한 것)로 글씨를 쓴 다음 질산으로 대리석판을 부식시켜 볼록판을 만들어서 악보 등을 인쇄하는 동안, 이 대리석이 다공질(多孔質) 로서 수분을 오래 지녀 지방성인 인쇄 잉크를 받지 않는 점에 착안해서 석판인쇄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평판인쇄의 시초가 되었다.
이리하여 18세기 말까지 볼록판(목판․활판)․오목판(조각 오목판․에칭)․평판(석판) 등 세 가지의 기본적 인쇄방법이 고안되었다. 19세기가 되면서 프랑스의 니에프스와 다게르에 의해 사진술이 발명되고, 1839년 영국의 폰턴에 의해서 중크롬산 젤라틴액의 감광성 내산물(感光性耐酸物)이 발견됨으써 사진제판이 고안되어, 마침내 67년에 독일의 알버트에 의해서 콜로타이프 인쇄로서 실용화되었다.
또, 망목 스크린과 감광제 등의 발명으로 사진판․원색판․그라비어 인쇄(1893)․오프셋 인쇄(1904)등의 인쇄방법이 계속 고안 되었다.
한국에 근대식 인쇄방법이 도입된 것은 1883년(고종 20) 정부가 인쇄기계와 납활자를 수입하고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 이어 84년부터 근대식 인쇄기계와 납활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곳은 광인사인쇄공소(廣印社印刷公所)였는데, 최초의 인쇄시설은 수동식 활판기였다.
사진제판 시설이 처음으로 도입, 설치된 것은 1920년경이다. 한편, 근대에 이르러 출판물 생산의 증대와 신속성의 요구는 인쇄기계의 개량을 촉진하게 되었다. 1868년에 영국에서 발명된 두루마리용 활판윤전기는 계속 개량․연구되어 점차 정밀․고속화하였다. 대량의 인쇄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인쇄기의 판을 부착시킨 부분과 종이를 사이에 두고 위로부터 압력을 주는 부분이 원통형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필요 조건으로 되었다. 그 때문에 볼록판에서는 지형(紙型)이 발명되고, 지형에서 원통형 연판(鉛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평판의 경우에도 아연판에 제판해서 이것을 원통형으로 둥글게 말아 판을 만들며, 오목판에서도 구리 원통판을 부식해서 판을 만들어, 윤전기에 의해 대량 인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근래에 사진과학․전자공학․합성수지 공업의 발달로 인쇄는 계속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서, 입체사진인쇄․전자사진인쇄․화장판건축재인쇄․직물용날염인쇄와 비닐․폴리에틸렌에 복제하는 인쇄를 촉진하였다. 한편, 전자공학을 응용한 제판법이 발명되어 원색원고를 정밀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전자색분해기(電子色分解機)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 특히 이들 기계에 쓰이는 광원도 레이저광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중심도시에서 제판은 신문을 전송사진으로 먼 곳에서 보내어 제판하고 인쇄하는 팩시밀리에 의한 오프셋 인쇄도 개발되었으며, 잉크를 쓰지 않고 다수 복제하는 인쇄기와 정전기구(靜電機構)를 응용하여 순간적으로 판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판을 만들지 않고 사진 원고에서 직접 인쇄물을 만드는 전자인쇄 등도 발명되었다. 이 밖에 인쇄배선(印刷配線)․자성(磁性) 녹음 시트의 인쇄, 자성 잉크에 의한 수표의 인쇄, 자동개찰 승차권, 형광 잉크에 의한 교통표지 인쇄 등 급속한 발전이 거듭되고 있다. 문자조판 분야에서도 납활자를 사용해서 수공적(手工的)인 방법으로 하던 문선(文選)․식자(植字) 등의 작업방식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사진식자(寫眞植字)방식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인쇄기 분야에서도 숙련기술자만이 하던 기계조작을 컴퓨터가 할 수 있도록 점차 개량되어 인쇄에 컴퓨터 시대가 열리고 있다.
6. 직지에 대하여
1)직지란
청주흥덕사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책의 이름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 心體要節)」이다. 이 책의 이름을 줄여서 「불조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책' 전시회에 「직지심경」이라 소개되면서 한때 잘못 불리기도 하였다. 불교에서 '경(經)'은 불교경전을 뜻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한 의미에서 불경이 아니므로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다. 여기에서는 판심제(版心題)에 나타나는 가장 간략한 책의 이름으로 「직지」라고 부른다.
2)직지의 편저자
「직지」를 편저한 백운화상의 호는 백운이고, 법명은 경한(景閑, 1298~1374)이다. 백운은 1298년(충열왕 24)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였다. 1351년(충정왕 3, 54세) 5월에 중국 호주의 석옥(石屋)선사에게 불법을 구하였다. 석옥선사로부터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을 전해 받고 불도를 닦아, 1353년(공민왕 2, 56세) 정월에 마음을 밝혀 불도를 체득하였다. 또한 백운은 인도의 고승 지공화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 황해도 해주의 안국사와 신광사 등에서 주지를 지내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 1372년(공민왕 21, 75세)에 성불산 성불사에서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상․하 두권으로 「직지」를 편집하여 저술하였으며, 1374년(공민왕 23, 77세)에 여주 취암사에서 입적(入寂) 하셨다.
3)직지의 체제와 내용
「직지」의 체제는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은 현재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 1책(총 38장)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전하고 있다.
취암사에서 간행된 「직지」 목판본은 상․하권이 완전한 1책으로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및 영광 불갑사에 소장하고 있다. 금속활자본만으로는 알 수 없는 체제나 내용을 목판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직지」는 석옥선사가 전해준 「불조직지심체요절」에 「선문염송」과 「치문경훈」 등에서 그 내용을 보완하고 과거 7불(佛)과 인도 28조사(祖師), 중국 110선사 등 145가(家)의 법어를 가려 뽑아 307편에 이르는 게․송․찬․가․명․서․법어․문답 등을 수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선사로는 유일하게 신라 대령선사(大領禪師)가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체>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名句)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4)직지를 간행한 사람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제작광경] 「직지」를 1377년에 청주목(淸州牧) 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하는데 연화문인(緣化門人) 석찬(釋璨), 달잠(達湛), 시주 비구니 묘덕(妙德) 이라는 간행 기록이 있다. 석찬은 「백운화상어록」 상․하권을 모아서 기록한 백운화상의 수행비서격인 시자(侍者) 였다. 특히 비구니 묘덕은 흥덕사 금속활자본과 취암사 목판본의 「직지」 간행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석찬과 달잠은 모두 백운화상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간행하게 되었다.
5)직지의 프랑스 소장 경위
「직지」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 경위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우리나라에 근무하면서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하였는데,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직지」의 수집경로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1901년에 저술한 「조선서지」의 보유판에 게재된 것으로 보아 1900년경에는 이미 수집되었으며, 1911년 드루오호텔에서 경매되었다.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다. 그러나 금속활자본 「직지」는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6)직지의 재발견
◀흥덕사지 발굴장면 「직지」는 1901년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저술한 「조선서지」보유판에 수록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물과 내용은 확인되지 않다가 1972년 "세계 도서의 해(International Book Year)"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써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직지」의 간행 장소인 청주 흥덕사도 1985년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됨으로써 오늘날의 청주 흥덕구 운천동 866번지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계기로 1986년 충청북도 주최로 열린 <청주 흥덕사지 학술회의>를 통해 흥덕사가 학계에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92년에는 흥덕사 터의 정비와 함께 청주고인쇄박물관을 개관하였다.
2000년에는 「직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직지」를 등재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 받게 되었다.
7)직지의 판본
◀금속활자본 직지 영인본
금속활자본 「직지」는 1377년(고려 우왕 3) 7월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으며, 본래 상․하 2권이었으나, 현재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째 장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하권 1책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Manuscrit Orianteaux)에 소장되어 있다.
「직지」 하권의 판식(版式)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계선이 있다. 반엽(半葉)의 행자수(行字數)는 11행 18~20자이며, 주문(註文)은 쌍행이다. 판심에 어미는 없고, 판심제는 「직지(直指)」이며, 권말제(卷末題)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책의 크기는 24.6 17.0cm이며, 다섯 구멍을 뚫고 붉은 실로 꿰맨 선장본(線裝本)이다.
종이는 전통한지에 인쇄되었으며, 전체가 배접되어 있다. 표지는 능화판 문양과 종이로 보아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377년이라는 연대와 함께 주조된 활자로 인쇄되었다고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국 인쇄본이다"라고 모리스 꾸랑의 기록이 있다.
금속활자본 「직지」에 나타나는 금속활자본으로서의 특징은 -
① 본문의 항렬(行列) 이 바르지 않고 비뚤어져 있으며, 그 중에는 글자가 옆으로 비스듬 하게 기울어진 경우도 있다.
② 인출(印出)된 자면(字面)에서 나타나는 묵색(墨色)의 농도 차이가 심하고 반점(斑點) 이 나타나있는 경우가 많다. -
③ 일(日)이나 일(一) 등의 글자는 아예 거꾸로 식자된 경우도 있으며, 어떤 글자는 인쇄 도중에 탈락된 경우도 있다.
④ 동일 면에서 동일한 활자의 같은 글자모양이 보이지 않으나, 동일한 활자가 다른 장에 서는 사용되고 있다.
⑤ 글자의 획에 너덜이와 티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7. 무구정광대 다라니경
다라니경이란 탑을 조성한 다음 불경을 염송함으로써 성불한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경전(기도문)으로서, 탑속에 이를 수납하는 것이 풍습으로 되어왔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다라니경의 전문을 인쇄한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보 126호로 지정․복원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라니경은 1200년 동안 좀벌레에 그 두루마리 일부가 침식되어 있던 것을 복원했다.
원지의 수축도․신장도․평량 등을 추․측정하여 그것과 같은 닥종이를 떴다. 이것을 결손모양과 동일하게 하여 원지와 땜질 종이와의 인접선은 섬유 한가닥 한가닥을 짜깁기식으로 서로 교차시켜 처리하였다. 그리고 원지보다 폭과 길이가 약간 큰 아주 얇은 닥종이를 떠서 배접하였다.
복원이 완료된 종이원지의 크기는 6.7cm×6.228인데, 54cm정도의 종이 12장을 이어서 약 6m가량으로 만든 두루마리 종이이다. 종이에 무리를 덜어주기 위해서 작은 심봉을 수납하는 큰 지름의 심봉을 따로 만들어, 거기에 배접한 종이부분이 물려 감기도록 했다.
1)발견 경위
1966년 10월 14일 경주 불국사석가탑 해체 공사중 2층 탑신, 탑석, 상륜부를 해체하자 사리 장치가 나타났다. 탑신 복판 사방 41cm, 깊이 18cm의 네모반 듯한 사리공에는 황산동의 동녹이 슨 금동제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고, 그 둘레에는 목재소탑, 동경, 비단, 향목, 구슬 등이 가득차 있었다. 다라니경은 상하괴선 행팔자로서, 네모난 금동 사리함 안의 서쪽 구석에 안치된 또 하나의 장방형 금동 소사리함 위에 비단보에 싸여서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닥종이로 된 두루마리였다. 이 권자본 다라니경 끝에는 죽심 권축이 있었고, 경의 폭은 6.7cm, 길이는 6m가 넘었다.
2)학적고증다라니경이 세계최고지라는 학적 고증으로 첫째 측천무후의 변조문자를 든다.측천무후변조자란 당나라 고종의 황후 측천무후(서기 690~705통치) 가 100자 정도의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이다. 이 변자들의 사용 기간은 그의 사후 약 100년 동안으로 금석학상 시대고증재료로 활용된다. 김두종 박사는 측천무후 변자를 발견하고 이 종이는 최소한 불국사 중창시 석가탑을 세울 때 경주근처에서 만들어진 닥종이라 했다.
둘째, 또 다른 고증으로 석가탑 창건이래 수리나 해체 여부에 관한 자료로 일본의 사원연기에 해당하는 우리나라의 [불국사고금창기]를 들 수 있다. 752년 석가탑 건립 기록에 목판인쇄 된 다라니경 수장 기록은 없으나 건립 후 수리․해체에 관한 기록도 없다. 13세기 조선에 대한 몽고란, 풍신수길에 의한 임진왜란, 조선초의 극단적 배불숭유에 의한 박해 등 불국사가 여러번 재난을 당했으나 [고금창기]의 기록이나, 발견당시 탑내 상태로 보아 한 번도 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751년 창건연대의 확실성 여부는 불국사의 주요건물과 탑은 751년에 완성되었다는 연구로 받쳐진다. 또한 무구정광 다라니경이 당나라 스님 미타산에 의해 한역된 것이 704년으로 신라에 전래되어 706년에는 경주황복사 삼중석탑 내에 다라니경의 사본이 봉납되었다는 것이 유품인 금문에 의해 확인된다. 따라서 다라니경의 제작연대는 704~751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다라니경에 쓰인 측천문자의 연대도 일치한다.
일본의 다라니회 회원인 어떤 출판 연구가의 견문기를 보면, 도대체가 훌륭한 서체입니다. 우리 [백만탑다라니]의 글씨는 상당히 치졸합니다만 이것은 차원이 다르게 정돈된 풍격이 있는 서체입니다. 아마도 이 다라니결을 팠을 무렵에는 이미 목판의 조판인쇄 기술이 상당히 진보하고 있었을 듯 합니다. 천지 8cm의 한지로 보이는 얇은 용지는 이미 아주 다색으로 변질되어 있습니다만, 글자의 먹색은 아직 매우 선명하고 돋보입니다. 또한 볼록판으로 인쇄했을 때 글자의 선이나 괴선의 가장자리 부분으로 잉크가 몰려 안쪽이 엷어지는 현상인 marginal zone이 천지에 있는 괴선부분에서 확인된 것으로 볼록인쇄임이 확실하다고 하였다.
김상기 박사는 우리 것이 인쇄시기를 측천무후의 사후 40년 경으로 보고, 이것이 사본이냐 인쇄본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자체가 뚜렷하게 확정 되어 있고 나무의 결이 보이는 걸로 목판 인쇄물이라 밝혔다. 김두종 박사는 다리니경의 중국 인쇄물을 석가탑에 안치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리만의 필체를 증거로 삼아 당시 통용되던 인쇄라기 보다는 사리탑에 넣기 위해 만든 특별한 보물이라 했다.
결론적으로 석가탑 다라니경의 인쇄시기를 석가탑 건립이전에 찍은 것으로 보고 서기 706년 혹은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고 최하한선을 건립년인 서기 751년으로 잡고 있다.
3)사적의의
종전까지 알려진 세계최고의 인쇄물은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고, 간행연수가 기록된 세계최고의 인쇄물은 중국의 [금강반야바라밀경]로 1908년 영국의 스타인경이 중국 돈황 석실에서 발견하여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간 것이다.
일본의 [백만탑 다라니경]은 서기 770년에 새긴 것으로 다라니경보다 적어도20년 이상 후의 것이고, 중국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서기 868년 당의종 함통 9년에 목판을 만든 것으로 다라니경보다 최소한 118년 후의 것이다.
손보기 박사는 다라니경이 목판 12장에 새겨서 찍은 것으로 그 글씨 모양과 지질이나 규모에 있어서 [백만탑 다라니경]과 비교가 안된다고 평했다. 과학사가 전상운 교수는 다라니경이 한국에서 목판인쇄물의 발달이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닥종이이다. 즉 우리조상들은 삼국시대 때 이미 닥을 종이의 원료로 해서 1,200년 이 넘게 보존 가능한 현대의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품질의 종이를 제조하였다. 우리의 닥종이가 1200년을 탑속에서 보내고도 형체를 보존하고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제지 기술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
포장디자인의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서 인쇄술의 발전 과정을 먼저 고찰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춘천 인쇄박물관 견학.)
우리나라 인쇄기술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외국에 비해 대단히 앞서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모두 활자에 의한 도서 출판 인쇄에 국한된 것이고 상품 포장을 위한 인쇄술의 발달은 아니었다.
우리보다 먼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현대 인쇄술이 우리보다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1910년 ~ 1945년)에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들어오고 한국에 생산 공장도 만들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마케팅 활동을 하면서 일본의 인쇄기술이 한국에 진출하게 되고, 일제 30년간 상당한 수준의 인쇄기술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은 일본인 인쇄소에서 일할 수 있었고 인쇄 기계를 다루는 법이나 인쇄방법 등을 어깨넘어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포장디자인의 발전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백화점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1906년에는 일본의 미스꼬시 백화점이 서울에 지점을 설립, 한국인에게 일본의 과자류와 식품등을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일본에서 팔거나 군납용 식품등을 한국에서 만들어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일본 군부대에 납품한 것으로 보인다. ( 자료 인쇄물 ) 그러다 1929년 미스꼬시 백화점을 정식 지점으로 승격 시키고 본격적으로 마케팅 활동을 벌인 것으로 사료에 의해 분석 되었다. 백화점의 탄생은 포장 디자인의 발전과 시각디자인의 발전은 물론 인쇄 기술, 인쇄기계, 인쇄 산업 전반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다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시 인쇄물의 견본을 분석해 봐도 요즘 인쇄술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기술들이 관찰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 도무송 (톰슨)기술, 엠보싱 기술, 금박 금분 인쇄기술, 원색 분해 제판 기술 등)
1932년,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인에 의해 원색 분해 기법이 도입된 것으로 자료에 의해 조사 되었다.
1920년 충무로 진고개에 (지금의 대한극장 주변) 일본의 자본으로 平田 백화점이 설립되었고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모든 공산품과 식품들이 한국에서 생산되고 포장되고 인쇄되어 판매되었다. (자료참조)
1930년에는 한국인의 자본에 의해 종로3가에 화신 백화점이 설립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많은 사람의 호감을 사기도 하였으나 1980년경 화제로 인한 폐업을 하게된다. ( 화신 백화점 역사 재 고찰 필요 )
( 당시 화신 백화점에서 사용되었던 포장지와 라벨 디자인 인쇄물자료 참조 )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는 박문국 ( 博文局 )으로서 1883년 설립되어 신문 잡지등을 인쇄하는 출판기관이었으며
1884년에는 민간 기관으로 광인사 (廣印社)가 설립되었으며 1885년에는 배제학당 내에 인쇄소가 설립되어 주시경 최남선 등에 의해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하였다. ( 확인 필요 )
1945년 일본의 패망, --> 일본 철수 --> 인쇄소 패쇄
일본인이 경영하던 인쇄소 주요시설 반출
일부 한국인이 인쇄소 접수. ( 다시 인쇄기술 낙후 )
1950년 6.25 동란으로 모든 인쇄소 파괴 ---> 목판 인쇄, 석판 인쇄 ( 데비기) 수준으로 전락
1960년 이승만 정권 하야
이로부터 10년동안 옵셑, 동판, 그라비아 인쇄술 발전.
제과류, 화장품류, 대량생산 체제에 맞는 인쇄기술 발전.
1970년대 해태 디자인실 - 장윤호, 신정필, 권정식, 박준배, 김종호, 주영원, 디자인실과 광고부 겸.
1973년 최초, 해태 디자이너 공채 - 최광. 전후연, 유한태.
1975년 해태 디자이너 13인전 시작 - 장윤호, 신정필, 민덕현. 권정식, 박준배, 주영원, 김종호, 최광, 전후연,
유한태, 강민구, 이면희, 윤성희,
1978년 서울 패키지 디자인 협회 탄생 ---> 도시 브랜드를 협회명으로 사용. - 김종오 ( 디자인 포장 쎈터 ) 권고.
1980 년 한국 패키지 디자인 협회로 변경.
--------------------------------------------------------------------------------------------
인터뷰 관련.
켄류 ( 깡통) 인쇄와 제관 디자인 스토리 ---> 선정근 인터뷰 ( 삼화제관 근무)
유리공예 기술 관련 ---->
포장 산업 관련 인터뷰 ----> 김 청
포장 기술 관련 인터뷰 ----> 김영호
전기 전자류 ---> 금성사, 화성,
화장품 류 ---> 아모레
제약류 ---> 유한, 동아, 안국,
식품류 ---> 해태, 롯데, 오리온
생활용품류 --->
--------------------------------------------------------------------------------------------
일본인이 경영하던 영강 제과 ---> 박 병규외 4인이 인수, 해태제과 설립.
첫댓글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인쇄의 발전단계에 한가지 첨가 하고 싶습니다...
평판에서 아연판 이전에 원시적 석판 인쇄가 있었습니다.
석판에(대리석?) (해먹)이라는 유성 먹으로 원고( 글/그림)를 작성하고 로라로 유성잉크를 입힌다음
종이를 올려 압축해서 종이에 인쇄 하는 방식....그러므로 석판 원고는 반대로 작성해야 합니다.
또 실크인쇄의 원조라고 할수 있는(등사기)인쇄도 있었음을 참고로 알리고 싶습니다.
석판 인쇄가 돌판 인쇄를 말하는건 아니고 아연판에 손으로 해먹으로 그려 판화 찍듯이 인쇄하는 일명 데비끼 인쇄를 말합니다. 자세히 설명 하기에는 지면과 시간이 없어서 아연판 인쇄라고만 했읍니다. 등사기 인쇄도 있긴 했으나 등사기는 디자인 보다는 교과서나 시험지 수준이었으므로 패키지 디자인에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낙화유수님의 인쇄에 대한 관심과 뎃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