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濯溪先生 神道 碑文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
司圃署別提 沙斤道察訪 濯溪全先生神道碑
초계(草溪)고장을 연고지(緣故地)로한 유학자(儒學者)이신 선인(先人) 탁계전선생(濯溪全先生)은 西紀 1596年(宣祖29) 12月 13日에 별세(別世)하시니 향수(享壽) 70世로 장수(長壽)하셨으며 명년(明年) 2月에 집에서 멀지않은 매야산(梅野山) 감리(坎離)에 장례(葬禮)를 치르셨으며 동방(東邦)제일의 전서체(篆書体) 대가(大家)이신 영의정(領議政) 허목(許穆)先生(號는 眉叟요 諡號는 文正公) 께서 그무덤에 묘지명(墓誌銘)을 쓰시고 채유후(蔡裕後)先生(號는 湖洲요 諡號는 文忠公) 께서 뒤이어 비문(碑文)을 지어시니 고인(故人)의 덕행(德行)과 업적(業績)을 열어 그윽히 빛나게하니 진실(眞實)로 평소 행적(行蹟)이 중엄(重儼) 하시고 후세(後世)에 끼침이 적지 않으시다.
그 뒤 조정(朝廷)으로부터 유림(儒林)에 토론(議論)하여 세차례 증직(贈職)을내려 재상(宰相)의 직분(職分)에 정당(正當)한 벼슬에 이르러니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신도비(神道碑)를 세워야 함에도 결과(結果)를 얻지 못한지 이제 80餘年이라 또 그간의 세대(世代)가 변천(変遷)하니 학문적아취(學問的雅趣)가 줄어들어 다시 당시의 위치(位置)를 얻기 어렵고 바라는바는 전일(前日)을 견주어보나 떳떳이 잡기가 같이 못한바이다. 후손(後孫)과 사림(士林)이 다함께 크게애써 근심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제와서 그일을 도모(圖謀)하니 비록 그때를 얻지못하나 모든 사람이 어질기를 옛과 같이 못하다고해서 마침내 탁계선생(濯溪先生)을 섬길봐가 없을까보냐?
이때일의 절차를 밟아 그 큰일(濯溪先生의 碑文)을 감당할수 있을까 하고 고요히 생각하니 先生(濯溪)은 저(榥)의 선조(先祖) 문정공(文貞公)(金宇웅 號는 東岡)과 교의(交誼)가 있으셨고 후인(後人)이 세대(世代)로 같은 강학(講學)을하고 더불어 그 근심하는 바를 들어면서 그일을 시험(試驗)해보지도 않으면 크게 망령(妄靈)되지 않을지 알 수 없고 념려(念慮)되어 삼가 선생(先生)의 행장(行狀)을 상고(詳考)하니 휘(諱)는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사의(士毅)이시고 탁계(濯溪)는 그 스스로 호(號)를 표(表)한 것이다. 전씨(全氏)의 본관(本貫)이 처음부터 전주(全州)인것은 충정공(忠貞公) 휘(諱)에 집(潗)께서 고려말(高麗末)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한 공로(功勞)로 인해 완산(完山)의 군(君)으로 봉(封)하셨으니 완산(完山)은 곧 전주(全州)의 옛 명칭(名稱)이라
중간 세대(世代)로는 예부상서(禮部尙書) 휘(諱)에 사경(思敬)과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휘(諱)에 하민(夏民)과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휘(諱)에 승덕(承德)이 계셨는데 선생(先生)(濯溪)은 절제사(節制使)(承德)의 현손(玄孫)이 되시고 (節制使 承德은 濯溪先生의 高祖이시다) 진산군수(珍山郡守) 휘(諱)에 수문(秀文)는 증조(曾祖)이시고 제령군수(載寧郡守) 휘(諱)에 영수(永綏)는 조(祖)이시고 종사랑(從仕郞) 휘(諱)에 인(絪)은 고(考)이시다.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써 우후(虞侯) 휘(諱)에 성(誠)의 따님이시다. 제령공(載寧公)(永綏)은 수리학(數理學)에 조예(造詣)가 있었으나 큰일에 당함이 없었고 종사랑공(從仕郞公)(絪)은 유림(儒林)의 행적(行績)으로 일찍 세상(世上)에 알려졌다. 허부인(許夫人)(어머니)은 성품(性品)이 어질고 온화(溫和)하며 정숙(靜肅)하셧서 규방(閨房)의 모범(模範)이라 일커러지다.
西紀 1527年(中宗22)10月 19日 선생(先生)은 초계(草溪)의 도방리(道方里) 누대(屢代)로 살던집에서 출생(出生)하셨다. 8세의 어린나이에 의지(依支)할곳을 잃어셔서 슲으서나 능히 스스로 예절(禮節)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않으시고 뭇사람과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으시며 어린동생과 더불어 항상 침식(寢食)을 같이하니 그를 보는 사람들이 보통(普通)아이보듯 하지 않더라. 어른께서 타시던 말이 늙어서 병이 들어 곧 죽을것 같으니 노비(奴婢)들이 모여서 잡아먹자고 하는 말을듣고 즉시 가로막아서서 그 말(馬)이 죽을때까지 기다렸다가 묻어주게하니 역시 천성(天性)이 다르다고 입을모아 일으더라. 조부(祖父)님께서 제령군수(載寧郡守)로 계실때는 선생(先生)의 연세(年歲) 15~16歲때 곁에서 모시고 따르면서 가르치심에 따라하는말이 만약 무공(武功)으로 업(業)을 삼으면 문전(門前)의 의장(儀仗)이 전부일 것이다. 조부(祖父)께서 또한 그뜻을 헤아리시니 선생(先生)은 앞에나아가 청(請)해 가로대 문(文)과 무(武)를 판단(判斷)해 헤아려보면 두길을 다함께 공부(工夫)해서 가려하면 그길은 멀고 힘들것이므로 도리어 무공(武功)으로 이름을 얻는것은 원(願)하는 바가 아니요 학문(學問)을 쫓아 공부(工夫)하기를 원(願)하는바입니다 하니 조부(祖父)님께서 칭찬(稱讚)하시고 허락(許諾)하시다. 때마침 이황강(李黃江)(諱는 希顔)선생(先生)은 그 고장에서 학도(道學)의 강좌(講座)를 개설(開設)했다. 선생(先生)은 조부(祖父)의 명(命)을 받들고 예의(禮儀)를 갖추어 강학(講學)을 청(請)하니 이선생(李先生)께서 처음은 혹(濯溪先生) 격(格)에 넘쳐 과로(過勞)의 환난(患難)을 초래(招來)할까 염려(念慮)했고 수학(受學) 하고저 하는 자(者)가 불가할것 같이 보였으나 선생(先生)의 학문(學問)을 구(求)하는 모습이 지성(至誠)스러웠다. 승낙(承諾)의 명(命)을 기다리는 5日째에 이선생(李先生)은 깊이 생각할수록 가상(嘉尙)스러움만 더해져 드디어 가르치기로 했다. 이선생(李先生)의 문하(門下)에서 수강(受講)한지 4~5年에 사고(思考)가 정미(精美)롭고 폭넓은 학문(學問)을 익혀 조예(造詣)가 날로 높아갔다 이선생(李先生)은 탁계선생(濯溪先生)의 학문(學問)이 날로 넉넉함을 자랑하고 다른 여러 제자(弟子)들과 같지않게 특별히 보살펴 주셨고 목적(目的)을 두고 돌려보낼때 이르러 하신 말씀이 이자(者)(濯溪)는 외질(外質)이 이미 수석(首席)의 위치(位置)를 얻었다고 하셨다.
선생(先生)은 집에 계시면서 어머님을 모실 때 거처(居處)가 따스한지? 차가운지? 써 계절(季節)의 기후(氣候)가 분각(分刻)의 차이(差異)라도 혹 어긋나지 않을까 살펴서 정성을 다하시고 가난한 살림에도 항상(恒常) 어머니의 입맛에 맞추어 봉양(奉養)하시고 부드러운 미음 등은 항상 여유있게 준비(準備)하셨다. 매일(每日)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洗手)하고 빗질하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먼저 사당(祠堂)에 나아가 알현(謁見)(祖上의 位牌가 모셔진곳에 인사)하고 그 다음에 자기 처소(處所)로 가서 엄숙(嚴肅)한 태도(態度)를 풀어 편히 하고 항상 화락(和樂)한 기분으로 書齋(글방)에 나아가 좌우양편(左右兩便)에 게시(揭示)한 좌우명(座右銘)(警戒箴)등을 낭독(朗讀)하고 중구(衆口)하여 익히고 체험(体驗)하니 그날후의 행실(行實)이 나타나 그 일과(日課)를 행(行)함에 그것이 가장 효행(孝行)의 근본(根本)이 되는 것이다. (孝는 父母에만 해당하는것이 아니오 사회생활의 根本)
그 내우(內憂)(바깥체의 男性이 아닌 안체의 女性으로 因한 喪事)를 만난그해 몸을 상(傷)하게 하지 아니하고도 오히려 제도(制度)(예절)를 지키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상복(喪服)을 벗지 아니하고 맛있는 음식(飮食)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여묘(廬墓)에서 3年상(喪)을 맞쳤다. 대저 뒷날에도 전(前)과 같이 삼가 재계(齊戒)하고 상예(喪禮)에 맞게 옷을 매고 심하게 통곡(痛哭)하고 아침과 저녁식사는 범벅죽을 마시고 무릇 모든 절차를 사당제사(祠堂祭祀)와 같이 제수(祭需)에 힘쓰기를 경제적(經濟的) 여건이 있고 없는데는 헤아리지 않았다. 평소(平所) 어머님께서 꿩고기를 즐기심으로 제사(祭祀)때는 반드시 갖추어 받치고, 혹 구하지 못해 제사(祭祀)에 올리지 못한해는 그해 1年 동안은 자기(自己)도 먹지 않았다 하니 그 마음쓰는 정성(精誠)이 대저(大抵)이와 같으니 스승을 섬기는데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라하고 낳아서 기르는 은혜(恩惠)와 스승이 가르치는 뜻도 같은것 이라했다. 황강이선생(黃江李先生)이 타계(他界)하셨다. 마음이 한없이 상(傷)하셨다. 옛 상례(喪禮)에 따라 지극(至極)한 예(禮)를 갖추었고, 또 사당(祠堂)을 세웠다. 이른바 청계서원(淸溪書院)이다. 여기에 뒷날 선생(先生)의 위패(位牌)를 모셔서 배향(配享)하니 이는써 그 높은 과거(科擧)를 한 공(功)이 있음으로 인(因)한 연고(然故)이다.
선생(先生)은 또 일찍 조식(曺植)(號 南冥)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왕래(往來)하셨다 학문(學問)을 깊이 얻고 도량(度量)이 중후(重厚)하셔서 같은 문하(門下)의 현인(賢人)들과 더불어 자질(資質)에서부터 그 강평해설(講評解說)에 이르기까지 심오(深奧)한 이치(理致)의 깊은맛이 듣는 자(者) 모두가 탄복(歎服)하고 이르되 도산서원학문(陶山書院學問)과도 부합(符合)하여 가히 그 명도(明道)(明道程 先生)의 바른길을 향(向)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西紀 1574年(宣祖 7)선생(先生)을 유일천거(遺逸薦擧)하여 관직(官職)(司圃署別提)을 내렸으나 사양(辭讓)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도백(道伯)(慶尙道 觀察使)은 순찰차(巡察次) 지나가다가 선생(先生)을 방문(訪問)했다. 방장(方丈)과 더불어 수행(隨行)하는 벗들과 모여 대화(對話)하는 자리가 우뚝하게 보였으며 말씀(文辭)이 끊어짐을 볼수 없었다.
최수우(崔守愚)(諱永慶이요 徵士를 받은 德行이 높은 學者)선생(先生)이 불행하게 잘못되어 기축반역옥사(己丑叛逆獄事)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있을때 뜻이 같은분들을 규합(糾合)하여 누명(陋名)을 벗기위한 상소(上疏)를 올린바 있다 ,
조정(朝廷)에서 새로 일본(日本)과 더불어 통신(通信)하고 그로 인(因)하여 군사교육(軍事敎育)이 있을때 감개(感慨)하여 쓴 시(詩)가 있다.
시국(時局)이 위태(危殆)로울때 위기(危機)를 바로잡을 계책(計策)을 시험(試驗)해 (더듬어)보지않고 세상(世上)이 요란(搖亂)한데도 공연히 감추려고 민심(民心)만 달래네 (이 詩를 보면) 그때 스스로 시대상항(時代上項)을 가히보고 계신것이다. 그리고 얼마 못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이란 외침(外侵)을 당(當)했다. 나라의 국경전역(國境全域)이 진탕(震蕩)이 되니 수례를 탄 무리가 다라나 흐터졌다. 김성일(金誠一)(號는 鶴峯이요 諡號는 文忠公)은 각고을에 알리고 의병(義兵)을 이르켰다. 이때 선생(先生)은 본인(本人)이 늙었다고 스스로 편안히 계시지 않고 곧 나라의 위급(危急)함에 응(應)했다. 고을에 건장(健壯)한 남자(男子)들을 모집(募集)하니 수千名이 모였다. 이대기(李大期)(號는 雪壑)公과 더불어 본면(本面)을 안팎으로 방어(防禦)하도록 각각 나누어 관장(管掌)하고 위의 동지(同志)와 또 명사(名士) 10餘名과 함께 군사(軍事)를 배불리 먹이고 대중(大衆)과 서약(誓約)을 했다. 위험(危險)한 요소(要所)마다 나누어 지키고 계획(計劃)을 도모(圖謀)하고 기회(機會)에 힘써서 고령(高靈), 합천(陜川), 거창(居昌), 성주(星州)의 모든 의병(義兵)과 더불어 합세(合勢)하여 전진(前進)하니 마침네 무계(茂溪)와 마수원전투(馬首院戰鬪)에서 2次에 걸쳐 크게 승리(勝利)하니 왜적(倭賊)은 넋을 잃고 감히 방자(芳姿)하게 날뛰지 못하니 낙동강좌우(洛東江左右)로 통(通)하는 길이 비로소 자유(自由)로워 졌다.
다음해 서기 1593年(宣祖26) 선생(先生)에게는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의 벼슬이 내려졌다. 그때 김성일(金誠一)(號는 鶴峯)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선생(先生)을 치하(致賀)했으며 동강(東岡)(諱는 金宇웅) 선생(先生)도 서찰(書札)을 보내와 일어서기를 권(勸)했으나 선생(先生)은 굳이 사양(辭讓)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선생(先生)은
스스로를 비유(比喩)하기로 시집가기 때늦은 노처녀(老處女)에게 시집가라는 것과 같다고 하니 그 절개(節介)와 지조(志操)는 가히 뺏을 자(者)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비유하여 전하는 시(詩)가 있다. 동(東)쪽 바다에서 서(西) 쪽의 정상(頂上)에 산냥하는것을 만날 수 없듯이 또한 한(漢)나라 장막(帳幕)안에서 왕(王)의 계획(計劃)을 누가 헤아릴 것인가?(이는 官職에 나아가지 않는 先生의 뜻을 누가 감히 알수 있겠느냐 라는 뜻이 된다) 그 스스로의 뜻을 가히 알수 있었다. 우국지심(憂國之心)의 발로(發露)는 몸을 아끼지 않는데 있으니 대저 선생(先生)의 재량(才量)과 학식(學識)은 세상(世上)이 찾고 기다림에 맞추어 나셨도다. 마땅히 써 나라의 줄기(기둥)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百姓)을 교화(敎化)하는데 도움이 되고 이에 나아가 스스로를 다스리고 뜻을 이행하기에 권욕(權慾)을 취(取)해 나아가는 일은 구(求)하지 아니하니 공(功)과 업(業)의 경우 향토(鄕土)의 명성(名聲)에 그치고 종묘(宗廟)의 높은 사당(祠堂)에 오르지 않으시 더라도 선생(先生)께서는 진실(眞實)로 자기 분(分)에 만족(滿足)하시고 후회(後悔)가 없으시니 그 기관에 얽혀 세도(世道)를 부리는 자(者)들은 어찌 선생(先生)의 위치(位置)를 돌아 볼수 있으리오. 문정공(文貞公)은 나를 은거(隱居)해 있지 말고 벼슬길에 나가라고 권(勸)하는 요점(要點)은 역시 깊이 알고 깊이 사랑한 나머지 나온 말인데 이는 대개 이러한 조짐(兆朕)에 말미암은 것이라 하겠다.
선생(先生)은 또 일찍 문정공(文貞公)께서 손수 쓰신글씨를 받아 병풍(屛風)을 만들어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수있게 하는것도 평상시(平常時) 성실(誠實)한 자세(姿勢)에서 기인(基因)된 것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아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일이로다. 선생(先生)의 가르침을 배운자 들은 먼저 소학(小學)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을 읽고 그 다음으로 모든 경서(經書)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孔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정밀(精密)히 연구(硏究)하고 힘써 행(行) 하는 것이니 다만 헛되이 외우고 읽는것만 으로는 불가(不可)한것 이라 했다. 또 질병(疾病)을 당(當)해서도 일러 가로대 반드시 굳건히 힘써 공부(工夫)를해서 바야흐로 한걸음 이라도 진보처(進步處)로 옮겨라 하니 그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學問)하는 절도(節度)가 이와 같았다.
또한 필법(筆法)이 좋아서 남명선생(南冥先生)과 황강선생(黃江先生)같은 대가(大家)의 비문(碑文)이 다 선생(先生)의 필적(筆跡)이며 지금까지도 전(傳)하는 각자(刻字)의 책판(冊板)과 금석문(金石文)이 많아 그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또한 명필(名筆)이 많이나서 예원(藝苑)을 이루니 이 또한 세상(世上)에 가문(家門)을 일으키는 자(者) 선생(先生)이 아니겠는가. 선생(先生)의 배필(配匹)은 두분이 였으니 선취(先娶)에는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전(士詮)(忠順衛)의 여(女)요 정무공(靖武公)인 이호성(李好誠)의 증손(曾孫)이기도 하다. 또 한분은 강양이씨(江陽李氏)로 정(精)(訓練奉事)의 여(女)이시다. 슬하(膝下)에 아들이 여섯분 딸이 세분이 있었으니 내외손(內外孫)이 심히 많고 또한 공적(功績)과 관직(官職)이 있으나 지금와서 일일이 능(能)이 다 살필수 없다.
선생(先生)이 남기신 저서(著書)와 시문(詩文)은 헤아릴수 없이 많으나 흩어졌다. 사적(事蹟)은 김학봉(金鶴峯)의 행장(行狀)과 년보(年譜)및 임진왜란(壬辰倭亂)때의 일기(日記)(龍蛇日記)등에서 증명(證明)되고 있고 문인(門人)인 윤형(尹泂)(號는 退村 詩號는 忠靖公이며 茂城府院君)의 제문(祭文)에서 본말(本末)이 상세(詳細)하고 임진부(林眞怤)(林谷) 허희(許熙)(赫臨齊)의 찬(撰)한 행장(行狀)과 행록(行錄)에서 가(可)히 갖출수 있었다.
선생(先生)이 작고(作故)하심에 사림(士林)이 연곡사(淵谷祠)를 창건(創建)하고 향사(享祀)를 치르다가 얼마 못가서 화재(火災)로 훼손(毁損)되고 뒤이어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이설학(李雪壑)과 더불어 배향(配享)되다. 순조왕(純祖王)의 계유년(癸酉年)때 영남(嶺南)의 유림(儒林)이 나라에 상소(上疏)를 올려 벼슬과 시호(諡號)를 청(請)했다. 그뒤 9年을 지나 신사년(辛巳年)에 비로소 선생(先生)의 충절(忠節)이 높음을 인정(認定)받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의 벼슬을 내렸으며 홍능임진년(洪陵壬辰年)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이 추가(追加)로 내렸다. 그러나 충절(忠節)의 혜은(惠恩)에 미치지 못함은 개탄(慨嘆) 할 일이로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중(配享中) 조정(朝廷)의 명(命)으로 서원(書院)이 훼철(毁撤)되고 이제 서당(書堂)에서 해마다 모여 행사(行事)를 수행(修行)하고 있던중 후손(後孫) 석무(錫武) 상림(相霖)은 나에게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청(請)해왔다.
명왈(銘曰)
선비의 숭상(崇尙)하는 것은 체용(体用)을 밝게하는 바라 큰 포부(抱負)를 몸에 간직하고 때를 기다려 움직이나니 오직 장신(長身)하고 있는것은 곧나아가서 큰일을 하기 위함이라 군자(君子)가 이것을 적용(適用)하여 안자(顔子)와 이윤(伊允)을 뜻하고 배웠도다 아름답다 선생(先生)이여 법문(法門)의 전통(傳統)이 있도다. 바르게 이어가고 널리 구(求)하나니 모두가 정의(正義)에 돈독(敦篤)하도다. 타고난 분수(分守)를 지키니 거룩하고 호매(豪邁)하도다. 무(武)를 사양(辭讓)하고 문(文)에 나아가니 공명(功名)을 돌보지 않도다.
돌아가 고훈(古訓)을 본받아서 몸소 실천하니 일용범절(日用凡節)에 조금도 결함(缺陷)이 없도다. 큰 벼슬을 맡겼더라면 어진 임금을 만들고 백성(百姓)에게 혜택(惠澤)이 많았으리라 모든 이치(理致)가 한테 융합(融合)하여 큰 경륜(經綸)을 펴리로다 누가 유학자(儒學者)가 때에 맞지 않다 하느냐 내가 갖추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슲어 하리요 오직 위급(危急)한것은 임금이 피난(避難)가신 일이라 눈물을 씻고 힘을 다하는것은 사람마다 다할 책임(責任)이라 이때에 분기(奮起)하여 군중(群衆)을 소집(召集)하고 동지(同志)를 규합(糾合)하니 누구와 같이 주장(主張)했느냐 문충공(文忠公)(金誠一 號는 鶴峯)과 충익공(忠翼公)(郭再祐 號는 忘憂堂)과 김송암(金松菴)(金沔)과 박대암(朴大庵)(朴惺)과 아들 전수족당(全睡足堂)(諱는 雨)이로다. 합심(合心)하여 막아내어 큰 공(功)을 이루웠도다. 누가 서생(書生)이 군사(軍事)에 익숙하지 않다하느냐 나는 행(行)했으니 나를 감히 막지 못하리라 충분(忠憤)이 격동(激動)하니 지용(智勇)이 겸비(兼備)하도다 위란(危亂)을 구제(救濟)하니 말과 뜻을 어찌속이리오
원리(原理)와 응용(應用)이 두가지가 아니며 동(動)과 정(靜)이 매일 반이로다. 자취를 감추고 초지(初志)로 돌아오니 나의 낙(樂)이 여기에 있도다 아직까지 풍교(風敎)가 일방(一方)에 진흥(振興)하니 당시나 후세(後世)에 공(功)을 들어 추앙(推昻)하도다.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配享)하고 매야산(梅野山)에 산소(山所)가 있도다 높은 산과 큰길을 모두가 추모(追慕)하도다 광채(光彩)가 비석(碑石)을 뚫고 명(銘)이 종이(宗彛)(宗廟祭器등)에 짝하도다 세상(世上)의 군자(君子)들아 이 신필(信筆)을 상고(詳考)하소서
聞昭 後學 金榥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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