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餘白과 겸양謙讓의 미학
-임강빈의 시집 이삭줍기
전원생활을 소재로 삼았던 밀레의 작품 중에 추수를 끝내고 남은 이삭을 줍는 세 아낙네를 그린 것이 있다. 그것은 과장이나 감상을 섞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담고 있어서 세상에 잘 알려진 그림이다.
같은 이름으로 임강빈의 시집 이삭줍기(동학사)가 나왔다. 표지에는 팔순을 넘긴 노시인의 얼굴이 또 다른 책의 표지 안에 들어가 있고 ‘언어의 절제와 행간의 깊이가 이룩한 감동과 여운, 아득히 홀로 걸어온 임강빈 시학 56년’이란 글이 눈에 띈다.
시인 임강빈은 박두진 선생의 추천으로 195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때마침 그 해 교사로 발령을 받아 1996년까지 40년의 교직 생활을 했다. 시집으로 당신의 손, 동목, 매듭을 풀며, 등나무 아래에서, 조금은 쓸쓸하고 싶다, 버리고 싶은 날의 반복, 버들강아지, 비오는 날의 향기, 쉽게 시가 쓰여진 날은 불안하다, 한 다리로 서 있는 새, 집 한 채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초록빛에 기대어를 냈다. 추천된 첫 시부터 발표된 작품을 망라하여 살펴보면 ‘여백과 겸양의 정신’이 두드러진 서정의 세계가 변함없이 차갑게 빛을 발한다.
돌이파리가 파르르 떨고 있다
팔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
반쯤 피어난 연꽃이 반긴다
-「법주사 석연지」 부분
세상은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는다. 지금 임강빈 시인의 눈에 비치는 것은 돌에서 피어난 연꽃이고, 창가에서 푸른 춤사위로 흔들리는 난蘭이고, 검다는 이유만으로 멀리 했던 까마귀이며, 무량한 시간을 비집고 일순 나타난 매미 같은 것들이다. 그가 믿는 것은 긴 노동을 끝내고 휴식의 시간, 평화의 정점으로 흘러들어오는 이런 사물들과 함께하고 있는 풍광들이다. 그러나 그는 보이는 것을 다 말하지 않고 절제한다. 애써 절묘한 기교를 생각하거나 뜨거움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금 차갑고 매정하기까지 하다.
명화 「이삭줍기」를 그린 밀레는 태양에 그을리고 땅을 매면서 땀 흘리는 노동에서 인간의 존엄과 신성함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종교적인 수용의 정신을 사랑으로 받아들여 전원생활에 매달렸다는 점이 매력이다. 시인 임강빈의 문학세계도 밀레와 많이 닮은 점이 있다. 물론 전원에 매달린 그의 태도를 가지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한눈팔지 않고 외길을 걸어온 예술가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정년퇴직할 때까지 오직 교직생활만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문학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을 짚어보면 그렇다. 교육은 분명 사랑의 정신과 통하는 무엇이 있지 않은가. ‘나는 농부로 태어났고 농부로 죽어갈 것이다. 땅을 딛고 서서 나막신 넓이만큼이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밀레와 바로 이것이 같은 점이다.
자서自序로 남긴 첫 페이지의 말처럼 여기 있는 시들은 ‘들판에 내려 앉아 이삭을 쪼는 철세 떼의 평화’를 생각하는 마음이 바탕을 이룬 것이기에 그의 시적 서정抒情과 사유思惟가 무욕의 흔적으로 배어 있다. 자랑할 만한 일도 곧잘 부끄러워하는 겸양의 정신도 깊이깊이 배어 있다. 이러한 그의 시심詩心을 평소 그와 가까웠던 시인 나태주가 편안한 해설로 안내하고 있다.
시인의 형상이 흐려지고 시의 기본적인 위엄조차 사라진 무지막지한 이 시대에 그래도 고토를 지키는 분이 임강빈 선생이고 시의 고향마을을 지키면서 시의 범전을 고수하고 있는 분이 임강빈 선생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나태주의 해설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부분
1931년생이라 문단 경력 반백년을 훌쩍 넘긴 터이고 한번쯤은 시의 외도가 있었을 법도 한데 임강빈 시인의 시는 한결같다. 결코 이념의 늪을 배회한 적 없고, 현란한 수사修辭의 미모에 흔들려본 적도 없다. 장황하거나 애매모호하거나 수다스럽지 않다. 압축과 간결을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백미, 겸양謙讓과 자족自足을 아는 선비끼리만 통하는 첨예한 문학정신으로 서정의 텃밭에 올곧게 뼈대를 세우고 자신을 지켜 묵묵히 빛을 낸다. 세파에 휘둘리지 않고 묵향을 길들이며 살아온 그의 천성이 격조에 맞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수채화나 담채화를 보는 것 같은 시를 쓰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타인의 시적 사유를 읽는 행위에는 시인이 주관적인 세계를 포착하는 순간 속에 함께 빠져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유가, 상징이, 환유가 존재하는 언술 구조 속에 흩어져 있는 미립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은 안개가 빼곡한 산길을 헤쳐 나가는 것처럼 어렵고 힘들면서도 큰 즐거움이 따른다.
누가 쓸었을까
골목길
싸리비 자국이 선명하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빈집 한 채
적막한데
돌담 위로
라일락이 고개를 쳐들었다
비어 있어
가득 채우려 함인가
그 향기가 부럽구나
가까운 산 빛이
초록으로 갈아입는 중이다
-「산책길에서」 전문
임강빈 시인의 언어는 크게 반짝거리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다. 김춘수가 무의미 시를 썼다고 한다면 임강빈은 철저히 무기교의 시를 쓴 사람이다. 시어의 탁발함으로 추종을 불허하는 박두진에게 추천을 받은 사람이니 기교의 뛰어남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는 요란함을 피하고 묵묵히 간결하고 여백이 많은 시를 선택했다.
산책길에서 골목길에 선명하게 그어진 싸리비자국으로 그의 일상은 충분히 읽혀진다. 길이 아니면 걷지 말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했던가. 그는 정갈하게 쓸린 욕심 없는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싸리비 자국 선명한 골목길을 가다보면 틀림없이 그를 만날 수 있다. 생명감 충만한 봄을 느끼고 부러워하면서도 그는 당장 그 속으로 달려가려 하지 않는다. 빈집을 생각하고 그 빈집을 꽃향기로 채우고 싶은 마음만 가다듬는다.
시인은 허세가 아닌 실체가 되어야 한다. 임강빈 시인에게 그 실체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은 스승의 본분이었으리라. 그는 후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빈틈없이 문학의 정도를 지켜왔다. 말 한 마디, 거동 하나에서 선비 정신을 향처럼 품어내고 문학인의 스승으로서 겸양의 빛을 잃은 적이 없다.
겨울 뒤에서 숨어 있다가
작심한 듯
마침내 뇌관을 터뜨린다
일제히 터뜨린다
펑펑
가지마다 꽃이 만개한다
꽃은 몸 전체로 핀다
조용하지만 치열하다
순수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은 허구虛構가 없다
-「만개」 전문
봄철이 되면 누구나 꽃을 본다. 특히 벚꽃이 필 무렵에는 무덤덤한 사람들마저 꽃놀이 가자고 보챈다. 봄의 양기가 모든 생명을 꿈틀거리게 하는 게 맞다. 임강빈 시인의 눈은 생명 지향적이다. 실제 현실적으로 보는 꽃보다 도리스 되리 감독의 영화 <The Cherry Blossoms(원제로 말하면 ‘벚꽃 피다’인데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란 제목으로 나옴)>에서 벚꽃이 만개한 화면을 본 사람이면 이 시가 실감 날 것 같다.
가지마다 펑펑 터진 꽃, 역광으로 더욱 눈부신 꽃. 그런 정경을 보면서 ‘꽃은 허구가 없다.’고 한 말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사실 그 이상이라고. 그는 순수를 지탱하고 있다고 믿는 사실(꽃)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꽃이 무엇인가? 사람도 꽃이고 시도 열정도 다 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사실 그 이상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된서리가 내린 날은
유성 온천 변두리
빈 논밭엔
까마귀가 까맣게 모여들었다
열심히 먹이를 쫓고 있었다
어지럽힌 발자국
햇살이 와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한적했던 허허벌판에
길이 생기고
지금은 도시로 변하고 있다
삼강이 아니어도
까맣게 오너라
검다는 이유만으로 멀리했다
미안하다
까아깍
그 울음소리가 불현듯 그립구나
-「까마귀」 전문
이 시는 ‘검다는 이유만으로 멀리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통렬하게 가슴을 찌른다. 말은 매우 부드럽게 하고 있지만 올곧은 마음으로 살아온 그의 태도로 보아 충분히 느껴지는 말이다. 희고 검은 게 다 무엇이랴. 무명의 구속을 물리쳐야 삶이 제대로 보이지 않겠는가. ‘삼강이 아니어도 까맣게 오너라’는 말의 삼강은 아마도 ‘상강’의 오자일 듯싶다. 상강霜降은 24절기 중 하나로 양력으로는 10월 24일경에 해당되며 서리가 내린다는 뜻이다. 세밀히 짚으면 결국 ‘상강이 아니어도 오라’는 말인데 흰 서리와 검은 까마귀가 색채로부터 은유된 의미의 경계를 털어내고 있다. 반야심경을 꿰어야만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인 것을 아는 걸까? 시구 하나로도 이렇게 불심은 충분히 건너 올 수 있다.
쓸쓸하다는 감이 잡힐 법한데
참 이상하다
한쪽으로 낙엽 구르는 소리
왠지 가볍다
이 가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떠나려 하는가
수척한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차갑다
슬금슬금 눈치 볼 것 없다
그냥 가거라
-「그냥 가거라」 전문
‘슬금슬금 눈치 볼 것 없다. 그냥 가거라.’는 말에는 차갑고 단호한 임강빈 시인의 성격이 비어져 나온다. 쓸쓸하고 가볍고 차가운 이미지가 이 시에 꽉 들이차 있다. 수척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맑은 가을 하늘이 전부다. 깊고 맑은 청색의 하늘은 곧 화자의 마음이다. 마음을 비워둔 흔적이 분명하고 수지청즉무어水至淸則無魚의 느낌이 다가 온다. 그래서 인연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떠나보내려는 그 마음이 쓸쓸한 것이다.
근자의 시인들은 고양된 심상 안에 자아를 투영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세상 밖의 일에만 자극되어 그에 대응하느라 시적 엑스타시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젊은 사람일수록 병폐가 심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일반 독자는 고사하고 전문 독자 혹은 문학 연구를 업으로 하는 학자도 해득하기 어렵다. 소통불가의 시가 판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시는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없는 현상이 생긴다. 시를 잘 사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다.
시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을 하다보면 시 정신과 삶이 하나 되지 못하여 빌미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은 숨길 수도 없이 소문으로 잘 떠돌기 마련이다. 임강빈 시인은 그렇지 않다. 삶과 시를 철저히 하나로 산 사람이다. 기왕에 쌓아 올린 명성과 시단의 경륜을 이용하여 행세코자 했던 적도 없고 큰 산처럼 묵묵히 먼 그림자로만 버텨왔다.
휙휙 지나가는 세월 속에
이정표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청명한 날에만
꽃이 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디쯤 가고 있습니까」 부분
임강빈 시인은 이 시의 끝에서 ‘수많은 별 가운데 너만한 별은 없을 것’이라 회상하고 있다. 영화로 하자면 ‘플래쉬 백’으로 처리할 곳인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관객과 함께 감정을 조율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화자를 불러내어 그의 손가락에 상징을 올려놓는다. 이 부분에서 특히 주목할 하나는 지표에 깊이 박혀 움직이지 않는 이정표이고 다른 하나는 ‘꽃’과 ‘별’로 표상된 타인이라는 존재인데, 그 지난한 인생 과정을 간단한 공간적 배치로 여백을 남기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 거기서 ‘당신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묻는다.
이정표를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시인은 아직 길고긴 여정 속에 놓여 있다. 그는 낮은 키로 서서 청청한 하늘에 ‘너’를 ‘별’로 올려놓고 바라보고 싶어 한다. 정해진 목표 지점을 설정해 놓고 가는 사람은 도착지의 일을 예상한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움직여가는 매 순간마다 시간의 엄중함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는 궂은날에 본 꽃을, 멀리 있는 별을, 촌음을 아껴가며 넉넉히 지켜봐주는 마음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후회 없이 산 삶의 한 부분인 동시에 그의 시심 전체가 아닐까. 그 여백이 크게 눈에 끌린다. 끝으로 이들 시처럼 그의 몸도 오랫동안 강령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