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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안경벗기(5월2주)불기2557년 5월 12일 |일요 법회 http://cafe.daum.net/bodydhamma/JBSw/149
혜천(嵇瀳)스님의 일요강론: 내 마음의 안경벗기(5월2주)불기2557년 5월 12일
오늘 주제는 '내 마음의 안경 벗기'입니다. 내 마음의 안경 벗기.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벗어난 것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습니다. 의식의 한계내에서만 보고, 듣고, 느끼고 하죠. 그것을 넘어선 것은 볼려고 해도 볼 수 없고, 들을려고 해도 들을 수 없고, 느낄려고 해도 느낄 수 없고,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해석하고 구성하죠. 흑백의 정보를 천연색으로 해석할 수 없고, 천연색의 정보를 흑백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두카의 안경을 쓰면 세계는 두카로 해석되고, 안락의 안경을 쓰면 세상은 안락으로 해석됩니다. 미움의 안경을 쓰면 세상은 미움으로 해석되고, 사랑의 안경을 쓰면 세상은 사랑으로 해석되죠. 불행의 안경을 쓰면 세상은 불행으로 해석되고, 행복의 안경을 쓰면 세상은 행복으로 해석되죠.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벗어나서 세계를 해석할 수 없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에 씌워진 안경을 벗으라고 하죠. 어쩌면 우리는 내 마음의 눈에 씌워진 안경이 있는지조차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그 안경은 내가 쓴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누군가가 씌워준 거죠. 누군가가 씌워줬기 때문에 본래 그 안경은 내 눈에 씌워져 있는, 아니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눈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마음은 모든 정보를 해석하고, 그 정보를 다시 구성하죠. 우리는 내 마음의 눈에 씌워진 그 안경을 통해서 보는 세계를 그대로 해석하고, 그대로 이해합니다. 그 안경을 벗지 않는한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죠. 검은 색 안경을 쓰면 세상은 오직 검은 색입니다. 우리가 누구나 아는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있죠. 상식 말입니다.
흑백 TV세대는 꿈도 흑백으로만 꾼다는 거예요. 절대 흑백TV 세대는 꿈을 천연색으로 꾸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적어도 우리 세대는 흑백으로만 구성되어있기 때문이지요. 사진도 흑백이었고, TV도 흑백이었으니까요. 세상은 흑과 백, 단 두 가지 색으로만 존재했죠. 두 가지 색으로만 이해해왔단 얘기예요. 칼라 세대 잚은이들은 꿈을 꿔도 칼라로 꾼다 그러죠. 사진도 칼라죠. TV도 칼랍니다. 그래서 적어도 칼라TV를 보고 큰 세대는 꿈을 꾸더라도 세상은 총천연색으로 꾼다는 거죠. 이거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죠. 흑백TV세대는 꿈을 꿔도 흑백으로 꾸는 것은 우가 보는 세계는 흑백이었기 때문이죠. 젊은이들들이 꿈을 칼라로 꾸는 것은 그들이 이해하는 세계는 칼라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맨 처음, 제일 처음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리는 태어나서 처음에 본 것을 자기 어머니라고 생각한다고 그러죠. 그래서 제일 처음 모이 준 사람을 자기 어머니처럼 따른다는 거죠.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마음은 처음에 각인된 것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여러 번 누차 말씀드렸지마는 인간의 한계는 다른 것이 한계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죠.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나서는 이해할 수 없고, 알 수가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우주를 가고. 인간은 그 동안 수없는 것을 이루어왔습니다. 우리가 공상만화에서 보았던 우리의 뇌와 기계가 결합되는 세계가 몇 십년 안에 올거라고 하죠. 우리가 어렸을 때 재미있게 봤던 소모즈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된다는 거죠. 그것도 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의 세대에 볼 것입니다. 이 힘없고, 이 나약한 다리 대신 강력한 기능을 가진 기계의 다리루다가 바꿔서 사용하는 그런 시대가 머지 않아 다가오죠. 우리는 그럴 정도로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을 일반화시켜서 현실화시켰죠.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역시 자신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씌워진 안경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죠.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날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앉아서 농담 따먹기를 하기로 했다는 거죠. 이성계가 먼저 무학대사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죠. "왕사는 돼지우리의 돼지 같소." 그랬더니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죠. "전하께서는 부처님같습니다." 그랬더니 이성계가 이렇게 말했다고 그러죠. "아니, 지금 우리가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아니 무슨 그렇게 과한 칭찬이시요." 그러자 무학대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본래 돼지 눈깔엔 돼지 밖에 안 보이거든."
이 이야기가 참 언중유골이라고 하는 사자성어에 딱 걸맞는 소리죠.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실제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일국의 왕과 왕사가 앉아서 이런 농담 따먹기를 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 까요? 인간은 자신의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거예요. 세상은 내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세상은 내가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성계 식으로 보며는 세상은 돼지우리일 것이고, 무학왕사 식으로 보면 세상은 불국토겠죠. 돼지우리와 불국토가 우리 마음의 한계 내에 있죠.
전에 어떤 분이 저를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죠. "부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분이 원하는 답은 아니죠.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았습니다. 부처님 이전에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몰랐겠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제가 이 이야기에서 하고자했던 것은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거죠. 과거의 낡은 방식이 아니라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겁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낡음을 뛰어 넘어서 새로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갈 것을 가르친 거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2,600여년 전에도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갔죠. 부처님은 그 시대의 방식이 아니라 미래의 방식으로 새상을 이해한 거죠. 우리는 항상 지금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죠. 지금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죠. 지금이 아닌 미래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미래의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지금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우리 눈에 덧씌워진 안경때문이죠. 우리 눈에 덧씌워진 안경은 마치 고깔과 같습니다. 고깔을 깊이 눌러쓰면 사물이 잘 보이지 않죠. 경마장에 가 보셨습니까? 경마장에 가면, 모든 말들은 좌우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죠. 그래서 오직 앞만 보고 질주하게 합니다. 마치 눈에 고깔이 씌워진 것과 같죠. 오직 한 방향만 보게 하죠. 경주마에게 말이예요.
제가 옛날 한 때 도가 깊어져서 김삿갓처럼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뜨거운 여름에 바깥의 더위가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솜누비를 입고, 마 그렇게 다닌 적이 있죠. 내가 무슨 김삿갓이라고 삿갓을 쓰고, 내가 무슨 사명대사라고 다래나무 지팡이를 짚고 한여름에 겨울 솜옷을 입고 나가니까 세상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래더군요. 벗어도 더운데 아니 이 한여름에 웬 솜옷입니까? 내 그 때 이렇게 이야기했죠. 찬 바람을 한 번 가두면 나가지 않습니다. 그 때는 정말 더운 줄 몰랐습니다. 왜 더운 줄 몰랐을까요? 이미 마음이, 의식의 한계가 거기 있기 때문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낮 부끄러운 이야기죠. 그 때는 왜 그랬는지 몰라요. 그 때는 그것이 마치 독 속에서 술이 익어가듯이 도가 익어가는 소리라고 나는 여겼죠. 독 속에서 술이 익어가는게 아니라 썩어가는 거죠. 도가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던 거죠.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그리고 다시 마음을 구성하죠. 그것을 벗어날 수순 없습니다. 내가 옛날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더울 때는 시원하게 옷을 입어야하고, 추울 때는 따뜻하게 입어야 하죠. 배고플 땐 밥을 먹어야 하고, 졸릴 땐 자야하는 거죠. 그것이 가장 도에 가까운 삶이죠. 세상이 스스로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 마음 밖에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경전을 읽지 않는다고. 스스로의 의 마음을 읽는 거라고 했죠. 우리는 고전을 읽지 않습니다. 고전을 읽는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읽는거죠. 왜 자신의 마음을 읽을까요? 스스로의 마음의 한계내에서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값진 것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그것은 쓸모가 없을 겝니다. 아무리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 보며는 가장 귀한 것일 수도 있죠.
어떤 분이 고서화점에 가서 그림을 한 점 샀답니다. 그런데 그림이 좀 너무 비싸서 뭐 하나 끼워달라고 졸랐다는 거죠. 그랬더니 그 사장님이 둘둘 말은 족자를 하나 보여 주면서 "이거래도 가져 갈래면 가져 가쇼."하더라는 거예요. 그 분은 그것이 첫눈에 추사의 글씨임을 알았다는 거예요. 낙관이 뭉개져서, 관리가 소홀해서 다아~~~ 더러워졌지만 그는 그것이 추사 선생의 글씨임을 직관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분이 이렇게 얘기했다는 거예요. "뭐 이까짓껄 주시요. 굳이 주니까 내가 사양할 순 없지." 역시 때를 벳기고 보니까 낙관에 희미하지만 사(史)자가 있더라는 거죠. 그건 추사 글씨였어요. 그 주인께서 그것이 추사 글씨인줄 알았으면 집어 던졌겠나요? 그걸 공짜로 줬겠어요?
일본에 가면, 우리나라에는 없습니다. 고려 초조 대장경을 담기 위해서 만들었던 나전칠기함이 몇 점 있죠. 우리나라 돈으로 싯가 한 50억 정도 갈겝니다. 어떤 분이 우리나라 골동품상에서 그걸 샀다는 거예요. 헐값에. 우리나라 고서화점을 돌아다니는데, 나전칠기함이 있더라는 거죠. 긴데 너무 관리가 안돼가지고 본래 빛은 다 잃었고, 때가 떡지떡지 앉아가지고, 저 구석에 그야말로 머리를 땅에 대고 쳐박혀 있더라는 거죠. 그 분이 쓸모없는 거를 비싸게 주고, 저거를 끼워달라고 그랬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골동품상 주인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작품을 돈을 두배로 받았으니까 완전히 봉 잡았다고 생각했죠. 이 일본인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지지리 때탄 저것을 달라 그러니까, 가져가시요. 뭐 자리만 차지하고 쓸모도 없는 걸. 줬다는 거예요. 그 분이 돌아와서, 그 분은 전문가니까, 때를 벗겼는데, 역시 그가 보았듯이 고려대장경 초조대장경을 담았던 나전칠기함이었어요. 그분은 고서화점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자기가 가장 아끼는거라 그랬어요. 한 20년전에 일본 돈으로 한 5억엔 정도 된다 그랬어요. 5억엔에 팔라 그랬는데도 안팔았다는 거예요. 왜? 그 함은 몇 점 밖에 없으니까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은 돈이죠. 스스로의 마음을 벗어나면 50억 짜리 나전칠기함도 자리나 처지하고 있는 쓸모없는 상자에 불과하죠. 스스로의 마음 밖에 벗어나면, 이거래도 가져갈려면 가져 가시요. 라고 이야기 되죠.
이제는 내 눈에 씌워진 안경을 벗어야 됩니다. 내 눈에 씌워진 안경을 벗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울 수가 있죠. 새로운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했던 새로운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내 눈에 씌워진 색깔 안경을 벗으면 되죠.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보라색 안경을 쓰면 세상은 보라색으로 이해되고, 붉은 색 안경을 쓰면 세상은 붉은 색으로만 이해되죠. 다른 색깔로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보여지는 전부니까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바로 그겁니다. "자네! 이제 그 안경 좀 벗게나. 그 안경은 본래 자네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네. 자네가 세상을 이해하기 전에 누군가가 자네에게 씌워준 안경이지. 근데 자네는 그것을 마치 본래 자네가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그것을 쓰고 있었던 것처럼 여기는 것 뿐이야! 이제 안경을 벗게나. 안경을 벗고 보면 자네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될거야. 그 때 비로소 자네는 자네 방식대로 세상을 해석하게 되지. 그것이 자네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거라네."
오늘의 주제가 '내 마음의 안경벗기'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다 함께 합장하시죠.
우르러 온 법계에 충만하신 부처님!
저희들은 안경을 쓰고 있지만, 그 안경이 본래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쓰고 있던 안경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 이 순간에서야 그것이 본래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제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주시고, 제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생일을 맞은 연담 김구 선우에게 지혜의 눈과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지혜의 귀를 주시고, 함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선우들에게 부처님의 지혜의 등불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싸두 싸두 싸두
혜천스님 - 초기불교전공 흥천사주지 보리도량 http://cafe.daum.net/bodydhamma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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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려고 낀 안경이 거추장 스러울 때가 많아 용기내어 내려놓습니다. 비록 사물이 잘 안보일지라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