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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공부할 것만 모아놓는방 스크랩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
임미정 추천 0 조회 22 10.02.26 20:1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보이지 않는 세계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거시세계는 실수(實數)로서 묘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극미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소립자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복소수(複素數)라고 하는 새로운 수의 도입이 필요하다.  복소수는 실수부분과 허수부분의 조합(예; a+bi, i=√-1)으로 표현되는데, 실제 물리세계에서는 허수의 존재를 상상하기 어려우므로 순수한 수학적 개념으로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복소수로 기술되는 양자론적 실체들이 어떻게 실수의 거시세계로 전환되는지, 그 과정은 완전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것은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통합하려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이 우주의 기본이 되는 양자적 실체들이 복소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거시세계 또한 본질적으로는 복소수로 나타내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앞장에서 아누의 내부 공간이 복소 4차원일 가능성과 함께 물질이 고차원의 초공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게다가 아인슈타인도 물질의 존재에 따른 시공의 휘어짐을 이야기하였으며, 로저 펜로즈는 8차원 복소수로 나타내어지는 트위스터 이론을 통하여 소립자(물질)와 공간이 불가분의 것임을 주장하였다.  초끈 이론이나 초중력 이론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공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는 물질의 본질을 논할 수 없으며, 공간 역시 물질과 분리하여 별개로 다룰 수 없다.

  물질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고 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만을 벡터로 나타낸 시공을 '4차원 민코프스키 공간'이라고 한다.  한편, 소립자를 기술하는 데는 '발산(發散)'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문제를 제거하려면 소립자를 확장해야 한다.  만일 보통의 4차원 민코프스키 공간을 그대로 두고 발산을 제거하려고 하면 인과율의 파탄을 초래한다.  따라서 인과율의 파탄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공 역시 확장할 필요성이 있다.  민코프스키 공간의 차원을 무한히 크게 한 것이 '부정계량의 힐버트 공간'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4차원 민코프스키 시공에 기반을 둔 것이다.  소립자를 확장하면서 시공을 민코프스키 시공에 묶어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즉, 특수상대성 이론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한복소공간을 의미하는 (부정계량의) 힐버트 공간이 민코프스키 공간을 대치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무한한 세계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소립자의 발산을 허용하던가 인과율의 파탄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소립자와 시공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무한의 힐버트 공간이 평범한 4차원 민코프스키 공간을 대체해야 한다면, 우리는 왜 그 무한한 세계를 다 느끼고 보지 못하는가?  그 답 역시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정된 공간(또는 시공)만을 인식할 뿐이다.  만약 그가 초끈 이론가라면, 여분의 차원들이 소립자 내부의 극히 작은 영역 속에 말려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과연 그 여분의 차원들은 소립자 속에 구겨 넣어져 아무 쓸모 없게 되어버린 수학적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여기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이 소립자, 또는 원자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고 가정하자.  40개의 동심원들은 소립자의 내부 구조를 이루는 ― 마치 전자궤도의 에너지 준위나 핵자의 껍질 모형을 연상시키는 ― 겹겹의 물질적, 비물질적 베일들이다.

 

 

 

<그림 5.1>  40개의 베일 (<모든 세기의 신비> p.119)

 

  이 원들의 맨 바깥에 위치해 있는 우리는 직접 베일들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는 없으므로 입자가속기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바깥쪽 베일에 충격을 가한다.  잠시 기다리면, 어떤 반응이 원들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다.  마치 지진파를 검출하여 지구의 내부 구조를 추정하는 것처럼, 우리는 되돌려받은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소립자(또는 원자)의 내부 구조를 추측하고 모델이나 가설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결과는 수십 개의 베일 안쪽에서 여러 번의 복잡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튀어나온 하나의 최종 결과물일 수 있다.  즉, 우리는 이 베일들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과정들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베일을 뚫고 들어가는 만큼, 또 이해하는 만큼만 그 수준에 맞는 이론과 모델들을 세우게 되기에, 더 많은 베일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더욱 정묘한 이론의 수립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미처 관측하지 못하는 베일 안쪽의 이러한 내부 과정을, 데이비드 봄은 '숨은 변수'와 '접혀진 질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숨은 변수 이론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고전 열역학의 경우, 수많은 분자들로 이루어진 기체와 같이 어떤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전체적인 현상은 통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기술하고 예측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계적인 방법이어서, 평균치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의 오차나 요동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동이 원래부터 불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원리적으로는 모든 분자 하나 하나의 운동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나 하나의 분자의 운동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데는 수많은 변수가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기체의 압력만으로 분자의 운동을 나타내려면, 우리가 무시한 나머지 변수 때문에 어떤 불확정하거나 모호한 요소가 개입되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무시함으로써 어떤 계에 모호함을 불러일으킨 변수, 그것을 '숨은 변수'라고 부른다.  이러한 숨은 변수들은 자연에 언제나 존재하지만, 우리의 관찰이 너무나 조잡하기 때문에 그것을 밝힐 수 없을 뿐이다.

  반면에 불확정성과 모호성이 생기는 건, 이처럼 우리가 자연을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양자 세계에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본질적인 요인이라는 가정이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보어 학파의 중요한 철학 정신이다.  이것은 현재 물리학계의 공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현실의 과학과 공학이 계산의 편리함을 위해 근사치를 사용하거나 자연을 단순화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 자연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러한 단순화 작업에 정당함을 느끼지만, 바로 그런 단순화 작업으로 우리가 무시하기로 한 숨은 변수 때문에 심각한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단순화 작업이 유용하긴 하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무시해온 것이다.

  접혀진 질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종이를 동일한 간격으로 잘게 접어 위에 돌출된 부분만을 이어 붙인다면, 우리는 새로운 종이의 표면 위에서 의미 없는 선이나 점 또는 색의 얼룩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접혀진 종이 속에 완벽한 그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와 법칙이 없어 보이는 선들이 사실은 접혀진 그림, 즉 접혀진 질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보이는 모든 물리현상들도 그런 보다 깊숙한 질서, 즉 접혀진 질서에서 표출된 일부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무질서한 혼돈의 계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드러나는 질서를 다루고 있는 카오스 이론, 엔트로피의 법칙을 거슬러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질서의 존재를 제시하는 일리야 프리고진의 산일구조 이론, 아마 이런 이론들도 접혀진 질서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데이비드 봄은 아원자 입자들이 보이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도, 이러한 접혀진 질서가 경우에 따라 때로는 파동으로, 때로는 입자로 펼쳐져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 독자 여러분은 앞서 4장에서 고차원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든, 리만이 책벌레를 등장시켜 기어다니게 한 주름잡힌 종이를 기억할 것이다.  고차원 공간과 접혀진 질서가 이렇게 비슷한 예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둘 사이에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란 추론을 가능케 한다.

  아인슈타인은 3차원 공간을 휘게 만들었지만, 고차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으면 이렇게 공간을 종이 접듯이 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칼루자-클라인 이론이나 초중력 이론, 초끈  이론 등을 통해서 고차원의 존재를 탐색했다.  그런데 이 고차원 혹은 접혀진 질서를 좀더 이해하려면 공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탐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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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진공

   

  앞장에서 공간에 대한 일반의 뿌리깊은 믿음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하나는 이 세계가 3차원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이 일종의 용기(容器)라는 선입관이다.  우리가 공간에 대해 가진 또 하나의 선입관이 있다면, 그것은 진공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은 그러한 생각은 19세기까지의 진공관(眞空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진공은 없다 하고,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이 원자와 진공으로 되어 있다고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한 이래 진공에 대한 논란은 ― 원자론과 마찬가지로 ―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왔지만, 현대 우주론이나 양자론에서는 더 이상 진공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빈 공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즉 무(無)에서 우주가 탄생하였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양자역학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진공에서 소립자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미 진공은 그 무엇을 낳는 생산자(生産者)이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순수한 무(無)의 개념은 아닌 것이다.

  공허한 개념의 진공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 외에도 케플러, 브루노, 데카르트, 버클리, 마하, 아인슈타인, 휠러, 디케 등이 있었다.  반대로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하여 루크레티우스, 갈릴레이, 게리케, 뉴튼, 싱 등은 진공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앞의 주장을 '진공 충만설' 또는 '상대공간설'이라 하고, 뒤의 주장을 '진공설' 혹은 '절대공간설'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진공이 존재한다고 믿게 된 시기는 불과 3백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과학이 싹트기 시작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자연관은 진공의 존재를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고수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의 존재를 부정하고, 매질(媒質)로 가득찬 유한우주를 생각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이 물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진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지동설을 주장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에도 반대했던 갈릴레이에 이르러서였다.  이어서 그의 조수였던 토리첼리(1608∼1647)와 프랑스의 파스칼(1623∼1662), 그리고 독일의 물리학자 게리케(1602∼1686)등이 실험을 통해 진공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토리첼리는 수은주를 이용하여 진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수은을 채운 긴 유리관을 수은 용기에 거꾸로 세우면 유리관 속의 수은 일부가 흘러나와 76센티미터 높이에서 멈추는데, 이때 이 유리관 속의 수은 위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곳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진공을 금기시하는 교회를 두려워하여 실험결과를 공표하지 않았다.

  파스칼 역시 토리첼리와 유사한 실험을 하여 대기압의 변화에 따라 수은주의 높이가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 게리케는 국왕과 여러 제후들 앞에서 직경 40센티미터의 반구 두 개를 서로 합친 후 안에 있는 공기를 빼고 양쪽에서 말 여덟 마리씩이 끌도록 했을 때, 두 개의 반구가 떨어지지 않는 시범을 보였다.  다시 공기를 넣자 이번에는 쉽게 반구가 떨어졌는데, 이 실험 역시 진공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이 실험은 후일 게리케가 마그데부르크의 시장이었던 것을 기념하여 '마그데부르크의 반구'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1596∼1650)는 공간의 존재를 부정하고 힘은 매질을 통해 - 시간이 걸려서 - 전달된다고 하는 근접작용론을 주장하였다.  그에 앞서 케플러와 브루노도 공허한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다만 케플러는 우주는 유한하다는 유한우주론을 내세운 반면, 브루노(1548∼1600)는 무한우주론자였다.

  한편 뉴튼(1643∼1727)은 만유인력이 원격작용으로, 즉 매질 없이 순식간에 전달된다고 하는 역학 이론을 세움으로써 데카르트의 힘과 진공에 대한 개념과 대립하였다.  이 절대공간의 존재를 그 밑바탕으로 하는 뉴튼역학의 성공은 만물을 진공과 원자의 구성으로 보는 원자론의 부활과 함께 진공의 존재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뉴튼 역학은 물체나 천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는 있지만, 힘(이 경우 중력)의 진짜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한다.  그저 중력이 존재하며 뉴튼이 밝힌 법칙에 따라 운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중력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에 따르면, 중력은 원격작용이 아닌 근접작용에 의해 힘이 전달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력은 거의 진공에 가까운 우주공간을 통하여 작용하고 있는 셈인데,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진공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힘을 전달할 수 있는 숨겨진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진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장(Field)이라는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장의 개념은 본래 전자기 현상에 대한 연구를 계기로 형성되었다.  1831년에 전자기유도 현상(자장 속에서 도선을 움직이면 도선에 전류가 유도되어 흐르는 현상)을 발견한 영국의 패러데이(1791∼1867)는 전자기력이 매질을 통해 전달해가는 근접작용에 의한 힘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석과 철가루를 이용하면 전기력선이나 자기력선의 형태로 전자기력이 전달되는 경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말이다.

  이런 역선(力線)의 존재는 비록 그 실체를 알기는 어려웠지만 전자기력의 성질을 잘 설명할 수 있었으며, 중력 역시 이와 같은 역선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간의 장소별로 어떤 종류의 양이 분포되어 있을 때 이 분포를 장이라고 부르는데, 전기력에 해당하는 장을 전기장, 자기력에 해당하는 장을 자기장이라 부르고, 중력의 분포를 나타내는 장을 중력장이라 부른다.

  역선은 공간적인 힘의 분포를 나타내는 것인데, 결국 역선이 충만된 공간이라는 것은 장 그 자체를 가르킨다.  전자기력을 전달하는 빛은 전자기장의 진동이며, 중력은 물질이 진공에 놓임에 따라 기하학적인 성질이 바뀐 중력장의 변형이 전파됨으로써 전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장은 데카르트나 케플러, 브루노와 같이 진공 충만설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정하는, 힘의 전달매체인 매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장의 개념에 의한 진공 역시 매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 진공은 공허하기만 한 비존재의 존재가 아니라, 장을 발생시키고 힘을 전달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지닌 성질의 것으로 되었다.  과연 진정한 허공이 이런 능력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한편, 양자역학이 발달함에 따라 진공은 더욱 특이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 예로,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서 소립자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시 진공 속으로 소멸하여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1928년에 디랙은 전자의 '상대론적인 양자역학적 운동방정식'을 완성하면서 마이너스 에너지의 전자로 가득 찬 진공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마이너스 에너지의 전자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관측하지 못한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를 부여받아 마이너스 에너지의 전자의 바다로부터 튀어나온 플러스 에너지의 전자, 그리고 전자가 튀어나옴으로써 바다 속에 생긴 빈 구멍이다.  이 빈 구멍은 전자와 반대의 전하부호를 가진 플러스 전하의 전자, 즉 양전자(陽電子)로 우리에게 비쳐질 것이다.  이런 디랙의 예언은 1933년에 앤더슨이 실제로 우주선 속에서 양전자를 발견함으로써 실증되었다.

  실험적으로 진공이 텅 빈 공간이 아님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은 '캐시미어 효과'라는 현상의 발견이다.

  공간에 두 장의 금속판을 나란히 놓게 되면 금속판 사이에 미소한 인력이 작용하여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는데, 이 현상을 캐시미어 효과라 한다.  여기에 작용하는 힘은 만유인력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만유인력보다 더 강한 힘이다.

  캐시미어 효과가 일어나는 이유는 이렇다.  양자론에 따르면 동일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는 없는데, 만약 입자의 위치를 특정한 한 지점에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짓는다면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 입자가 전체 공간으로 퍼져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따라서 입자의 위치를 어느 정도 한정된 영역에 존재하도록 제한하려면 아예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퍼짐을 가진 상태를 공존(즉 복수의 상태로 존재)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 공존하는 각각의 상태가 서로 영향을 미쳐 그 이상의 퍼짐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똑같은 현상이 전자기파의 진폭에서도 일어나는데, 만일 어떤 순간에 전자기파의 진폭이 완전히 제로였다면 다음 순간에는 모든 진폭의 파가 공존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파의 진폭을 될 수 있는 대로 작게 억제하려면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미세한 진폭의 차가 공존하고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바로 이 미세한 진폭의 파를 영점(零點)진동이라고 부른다.  진폭이 제로인 상태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움직임이라는 의미이다.

  진폭이 완전히 제로라는 이야기는 전자기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만약 어떤 용기의 내부를 완벽한 진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 안에 들어 있는 공기뿐만 아니라 전자기파까지도 모두 없애야 하는데, 전자기파는 광양자(光量子)라는 입자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용기의 온도를 절대온도 0도로 떨어뜨리면 용기 안에는 광양자마저도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전자기파는 최저의 에너지 상태에서도 아주 약하게 물결치고 있으며, 이것이 영점진동이다.  광양자가 전혀 없는 상태란, 실은 전자기파가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양자론적인 영점진동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인 것이다.

  한편 모든 전자기파는 각각의 파장에 대한 영점진동이 있기 마련인데, 전자기파를 차단하는 금속판을 공간 속에 놓으면 그 결과 영점진동의 종류에 제한이 생기게 된다.  이로 인해 두 금속판 사이에 있는 진공의 상태가 가지는 에너지에도 변화가 생긴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캐시미어가 1948년에 그 변화를 계산하였는데, 금속판의 간격이 좁을수록 영점진동에 의한 진공의 에너지도 작아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금속판은 에너지가 작아지는 방향으로, 즉 간격이 좁은 상태로 움직이게 되고, 결국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도 캐시미어효과를 입증하는 실험결과를 내놓았는데, 결국 진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가 아니라, 이러한 영점진동으로 충만한 그 무엇이라는 것이 이 실험의 요지인 셈이다.

 

 

 

 

<그림 5.2>  캐시미어 효과

 

  물질이라는 것이 하나의 환상이나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종종 하찮은 물질에 비해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비유로 들어 이야기할 때가 있다.  즉 우리가 단단하고 연속적인 물질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가 원자로 되어 있고, 원자는 다시 원자핵과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는 몇 개의 전자로 묘사되곤 하는데, 원자핵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비교한다면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펼쳐져 있는 공간이란 태양과 지구 사이의 우주공간보다도 더 넓은 것이다.  이런 틈새가 없도록 원자핵과 전자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친다면, 우리 육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원소를 총동원하여도 공기 중에 떠도는 아주 작은 먼지 하나의 크기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딱딱한 물체라고 느끼는 것, 예를 들면 돌멩이나 쇳덩어리도 그 부피의 99.999% 이상이 진공이다.  이쯤 되면 우리가 보고 있는 돌덩어리라는 형태는 실체라기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상대적으로 공간이란 얼마나 광대한 것인가!  우주는 거의 무(無)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캐시미어 효과와 양자요동으로 가득 찬 공간, 소립자의 탄생과 소멸, 광속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실험(다음 절에서 설명함), 중력장과 전자기장 같은 각종 장의 발생, 디랙의 마이너스 에너지 입자의 바다, 초공간이나 블랙홀의 존재와 같은 진공의 기하학적 성질, 공간에너지, 카오스 이론과 산일구조 이론의 자발적인 질서, 3장에서 언급한 트윈의 존재 등은 공간 또는 진공이 단순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어 있는 공간 또는 진공이라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인식범위를 넘어서 있을 뿐이지 공간의 본질 자체가 텅 비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신비학 역시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푸루커는 블라봐츠키 여사의 <비교>를 연구하고 강의한 강의록인 <비의철학의 기초>에서 "공간(space)은 진공이 아니다.  공간은 단순히 무엇을 담는 그릇이 아니다.  만일 공간이 하나의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담는 그릇 또한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공간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한대의 충만함이다"라며, 공허한 개념의 진공을 부정하고 있다.

  과학자들과 일부 철학자들이 텅 빈 진공의 존재에 대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사이, 신비학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공간의 충만함을 이야기하였다.  신비학자들의 견해가 옳았던 것일까?  그리스 철학자들이 가득 찼다(Fullness)는 의미로 '플레로마(pleroma)'라고 불렀던 공간, 혹은 진공은 양자역학을 비롯한 과학의 발달로 우리의 일반 상식과는 달리 미지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으면서 아주 놀라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불교는 그러한 공(空)의 성질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절묘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간혹 불교의 가르침을 공의 가르침(一切皆空 혹은 諸法皆空)이라 하여, 일체 모든 것은 환상이요, 허무한 것이라고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 또는 편공(偏空), 단공(但空)이라 한다.

  이제 공허한 개념의 진공은 더 이상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진공, 진공포장 속의 진공과 진공펌프가 만들어내는 진공, 수은주 실험으로 만들어내는 진공, 또 우주공간의 진공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것으로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불완전한 감각이 만들어내는 환상 탓이다.  우리의 감각은 인식범위에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믿을 만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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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소성과 양자 퍼텐셜

 

  위의 책에서 푸루커는 계속해서 공간이 충만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단일체라고 강의하고 있다.

 

  "공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전체이다.  공간은 광대한 하나의 유기체이며, 단일체이다. … 진공에 의한 분리 같은 것은 없다.  그 어느 곳에도 절대적인 분리 같은 것은 없다.  진정한 의미의 진공은 없다.  모든 것이 존재들로 꽉 차 있다.  무한한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이들 존재가 공간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어느 한 존재계의 광대하고 끝없는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특별하게는 내부로 향한 상승적인 존재계를 포함하는, 보이지 않는 영역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존재의 계는 내부의 내부의 계로, 또 그 내부의 내부의 계로 무한히 계속된다.  이것은 바깥쪽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비의철학의 기초> p.400)

 

  "모든 것은 하나"라는 철학은 신비학의 기본적인 대명제이다.  신비학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우주에 분리란 없으며, 있다면 오직 분리의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런 개념은 아직까지 고수되고 있는 과학의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보면 타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실재는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존재라는 이런 파격적인 개념은 사실 '비국소성(非局所性)'이라는 이름으로 양자론에서 비교적 오래 전부터 논란을 거듭해오고 있는 주제이다.  특히 1982년에 수행된 아스펙트의 실험으로 이런 논쟁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아스펙트의 실험을 설명하기에 앞서 EPR 실험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항상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을 못마땅히 여겨 보어와 의견대립을 하곤 했던 아인슈타인은 입자에 대한 양자역학의 묘사가 불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해 1935년에 보리스 포돌스키 및 나단 로젠과 함께 하나의 사고(思考)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을 EPR 실험(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 실험)이라고 한다.  이 사고실험에서 아인슈타인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절묘하게 관측해냄으로써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양자역학의 역설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구체적인 실험방법을 알아보자.

  정지해 있던 한 입자가 폭발하여, 운동량과 크기는 똑같지만 방향만 서로 반대인 두 개의 입자 A와 B로 분리되어 날아간다고 가정하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는 없다(예를 들어 누군가 위치를 측정하려고 하면 그 측정하려는 행위로 인해 운동량에 영향을 미쳐 운동량을 결정할 수 없다.  이런 불확정성과 모호성이 본래 자연에 내재하는 필수적인 성질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알려진 보어학파의 견해이다).  그러나 두 입자는 운동량이 같고 방향만 반대이기 때문에, 어느 한 입자의 운동량을 알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용하여 다른 한 입자의 운동량을 추정할 수 있다.  즉, 입자 A의 운동량을 측정하면 B의 운동량을 추정할 수 있고, B의 운동량을 측정하면 A의 운동량을 추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한 입자의 위치를 알면 다른 한 입자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이제 누군가 A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하면 B 입자의 위치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B 입자의 운동량을 유도해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동시에 B의 위치를 측정하기만 하면 우리는 B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수 있다.  비록 사고실험이기는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불확정성 원리의 허를 찔러가면서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아내는 데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두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첫째는 한 장소에서 수행된 측정이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에 순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입자가 충분히 떨어져 있기만 하면, 거리에 따라 상호작용의 영향이 감소할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 자신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라 빛보다 빠른 신호나 영향은 전달될 수가 없으므로 위치나 운동량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논리에서 나온다.

  두 번째 가정은 객관적 실체(objective reality)의 존재를 인정한 것인데, 객관적 실체라 함은 우리의 관찰과는 무관하게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실체를 말한다.  이 실험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날아간 두 개의 입자는 각기 분리된 객관적 실체이다.  하지만 만약 두 입자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한 입자를 관측하였을 때 다른 한 입자도 즉각 영향을 받아 불확정성 원리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을 부인하였는데, 만일 그렇다면 비록 A와 B의 두 입자가 공간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실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유령 같은 원격작용'이라 하여 비웃었다.

  1965년에 존 벨은 실제 실험으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상반된 입장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벨은 EPR 실험의 기본가정이기도 했던 위의 두 가지 가정을 택하여, 즉 '국소적 실재(local reality)'라는 가정을 전제로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입자를 동시에 측정할 때 얻어지는 결과 사이의 상관관계를 조사하여, 만일 고유의 불확정성을 갖는 양자역학이 옳다면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실험적 예측을 할 수 있었다.  이 예측은 벨의 부등식이라는 수학적 표기로 나타낼 수 있는데, 만일 국소적인 세계에 대한 아인슈타인이 생각이 옳다면 벨의 부등식은 실제 실험 결과를 만족시키지만, 만일 보어가 옳다면 이 부등식은 깨질 것이다.

  이후 벨의 부등식을 시험하기 위해서 많은 실험들이 시도되었지만, 가장 성공적인 예는 알랭 아스펙트가 장 달리바르, 제라르 로저와 함께 실시한 실험이다.  아스펙트와 그의 동료들은 레이저로 칼슘원자를 때려 쌍둥이 원자를 만들어낸 다음, 각각의 광자를 파이프를 통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게 하여 특수한 필터에 통과시키는 방법을 썼다.  

  1982년에 발표된 이 아스펙트의 실험 결과는 벨의 부등식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보어의 견해를 강화시켜 주었으며,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 원리가 본질적인 것임을 다시 한번 말해주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벨의 정리의 기본가정, 나아가 EPR 실험의 기본가정이 잘못되었을 경우로, 이럴 경우는 빛보다 빠른 효과를 인정하거나 분리된 실체, 즉 국소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아스펙트의 실험 결과는 객관적인 실재나 국소성,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포기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국소성을 포기한다면 불확실성을 배제할 수 있는 대신 빛보다 빠른 물리효과를 인정하거나 비국소성을 인정해야 한다.  보어학파의 코펜하겐 해석은 대체로 객관적인 실재를 포기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더라도 입자상호간에 서로 영향을 주는 모종의 연결은 이미 양자역학에 내포되어 있던 현상으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금 비약해서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선택은 비국소성과 객관적인 실재를 모두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객관적인 실재는 포기한 채 비국소성만을 받아들일 것이냐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아스펙트의 실험을 좀더 살펴보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광자는 필터를 통과하여 두 개의 편광분석기 중 하나로 향하게 된다.  필터가 한 분석기에서 다른 분석기로 전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0억분의 1초로, 광자가 파이프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300억분의 1초 짧게 하여 두 광자쌍이 어떤 알려진 물리적 작용을 통해서도 교신할 수 없도록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그런데 아스펙트와 그의 동료들은 광자가 그 자신의 짝이 되는 광자의 편광각과 자신의 편광각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초광속 교신이 일어났거나, 두 광자가 비국소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초광속 현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아스펙트의 실험은 두 개의 광자 사이에 비국소적인 연결이 있음을 사실상 증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미 앞에서 소립자를 올바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기반이 되고 있는 민코프스키 공간이 부정계량의 무한복소 힐버트 공간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따라서 특수상대성 이론도 수정될 필요성이 있음을 거론한 적이 있다(아니면 뉴튼역학이 상대성 이론의 특수한 경우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성 이론도 좀더 포괄적인 이론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자체를 재검토해봐야 할 단계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개인적 견해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아스펙트의 실험결과는 객관적으로 분리된 두 실체가 초광속의 연락을 주고받는다기보다는 초공간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데이비드 봄은 배질 힐리와 함께 비국소적인 숨은 변수 이론을 발전시켜 '양자 퍼텐셜'이라는 비국소 이론을 만들어내었다.  이 이론은 비국소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반대하면서 고수하고자 했던 객관적인 실재, 바꾸어 말하면 인과성(因果性)을 유지하는 해석이다.  양자 퍼텐셜은 중력 퍼텐셜이나 전자기 퍼텐셜과 흡사하지만, 전일적(全一的)인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크게 다른 점이다.  양자 퍼텐셜은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줄어들지도 않으며, 하나의 힘이라기보다는 입자의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정보는 개개의 입자에 전체성이라는 새로운 성질을 제공하는데, 즉 분리되어 보이는 조그만 부분일지라도 전체의 상태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표 5.1>  실재에 대한 개념 비교

 

 

아인슈타인

코펜하겐 해석

아스펙트 실험

양자 퍼텐셜

초광속효과

×

×

?

-

비국소성

×

×

객관적 실재

(인과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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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래픽 우주

 

  따라서 전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물리적 상황이 이 양자 퍼텐셜 속에 구현되어 있다.  데이비드 봄과 함께 양자 퍼텐셜의 개념을 창안한 배질 힐리는 양자 퍼텐셜이 곧 정보 퍼텐셜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봄과 힐리가 창안한 이 양자 퍼텐셜이란 개념 속에는 우주의 모든 존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비국소성 개념(봄은 양자 퍼텐셜을 다른 모든 퍼텐셜을 포함하는 초양자 퍼텐셜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을 꾀하고 있다)은 물론,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놀라운 주장까지 들어 있다.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은 신비학 전통에서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보다 많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이해하기 쉽도록 해준 데는 홀로그래피의 발견이 큰 역할을 하였다.

  홀로그래피 사진술은 1947년 데니스 가보어(1900∼1979)가 처음 생각해내었고, 1963년에 에밋 리드가 레이저를 홀로그래피에 응용해 실용화의 길을 열었다.  홀로그래피의 원리는 두 파동의 간섭으로 형성되는 간섭무늬를 사진에 기록하는 것으로, 이때는 레이저 같은 동조성 빛(진행 방향이 일정하고 규칙적이며 단일 파장의 빛)이 필요하게 된다.  홀로그래피가 일반 사진술과 다른 놀라운 점은 그것이 3차원 영상을 재생해낸다는 점에 있다.  즉, 일반 사진이 3차원 대상을 2차원의 평면(사진)에 표현해내는 데 비해, 홀로그래피는 실물과 똑같은 3차원 영상을 공간상에 재생해낸다.  따라서 우리는 홀로그래피 영상을 앞과 뒤, 옆, 위, 아래에서도 바라볼 수 있으며, 실제의 3차원 물체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는 각도에 따라 물체의 서로 다른 측면을 접하게 된다.

  홀로그래피의 정말 놀라운 특성은, 재생된 3차원 영상보다도 그 영상이 기록되는 방식에 있다.  홀로그래피는 다음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레이저에서 나온 빛을 기준광선과 작용광선으로 나누어, 이 중 기준광선은 직접 건판(필름)에 도착하게 하고 나머지 작용광선은 촬영대상을 거쳐 건판에 도착하게 한다.  건판에 도착한 두 빛은 서로 간섭을 일으켜 간섭무늬를 건판에 기록하게 되는데, 이 간섭무늬를 홀로그램이라고 한다.  일반 사진술은 그 필름을 보면 어떤 영상이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홀로그램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암호 같은 간섭무늬만이 찍혀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홀로그램이 담겨 있는 사진건판에 레이저광을 비추면 홀로그램이 3차원 공간상에 실물처럼 되살아난다.  

  이제 이 건판을 두 개의 조각으로 가위질을 해보자.  일반 필름이라면, 예를 들어 큼지막한 사과를 찍은 일반 필름이라면 필름에는 사과의 반쪽만이 남아서 이 조각난 필름을 가지고 인화를 하면 반쪽 사과의 사진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홀로그램은 다르다.  조각난 홀로그램에 레이저광을 비추어도 원래의 사과 전체가 그대로 재생이 되는 것이다.  다시 또 가위질을 해서 네 조각을 내고, 그것을 또 수십 개의 조각으로 나눈다고 해도 잘게 조각난 홀로그램은 희미해지기는 할 망정 원래의 사과 전체를 그대로 재생해낸다.  

  이러한 현상은 아무리 작은 홀로그램 부분이라고 할지라도 홀로그램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전체가 부분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고, 부분이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림 5.3>  홀로그래피의 원리

 

  홀로그램은 우리의 전통 의학에서도 그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장기(臟器)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경락과 경혈, 수지침(手肢針), 이침(耳針) 등이 좋은 예이다.  특히 수지침과 이침은 손이나 귀에 인체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으로, 홀로그램의 단적인 예다.  혀나 눈, 손톱, 피부, 복부의 관찰만으로 신체 전반의 이상을 알아내는 것도 홀로그램의 예라 하겠다.  대체의학의 한 요법으로 알려져 있는 홍채관찰법이나 발반사요법 등도 홀로그램의 원리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다.

  홀로그램의 모델을 물리학과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분야에 적용하려는 과학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 이런 분야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들, 예를 들면 임사(臨死)체험, 자각몽(자신이 깨어 있음을 자각하는 상태에서 꾸는 매우 생생한 꿈), 투시, 공시성(共時性; 단지 우연의 결과라고만 볼 수 없는 사건들간의 시간적 일치성)과 같은 초상현상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신경생리학자인 칼 프리브램은 인간의 두뇌가 홀로그램의 원리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미 암시하였듯이 홀로그램은 데이비드 봄이 주장한 접혀진 질서의 가장 좋은 예이기도 하다.  홀로그램의 각 부분에는 전체에 대한 정보가 접혀져 있어, 이것을 펼치면, 즉 레이저광을 비추면 전체의 아름다운 영상이 되살아난다.  전체가 각 부분으로부터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봄은 양자역학이 이런 접혀진 질서를 암시해준다고 생각하였다.  EPR 실험의 패러독스나 아스펙트의 실험도 홀로그램의 개념을 받아들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다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홀로그램은 새로운 우주의 모델로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놀라운 가능성에 직면해 있는데,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홀로그래피 영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우주는 홀로그램이라는 초공간적 필름 속에 담겨 있는 정보가 의식이라는 레이저 광선으로 투사된 것이며, 공간과 차원이라는 것은, 스크린에 비치는 영화 장면들을 3차원적인 실체로 느끼듯이, 우리의 감각과 인식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신비학에서는, "존재의 세계는 장소가 아니고 존재의 상태"라고 하여, 공간적인 차원의 개념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매우 심오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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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공간들

 

  홀로그래피는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실제적인 예가 있기 때문에 부분이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다는 홀로그래픽의 놀라운 개념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어떻게 극히 작은 부분이 거대한 전체를 반영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홀로그래피라는 주장을 수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맨인블랙(MIB)>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외계인이 데리고 있던 오리온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목에는 작은 구슬이 매달린 벨트가 채워져 있었는데, 그 구슬 속에는 진짜 은하계가 들어 있고,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외계인들 간의 암투가 이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어떻게 손톱만한 구슬 속에 광대한 우주가 들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공상과학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재미있는 계산을 한번 해보자.  어려운 계산이 아니므로, 직접 따라서 해보면 그 결과에 놀랄 것이다.

  블랙홀의 영역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탈출속도가 광속도와 같아지는 곳의 반지름이다.

  탈출속도  V = √(2GM/R) 에서 V를 광속도 C로 바꾸어 놓으면 C =  √(2GM/R) 가 된다.  여기에서 M은 천체의 질량, R은 천체의 반지름, 그리고 G는 중력상수이다.  양변을 제곱하면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R = 2GM/C2 로 구할 수 있다.  이 식에서 볼 수 있듯이,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천체의 질량에 비례한다.  만일, 붕괴 당시 태양의 10배의 질량을 가진 천체가 블랙홀이 된다면, 그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블랙홀이 된 태양의 10배가 될 것이고, 그 부피는 103=1,000 배가 된다.  따라서 밀도는 질량을 부피로 나눈 것이므로, 블랙홀의 밀도는 태양으로 만들어진 블랙홀보다 100분의 1로 작아질 것이다.

 

ρ = M/V = M/(4πR3/3) = {3C6/(32πG3)}/M2

 

  이와 같이 블랙홀의 밀도는 질량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급격히 감소한다.

  태양급 질량을 가진 천체가 블랙홀이 되면 질량밀도는 1016g/㎤ 이 된다.  만일, 우주 전체의 질량(태양의 1023배로 가정)을 가지고 블랙홀을 만들면 그 질량밀도는 10-30g/㎤ 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숫자는 실제 우주의 밀도와 거의 같다.  또한 이 블랙홀의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을 구하면 태양급 블랙홀의 경우(약 3㎞)의 1023 배로 3×1023㎞, 즉 3백억 광년으로 우주의 반지름(1.42×1023㎞)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어쩌면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블랙홀 내부에서 살고 있는 셈이 아닌가!  

  상상하기는 힘들겠지만, 일부 신비학 단체에서는 이 우주 전체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일종의 관(space tube)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감지할 수는 없는데, 이 우주 자체가 하나의 블랙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회전하는 블랙홀, 즉 케르 블랙홀이거나 케르-뉴만 블랙홀(그것도 극단적인 케르-뉴만 블랙홀)일 가능성이 크다.  아누가 바로 플랑크 길이의 케르-뉴만 블랙홀에 해당된다고 제안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아누의 어원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산스크리트어로 '원자'를 뜻하는 아누는 베단타 철학에서 파라브라만의 이름이기도 하다.  파라브라만은 가장 작은 원자보다도 더 작은 존재이면서 또 가장 큰 우주의 영역보다도 더 큰 존재로 묘사된다."  (<비교> 1권, p.357)

 

  케르-뉴만 블랙홀을 연결고리로 한 아누와 전체 우주, 극소와 극대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파라브라만과 아누의 어원, 그리고 이 우주 자체가 블랙홀이라는 사실은 여기에 어떤 무한의 순환고리가 존재함을 일깨워준다.  그에 비하면 상대적인 공간의 크기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무감각한 존재들인가!  위의 영화에서, 조그만 구슬 속에 은하계가 들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지구인에게 외계인은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오" 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아누의 내부에 또 하나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해도, 아니 우주보다 더 큰 세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림 5.4>  자기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오로보로스(Ouroboros)',

극대와 극소의 무한한 순환을 나타낸다.

 

  한편, 홀로그래피와 유사한 개념 중에 홀론(holon)이라는 말이 있다.

  홀론은 유태계 헝가리 출신의 영국 소설가 아더 케슬러가 만든 용어다.  케슬러는 요소환원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홀론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홀론은 그리스어 홀로스(holos; 전체)와 온(on; 부분, 입자)의 합성어로, 즉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시스템에서나 부분과 전체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려는 개념이 바로 홀론이다.

  홀론은 독립성과 의존성, 모두를 갖춘 존재이다.  그 무엇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독립자를 절대독자(絶對獨者)라 하는데, 이 우주 안에 절대독자는 있을 수 없다.  의존성이 전혀 없는 절대독자들은 마치 모래알과 같아서 그들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대로 독립성은 전혀 없고 의존성만 있는 것도 무용지물이다.  이것은 마치 묽은 진흙탕이나 물처럼 주루룩 흘러내리고 자신의 모습조차 갖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나 홀론은 독립성과 의존성으로 서로 결합해서 어떤 구조를 만들고 형체를 만들어나간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각 특정의 비율로 독립성과 의존성을 갖춘 홀론들이다.

  또 홀론은 위와 아래 어디나 열려 있는 일종의 개방계이다.  개방계로서의 홀론은 위로부터 끊임없이 정보를 얻어내고 그것을 아래로 보내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케슬러는 우주가 홀론의 계층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누가 결합하여 쿼크를 만들고, 쿼크가 강한 상호작용을 해서 핵자를 만들고, 다시 원자핵, 원자, 분자, 세포, 생명체를 만드는 것도 홀론시스템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원자, 모든 행성, 모든 태양은 우리 몸이 그렇듯이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들은 위대한 하나의 생명(One Life)의 유기적인 현현체이다."  (<비교의 물리> p.116)

 

  신비학에서 공간은 홀로그래피 혹은 홀론의 성격을 갖춘 '초공간'(이때의 초공간은 단순히 3차원 우주를 넘어선 고차원의 영역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모두 포함한 통일적 유일자로서의 공간을 말한다)이다.  초공간은 단지 현현된 질서와 접혀진 질서, 즉 우리의 인식하에 있는 3차원 물질우주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양분될 뿐 아니라(이것을 明在界와 暗在界로, 혹은 유한계와 무한계로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한한 계층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간은 다중(뭇겹)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공간의 공간들(spaces of Space)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그 공간들은 경계가 없는 물리적인 공간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게는 내부의 공간, 그리고 그 내부의 내부의 공간, 무한한 안쪽으로의 영역들이다."  (<오컬티즘의 원천> p.74)

 

  즉 다중구조의 공간에서 한 공간은 더 낮은 차원의 공간에 대해서는 접혀진 질서와 펼쳐진 질서의 관계에 있으며, 더 높은 차원의 공간에 대해서는 반대로 펼쳐진 질서와 접혀진 질서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접혀진 질서의 접혀진 질서, 또 그 접혀진 질서의 접혀진 질서가 계속 소급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 물질우주는 더 높은 차원의 펼쳐진 질서의 펼쳐진 질서의 펼쳐진 질서, 또는 보다 근원적인 홀로그램의 그림자의 그림자의 그림자쯤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분화된 초공간은 7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신비학에서는 이야기한다.  

 

  "공간은 비교의 상징학에서 '일곱 개의 피부를 가진 영원한 어머니-아버지'로 표현된다.  공간은 미분화(未分化) 상태에서 분화한 층에 이르기까지 일곱 층의 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교> 1권, p.9)

 

 

<그림 5.5>  일곱 개의 피부를 가진 공간(<공간-의식의 기하> p.87)

 

  이 분화된 일곱 층의 공간을 신비학에서는 존재의 계(plane of existence)라고 하는데, 각각의 존재계는 다음과 같은 나름대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디계              (Adi plane)

        아누파다카계    (Anupadaka plane)

        아트마계           (Atmic plane)

        붓디계              (Buddhic plane)

        멘탈계              (Mental plane)

        아스트랄계        (Astral plane)

        물질계              (Physical plane)

 

  우리가 인식하는 3차원 공간은 물질계에 해당한다.  물질계의 궁극원자인 아누에 힘을 부어주는 상위의 4차원 공간은 아스트랄계이다.

 

  "하나는 힘이 '바깥에서', 즉 4차원 공간인 아스트랄계에서 흘러들어와 아누를 통과하여 물질계로 쏟아져 들어간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3)

 

  그러나, 이들 상위 차원의 공간들이 말 그대로 일반 공간 개념의 '위'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각 차원의 공간을 나타낸 위의 그림은 상징일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모든 존재의 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을 뿐 아니라, 3차원적인 위치 개념을 초월해 있다.  그러므로 아스트랄계의 공간으로 가기 위해서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태양계 바깥이나, 은하계 바깥으로 빠져나갈 필요는 없다.  라디오파나 가시광선, 자외선, 또는 X선과 같이 전혀 다른 주파수의 전자기파가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중첩된 공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공간론에서 현대물리학은 신비학이 그간 주장해오던 공간의 성질을 인정하거나 실험 혹은 수학적 계산으로 이를 반증해주는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다.  즉 캐시미어 효과는 신비학의 공간 충만설을, 아스펙스의 실험은 공간의 비국소성을, 그리고 홀로그래피와 홀론 개념은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또 궁극원자와 우주 양쪽 다가 블랙홀일 수 있다는 사실은 신비학의 다중적 공간론을 확인해주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누가 물질우주의 가장 작은 경계선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한 세계의 끝이 아니라, 어쩌면 상위 차원이라고 해야 할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미지의 출입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계적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경이로움에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매질의 성질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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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일론과 에테르

   

  어항을 보면 물 속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공기발생기를 통해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구슬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구슬이 공기로 되어 있는 걸 안다.  우리는 평소에 공기를 볼 수가 없다.  그런데 대기 중의 공기와 성분은 다를 것이 없건만 그 공기가 어항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우리는 공기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가 물고기가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인간이 공기를 마시듯이 물을 마시고 새가 날개짓을 하듯이 지느러미를 퍼득거린다.  우리가 한평생 바다 속에서만 사는 어종이라면, 인간이 공기의 존재에 무뎌지듯이 물의 존재에 무뎌질 것이다.  그리고는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공기가 존재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듯이, 물의 흐름을 느끼고서야 물의 존재를 이따금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우리 눈앞에 어디선가 동그란 풍선 같은 것이 나타나서 흔들거리면서 위로 올라간다고 해보자.  그 표면은 반들반들해서 우리의 툭 튀어나온 눈이 반사되어 보일 정도이다.  가슴지느러미로 그 풍선을 건드려 보지만 모양은 찌그러져도 터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공기방울은 물고기가 된 우리에게 하나의 실체라는 인상으로 강하게 다가올 것이다.  평생 단 한번도 해수면위로 올라가보지 못한 우리는 공기방울의 정체가 본래 형태가 없는 기체라는 사실을 ― 물고기 과학자가 있어 그 성분을 분석해보기 전에는 ― 알기 어려울 것이다.

  "물고기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공수증(恐水症)이 있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오컬트화학을 보는 순간, 나는 인간이 한 마리 물고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또 하나의 질문에 대답할 때가 되었다.  나는 앞에서 아누가 물질계의 궁극원자임을 다양한 검토를 통해 주장해왔다.  그런데 궁극원자라고 하는 아누는 왜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는가?  스파릴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물질계의 궁극 원자를 조사해보자.  이 원자에는 나선 혹은 철사 같은 것이 열 개 있는데, 나란히 있지만 결코 서로 접촉하지는 않는다.  원자에서 이 나선을 하나 끄집어내어 펴면 완전한 원형이 되는데, 하나의 선이 아니라 코일 형태의 스프링이 된다.  1,680바퀴 회전하는 코일로 이루어진 스프링이다.  이 코일 하나하나를 제1스파릴라(전체를 나타낼 때는 제1스파릴래)라고 부른다.  이 제1스파릴래를 펴 늘이면 훨씬 더 큰 원이 된다.  각각의 코일 역시 그 자체가 더 작은 코일 형태의 스프링이다.  이것을 제2스파릴라(스파릴래)라고 부른다.  이렇게 제7스파릴라(스파릴래)까지 존재한다.  각각은 앞의 것보다 더 정묘하며, 그 축이 앞의 것과 직각을 이루고 있다.  이 고리들을 펴는 과정을 계속 진행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줄 위에 있는 진주들처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을 보게 된다.  이 점들은 너무나 작아서 궁극의 원자 하나를 만드는 데는 수백만 개의 점이 필요하다.  이 점들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모든 물질의 기초인 것 같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7)

 

  위에서 하나의 나선은 1,680개의 코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 하나하나의 코일(제1스파릴라)은 7개의 더 작은 코일(제2스파릴라)로 이루어져 있고, 제2스파릴라는 또 다시 7개의 제3스파릴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7스파릴라는 7개의 작은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점들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보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기초이다.  하나의 아누 속에는 이러한 점들이 약 140억 개가 있다.  이 작은 점들은 모든 물질의 토대이지만, 그 자체는 결코 물질이 아니다.  오컬트화학에서는 이 점들을 거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단위들은 모두가 똑같으며, 모양은 구형(球形)이고 그 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이들은 모든 물질의 토대이지만, 그 자체는 결코 물질이 아니다.  이들은 덩어리가 아니라 거품들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7)

 

  "이 거품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비누방울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비누방울은 얇은 막을 가지며 이 막을 기준으로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면서, 막 자체가 내면과 외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아누의 스파릴래를 구성하는 거품은 공기 중의 거품보다는 차라리 물 속에서 보글보글 솟아오르는 거품과 비슷하다.  물 속의 거품은 단지 하나의 면만 가지고 있다.  즉 거품 속에 담긴 공기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물의 면(面)만 있는 것이다.  물 속의 거품이 물이 아니고 물이 없는 지점인 것처럼, 모든 물질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는 코일론이 아니라 코일론이 없는 상태이다.  즉 코일론이 없는 유일한 지점이며, 코일론 안에서 떠도는 무(無)의 점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간-거품의 내부는 우리의 눈에는 하나의 절대공(absolute void)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7)

 

  어항 속의 공기방울처럼, 스파릴래를 이루는 거품도 코일론(Koilon)이라고 부르는 바다 속에 생겨난 공기방울이다.  우리가 소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코일론이다.

 

  "이 물질을 코일론이라 부르자.  이것은 우리가 소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라프라크리티 혹은 '모물질(母-物質)'이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우주들의 총합이듯이, 코일론은 우리가 속하는 특정한 우주의 총합이다.  즉 우리 태양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태양을 포함하는 광대한 단일체다.  코일론과 물라프라크리티 사이에는 아주 많은 단계들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 수를 추정하거나 그 단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6)

 

  물 속의 공기방울이 물이 아니라 물이 없는 영역인 것처럼, 아누를 이루는 거품도 코일론이 아니라 코일론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물질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거품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도 바로 이 거품이다.  역으로 우리는 코일론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의 본질이 거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그것,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없는 것이고, 우리가 없다고(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있는 것이다.  코일론은 비현현의 상태여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코일론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때 과학자들이 가정하였던 에테르(ether)란 개념이다.  신비학의 우주론에서는 에테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에테르(ether), 에테르(aether), 아스트랄광(astral light), 아카샤(akasha)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코일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에테르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에테르란 개념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공간을 충만(Fullness)을 의미하는 '플레로마(pleroma)'라고 불렀다.  진공을 부정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의 머리 속에는 힘을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에테르란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뉴튼 역학은 에테르의 가정 없이도 천체의 운행을 아주 잘 기술하였지만, 정작 뉴튼 자신은 에테르의 존재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한편 음파나 수면파와 같은 파동은 반드시 매질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토마스 영(1791∼1865)의 이중 슬릿 실험과 오거스틴 프레넬(1788∼1827)의 빛의 회절 이론, 장 푸코(1819∼1868)의 물 속에서의 광속도 측정, 그리고 제임스 맥스웰(1832∼1879)의 전자기 이론에 이어 헤르츠(1857∼1894)가 1888년에 실험적으로 전자기파의 검증에 성공하는 등 빛이 파동성을 지닌 전자기파인 것으로 밝혀지자, 빛을 전달하는 매질로서 에테르의 존재가 상정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에테르의 존재는, 에테르의 존재를 그토록 확인하고자 열망하였던 알버트 마이켈슨과 에드워드 몰리의 실험이 실패함으로써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약 30㎞/sec의 속도로 공전하고 있고, 태양은 다시 다른 별들에 대해 운동을 하고 있으며, 태양계 전체는 약 250㎞/sec의 속도로 은하의 핵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하고 지구가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지구에서 보았을 때는 에테르가 흐르고 있는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이 에테르의 흐름을 에테르 유동이라고 하자.  그런데 어떤 물체가 매질 속을 움직일 때에는 저항을 받게 된다.  물 속에서 수영하거나 공기 중에서 뜀박질을 할 때 물과 공기의 저항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창문을 열어 놓으면 그 효과를 더욱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테르라는 매질이 존재한다면, 비록 우리가 그 효과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빛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가정해볼 수 있다.

  1887년에 마이켈슨과 몰리는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빛의 속도 변화를 측정할 수 있는 실험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들은 광 간섭계의 나트륨 등에서 나온 빛이 거울을 통해 서로 수직으로 갈라져, 일부 광선은 에테르 유동에 대해서 수직방향으로, 나머지 광선은 에테르 유동과 같은 방향으로 동일한 거리를 일주하게끔 한 다음, 이 두 갈래의 빛이 하나로 합쳐지게 하였다.  일주하는 데 걸린 시간이 차이가 난다면 합쳐진 두 개의 빛은 간섭무늬를 만들어낼 것이다.  따라서 실험장치의 방향을 돌려가면서 실험한다면, 어느 한 광선의 방향이 에테르 유동과 수직을 이룰 때 간섭효과는 최대가 되고, 두 광선 모두 에테르 유동과 45도의 각도를 이룰 때 최소의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  따라서 장치가 회전함에 따라 간섭으로 인한 주름무늬는 계속 변화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림 6.1>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장치 개요 (<빅뱅을 넘어서> p.245)

 

  그러나 마이켈슨과 물리는 아무런 간섭효과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에테르의 증거를 찾기 위해 실험장치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끈질기게 실험하였으나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을 반복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실험결과는 에테르의 존재를 강력하게 부정하는 것이었고, 과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에테르에 대한 해석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헨드릭 로렌츠가 새로운 가설을 내놓음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기존의 에테르가 다분히 기계적인 개념이었던 데 비해, 1904년에 로렌츠가 내어놓은 에테르의 개념은 전자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원자 입자들이 에테르와 구별되는 일종의 당구공 같은 것이 아니라, 에테르 그 자체로부터 형성된 파동의 여기(勵起)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물질 자체가 에너지파와 같은 전자기적인 본질을 가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편, 조지 피츠제럴드(1851∼1901)와 로렌츠는 빛의 속도에 근접한 속도에서는 물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수축될 수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만약 그렇다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장치 자체가 에테르 유동이 있는 방향으로 수축되어 실험결과가 무의미해졌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피츠제럴드-로렌츠의 가설대로 수축이 일어난다면 빛의 신호가 에테르 속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나가든지 일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렌츠의 방정식은 또한 움직이고 있는 시계의 시간이 느리게 갈 것이고, 시계의 기계장치가 광속에 가까워질수록 물리적인 움직임은 더 느려질 것임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렌츠는 한동안 시계의 지연 현상을 실제적인 물리 효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현상을 처음으로 지적한 영예는 아인슈타인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 효과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말았다.  즉 1905년에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시계의 지연 현상을 시간 그 자체의 지연 현상으로 결론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속도에 따라 물체 자체가 수축된다는 피츠제럴드-로렌츠 수축 가설은 속도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바뀐다는 내용으로 변해 상대성 이론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한편 구스타프 미에는 물질에 대한 로렌츠의 전자기적 개념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전자와 같은 기본 입자들은 전기와 자기장의 강도가 특별히 높은 곳에 해당될 뿐이고, 그 위치에서는 통상적인 전자기 역학 방정식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새로운 유형의 비선형 행동이 나타나 물질이 된다고 추론했다.  로렌츠와 미에, 그리고 전자기적인 에테르의 개념을 갖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여전히 에테르를 유일한 실재로 보았다.

  사실 이미 19세기에 켈빈 경을 비롯해서 톰슨과 올리버 롯지 경 등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867년에 보텍스-원자 이론을 발표한 켈빈 경은 물질의 원자란 건 보텍스링 운동을 하는 에테르 질료의 어떤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가정하였던 것이다.  또 전자를 발견한 톰슨은 모든 질량과 운동량, 운동에너지는 결국 에테르의 질량과 운동량, 운동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올리버 롯지 경은 1882년에 하나의 연속적인 질료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것은 빛의 형태로 진동할 수 있으며, 양전기와 음전기로 전단(剪斷) 변형을 일으킬 수 있고, 소용돌이 형태가 되었을 때에는 물질을 구성하며, 충돌에 의한 충격이 아닌 연속성을 통해서 물질의 모든 움직임과 반응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에테르에 대해서 썼다.

  이렇게 에테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에너지파를 비롯한 모든 물리 현상과 물질 입자들은 우주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에테르가 여기되어 외형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으며, 에테르와 입자를 단절적으로 구별해서 이분법으로 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렌츠와 미에의 에테르 이론은 물리학계에서 확실한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다.  바로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만일 빛의 한 방향 속도가 일정한 상수값을 유지한다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가정(즉 광속 불변의 법칙)을 받아들이면 관찰자가 속해 있는 좌표계의 속도에 관계없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결과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아인슈타인의 해석은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인 기준계를 가정하는 고전적 개념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대신에 아인슈타인은 공간상의 두 지점이나 시간상의 두 사건간의 간격이 관찰자가 얼마나 빨리 두 지점을 상대적으로 움직여가느냐에 따라 무한하게 변할 수 있는 탄성적인 양이라고 이론화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관찰자의 속도를 시공간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직관에 반해 매우 복잡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중 속에 있는 한 사람을 서로 다른 백 가지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백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관측한다고 해보자.  상대성 이론대로라면, 이 백 명의 사람들은 각각 그 자신만의 척도를 가진 백 개의 서로 다른 시공의 틀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또한 쌍둥이 시계 패러독스나 광원속도의 패러독스와 같은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전자기적 에테르 이론이라면 이런 모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리학자들 대부분은 전자기적 현상을 오로지 수학적인 기술로만 이해할 뿐이고, 구체적인 실체의 개념과 분리시켜 장 방정식으로 다루는 데 익숙해져서 이런 패러독스들을 기꺼이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  그들은 수학적 우아함에 기초하여 상대성 이론을 수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직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암시들도 너그럽게 보아 넘기려 한다.  어쨌든 1910년경에는 이미 특수상대성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상대성 이론의 성공은 곧 에테르 가설의 실패를 뜻하였다.  상대성 이론은 에테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게다가 광속 불변의 법칙과 그에 따른 무수한 시공의 틀을 가진 상대성 이론은 단지 하나의 공간과 시간의 척도만을 수반하는 에테르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날 상대성 이론이 최대의 찬사와 함께 확고한 지위에 올라섬으로써, 에테르 가설은 마이켈슨-몰리의 실험 실패에 이어 상대성 이론이 등장했을 때 이미 영원히 종말을 맞이했다고 보는 것이 과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그러나 비록 권위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는 했지만, 상대성 이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는 않았다.  주목할 만한 첫 번째 반론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3년에 프랑스의 물리학자 게오르그 사그낙이 실험을 통해 제기했는데, 이로 인해 상대성 이론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그낙은 광원을 회전반 위에 설치하였다.  사그낙은 거울을 사용하여 그 빛을 두 개의 광선으로 나누어, 회전반의 페리미터(perimeter) 주위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였다.  그 다음 두 개의 광선을 재결합하여 간섭 무늬를 만들어내었는데, 회전반이 시계방향으로 돌 때 광선의 간섭무늬가 회전반의 속도에 비례해 변화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회전반의 회전에 따라, 시계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광선이 그 일주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시계방향으로 움직이는 광선의 일주 시간보다 적게 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그낙은 이것을 빛이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직접적인 증거라고 간주하였다.  사그낙의 발견은 나중에 유도장치 기술에 중요한 진보를 가져다주었는데, 오늘날 보잉 757기와 보잉 767기 같은 여객기들을 유도하는 링-레이저 자이로스코프는 바로 이와 똑같은 원리에 의해 작동된다.

  사그낙의 실험은 한때 상대성 이론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상대성 이론의 지지자들은 곧 그 실험결과를 해명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1921년에 폴 랑제방이 상대성 이론의 시간지연 효과를 고려하면 사그낙의 실험 결과가 무효화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번에는 벨연구소의 허버트 아이브가 랑제방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논문을 1938년에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에 의하면 적어도 회전하는 좌표계에서는 사그낙의 해석이 정당하며, 특수상대성 이론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아이브의 반증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랑제방의 논문 발표 이후 에테르 가설은 점차로 낡은 것이 되어갔다.  물리학자들은 특수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에테르에 관한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장 방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상대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에테르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다.

  1951년에 아이브는 다시 한번 아인슈타인 이론의 중대한 결점을 폭로하였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결과에 상대성 이론의 푸엥카레 법칙을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계에서 빛의 한 방향 속도는 아인슈타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항상 상수인 c(광속도)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오히려 한 좌표계에서 다른 좌표계로 이동할 때 상수로 남는 것은 자와 시계의 눈금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기술한 용어를 포함하는 매우 복잡한 수학적 함수였다.  아인슈타인의 결과는 정상적인 물리 방법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양을 사용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특수상대성 이론의 불안정한 관찰상의 근거를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진 물리학계에 화가 난 아이비는 "측정기구에 의지하지 않고 권위적인 명령에 의해 미지의 속도(빛의 한 방향 속도)에 한정된 값을 할당하는 것은 참된 물리 작업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일종의 의식(儀式)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광속 불변의 원리는 단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지도 않다"고 비판하였다.  아이브는 1940년대와 1950년대초를 통하여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는 전자기적인 에테르 이론이 보통 특수상대성 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용되는 실험결과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논문들을 연속해서 발표하였다.  로렌츠의 이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오늘날 '잣대수축-시계지연 에테르 이론(rod-contraction-clock-retardation ether theory)'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다른 과학자들의 상대론적인 견해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특별히 빛의 한 방향 속도가 일정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특수상대성 이론은 틀리게 될 것이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은 단지 빛의 양방향 왕복속도의 평균이 일정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 실험결과는 반드시 빛의 한 방향 속도가 어느 방향을 향하든지 일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특수상대성 이론은 마이켈슨-몰리 실험의 결과를 훨씬 넘어서 불확실한 외삽법(外揷法) 위에 세워진 셈이다.

  비록 아무도 빛의 한 방향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1987년에 어네스트 실버투스는 빛의 파장이 빛이 전파되는 방향에 따라 변하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하였다.  실버투스는 파장을 측정하기 위한 특별한 종류의 레이저 간섭계를 만들었는데, 이 장치에는 조정이 가능한 거울과 광선 스플리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서로 반대 방향의 두 레이저 광선을 서로 간섭하게 하여 일정한 간격의 밝고 어두운 띠나 무늬로 나타나는 정상파형(定常波形)을 만들어내는 장치였다.  그는 이어서 특별히 제작된 TV 카메라를 이용하여 이 무늬의 간격을 측정하였다.  이 검출기에는 그 유효 두께가 레이저 광선의 파장보다도 10% 이내로 작은 투명한 감광층이 있어서 매우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였다.

  실버투스는 로 반대 방향을 향하도록 조정된 레이저 광선이 천구의 사자자리와 일치하도록 정렬되었을 때 간섭무늬의 간격이 가장 좁아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것이 에테르 속을 움직이는 지구의 방향을 나타낸다고 생각하였다.  실버투스는 최소가 되는 간섭무늬의 이 간격을 측정하여 지구가 사자자리를 향하여 약 378(±19)㎞/sec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몇 년 후에 더 개선된 장치를 만들어 실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천문학자들은 태양계가 주위의 3。K 의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의 복사장에 대하여 365(±18)㎞/sec의 속도로 사자자리의 남쪽 부분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실버투스의 실험 결과와 상당히 일치하며, 마이크로파 배경복사가 국부적인 에테르 정지계에 대하여 고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실버투스의 발견은 방향에 따라 빛의 한 방향 속도 역시 변화한다는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그낙의 실험이 회전하는 좌표계에서 특수상대성 이론이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었다면, 실버투스의 실험은 특수상대성 이론이 선형 움직임에서도 적용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림 6.2>  실퍼투스의 파장 측정 장치 (<빅뱅을 넘어서> p.251)

  

  에테르의 존재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그리스의 물리학자 파나지오티스 파파스와 미국 물리학자 피터 그라누가 수행한 전기역학적인 실험으로부터 얻어졌다.  이 실험 결과는 하전된 입자들이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방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어왔던 상대론적인 로렌츠 수축의 법칙이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며, 대신 좀더 정확하고 비상대론적인 암페어의 힘의 법칙으로 바뀌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암페어의 힘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전기역학적인 상호작용은 우선하는 절대적인 좌표계, 즉 에테르 정지계와 관련되어 있다.

  실버투스와 사그낙, 아이브, 파파스, 그리고 다른 몇몇 사람들의 발견은 우리가 에테르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성 이론과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현대 우주론을 다시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현재 일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에테르의 개념이 새롭게 부활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한참 유행했던 기계적인 개념의 에테르 이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이켈슨-몰리의 실험이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난해한 로렌츠의 '전자기 에테르 이론'과 아이브의 '잣대수축-시계지연 에테르 이론'이 마이켈슨-몰리의 실험결과를 설명할 수도 있지만, 폴 라비올레는 1995년에 펴낸 <빅뱅을 넘어서>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에테르 이론을 내세우면서 보다 구상적인 에테르를 가정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위의 책에서 일반 시스템 이론과 카오스 이론을 응용하여 에테르가 물질로서 현현하는 과정을 도식화하면서, '반응-확산 파동'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파동을 제안하였다.  이 반응-확산 파동은 수동적이고 불활성인 기존의 기계적인 파동이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데 반해(따라서 이 기계적인 파동의 매질은 단순히 파동을 전달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일정 상황 하에서는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파동이다.  반응-확산 파동은 매질의 접혀진 질서가 외부로 드러난 표현이기도 하다.  반응-확산 파동, 또는 화학적 파동(chemical waves)의 쉬운 예로 벨로소프-자보틴스키 반응을 들 수 있다.

 

 

<그림 6.3>  벨로소프-자보틴스키 반응

 

  라비올레는 또 그의 변성 에테르 이론을 이집트의 창조신화와 서양 트럼프의 원형이자 역시 이집트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타로(Tarot)카드, 그리고 점성학과 연계시켜 흥미로운 풀이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변성 에테르 이론이 기원전 5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원초적 유동(primal flux)'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헤라클리투스는 에테르를 불에 비유하면서 에테르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자신의 구성성분의 동시 발생적인 창조와 파괴를 지탱하는 것으로 상상하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질서정연한 우주(코스모스)는 얼마간은 켜져 있고, 얼마간은 꺼져 있는 영원히 사는 불이다.

  그런데 오컬트화학의 코일론은 전자기적인 에테르 또는 라비올레의 변성 에테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물질이 일어나는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그 자신은 물질과는 다른 질서와 유형에 속한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  

 

  "투시를 통하여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코일론이 실제와는 다를지 모르지만 동질(同質) 혹은 균질(均質)적인 것으로 보인다.  코일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물질보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조밀한 점에서는 과학에서 말하는 에테르의 요구조건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코일론은 물질과는 전혀 다른 질서와 유형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은 코일론이 아니라 코일론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 상황을 이해하려면 물질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거의 180도 수정해야 한다.  비어 있음은 곧 비어 있지 않음이고, 비어 있지 않음은 곧 비어 있음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6∼17)

 

  기존의 에테르 이론들은 물질과 에테르를 모두 실체로 보고 있는 반면에, 오컬트화학의 코일론-에테르 개념은 물질의 실체를 부정한다.  비록 아누라는 구상적인 물질의 최소 단위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 실체는 공(空)한 것이다.  통상적인 믿음과는 반대로 진공은 어마어마한 밀도로 꽉 차 있고 물질은 비어 있다.

  이와 비슷한 개념을 1902년에 오스본 레이놀즈 교수가 제안한 바 있다.  물질은 에테르의 질료 속에 생긴 일종의 결함이나 갈라진 틈, 또는 잘 맞지 않고 어긋난 열 같은 것으로, 어떠한 질료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료가 결여된 상태가 물질이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물질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믿고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똑똑한 물고기라면 바다의 수면 위로 떠올라 바다의 존재를 깨우칠 수가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일론이라는 바다를 보려면 날치나 돌고래처럼 수면 위로 뛰어올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코일론의 바다를 빠져나갈 수가 없다.  우리의 우주는 '바깥'도 존재하지 않고 '수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공기방울로 지어진 용궁을 진짜라고 착각하면서 코일론의 바다 속에 영원히 묻혀 사는 심해 어족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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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질료

 

  코일론은 물질 그 자체는 아니지만(또는 물질과는 다른 유형이지만) 물질의 바탕이 된다.  나는 그것이 아인슈타인이나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이 찾고자 꿈꾸어왔던 통일장(unified field)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공간이 하나의 단일체인 것처럼, 공간의 분화물이자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코일론 역시 하나의 단일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물질을 코일론이라 부르자.  이것은 우리가 소위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득 채우고 있다. ‥‥‥  코일론은 우리가 속하는 특정한 우주의 총합이다.  즉 우리 태양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태양을 포함하는 광대한 단일체다."  (<오컬트화학> 제3판, p.16)

 

  이 단일체라는 개념을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 원자와 분자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 ― 연속적인 물체를 뜻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 개념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키온의 예를 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타키온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입자들과는 달리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초광속 입자이다.  물론 특수상대성 이론이 초광속을 허용하지 않고 있으므로, 타키온은 기존의 상대론적인 물질관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입자로 취급받고 있다.

  보통의 물질 입자는 에너지를 가하면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광속에 접근하게 된다.  따라서 속도가 0일 때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타키온은 아무리 에너지를 가하여도 빛의 속도보다 낮출 수가 없다.  오히려 무한대의 속도일 때 타키온은 가장 안정된 에너지 상태가 되는데, 무한대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한대의 타키온이란 곧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코일론을 타키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정할 때, 코일론-타키온은 분리되어 있는 입자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전체를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코일론이 하나의 단일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앞 절에서 공기방울을 비유로 설명한 것처럼, 코일론은 물질에 속하는 것이고, 실제적인 물질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물질 또는 물체라고 부르던 것을 계속 물질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한다면, 반대로 코일론을 물질이라고 부르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앞으로 코일론 역시 물질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둘이 비록 서로 다른 유형과 질서에 속하는 것이기는 해도, 이 둘이 함께 빚어져 비로소 물질이라는 조각품을 내어놓는 것이므로 이 둘을 서로 떼어놓기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나아가 코일론은 물질의 재료라고까지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터널의 실체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지만 터널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치형의 기다란 콘크리트 원통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또 다른 예로 물질을 물결치는 파도에 비유한다면 코일론은 바닷물과 같다.  즉 바닷물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파도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코일론을 물질(더 정확하게는 질료의 개념)로 간주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코일론조차도 더 높은 질서의 하위 개념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에테르를 무엇이라고 인식하여도, 에테르는 결국 분화된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  (<비교의 물리> p.24)

 

  아누도, 코일론-에테르도 물질의 궁극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존재하게 하였는가?  또는 위의 인용문처럼 에테르가 그 어떤 것으로부터 분화된 질료에 불과하다면, 분화 이전의 그 어떤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어떤 것을 최초의 근원적인 질료라는 의미에서 '원초적 질료(Primordial Substance)'라고 부르기로 하자.

  물질(Matter)과 질료(Substance)는 어떻게 다른가?  둘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이 책에서는 물질을 질량이나 관성, 전충성(塡充性; 물체가 공간을 점유하는 성질)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질료는 이런 특성들을 갖지는 않지만 보다 원인적이며 물질을 구성하는 재료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질이 가진 위와 같은 특성은 본래부터 물질에 내재해 있는 본원적인 성질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차차 설명할 것이다), 물질은 질료에 비해 부차적인 것, 또는 질료의 운동이나 결합 같은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일종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런 구분이 항상 유지된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물질과 질료를 서로 바꾸어 쓰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의식이나 생명과 대비하여 존재의 물질적 측면을 말할 때에는 질료라 하지 않고 물질이라 하기도 하였다.

  에테르를 상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과학의 개념이나 인간의 인식능력으로 원초적 질료를 그려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실 이 이상의 것을 다루는 것은 형이상학 중에서도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우리의 노력은 멈출 수가 없기에 신비학의 지혜에만 의존해서라도 남은 여정을 계속해 나가기로 하자.

  원초적 질료를 신비학에서는 산스크리트어로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라 한다.  물라프라크리티는 문자적으로 천지만물 또는 물질의 뿌리를 의미하며,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모물질(母物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컬트화학의 표현대로 "코일론과 물라프라크리티 사이에는 아주 많은 단계들이 있지만, 현재 그 수를 추정하거나 그 단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모물질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것처럼 물라프라크리티는 코일론을 포함한 모든 물질과 질료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라프라크리티는 동서양의 여러 신비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아카샤나 에테르보다도 훨씬 더 상위의 개념이다(코일론조차도 이들보다는 더 상위의 개념이다.  아카샤나 에테르 모두 일반 물질과 코일론의 중간 단계에 해당하며, 이때의 에테르(aether)는 코일론-에테르와 같지 않다.  에테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단계의 물질 상태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면 혼란을 줄일 수 있다.  또 오컬트화학과 여러 신비 문헌에서는 물질계의 보다 정묘한 부분, 즉 기체 상태를 넘어서 아원자 수준에 해당되는 물질 상태를 에텔(ether)이라 부르는데, 이것 역시 과학계에서 논의하는 에테르나 위의 에테르와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여행을 통해서 공간과 물질이 사실상 서로 구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보았다.  우리는 보통 우주가 한 점에서 팽창해 나왔다는 빅뱅 이론 등의 영향으로 우주가 창조되면서 비로소 공간이 생겨났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신비학에서는 공간이야말로 우주의 현현(顯現)과 관계없이 존재하고 있는 우주 이전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우주가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간에,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은 무엇이겠는가?  ……  그 답은 '공간'이다."  (<비교> 1권, p.9)

 

  따라서 공간 자체를 우주의 현현 이전과 현현 이후로 구분하여 볼 수도 있다.

 

  "공간은 그것이 우주활동 전일 때 어머니라고 불리며, 다시 막 깨어나는 단계는 아버지-어머니로 불린다."  (<비교> p.84)

 

  물라프라크리티는 그러한 공간의 물질적 측면을 나타내는데, 종종 베일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영원한 어버이(공간)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그녀의 옷자락에 감추어져 있다.' ...  '옷자락'은 분화되지 않은 우주 질료 그 자체를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질료가 아니라 질료의 영적 에센스이다.  그리고 공간과 함께 영원히 공존하는 것이며 관념상의 인식에서 공간과 오히려 하나이다. ...  그것은 말하자면 유일하며 무한한 영(One Infinite Spirit)의 영혼이다.  힌두인들은 그것을 물라프라크리티라 부르며, 그것이 원초적 질료라고 말한다.  그것은 물질 현상이든, 심령이나 정신 현상이든 모든 현상의 우파디(Uphadi), 또는 매체(Vehicle)의 토대이다.  그것은 아카샤가 방사되는 근원이다."  (<비교> 1권, p.35)

 

  유일하고 무한한 영, 또는 물라프라크리티가 모든 분화된 질료의 근원인 것처럼 모든 분화된 의식의 근원인 형용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을 파라브라만(parabrahman)이라 한다.  물라프라크리티의 개념은 언제나 파라브라만과 함께 나타난다.  물라프라크리티는 파라브라만을 덮고 있는 베일이며, 동시에 파라브라만의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파라브라만과 물라프라크리티는 그 본체는 하나이지만, 현현된 우주의 개념에서 볼 때는 둘이다.  심지어 최초의 '현현'인 하나의 위대한 로고스의 개념 속에서도 둘로 구분된다.  객관적인 견지에서 볼 때는 파라브라만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물라프라크리티로서 나타난다.  무제약적이고 절대적인 하나의 위대한 실체로서가 아니라, 그 실체를 가리고 있는 베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비교> 1권 p.294)

 

  불교에서는 파라브라만과 물라프라크리티의 통일적 일자(一者)를 스바바바트(Svabhavat)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파라브라만이 이 통일적 일자의 의식 측면이라면, 물라프라크리티는 물질 또는 공간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파라브라만이라는 용어는 '브라만(Brahman) 너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브라만은 절대자이자 우주 최고의 신성한 영적 존재를 말한다.  그러므로 브라만을 넘어서 있는 파라브라만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파라브라만은 신이 아니다.  더욱이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인격신(人格神)의 개념을 파라브라만에 적용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파라브라만은 무한의 개념이다.  무한은 절대의 개념조차도 초월한다.  절대자란 우주적인 하이어라키(계층구조)의 수장(首長)을 의미하며, 수식어를 동원하여 형용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정지어지게 된다.  하지만 경계가 없는 파라브라만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시간도 없고, 죽음도 없는 무한 바로 그것이다.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것을 감히 파라브라만이라고 부를 뿐이다.  파라브라만과 물라프라크리티는 카발라의 아인 소프(Eyn Soph), 또는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무극(無極)의 두 측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파라브라만-물라프라크리티는 브라만-프라다나, 그리고 이어서 브라마-프라크리티 또는 푸루샤-프라크리티로 현현되어 나타난다.  프라다나는 근원질료(원초적 질료)의 첫 번째 현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코일론은 이보다도 나중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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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2.26 20:16

    첫댓글 갑자기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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