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kpKFGwN_tUo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에스라의 나무 강단이 제공하는 성경의 어휘 연구 오늘 계속하겠습니다. 성경의 어휘를 연구하는 목적은 단어의 의미를 잘 파악해서 본문을 잘 이해하고 바른 신학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오늘은 152번째 강의입니다. 오늘 공부할 어휘는 '몽학선생'입니다. 좀 어렵죠? 저희가 전통적으로 많이 보는 개역한글판에는 몽학선생이 있고, 그것을 개역개정판에는 '초등교사'라고 번역해 놨습니다. 몽학선생이 너무 어려우니까 초등교사로 쉽게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가 몽학선생에 더 익숙하니까 몽학선생의 뜻이 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몽(蒙)' 자는 옥편을 찾아보니까 '어릴 몽', '어두울 몽'입니다. 어리거나 어두운 것, 아직 학문에 밝지 못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몽학'이라고 하면 어린아이들이 공부하는 것, 어린아이가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전통적으로 저도 어릴 때 이 책을 보고 어른들에게 배웠습니다마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이 동(童) 자에 어릴 몽(蒙) 자를 써서 어린아이가 먼저 학습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조선 시대 중종 때 박세무라는 사람이 만든 책인데, 어린아이들이 어릴 때 제일 먼저 공부해야 할 내용을 책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우리 국어사전에 보니까 '몽학훈장'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동화국어사전에 보니까 이 몽학훈장이란 뜻은 옛날 서당의 선생님을 훈장이라 그랬죠.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 또는 겨우 어린아이들이나 가르칠 정도의 훈장을 말합니다. 좀 아주 기초적인 내용만 가르칠 수 있는 교사를 약간 낮춰 볼 때 "에이, 몽학훈장이네"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습니다. 하여튼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훈장을 몽학훈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몽자가 들어 있는 다른 말을 보니까 '몽매'가 있습니다.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을 말할 때 '무지몽매하다'라는 사자성어를 쓰죠. 무지하고 사리에 어둡고 어리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계몽'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계(啓)는 열어준다, 펼쳐 준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나 무식한 사람을 깨우쳐 주는 것을 계몽이라 합니다. 인습에 젖어 있거나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서 새롭고 바른 지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계몽주의라 그러죠. 영어로는 'Enlightenment' 즉 밝혀주는 것입니다. 독일말로는 'Aufklärung'이라 하는데, 분명하게 해주는 것, 몽매한 것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 계몽입니다. 프랑스어로는 'Éclaircissement'라 하며 다 같은 뜻입니다. 밝혀 주고 분명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인류가 무지한 시대에 있다가 계몽 시대에 많이 깨어났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자꾸 계몽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어리석고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동몽선습』이라는 책을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에 갖고 있는 걸 보았는데요, 어린아이들에게 먼저 학습해야 할 것을 담은 책으로 박세무가 지었고 김혁제라는 분이 해설을 했습니다. 그 첫 페이지가 이렇습니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天地之間 萬물之中에 惟人이 最貴하니)" 즉 하늘과 땅 사이에 만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라는 뜻입니다. 여기 '유(惟)' 자는 옥편을 찾아보니까 '생각할 유'입니다. 원래 우리가 '사유'(思惟)라는 말을 잘 쓰죠. 논리적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을 사유한다 할 때 요 유자입니다. 그런데 이 글자는 '오직 유' 자도 됩니다. 입구 변이 붙은 '유(唯)' 자를 유일하다 할 때 쓰는데, 생각할 유(惟) 자도 오직이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옥편에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유독'(惟獨), "오직 홀로, 유독 너만 안 가고 여기 남았느냐?" 할 때 이 생각할 유자를 써서 오직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여기서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오륜을 배워야 한다고 해서 "부자유친(父子有親)하며 군신유의(君臣有義)하며 부부유별(夫婦有別)하며 장유서(長幼序)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나옵니다. 삼강오륜 할 때 오륜입니다. 뜻은 다 아시죠? 부자 간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고,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윤리입니다. 이것이 『동몽선습』에서 맨 처음 가르치는 삼강오륜입니다. 이처럼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그것이 우리가 지금 보고자 하는 몽학선생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럼 몽학선생의 뜻이 무엇일까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로는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라고 합니다. 파이다고고스는 '파이스'(pais) 또는 '파이디온'(paidion)에 '아고고스'(agogos)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파이스나 파이디온은 어린아이를 뜻하고, 아고고스는 '아고'(ago) 즉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어린이 교사(child-conductor), 어린이 지도자, 가정교사(tutor), 후견인(guardian) 이런 뜻을 갖고 있는 것이 파이다고고스입니다.
그런데 이 파이다고고스는 일반적인 의미의 교사인 '디다스칼로스'(didaskalos, teacher)와는 다릅니다. 파이다고고스는 6세부터 16세까지의 어린 학생들을 맡아서 통학을 돕고, 학교에 가면 신발도 챙겨 주고, 항상 곁에서 시중을 들어 주며 코도 닦아 주고, 소지품도 챙겨 주고, 밥 먹을 때 챙겨주기도 하며, 집에서는 공부와 예절을 가르치는 사람을 뜻했습니다. 이 일을 주로 누가 했느냐 하면 부잣집에서 종살이하는 유식한 노예들이었습니다. 좀 배운 종들이 그 집의 어린아이들을 챙겨 주는 가정교사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면 이 가정교사의 지도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몽학선생이 언급된 성경 본문을 보면 갈라디아서 3장 24절과 25절에 딱 두 번 나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있고 실력이 붙고 어른이 되면 이제는 유치원 선생 같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습니다. 개역한글판에는 몽학선생이라 되어 있고, 개역개정판에는 이것을 '초등교사'로 바꿨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아니라 초등 단계에 있어서 아주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교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딱 두 번만 언급되는 단어를 '디스 레고메논'(dis legomenon)이라 합니다. 성경에 한 번 언급된 말은 하파스 레고메논, 두 번은 디스 레고메논, 세 번은 트리스 레고메논이라 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두 번 언급된 단어입니다.
파이다고고스가 우리말로 몽학선생 또는 초등교사로 번역되었는데, 율법이 하는 역할을 이 몽학선생에 비유하여 가르쳐 준 것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몽학선생이 하는 일과 같습니다. 몽학선생은 아이를 따라다니면서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지 마라" 하며 하라와 하지 마라(Do's and Don'ts)를 주로 가르칩니다. 어릴 때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교사들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항상 따라다니며 지시하지는 않으며, 자라면 알아서 하게 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이거 해라, 지켜라, 하지 마라 지시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을 몽학선생의 역할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몽학선생이 아이를 훌륭한 성인이나 좋은 학생이 되도록 좋은 길로 인도하듯이, 율법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그다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게 해 줍니다. 법도 없고 아무런 가르침도 없으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구원받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영원히 매여 있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온 후에는, 즉 내가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는 그 몽학선생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처럼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의 기능을 알게 되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가 몽학선생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하신 이 말씀의 취지를 다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율법이 나쁜 것일까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앞선 강의에서 보았듯이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로마서 7장 12절), 신령하고(14절), 완전하여(시편 19편 7절)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해 주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율법이 하라는 대로 쫄랑쫄랑 따라만 다니고 머물러 있는 상태는 '동몽', 즉 어둡고 어리며 미숙한 상태인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율법 그 자체나 율법의 행위로서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없다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가르치는 것이지, 나를 대신해서 구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합니다. 행동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필요하고 거룩하며 선하지만, 율법 아래에만 갇혀 있으면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율법에는 가르쳐 주고 자라게 하며 어렵게 되는 방법을 알리는 기능이 있지만, 바울은 그것의 한계를 몽학선생 또는 초등교사에 비유했습니다. 유치원 교사가 평생 우리를 지시할 수 없듯이 이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몽학선생은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도울 수는 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그 아이를 스스로 선하고 의롭게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배워서 행해야 합니다. 몽학선생은 아이의 성장 과정 중 일정한 기간 동안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생토록 몽학선생의 지도 아래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다섯 번째, 몽학선생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수단이자 과정이지, 그 자체가 우리의 믿음이나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게 되는 것입니다. 몽학선생의 필요와 한계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몽학선생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몽학선생은 우리를 올바른 길로, 우리 인생의 초기에 지도하고 가르쳐 주는 존재입니다. 그 가르침을 받아 자기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면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짧게나마 152번째 강의로 몽학선생의 의미와 특히 '몽' 자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어릴 몽, 어두울 몽) 살펴보았고, 올바르게 성장한 사람이 되도록 역할을 하는 율법을 교사에 비유하여 연구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 25절을 읽을 때 "아, 몽학선생이 이런 뜻이구나, 율법이 이런 인도하는 역할 지시를 하는구나"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여기서 강의를 줄이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 핵심 요약정리
'몽학선생(초등교사)'의 한자어 및 원어적 의미
한자어: 개역한글판의 '몽학(蒙學)'에서 몽(蒙) 자는 '어릴 몽, 어두울 몽'으로 사리에 어둡고 미숙한 어린아이를 일깨워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초등교사'로 개정되었습니다.
헬라어: '파이다고고스(paidagogos)'로, 아이를 뜻하는 '파이스'와 인도자를 뜻하는 '아고고스'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일반 교사(디다스칼로스)와 달리, 당시 부잣집에서 6세~16세 유년기 자녀들의 등하교를 돕고 품행과 예절 및 기초 학문을 시중들며 지도하던 유식한 노예(가정교사, 튜터)를 가리킵니다. 성경에 단 두 번 나오는 디스 레고메논(dis legomenon) 단어입니다.
율법과 몽학선생의 비유적 관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4절, 25절에서 율법의 기능과 한계를 몽학선생에 비유했습니다.
몽학선생이 어린아이에게 일일이 행동 지침(하라와 하지 마라)을 가르치고 보호하듯, 율법도 영적으로 미숙한 죄인들에게 선악의 기준을 지시하고 가르치는 기능을 합니다.
율법의 수기능과 구인성
율법의 한계와 신앙의 성숙
몽학선생이 아이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는 있어도 아이의 인격 자체를 선하게 완전히 뜯어고치거나 성인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듯이, 율법 역시 죄를 지적할 뿐 '인간을 스스로 의롭게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가정교사(몽학선생)의 통제를 받지 않듯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성인이 된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나 형식적인 얽매임(율법주의) 아래 머물지 않습니다.
최종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