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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2019년 봄호에 실린 계간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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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가 현전하는 방식
이영숙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
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
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
― 발터 벤야민
세계는 접근 가능한 디테일로 가득 찬 창고다. 모든 문화적 산물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만인이 공유할 수 있는 지적 오브제로 바뀌었다. 전반적이고 보편적인 교양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연장자가 전수해주던 삶의 지혜조차 잠시 손가락 품을 파는 것으로 상시 습득 가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아 벽돌 한 장 쌓는 일은 여전히 일부 전문가들의 몫으로 간주되어 왔다. 인류 지식의 총량은 ‘벽돌 한 장’을 위하여 기꺼이 각주의 질료가 되어주었다. 주로 논문에서 특정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 내지 출처를 밝히는 용도로 쓰이는 각주는 연구자들 자신의 지적 노력과 지적 결벽을 증명하는 양 기능을 수행해오면서 한편으로 지성의 수직적 위계를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일반 대중이 검색이라는 방식으로 그 결과물들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소비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때, 최근 각주를 단 시들이 부쩍 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런 현상을 시의 지성화로 볼 수도 있고 지성의 대중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의 각주에 주목하는 이유는 각주가 함축과 암시를 제시하는 장르라는 시의 특성에 반한다는 점이다. 평론이나 여타의 산문에서도 가급적 각주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추세에 비하면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시의 본문이 각주를 사용할 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인지, 혹은 그간 다루지 않았던 영역을 시에 끌어들여 시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것인지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각주를 발생시키는 동기를 시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시와 각주의 관계에서 무게중심이 어디에 위치하는가도 중요하다. 시가 중심이고 각주가 부수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시가 각주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될 수가 있다. 시와 각주의 문제는 시와 원본Original의 문제이기도 하다. 과연 시에서의 각주는 원본에 대한 오마주적 욕망인가, 원본의 아우라에 편승하기 위한 방편인가, 아니면 단지 원본을 소비하는 현장의 목소리인가.
이 글은 몇 가지의 질문을 품고 시작되었지만, 이러한 질문들에 일일이 답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럴 만한 필력도, 지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시에 등장하는 각주의 대부분이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이거나 책, 인물, 역사 등으로 다양하되, 검색을 통하면 어느 정도의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각주가 있는 시를 독해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이 마련되지 않을까 싶다. 능동적인 독자의 시 읽기 방식으로 말이다.
뼈째로 쓰는 말은 내 저승의 뜰을 미리 떠돈다
추상화를 그린다더니 자취의 초상화를 그렸구나
색깔의 눈물과 눈물의 색깔로
이름을 알 수 없는 너는 역광 안에서 사람을 처음 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네 매순간 하얗게 질려 간다 나는
슬픔이 곧 주소인 우리의 오래전 실명한 눈을 닮은
검은 너를 바라보며
생의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 언어를 기다리고, 언제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 키려 했지만
모든 무렵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
성가의 전주(前奏)에서 발각되는 도처의 미라
미라의 그림자
너를 무엇이라 부를까 침묵만을 담은 악보를 너의 그림자라 부를까
증오만으로 설계된 그림자의 마을에서 수상한 숨을 쉬는 그림자에게 말을 걸면 나의 윤곽은 절벽이 되어 윤곽 안으로 가라앉고
타들어가는 손바닥, 허공이 피어나는 손바닥의 뼈와 뼈 사이, 불타는 그네에서만 들을 수 있다던 괴 로운 종소리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아버지를 버리시나이까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 검음, 나의 그림자를 너라 부를까
덜 아문 칼자국 같은 달
밤새 펄펄 끓던 이마를 우리는 숨긴 채
방금 버려진 꽃을 무덤가 주변에서 한 다발씩 주우며
무릎을 굽힐 때마다, 서로 같은 모양이던 검은 멍을 우리는 함께 문지르면서
*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Black Circle, 1913
―김유태, 「검은 원」* 전문(『현대시』, 2018년 11월)
이 시를 독해하기 위해 독자가 취하는 방식은 왠지 대동소이할 것만 같다. 우선 시를 한 번, 두 번, 혹은 여러 번 읽을 것이다. 그리고는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와 <검은 원> 혹은 <Black Circle>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찾아볼 것이다. 흰색 직사각형 위에 오른쪽 상단으로 치우친, 전체 면적의 1/2 정도 되는 검은색에 가까운 초록색 원을 이리저리 뜯어볼 것이다. 몇몇의 백과사전을 돌며 그의 프로필과 작품 경향 등을 살펴보고, 그와 관련된 절대주의, 절대구성주의, 기하학적 추상, 미니멀리즘, 순수회화 등의 개념들을 유념하여 읽은 뒤 어딘가에 메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검은 원」이라는 시로 돌아올 것이다.
이윽고 <검은 원>의 강렬한 이미지와 ‘절대주의’ 같은 개념들의 영향을 받으며 시에는 궁극의 ‘검은 원’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가는 ‘검은 것’들이 부조처럼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너’를 ‘검은 원’으로, 나를 ‘흰 바탕’으로, ‘우리’를 <검은 원>이라는 한 편의 작품으로 단순화시키려는 욕구를 뿌리치면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하여 아버지를 버리시나이까”란 대목을 붙잡았을 때 가능해진다. ‘어찌하여 아버지[스스로]를 버리시나이까’로 읽을 때, ‘아버지’는 ‘검은 원’을 블랙홀로 만들면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는 말레비치가 된다. “색깔의 눈물과 눈물의 색깔”이라는 방식으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로나 대상으로부터도 자유롭기를 실천한 말레비치는 “추상화”를 넘어 그 자신 신념의 귀결과도 같은 “자취의 초상화”를 그렸다. 시인은 그것이 바로 <검은 원>이라고 말한다. “색깔의 눈물과 눈물의 색깔”이 밀레비치의 기조라고 본 시인은 “뼈째로 쓰는 말”을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기조로 내세운다. 말레비치의 작품 세계와 <검은 원>이 「검은 원」의 독해를 이처럼 돕고 있다.
시에는 유독 많은 ‘그림자’들이 서성인다. “미라의 그림자/ 너를 무엇이라 부를까”, “침묵만을 담은 악보를 너의 그림자라 부를까”, “나의 그림자를 너라 부를까”라고 망설이는 가운데 “증오만으로 설계된 그림자의 마을에서 수상한 숨을 쉬는 그림자에게 말을 걸면 나의 윤곽은 절벽이 되어 윤곽 안으로 가라앉”으며 모호해진다. 그리하여 어찌 보면 이 시는 <검은 원>과 「검은 원」의 거리에 대한 성찰로도 읽히고, 원본Original에 대한 시인의 자의식의 양상으로도, 또한 <검은 원>에 대한 김유태 식 각주로도 읽힌다. 무릇 원본을 빌려와서 시인이 이득을 보는 것 중 하나가 이런 것이 아닐까. 원본의 아우라에 반응하는 독자의 태도에서 한 편의 시가 다양한 모습으로 완성된다는 것.
그림*에는 달빛을 받으며 숲길을 걸어가는 나귀와, 나귀가 끄는 낮은 수레에 앉은 인간이 있다 인간 은 턱을 팔에 괴고서 뒤를 돌 아본다 뒤를 다 돌아보지는 않고 육십 도 정도만 돌아보고 있으며, 돌아 보는 각도가, 수레바퀴가 달빛에 그림자 지는 각도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검은 털의 나귀는 뒤 돌아보 지 않고 앞 바라보되, 달 대신 달의 옆, 아무것도 없는 곳을 응시하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의 끝은 그 림 바깥인데 너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자상하게 되묻는 것 같다 길 완만한 오르 막 나귀가 길을 멈춘 것인지 걷고 있는지 단정하기 어렵고 그림이란 건 원래 멈춰 있기 때문이고 그림 은 삶을 정지하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라고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달밤 턱 괴고 뒤 바라보는 인간 아무 도 없는데 돌아보며 은근한 미소 날리는 인간은 곧 죽을 거라는 인상을 풍기며 그것은 그가 너무 미소 를 짓고 있어서, 라고 그림 바깥이 생각한다 숲의 끝은 절벽이고 나귀와 인간은 절벽 앞에 있어서 신 나고, 멈춰서 기쁘다고, 멈춘 것을 확신한 것은 나귀의 발이 일직선으로 곧게 땅을 짚고 있어서, 그제 야 그림 바깥은 깨닫지만, 그들은 이제 도착했으며, 도착해버렸으며, 따라서 모든 것이 멈추었지만 더 멈추면 좋을 거라고, 그들 중 누군가 생각한다 늙은 세상을 어린애처럼 여전히 즐겁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귀와 인간이 미소 지은 그림의 제목은 ‘나귀 가죽’이 아니라 ‘꿈의 신속함’으로 왜곡되어 누 군가의 꿈에 나타난다. 신속하게 신속하게 죽으러 가는
` `
* 샤를 페로의 「나귀 가죽」
** 라 퐁텐느는 「나귀 가죽」 이야기를 들으면 즐겁다고, 세상이 늙었다고 하지만, 늙은 세상을 어 린애처럼 여전히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 선언, 앙드레 브르통
―문보영, 「절벽 미소」 전문(『모든 시』 2018년 가을)
각주가 달린 시는 각주를 찾아보라는 시인의 권유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검색을 시작한다. 이 시는 각주를 달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면서, 여러 개의 원본들을 시의 축으로 삼았는데, 우선 각주가 명확하지 않아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그림”에 대한 각주(*)는 ‘샤를 페로의 「나귀 가죽」’이 아니라, ‘샤를 페로의 동화 「나귀 가죽」에 들어있는 삽화. 귀스타브 도레가 그렸다’ 정도로는 소개가 되어야 한다.1) 시가 「나귀 가죽」의 동화적 서사와는 무관하게 4/5를 이 삽화에 대한 묘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각주(**)에도 빠진 게 있다.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나귀 가죽」을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 퐁텐느는 ~ 한다고 말했다”의 내용은 『초현실주의 선언』(미메시스 刊)의 번역ㆍ주석ㆍ해설을 맡은 황현산이 그 「나귀 가죽」에 단 각주다. 즉 번역자가 다른 『초현실주의 선언』에서는 라 퐁텐느의 이야기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자와 출판사가 언급되지 않아 검색에 불필요한 시간을 소모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더욱이 이 책에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나귀 가죽」의 삽화도, 라 퐁텐느의 「우화의 힘」의 한 구절도, 이브 탕기가 그린 <꿈의 신속함>(이 역시 작가에 대한 정보를 주었어야 할 것이다)도 몇 페이지를 사이에 두고 수록되어 있으므로 시가 이래저래 황현산과 그가 번역한 책에 빚진 바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내용이 세 번째 각주(***)로 달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에서의 각주도 시의 일부이며, 지적 노력과 지적 결벽을 증명하려는 각주의 기능이 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벽 미소」는 의도적이라 할 만치 각주를 소홀하게 다루었다. 원본들의 경계를 지워야 한다는 듯. 그렇지 않으면 이들을 하나의 풍경 안에 담아내는 데 방해가 된다는 듯. 혹은 인용된 원본들에게 1/n의 지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더 나아가 “그림”은 「나귀 가죽」의 삽화가 아니라 시인이 문자로 다시 그려낸 <절벽 미소>가 되어야 한다는 듯.
「절벽 미소」의 핵심 이미지는 “절벽 앞에서” “아무도 없는데 돌아보며 은근한 미소 날리는 인간”의 “곧 죽을 거라는 인상”에 치우쳐 있다. ‘미소’에서 죽음을 보는 것은 ‘인간’을 태운 ‘수레’와 ‘수레’를 끄는 ‘나귀’가 멈춰 선 공간이 막다른 ‘절벽’ 위이기 때문이다. ‘멈춤’은 “삶을 정지하고 싶은 욕망의 산물”로서의 죽음의 포용일 수도 있고, “더 멈추면 좋을” 죽음에 대한 거부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늙은 세상을 어린애처럼 여전히 즐겁게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무리 악몽이라 하더라도 깨어나면 살아나는 ‘꿈’으로 “신속하게 신속하게” 대체된다. 죽음에 대한 매혹과 회피 본능을 ‘그림’과 ‘그림 바깥’ 간의 심리적 대면으로 몰고 가면서도 시에 무게감을 주지 않은 것은 원본의 동화적 판타지를 배경으로 깔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시의 후반부와 불안정한 각주의 얼버무려진 분위기가 시 전체의 분위기에 일조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보여진다. 「절벽 미소」는 오히려 각주를 면밀히 검토해보지 않은 독자가 시의 감상에 더 유리했을 듯하다. 독해를 한답시고 작품들의 발표년도2)를 찾아보고, 귀스타브 도래의 삽화나 이브 탕기의 그림을 출력해서 벽에 붙여놓고 그것을 시의 장면들과 퍼즐처럼 맞춰보느라 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한 필자의 경우처럼 과도하게 각주에 몰두하느라 시인이 그려서 보여주려던 <절벽 미소>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할 줄 안다 나는 나보다 더 없는 자를 한눈에 알아볼 줄 안다 성깔도 색깔도 없는 자를 나는 한 번도 진짜 섹스를 해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진짜 알몸이었던 적 없다 하지만 고환 맛이라 면 볼 만큼 봤다고 생각한다 그 냄새라면 맡을 만큼 맡았다고 나는 식민지의 식민지 태생이다 내 왼쪽 뺨에는 담뱃불에 데인 흉터가 있고 내 입 속에는 일곱 개의 나사가 박혀 있다 나는 아이를 죽여서 낳 은 적이 있다 나의 반려는 죽은 말 대가리다 우리는 한 시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이름 없는 해변에 서 우연히 마주친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평생토록 피해 온 질문이 있다 나는 결국 내 눈을 내 손으로 찌르게 될 선택을 한다 나는 모든 것을 뉘우치지만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는다 나는 하루에 거울을 두 번 보지 않는다 나는 삼십년 동안 죽은 화분 하나를 기르고 있다 시체를 기르듯이 나는 종말이 시속 오십만 킬로로 다가오고 있어서 좋다 지금이라도 내 눈앞에서 이 세계를 딸깍 꺼 버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온 우주가 일인용이라는 건 낭비라 생각한다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사체기증을 하셨다 나는 춤 이 정말로 무엇인지는 불판 위의 산낙지만이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순간순간 내가 동물이라는 사실 을 자신에게 상기시켜 준다 태어나서 죽은 그 순간까지 줄기차게 더러워지다 죽는 종이라는 걸 나는 자지 보지 없이 사는 법을 모른다 자지 보지 없이 쓰는 법을 모른다 종종 나는 미친 말처럼 웃어젖히 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부처님의 자지를 만져본 적이 있고 나는 보들보들한 시인들을 경멸한다
―김언희, 「자기소개―에두아르 르베에게」 전문(『문학선』, 2018 가을)
때론 제목이 각주가 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에두아르 르베’가 그렇다. 그는 자화상의 저자다. 그는 책을 “10대 때, 나는 ≪인생 사용법≫이 사는 법을, ≪자살 사용법≫이 죽는 법을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다.”로 시작해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로 끝맺는다. “나는 앙드레피에르 아르날의 전시 오프닝 동안 타라스콩의 성 지붕에 서서 사랑을 나눴다. (중략) 나는 한 번에 두 사람과, 세 사람과, 그 이상의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나는 해시시와 아편을 피웠고, 아질산아밀을 들이마셨으며, 코카인을 코로 흡입했다. 내게는 신선한 공기가 약물보다 더 중독성이 있다.”에서와 같이 모든 주어는 ‘나’이고, “나는 내 진짜 생각을 말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에서와 같이 두서없이 떠오르는 자신의 ‘진짜 생각’을 가공하지 않고 자동기술의 방식으로 적어 내려갔다. 또한 “나를 바보로 보이게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많은 시간을 입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항공술에 흥미가 없다. 형은 자신의 거북이가 도망쳐 라디에이터 밑에서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다.”에서와 같이 문장들이 엘피판 바늘 튀듯 맥락을 톡톡 건너뛴다. 「자기소개―에두아르 르베에게」는 이런 형식들을 패러디하고 거기에 시인 자신의 문체적 특성을 포갠다.
기본적으로 ‘자기소개’에는 자기를 어필하려는 의도가 잠재한다. 단점도 장점으로 전환시키는 게 자기소개서의 고도의 전략이라 하지 않는가. 때문에 과장과 미화, 불리한 부분에 대한 배제 등 어느 정도의 왜곡이 뒤따르는 게 사실이다. 더욱이 자기가 아는 ‘나 자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있을 수도 있어서 이래저래 진정한 ‘자기’에 가 닿기는 쉽지 않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거나 ‘긁어 부스럼’이라는 우리네 속담의 배후에는 ‘나’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경계가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진짜 생각’을 말하는 ‘에두아르 르베’에 보내는 답신의 형식을 담보하여 솔직함이라는 ‘자기소개’의 덕목을 성취한다. 그런데 “고환 맛이라면 볼 만큼 봤다”거나 “부처님의 자지를 만져본 적이 있”다거나 “나는 자지 보지 없이 사는 법을 모른다”는 ‘자기소개’가 시인에게 왜 필요했을까. 이런 실토는 시인이 취득한 일종의 자격증이 된다. 시적 주체의 발화는 자주 시인의 육성과 혼동된다는 점에서 많은 시들이 성적으로 무균의 상태를 지향한다. 이와 같은 양태를 두고 “종종 나는 미친 말처럼 웃어젖히고 싶을 때가 있다”고 비웃을 수 있는 것이고, “성깔도 색깔도 없는” “보들보들한 시인들을 경멸”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의 앞과 뒤에 배치된 성적 발화의 중요한 역할은 ‘나’가 진정으로 하고픈 말들인 중간부분의 “나는 식민지의 식민지 태생이다”부터 “나는 춤이 정말로 무엇인지는 불판 위의 산낙지만이 안다고 생각한다”까지의 비등점을 낮추면서 시 한 편이 진실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나’가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순간순간 내가 동물이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줄 때라야만 ‘경멸’이 가능해진다. “줄기차게 더러워지다 죽는 종”이 바로 ‘나’를 포함한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의 형식을 빌려온 이 시는 결국 ‘나=동물’이라는 관계를 객관적으로 스캔하여 ‘인간=동물’이라는 범주로 확대시킬 뿐 아니라 “자지 보지 없이”는 “쓰는 법을 모”르는 ‘나’를 ‘우리’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설득 당한다.
노래를 모티프로 하는 시도 자주 보게 되는데, 아래 시도 그 중 하나다.
그녀의 목소리가 나에게 다가온다
통증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그녀가 노래를 불러줄 때
나는 살아난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다
어쩌면 나의 형벌일지도 모른다
나의 그녀가 노래로 나를 어루만지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떠나면
눈먼 자처럼 길을 잃고 눈물을 흘리고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돌이 된다
(중략)
노래가 끝나자
나는 다른 사랑으로 이주한다
새 사랑도 종국에는 사라지겠지만
내게 더 이상 사랑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가 나를 밀며 움직이라고 속삭인다
사랑에는 끝이 없어요
사랑은 실현되지 않아요
사랑 속에서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니까
두 팔을 벌리고
저 광야의 바람 속으로 팔을 뻗어요
나는 당신의 따뜻한 집이 될 거예요
눈을 감고 당신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랑을 느껴보세요
당신은 떨고 있네요
나와 그녀는 노래 속에서 뒤엉킨다
우리는 정오의 침묵 속으로 걸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 퍼져 나온다
햇빛의 방향(芳香) 속에 피가 돋는다
―장석원, 「나의 영혼은 목소리에 저항할 수 없다―Tracy Chapman 「The Promise」에 붙여」 부분 (『시로 여는 세상』, 2018년 겨울)
이 시 역시 제목에 각주를 품고 있어서, 시를 읽던 손길은 자연스레 검색창을 향한다. 그러나 유투브를 하나씩 클릭할 때마다 동영상을 재생할 수 없다면서 ‘저작권상의 이유로 해당 국가에서 차단한 콘텐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그렇다 하더라도 구석구석을 뒤져 종국에는 재생되는 동영상을 찾아내어 트레이시 채프만의 목소리를 몇 번이고 들을 때, 눈은 가사와 시 사이를 오가게 된다. 이때 각주는 가수와 음색과 가사를 한 묶음으로 보는데, 가수와 음색이라는 ‘영혼’이 담기지 않은 가사는 무미건조하게 읽힌다. “그녀”는 노래한다. 읊조리듯 호소하듯. 나는 떠나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항상 당신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고 약속해준다면 당신에게 돌아가겠노라고, 내 사랑은 변치 않았노라고. ‘나’는 이를 6,7연에서 “사랑에는 끝이 없어요/ 사랑은 실현되지 않아요/ 사랑 속에서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니까/ (중략)// 눈을 감고 당신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랑을 느껴보세요/ 당신은 떨고 있네요”로 바꿔 듣는다. 가사에 ‘영혼’을 부여한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시에는 두 명의 ‘그녀’가 존재한다. “통증 때문에” 역설적으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현실 속의 ‘떠난 그녀’와 ‘The Promise'를 불러주는 ’그녀‘. ’떠난 그녀‘로 인해 ‘나’는 “눈먼 자처럼 길을 잃고 눈물을 흘리고/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돌이 된다”. “다른 사랑으로 이주”했지만, ‘나’는 이미 사랑 자체를 불신하게 되었다. “새 사랑도 종국에는 사라지겠”고, “내게는 더 이상 사랑이 남아 있지 않”다고 말이다. 그러나 노래는 “사랑은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 속에서 당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윽고 “나와 그녀[통증을 주는 그녀]는 노래[위로를 주는 그녀] 속에서 뒤엉킨다”. 사랑은 가도 여전히 ‘나’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위로란 이런 것. 부제인 ‘Tracy Chapman 「The Promise」에 붙여’는 이 시가 ‘그녀’에게 헌정되었음을 말해준다.
지난 시간들이 균열되지 않고 내게로 온다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만나듯이
크로아티아 언덕 마토스 시인의 눈과 마주하듯이
벨베데레 궁전의 봄을 보고 있다
클림트의 키스가 있는 방
영혼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고개를 젖힌 여자와 조응하는 각도에서
환하게 정점을 끌어올리는 순간
어떤 이는 아담과 이브를,
어떤 이는 장방형 문양에서 제우스의 남근을 떠올린다
노란 옷자락에 새겨진 에로틱한 인간을 매혹하는 연서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생을 휘발시켰으리
시간을 관통한 소리들 소멸되고
정오의 그림자들 웅성거린다
봄의 황금빛 터널을 지나고 있다
―고경자, 「벨베데레의 봄」 전문(『예술가』, 2018년 겨울)
독자 다수가 원본을 알고 있을 때와 원본이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각주는 생략된다. 이 시가 그렇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키스>가 소비되는 빈도수는 밀레비치의 <검은 원>을 능가한다. “클림트의 키스”에 별도의 작품 표시를 하지 않은 것에서 볼 수 있듯 이제 <키스>는 보편적인 ‘상품’이 되었다. ‘벨베데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더라고 시를 읽어보면 그곳에 이 이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궁전이 사보이 왕가 오이겐 왕자의 여름 궁전이고, 여기에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설명 등을 각주로 달았다면 한낱 군더더기가 되었을 것이다.
원본들은 자주 아우라를 잃어버린 채 소비된다. “루브르”의 “모나리자”나 “크로아티아 언덕 마토스 시인의 눈”은 루브르의 <밀로의 비너스>나 바티칸의 <천지창조> 등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지난 시간들이 균열되지 않고 내게로” 오는 것은 그 때와 다름없이 내가 여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벨베데레 궁전의 봄을 보고 있”는 것이다. 2연에서 3연 둘째 행의 “나비처럼 팔랑거리며”까지의 <키스>에 대한 묘사는 현지에서 원본을 보는 중이거나, 한국 모처에서 복제품을 보았어도 비교적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물론 원본과 복제품을 대하는 감정의 파고가 비슷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3연의 “생을 휘발시켰으리”에서부터 나머지 3행은 마치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키스>의 찰나적 정황을 줌-인한다. “균열되지 않고 내게로” 왔던 “지난 시간들”과 “시간을 관통한 소리들”이 “소멸되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웅성거”리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오의 그림자들”로 ‘시간’도 ‘소리’도 소거되는 순간, 다만 ‘봄’이 “황금빛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미지만이 부각될 뿐이다. 이 시에서는 봄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며, 심지어는 <키스>의 ‘망토’조차 ‘황금빛 터널’을 위해 내어주기까지 했을 정도다.
며칠 후에 은사님을 뵙기로 했다 나는 은사님의 시집을 몽땅 다시 읽는다 이건 의식적인 시 읽기다 은사님의 Y라는 시를 읽으며 은사님은 이렇게 시를 써도 되는가 의심한다 책을 열권 넘게 내면 이렇 게 망연자실 써도 되는가 한다
벚꽃 나무 이파리 끄트머리부터 붉게 물이 드는 계절이다 은사님은 이렇게 열 권이 넘는 시집을 내 며 행간을 줄이고 내키는 대로 건너뛰고 한 줄씩 소멸시키다가 아예 시를 쓰지 않으실 것만 같다
시인이 없는 세상은 신난다 은사님들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나 같은 뽀시래기 들이 잠시 그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려야지 그러다 삶처럼 사연만 길어지는 리얼리티에 질려 금세 시 를 때려치우리라 그렇게 시가 사라지는 세상을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은사님을 기억해야 한다 은사님이 이미 써버린 시들이 은사님이 되어 제자들을 키워내 고 있다 굴뚝의 연기처럼 밀려 나오는 제자들이 은사님의 문학제를 매년 해치우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 다
앞산 언덕에 저녁연기 같은 것들이 피어오른다 어떤 문학 행사에 참가했던 은사님이 피곤한 몸으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실 것만 같은 시간이다 은사님은 흔들리며 이제 시를 그만 써야 하나 하 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은사님이 떠난 뒤풀이에서 우리는 울다 웃다 욕을 하다
―최휘, 「은사님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전문(『예술가』, 2018년 겨울)
벤야민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유일성은 아우라의 다른 말이다. 원본에만 생기는 아우라는 바로 유일성에서 비롯된다.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은 종교적인 의식儀式에서 출발하여 미에 대한 세속적인 숭배행위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제의가치가 예술작품을 폐쇄적인 공간에 숨겨둔 채 신비로움의 아우라를 조성해왔다면, 현대에 이르러 의식에서 해방된 예술 작품들은 기술적인 복제의 가능성에 힘입어 전시가치로 그 절대적 역점이 바뀌었다. 밀레비치의 <검은 원>은 그의 <검은 십자>와 함께 인테리어를 위한 세트상품이 된 지 오래고, 클린트의 <키스> 역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복제를 통한 소비뿐 아니라, 이제 인터넷에 떠도는 아우라가 제거된 원본 이미지들은 누구나가 가져다 쓸 수 있는 소재가 되었다. 그것은 변형과 왜곡과 파괴와 유희의 대상으로, 심지어는 무료이고 무제한 제공된다. 세계의 박물관과 모든 여행지를 둘러볼 수 있으며, 유투브에는 사시사철 음악과 동영상이 흘러넘친다. 보고 들을 것의 다양함이 우리를 자극한다. 이것이 각주를 단 시가 급증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하겠다. 시의 지성화나 지성의 대중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시는 각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 속에 벤야민이 들어있다. ‘은사님’으로 대표되던 전통적 가치에 어렸을 아우라의 현주소를 그려낸 것이다. ‘은사님’이 아우라를 가지고 있던 시절, 제자들은 존경과 맹목으로 갖은 예를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은사님’은, ‘은사님’의 “열 권이 넘는 시집”은, ‘은사님의 시’는 ‘의심’과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며칠 후에 은사님을 뵙기로” 하여 “은사님의 시집을 몽땅 다시 읽”지만, “이건 의식적인 시 읽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은사님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굴뚝의 연기처럼 밀려 나오는 제자들이 은사님의 문학제를 매년 해치우는 세상이 도래할 것”에 대비하는 ‘의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의식적인 행위에 어리는 제자들의 사이비 존경심을 믿고, “은사님들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진실을 외면한 채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는 ‘은사님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는 그러나 “피곤한 몸으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은사님이 “이제 시를 그만 써야 하나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드는 대목에서 연민으로 바뀐다. 아우라의 완벽한 죽음이다.
이제는 아우라를 살리는 것이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아우라를 말한다. 시에서 그것은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나기도 하고 이면에서 우러나와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기도 하며, 감각적으로 몸에 아로새겨지기도 한다. 이미지로, 전율로, 빛과 어둠으로 혹은 침묵의 형태로 말하고, 삶에 녹아들어 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도무지 실체가 없는 아우라는, 그러나 현전한다.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로. 곧 쾌와 감동을 부여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서뿐 아니라 텍스트가 품은 질문에 답하는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라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시가 자신의 욕망과 존재들의 욕망에 에워싸일 때 아우라는 빛을 발한다. 아우라는 현전現傳하지 않고 현전現前한다.
1)어찌 보면, 최초의 오류는 황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삽화 밑에 '샤를 페로, 『나귀 가죽의 삽화』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각주의 정확성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샤를 페로는 「나귀 가죽」을 1695년에『운문 콩트』 속 한 편으로 최초 발표하였고, 귀스타브 도레는 1867년판의 『나귀 가죽』(Peau d'ane)(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eaudane4.jpg)에 이 삽화 등을 그렸으며, 이브 탕기는 1945년에 <꿈의 신속함>을 그렸다.
이영숙|1991년 『문학예술』시 등단. 2017년 『시와 세계』 평론 등단. 시집 『詩와 호박씨』『히스테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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