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의 『서울 선언』
1. 내가 일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 중 일부는 답사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현재 거주 지역을 벗어나 가고 싶은 지역을 방문하여 천천히 이동하면서 응시하고 경험한다. 방문하는 장소는 둘레길이 될 수도 있고, 문화재가 있는 명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자주 가는 곳 중 하나는 도시의 길이다. 한때 서울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전철역에서 내려 주변을 관찰하는 작업을 제법 오랫동안 하기도 했다. 서울을 걷는 것은 익숙하지만 알 수 없었던 새로움을 만나는 과정이었다. 50년 넘게 서울시민으로 살아왔고, 서울의 독립문 일대가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장소였지만 서울은 그저 막연한 공간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역에서 내려 걷는 길은 항상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과정은 제법 즐거웠다.
2. 서울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접어들 때 눈에 띄는 책을 발견했다. 일본학과 문헌학을 전공한 학자가 2018년에 출간한 『서울 선언』이었다. 보통의 서울에 관한 글들이 고궁이나 주요 문화재를 중심으로 기술된 것과 달리 이 책은 서울의 일상적인 모습에 대한 정보와 의미를 종합하여 기록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해서 책을 통해서는 소개되지 않는 서울의 숨어있는 장소들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서울의 한 역에서 내려 그곳의 모습을 추적하던 나의 일상과 닮아있던 내용이었다. 이후 스치듯 훑어보는 기회는 가졌지만 차분하게 정독하지는 못했다. <서울역사박물관> 도서회원이 되고 책을 대출하면서, 서고에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는 김시덕의 ‘서울답사’ 3부작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또한 서울을 나름대로 답사하는 방법을 보충하기 위해 책을 뽑았다. 서울 답사 첫 번째 책 <서울선언>을 소개한다.
3. 저자는 이 책이 특별한 문화답사나 역사의 추적과 같은 거창한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다만 우리가 살아왔던 서울의 모습을 담담하게 관찰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것은 ‘일상성’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이다. 이런 관점은 특정하게 강화된 애국심이나 애향심과 같은 과도함을 거부하고 서울을 특별한 공간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평범함 속에 숨어있는 보통 시민들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서울을 ‘조선시대적 유교적 관점’으로만 보는 주류적 시각에 대한 경계를 드러낸다. 이런 시각이 서울에 대한 편향된 시선만을 수용하게 만들고 그것과 관계없는 많은 것들을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4. ‘조선시대’ 수도로서의 ‘서울’이라는 정체성의 강화는 다른 시대의 중요한 가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조선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조금이라고 왕과 궁궐과 관계있다는 보존되는 반면에 다른 것들은 쉽사리 개발 과정에서 파괴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삼성동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토성이었다. 서울은 한성 백제가 400년 넘게 도읍이었던 곳이다. 197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발견되었고 삼성동에서도 토성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삼성동 토성은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개발의 광풍 속에서 조선 시대 이외에 역사는 몰이해에 희생되어 버린 것이다. 은평 뉴타운에 만들어진 ‘한옥마을’이나 ‘한옥 발물관’ 또한 과도한 조선시대의 재현이었다. 원래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평민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장소였다. 하지만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은 오직 삼남지역 양반들의 기와집으로 구성되었다. 보통의 평민들의 공간을 빼앗아 양반들의 공간으로 전환시킨 것이었다. 그밖에도 서울의 숨어있는 장소를 찾다보면 근대의 중요하면서도 의미있는 장소들도 조선시대와 충돌하면 언제든 쉽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그런 ‘조선시대’, ‘4대문 안 서울’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있다.
4. 도시는 죽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생동하는 살아있는 장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시대에 매몰되어 집착하였을 때 도시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도시는 확장한다. 특히 서울은 한국의 중심지로서 산업화와 도시화의 중심으로 끝없이 확대되었다. 점점 늘어나는 서울의 끝에는 공장들이 생겼고, 빈민들의 거주지가 만들어졌으며, 종교 시설이 확산되었다. 서울 변두리에 이동된 공장지대는 중심에서 비켜난채 서울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들과 역사적인 투쟁들이 발생하였다. 면목동에 있던 ‘YH 사건’은 한 여공의 죽음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서남쪽 변두리에 있던 ‘동일방직’에서 일명 ‘똥테러’로 상징되던 자본과 남성의 폭력이 발생하였다. 이후 구리에서 발생한 ‘원진레이온 사태’와 같이 서울 변두리에서 터져나온 저항의 목소리는 결국 서울의 핵심까지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저자는 원진레이온 사태를 계기로 만들어진 <녹색병원>이 원래 <YH건물>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병원 어디에도 그러한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한다. 과거 구로공단 시절 중심이었던 ‘가리봉’이라는 지명은 점점 삭제되어 ‘가리봉’과 ‘독산’의 합성어 ‘가산’으로 바뀐 사실을 들면서 과거의 어둠을 감추려는 누군가의 시도를 분노하는 것이다. 이제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서 과거의 희생을 담당했던 장소는 은폐의 대상으로만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5. 서울의 변두리는 서울의 중심에서 밀려난 빈민들의 거주지로 변하였다. 그런 이유로 서울 주변에는 수많은 민중들의 투쟁이 있었고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항거가 존재한다. 저자는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 지역(부천, 하남, 광주, 성남, 고양, 김포 등)을 ‘대서울’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이 지역 사람들은 서울과 여전히 연관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지역들은 서울의 빈민들이 이동한 지역이기도 하다. 서울의 빈민들을 대규모로 이동시킨 ‘광주’에서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이나 ‘목동사태’, ‘상계동 사태’ 등은 모두 빈민을 철거하거나 빈민 거주지역의 열악한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었다. 서울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대문 안의 고궁과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변두리로 이동하면서 어떻게 생존하였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이런 발전에 따른 비극 속에서 서울은 만들어졌고 현재의 수도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6. 이번 독서에서 개인적으로 얻은 성과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 1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거주했던 ‘시흥동’에 관한 정보를 얻은 점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서대문 영천시장 주변에서 ‘시흥동’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신월동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학창시절의 기억은 시흥동과 구로동과 연관되어 있다. 신월동으로 이주한 이후 경기도 ‘시흥시’가 만들어졌을 때, 그것이 시흥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의아해했지만 답을 찾지 못한 채 잊어버렸다. 그러한 궁금증이 이번에 해소되었다. 과거 조선시대 ‘시흥군’의 중심은 현재의 서울 시흥동이었다. 그 주변에는 관아와 향교가 있었고 왕이 묵어가던 ‘행궁’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위치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한다. 그후 생긴 ‘시흥시’는 과거 시흥군과는 관계가 없는 지역으로 이름만 빌려간 지역이었다. 과거의 시흥군은 현재의 안양을 포함한 지역이었다. 시흥을 떠난지 30년 지난 어느 날 변화된 ‘시흥’과 ‘시흥초등학교’을 찾기도 했다. 서울의 끝이었던 시흥에 대한 기억, 변화된 구로공단의 달라진 모습, 그것은 막연한 추억이었지만 ‘시흥’이라는 지명을 떠올리면 따라오는 아련한 추억임에 분명하다. 막연한 추억이 최소한의 정보를 만나 조금은 그 빈틈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7. <서울선언>에 소개된 장소들은 대부분 어떤 이유로든 나와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오랜 서울시민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었다. 단지 그 장소의 시각적 정보만을 넘어서 그것이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된 과정을 안다면 현재의 모습은 새롭게 보일 것이다. ‘서울답사’, 그것은 분명 흥미로운 작업이다. 한국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장면을 관찰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충돌을 확인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역사적 현장을 찾는 것도 중요한 답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라는 조금은 좁은 시각을 벗어나 서울을 바라볼 때 현재 생동하고 있는 도시의 변화와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실존을 좀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답사’는 ‘둘레길’ 못지않게 흥미롭고 매력적인 ‘걷기’라 할 수 있다.
첫댓글 - 서울,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이리라! '고향'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는 고향이지만, 평생 그 속에서 살다가 갈 수밖에 없는 삶의 공간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