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2-1) † 네 단계에 있는 요한계시록/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네 개의 주요한 이상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네 번 영 안에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상은 1-3장까지 교회에 관한 것이며, 묵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은 교회에 관한 것들을 보기 위하여 영 안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4-16장까지의 두 번째 이상은 이 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땅에 관한 상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요한이 영 안에서 했던 것처럼 이상을 가져야만 한다(4,2절). 17-18장은 세 번째 주요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크고 비밀스러운 바벨론에 관한 것이며, 사도 요한은 영 안에서 그것을 보았다(17,3절). 마지막으로 19-22장에서는 네 번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신부, 곧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종교가 아니다>
계시록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언의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합당한듯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책을 주의 깊게 그리고 교회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읽어본다면, 교회가 이상한 종교로 타락했을 때 이 책이 쓰여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대단히 종교적으로 변하였다.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주 많은 일들에 있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할 뿐 아니라, 많은 합당하고, 건전하고, 근본적인 가르침들과 많은 좋은 외형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것들에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가 없으며, 그 영(the spirit), 곧 성령이 없다는 뜻이다.
<말하시는 영>
만일 우리가 주님에 의해 교회들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의 처음 1-3장에 있는 일곱 서신을 읽는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 대부분을 책망하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에페소 교회는 너무 종교적이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부족하며 생명이 부족하고 성령이 부족하다.
계시록이 쓰여 졌을 때 교회는 생명에서 지식으로, 그리스도에게서 교리로, 성령에서 형식으로 전락해 버렸다. 교회는 많은 교리와 많은 형식과 많은 봉사활동으로 종교적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 안에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잃었다. 교회는 생명주는 영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깊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이 시대는 이 책이 쓰여 진 때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종교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는 더 많은 교리와 더 많은 잡다한 봉사활동(복지시설, 학교, 병원, 신문사, 방송국, 출판사 설립 등)과 더 많은 형식으로 극도로 종교에 치우쳐 버렸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다면, 그리스도가 부족하고, 생명이 부족하며, 성령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내가 믿기로는 오늘날 우리 시대는 이 책을 연구할 합당한 시대이며, 이 책을 받기에 합당한 시기이며, 우리가 이 책을 취할 수 있는 합당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많은 것들이 다루어져 있으나 주요한 원칙은 여전히 이 책이 신성한 영과 인간의 영에 관한 두 가지 방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계시록 2-3장에 일곱 서신이 있고, 각 서신의 서두에 말씀하시는 주님이 있다. 그분은 그분이 누구이며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어떤 종류의 지위와 자격을 가지셨는지를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각 서신의 끝에는 말씀하시는 그 영, 곧 성령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서두에 말씀하시는 주님이 있고, 말미에 말씀하시는 성령이 있다. 일곱 서신 모두가 똑같다. 서두에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만, 끝에서는 “귀 있는 자들은 그 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단순히 예언의 책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그 영, 곧 성령의 책이다. 왜 서두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끝에는 성령이 말씀하시는가? 왜 주님은 서두에서 한 지방 교회에만 말씀하시고 서신 끝에서는 성령이 모든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묵시록을 읽을 때 단지 과거에 존재한 교회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가? 아니면 그 영, 곧 성령에 귀를 기울이는가?
우리는 주님에 의해 말씀된 성경 말씀을 배우지만 결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의 서두는 있지만 끝을 가보지 않았다. 우리가 묵시록 2-3장에 있는 말씀들을 사려 깊게 읽을지라도, 단지 이 천년 전에 말씀하신 것을 읽을 따름이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단지 서두를 받을 수 있지만 그 끝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읽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문자 안에서는 옛 것이지만 영 안에서는 새 것임>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읽고 성령이 말씀하신 것을 둘 다 듣는 합당한 방법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지성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다만 우리 영을 사용하여 말씀을 기도로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즉시 말씀을 통해 그 영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내적이고 영적인 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그것은 단지 에페소 교회나 다른 교회들에게 준 서신이 아니고, 이 순간 그 영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산 말씀이 될 것이다. 요한묵시록은 구서(舊書)인가? 아니면 신서(新書)인가? 만일 당신이 신서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 책이 이 천년 전에 쓰여 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이 이 책이 신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문자는 옛 것이지만 영 안에서는 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옛날 책이지만 영 안에서는 새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 책이지만 그 영, 곧 성령에 의해 새 책이 된다. 묵시록에 있는 일곱 서신은 일 세기 내에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쓰여 진 것이지만, 그 영 안에서는 시간과는 관계없이 모든 교회들에게 쓰여졌다.
첫 서신은 문자로는 에페소 교회에 편지한 것이지만 매일 그 영에 의해 모든 교회들에게 전하여지고 있다. 만일 이 일곱 서신이 단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만 쓰여 졌다면 이것들은 지금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곧 우리에게 쓰여 진 것은 없다. 그러나 주님이 어떤 교회에게 편지하셨든지 간에 그것은 살아 있는 영에 의해 즉시 영 안에서 듣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재적으로도 전하여진다는 말이다.
계시록은 말씀하시는 영의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예언의 책이 아니고 말하시는 영의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많은 기존의 해석들을 연구하던 작업을 중단했었다. 이 책은 과거나 미래보다도 현재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전율했었다. “귀 있는 자들은 그 영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가 타락했을 때에 주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영이시다. 앞쪽에서 주님께서는 “주”로서 말씀하시지만 서신 끝에서는 영으로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으로서 말씀하고 있다(1코린15,45).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자칫 어렵고 이단시하여 금기시하는 책이거나, 연구한다고 하여도 지식과 정보, 곧 생각을 사용함으로써 이해하려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나마 이 책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곱들, 곧 일곱 등대, 일곱별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에 사로 잡혀 있다. 이 일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잊어버리고 이 책을 이해하든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든 이 모든 구절들을 기도로 읽어야만 한다. 곧 우리는 단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한 구절 한 구절을 기도로 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구절들을 기도로 읽어간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영이 될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곧 그분은 우리에게 영적이고 살아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문자적으로 이 책을 연구하지 말고, 영 안에서 그것을 기도로 읽어보라! 우리가 기도로 읽을 때, 실제적인 영양 공급을 받으며, 이 영양 공급 안에 그 영의 말씀하심이 있다.
<영 안에서>
우리는 이 책에서 신성한 영의 어떠함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의 영의 면을 보기로 하자. 사람의 영에 관해서는 네 구절, 곧 계시1,10; 4,2; 17,3; 21,10절이 그것이다. 네 개의 다른 장과 네 개의 다른 경우에 관한 네 개의 구절은 사도 요한이 영 안에 있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 네 구절에 있는 “영”이란 단어를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은 “spirit”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사람의 영을 의미한다(“the spirit”는 성령이다). 계시록은 네 개의 주요한 이상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네 번 영 안에 있었다.
(1) 그 첫 번째 이상은 1-3장까지 교회에 관한 것이며, 묵시록 1장 10절에서 요한은 그가 교회에 관한 것들을 보기 위하여 영 안에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2) 그리고 4-16장까지의 두 번째 이상은 이 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땅에 관한 상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요한이 영 안에서 했던 것처럼 이상을 가져야만 한다(4,2절). (3) 17-18장은 세 번째 주요 이상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크고 비밀스러운 바벨론에 관한 것이며, 사도 요한은 영 안에서 그것을 보았다(17,3절). (4) 마지막으로 19-22장까지는 네 번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신부, 곧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한 것같이 이런 이상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도 영 안에 있어야만 한다(21,10절). 이 네 이상들을 계시록의 내용을 구성하고 요한은 그가 영 안에 있었다는 것을 네 번 언급했다. 요한은 교회를 보기 위하여, 세상을 보기 위하여, 큰 바벨론을 보기 위하여, 그리고 신부, 곧 새 예루살렘을 보기 위하여 네 번 영 안에 있었다. 요한은 매 번 영 안에 있었다.
주님은 오늘 생명 주시는 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이 책에서 그분의 음성을 합당하게 듣기 위하여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영의 말씀하심을 듣기 위해 우리의 혼 안이나 생각이나 사고 안이나 감정 안에서가 아닌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영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