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회 자유게시판에서.....
갈홍기
갈홍기(葛弘基, 일본식 이름: 葛城弘基, 1906년 4월 14일 ~ 1989년 8월 25일)
감리교 목사 출신의 제1공화국 관료이다.
경기도 강화군에서 이 지역에 사립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유지인 갈형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 문과를 1928년에 졸업하였고, 미국에 유학하여 개렛 신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귀국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면서 감리교신학교에서도 종교철학을 강의했다.
1937년 창영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년 동안 시무했다.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연성국장 직을 맡아 교단의 지도자급 인물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교단 내에도 황민화 운동 등이 활발히 벌어지던 시기에 이같은 역할을 맡은 갈홍기는 정춘수, 이동욱, 심명섭 등과 함께 감리교단의 대표적인 친일 목회자로 꼽히게 되었다.
1938년 인천 지역에서 조직된 인천기독교연합회 서무를 담당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종교가 연합하여 학병 지원 독려를 위해 조직한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감리교 대표로 포함되었고, 지방 순회강연을 벌이며 황도기독교의 수립과 전쟁 지원을 역설했다. <대화세계> 기자를 지냈으며, 유서 깊은 상동교회를 폐쇄하고 세운 황도문화관 관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발간된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에서 이같은 행적이 폭로되는 등 친일행적으로 인해 비난을 받으면서 감리교 일부와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나,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잠시 거쳐 이승만 정부에서 고위 관료로 발탁되어 활동 반경을 정관계 쪽으로 넓히게 되었다. 주일대표부 참사관과 한일회담 대표를 시작으로 외무부 차관을 지냈으며, 특히 1953년부터 3년간 공보처장으로 활동하며 이승만 대통령의 이념적 대변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 북진도 불사하는 북진통일론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남북 간의 평화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호전적인 입장 때문에 평화회담을 촉구하는 국제사회 일각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갈홍기는 이같은 이승만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했고, 사사오입 개헌 때도 사실상 이승만의 종신 대통령직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헌을 안보를 핑계삼아 옹호하여 비난을 받았다.
공보처장 시절인 1955년 저술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 약전>에서 이승만을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에 비유하며 찬양한 바도 있다. 공보처장 직을 물러난 뒤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1956)과 주 말레이시아 대사(1966), 아스팍 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1973) 등을 지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사망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연세대학교 교내 단체인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2005년 선정 발표한 ‘연세대학교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 있다.
말년인 1980대 중반 출간한 삼성문화사 판본의 <삼국지>가 해적판으로 인정되는 판본을 거의 그대로 베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정춘수
정춘수(鄭春洙, 일본식 이름: 가타니 슌쥬(禾谷春洙) 1875년 2월 11일 ~ 1951년 10월 27일)
한국의 감리교 목사로,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아호는 청오(靑吾)이다.
충청북도 청원 출생이다. 1904년 원산에서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한 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그는 부흥회 집도에 특히 능력을 보였고, 원산의 교회에서 근무 중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정춘수는 그해 2월 경성부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원산으로 돌아가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조직한 뒤 당일 기차편으로 상경했으나, 태화관 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였기에 자수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개성의 교회에서 근무하고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맡는 등 서울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으로 피선되었고 내선일체에 철저히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일본제국이 일으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감리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때도 앞장서는 등 조선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혔다.
개신교 내부의 사상 검사 단체로 일제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를 독려한 총진회 회장, 전시 총동원 체제 건설을 위한 친일 단체들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 그리고 친일 종교인 모임으로서 개신교 교인들의 지원병 참전을 부추긴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1944년)를 지냈다. 심지어는 일본군을 위한 특별 기도, 애국 헌금과 무기 제조를 위한 철문과 교회종의 헌납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감리교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던 정춘수의 이러한 친일 행적은 해방 이후 감리교의 재건파가 1947년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를 발간함으로써 드러났고, 1949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두 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감리교회 내에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거센 비판이 계속되자 정춘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는 체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194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회로 개종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고향에 피난해 있다가 사망했다.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인 손병희, 신석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과 함께 동상이 설치되었다가, 친일 행적과 관련된 항의로 철거된 일이 있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2008년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들어 있다.
심명섭
심명섭(沈明燮, 1898년 ~ 1950년?)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소설가 심훈의 둘째 형으로 잘 알려져 있다.호는 설송이다.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출생했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부인상회라는 상점 경영에 참여했다가 기독교에 입문했다. 당시 동아부인상회는 지식인의 출입이 잦아 정보교환의 장 역할을 했다.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수학했다.
충남 예산교회 및 아산교회의 전도사를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경성부 창천교회와 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신흥우가 조직한 적극신앙단에 가담해 운동을 주도하였다.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겸 기독교신문 편집위원도 역임하는 등 기독교 언론에 관심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해 신흥우가 부장으로 있는 총무부 부원을 지냈고, 일제가 강요한 개신교 교파 합병 작업에도 감리교 측 대표로 참여했다. 광복 후 감리교단 내부에서 친일 목회자와 신자들을 지목하며 반성을 요구해 내분이 일어났을 때, 심명섭은 정춘수, 갈홍기, 이동욱, 김영섭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목사로 꼽혔다.
심명섭이 1941년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에는,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각 지방의 역사와 풍습, 민족성에 맞추어 변화되어 왔다며 이 시기의 황민화 기독교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승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하는데 “목숨을 버리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예수의 말을 원용하고 있다.
광복 후 일찍 사망한 동생 심훈의 유고 작품을 모아 시집 <그 날이 오면>을 간행했고, 대한기독교교육협회 부총무를 맡아 재임했다. 한국 전쟁 초기에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이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준비하는데 감리교 대표로 참가하였으나, 정치보위부의 호출에 이어 실종되어 북조선으로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형인 심우섭도 이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이동욱
이동욱(李東旭, 일본식 이름: 李河東旭[1], 1897년 ~ 1948년)은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경성부 왕십리감리교회와 연화봉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1930년대 후반 이후 감리교단이 정춘수와 갈홍기 등이 앞장서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보였을 때, 여기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 전쟁 지원단체인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감리교 측 대표로 참여하여 지방순회 연설을 하였고, 1941년 일제가 개신교 교파 통합을 추진했을 때 감리교 측 합동연락위원을 맡았다.
1942년 전필순이 혁신교단을 조직해 통리를 맡았을 때는 사무국장으로 가담했으며, 혁신교단이 붕괴하고 1943년 감리교단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교단으로 강제 편입되어 황도기독교를 표방했을 때도 참여했다.
일제 초기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상동교회가 1944년 폐쇄되고 그 자리에 세워진 황도문화관 부관장을 맡기도 했다.
중일 전쟁 이후 친일 행각이 가장 두드러졌던 감리교는 광복 직후부터 부흥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친일 청산이라는 과제를 놓고 치열한 대립에 들어갔다.
이동욱은 1947년 감리교 재건파가 일제 말기의 교단 내 친일 행적을 정리해 공개했을 때 정춘수, 심명섭, 김영섭, 갈홍기 등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교역자로 지목되는 등 공세의 표적이었다. 동대문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48년 사망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포함되었다.
양주삼
양주삼(梁柱三, 일본식 이름: 梁原柱三, 1879년 평남 용강 ~ ?)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 감리교회의 감독이다.
1938년 일본이 종교계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종교인이기 앞서서 국민”이라면서 신사참배를 찬성하였다. 양주삼의 이러한 행적은 신토를 앞세운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협조이기 때문에, 친일행적이라는 한국 개신교 교회 역사의 큰 오점을 남겼다. 이러한 친일행적이 광복 이후 출옥교인이나 그렇지 않은 교인이나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는 논리 하에 전혀 청산되지 못했음을 문제로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를 지내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실종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변홍규
변홍규(卞鴻圭, 일본식 이름: 卞田鴻圭, 1899년 5월 28일 ~ 1976년 7월 27일)는 한국의 감리교 목사이다.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했다. 선교사의 권유로 공주의 감리교 계열 학교인 공주영명학교에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갔고, 여운형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의 조언에 따라 중국에서 덕화서원을 졸업하고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26년 미네소타 주의 햄린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28년 드루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29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31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업 마치고 1933년까지 하와이 주 호놀룰루의 한인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시무했다.
이후 귀국하여 1934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1939년에는 이 학교의 제6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장이었다. 그러나 1940년 6월에 반일 전단이 교정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해 교장인 변홍규는 기숙사 사감과 함께 구속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6개월 후 석방된 뒤 1943년까지는 종교교회에서, 이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종교교회 재직 중 정춘수가 주도한 혁신교단의 통리로 김영섭 대신 추대되었다.
광복 후에는 교단 내 친일 청산에 적극적이었던 재건파에서 활동했다. 재건파는 일제 말기 실세였던 정춘수에게 소외되었던 이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친일 경력을 가진 교역자들의 사퇴를 요구했다. 변홍규는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재건하여 1946년 다시 교장에 취임했고, 1948년에 남산교회 담임목사를 맡았다. 1967년에는 여러 파벌이 얽혀 복잡에 상황에 놓인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제10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70년 퇴직한 뒤 미국으로 이주해 로스앤젤레스와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활동하다가 사망했다.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일상 생활에서도 경건주의 원리를 철저히 실천하여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는 평가가 남아 있다. 학생들이 변홍규를 성인이라는 뜻의 “세인트 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다.
며느리 정은득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고아원을 오랫동안 운영한 사회복지 전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