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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33. [역경의 열매] 이말테 <1-10> 루터를 한국에 알리는 것이 소명이자 은혜
루터교 파송 선교사로 온 지 26년… 교회 개혁의 마중물 역할하고 싶어
독일 루터회 파송 선교사인 이말테 루터대학교 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용산구 중앙루터교회에서 25년 넘는 한국 생활 중 겪은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다.신현가 인턴기자
한국명 이말테. 본명은 말테 프리드리히다. 나는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태어났고, 현재 독일 루터회 파송 선교사다. 한국인 아내인 한정애 교수와 한국에 온 지 올해로 26년이 됐다. 그런 내게 지난해는 정말로 바쁜 한 해였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었기 때문이다. 루터에 대한 관심이 전국 각지에서 쇄도했다.
내가 섬기고 있는 기독교한국루터회는 크지 않은 교단이다. 그래서 루터나 그의 종교개혁에 대해 발표할 수 있는 루터학자들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루터 전문가라 할 수 있는 루터대 박일영 석좌교수, 최주훈 중앙루터교회 목사와 함께 바쁜 나날을 보냈다.
2016년 12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매주 금요일 방송된 CBS 성서학당 강의 외에도 언론 활동이 수없이 많았다. 국내외 신문, 라디오 및 TV 인터뷰와 프로그램 출연 요청 등이 끊이지 않았다. 강연과 발표도 40차례에 달했다.
그 가운데 장로회신학대 국제학술대회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주제발표, 그리고 한동대 국제학술대회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종교개혁500주년 포럼에서의 발표가 의미 있게 와닿는다. 나 스스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횟수를 훌쩍 넘어섰지만 여러 차례 비슷한 주제로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됐다.
나는 현재 한국루터대학교 교수 신분이다. 지난해 가을 학기에 루터대 강의가 없었던 것도 이런 ‘발표 마라톤’을 가능하게 했다. 루터교 실행위원회가 나의 교수 임기 연장을 결정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인해 가을 학기에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됐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합당함을 몸소 경험했다. 이런 역경의 열매를 통해 칼뱅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에 루터와 그의 사상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루터 시대의 천주교회와 공통점이 많은 한국교회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를 위한 다양한 개혁안도 제안할 수 있었다. 고맙고도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요셉을 구덩이로 던지고 이집트 상인에게 팔아넘겨 없애 버리려고 했던 형제들이 수십 년 뒤에 요셉을 통해 살아남게 된 이야기와 연관시켜도 될지 모르겠다.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이 쌀을 받으러 온 자신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물론 한국교회를 살리는 데 내가 기여할 수 있는 힘은 크지 않다. 그리고 스스로 요셉과 비교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나 또한 비슷하게 느꼈다.
내가 목사가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 내가 한국에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다. 한국에 오기 전 독일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와 한국에서 누렸던 은혜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국민일보를 통해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나누려고 한다.
약력=△1957년 독일 뮌헨 출생 △독일 뮌헨 대학교 졸업 △독일 기독교 바이에른주 루터회 파송 선교사 △1992년 한국 입국 △전 재한 독일어권교회 담임목사 △기독교한국루터회 교회개발원 초대 원장 △기독교 한국루터회 소속 선교사 △루터대 교수 △2017 한국교회개혁상 수상 △홀리 스피리츠 맨 메달리온 교육자 부문 수상 △중앙루터교회 동역목사
* [역경의 열매] 이말테 <1> 루터를 한국에 알리는 것이 소명이자 은혜
* [역경의 열매] 이말테 <2> 대학서 만난 여학생과 치열하게 토론하다 사랑에 빠져
* [역경의 열매] 이말테 <3> 유년시절 가인·노아·요나 같은 신비한 경험
* [역경의 열매] 이말테 <4>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성을 따르던 형
* [역경의 열매] 이말테 <5> 두 번의 영적 체험, 목회자의 길 확신 얻어
* [역경의 열매] 이말테 <6> 독일 온 장모님, 교회 성찬식 때 해프닝
* [역경의 열매] 이말테 <7> 결혼 약속 지키려 한국 보내 줄 선교회 찾아
* [역경의 열매] 이말테 <8> 기장 교회 사역하다 한국에 남고 싶어 선교사로
* [역경의 열매] 이말테 <9> 한국루터회에 몸담으며 목회·강의 함께 맡아
* [역경의 열매] 이말테 <10·끝> 하나님 인도하심으로 27년째 한국 생활
정리=이현우 기자 base@kmib.co.kr
***[역경의 열매] 이말테 <2> 대학서 만난 여학생과 치열하게 토론하다 사랑에 빠져
당시 아내는 경건파 기독교인… 덕분에 영적 경험하고 목사 돼
이말테 교수 가족이 1966년 독일 뮌헨의 집에서 대림절을 보내고 있다. 맨 오른쪽이 이 교수. 이말테 교수 제공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상들 중 마지막 목사가 200년 전에 나왔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의 부친은 기독교 경건주의자셨다. 성서를 연구하기 위해 혼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까지 공부하셨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교회에 실망해 개종했다. 내 외조부모는 힌두교 신자들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매일 좌선(坐禪)을 하셨다. 내 친조부모도 교회에 거의 나가지 않는 분들이었다.
부친은 교육대학을 다닐 때 전공으로 수학 외에 신학도 선택하셨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평범한 독일 기독교인 가족이었다. ‘독일의 평범한 기독교인 가족’이란 해마다 서너 번만 교회에 나갔다는 뜻이다. 우리 가족은 아들만 4명인 대가족이었다. 집값이 비싼 뮌헨시의 테라스하우스를 구입하다 보니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갑부가 되는 게 어릴 적 꿈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에는 아직 관심이 없었다. 사춘기 시기에는 그게 더 심해져 학교가 정말 싫어졌다. 억지로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13학년 말에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기독교교육 시간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교실에서 나가 화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기독교교육을 가르치던 목사님의 넓은 마음을 악용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그 과목에서 보통 A나 B를 받곤 했는데 나는 D를 받았다. 기독교교육에서 D를 받은 목사는 독일을 통틀어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정말 놀랍다. 화장실에서 토론할 때 친구들과 세상을 비판하고는 했다. 기독교교육, 교사들과 교육제도, 사회 구조와 정치를 비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거대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진리가 무엇인가?”
아무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지 못했다. 곧이어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철학을 전공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다른 결론을 냈다. “아니야, 철학자들은 진리가 여러 가지라고 하잖아. 신학자들은 진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자!”
이렇게 해서 나는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뮌헨대학에 들어가 이중전공으로 사회학과 신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신학 학사 과정은 진리 탐구로 시작하지 않았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부터 배워야 했다. 포기하지 않은 게 기적이다. 이미 학교에서 라틴어를 공부해 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다 3학기에 폴 틸리히의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를 공부하면서 내가 찾던 진리를 발견했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기 시작했다.
이후 본대학에서 지금의 아내 한정애(협성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경건파 기독교인이었는데 방언기도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철학파이자 정치파였다. 우리는 서로를 비판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 배우려는 마음도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란 신비롭다.
아내 덕분에 나는 영적 경험을 했고, 영을 분별하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 목사가 됐다. 아내는 내 덕분에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나를 통해 어머니도 교회에 대한 관심이 강해져 장로가 되셨다. 동생도 신학을 공부했고 목사가 됐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고전 15:10)”
***[역경의 열매] 이말테 <3> 유년시절 가인·노아·요나 같은 신비한 경험
성경 인물 이야기 지금도 반복돼… “말씀은 살아 있다” 피부로 느껴
이말테 교수(왼쪽)가 1963년 독일 펠트키르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형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이말테 교수 제공
내가 목사가 된 게 놀랍다고 했지만 돌아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목회자로 인도하셨던 모양이다. 내 일생에는 하나님의 흔적이 수없이 많다.
유아세례를 받을 때 목사가 들고 있던 성경책을 잡았다고 한다. 이걸 보고 그 목사는 “이 아이가 하나님 말씀을 잡으려고 한다. 나중에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몇 년 지나서야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다.
어릴 때부터 어린이 성경책을 읽었다. 읽었던 이야기들이 꿈에 등장하곤 했다. 꿈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이야기와 매우 비슷한 일들을 경험했다.
난 성경 속 가인처럼 내 형을 죽이려고 한 적이 있다. 숨바꼭질을 했는데 형과 형의 친구가 약속한 지역을 벗어나 버렸다. 자기들보다 어렸던 내가 귀찮았던 모양이다. 열심히 찾아다녔지만 그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나를 두고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무척 화가 났다. 그때 달리기를 잘 못했지만 도끼를 들고 형을 죽이려고 뛰어갔다고 한다. 나를 발견한 어머니가 놀라 달려와서 도끼를 빼앗았다. 그러나 화를 쉽게 풀지 못했다. 배신감을 깊이 느꼈는지 많이 울었다고 한다. 나중에 성경을 읽다 보니 “내가 가인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성경이 내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서커스 공연단이 우리가 사는 마을로 왔다. 가족이 함께 구경하러 나갔다. 서커스 공연 중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 닥치고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천막이 날아갔다. 집중호우를 피하려고 모두가 근처에 있는 집들을 향해 달려가 지붕 아래로 피신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옆집으로 피해 왔다. 도로가 강으로 변했다. 성경 속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물원에 가서 하마를 구경할 때였다. 하마가 바로 내 앞에서 입을 열었는데, 입이 어찌나 크고 이빨이 얼마나 길었는지 깜짝 놀랐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그 하마의 입으로 떨어졌다. 하마가 나를 삼켰다. 나는 한동안 하마 배 속에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마가 나를 토해내는 순간 잠에서 깼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요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하나님이 나를 요나처럼 동쪽으로 보내시고 나에게는 니느웨 같았던 서울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게 될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이미 요나 이야기를 신화나 남의 이야기로만 보지 않았다. 성경 이야기가 옛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이야기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연결되고 있었다.
신학 전공을 시작한 뮌헨대에서의 1학기 때 한 강의에서 교수가 “로마서 3장 21절을 찾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때 로마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성경은 어린이 성경뿐이었다. 어린이 성경에는 로마서가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찾았다.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 하나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히 4:12).
하나님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위해 계획하신 미래를 보여 주셨다. 이러한 경험들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발견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만지셨다.
***[역경의 열매] 이말테 <4>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성을 따르던 형
물리학자 된 후 교회 발길 끊어… 이성으로 믿는 신앙 한계 있어
이말테 교수(오른쪽)가 2005년 독일 뮌헨에 있는 형의 집에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 전 형과 함께한 모습. 이말테 교수 제공
우리 가족은 1960년대 초부터 매년 여름방학에 이탈리아로 휴가를 갔다. 70년대부터는 성령강림절 방학 기간에도 해외에서 휴가를 보냈다. 크로아티아(구 유고슬라비아)의 해수욕장에서 2주간 지냈다. 어느 해인가 휴가지에서 형과 함께 주변을 산책했다.
캠핑 장소 뒤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니 왼편에 높은 바위들이 보였다. 앞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 쪽으로 걷고 있는데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히 꿈속에서 그 길을 본 것 같았다. 마지막 바위를 지나면 가지에 눈이 많이 쌓인 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이걸 미리 형에게 말해주니 형은 ‘얘가 너무 더워서 정신이 좀 이상해졌나’ 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성령강림절에는 그 지역의 낮 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지막 바위를 지나서 왼쪽을 바라보니 정말 하얀 나무 하나가 보였다. 물론 그것은 눈이 쌓인 게 아니라 꽃이 활짝 피어 만발한 나무였다. 형은 아주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나중에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성을 초월하는 경험들을 한 뒤 하나님을 전에도 체험했는지 궁금해졌다. 지난 회에서 이야기했던 신기한 경험들이 떠올랐다. 크로아티아에서의 경험도 생각났다.
수 년 뒤 수학·물리학자가 된 형이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빠져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나는 형에게 물질주의가 너무 좁은 세계관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크로아티아 휴가 때 함께 경험했던 사건을 얘기하면서 “그 세계관이 맞지 않다는 것을 형도 경험했잖아”라고 말했다. 형은 “그런 일을 경험한 적 없어. 넌 그냥 상상하는 것일 뿐이야. 네가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 경험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위협하기 때문에 견디지 못한다. 나도 그랬다. 나도 당시 물질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 그 경험을 이상한 것으로만 판단한 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 세계관이 깨졌다. 그 이후에는 그 사건이 더 이상 위협적인 기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세계관은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초월적인 경험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신앙이 기억의 회복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 세계관의 영향력이 매우 커 보인다. 객관적인 관찰이 없음을 뜻한다. 유명한 독일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이미 알고 이해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말이 옳다.
계몽주의와 인문주의는 인간 이성을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권위를 가졌다고 본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최고로 봤다. 이성이 하나님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이성으로도 믿을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이성으로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믿는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은 ‘자신의 이성을 믿는가, 하나님을 믿는가’이다. 그리스도인이 철학을 함께 알면 전도에 도움이 된다. 목사들이 신학을 전공할 때 철학과 심리학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역경의 열매] 이말테 <5> 두 번의 영적 체험, 목회자의 길 확신 얻어
준목 시절 프라일라싱 교회서 청년회기도회 통해 은사 체험
이말테 교수가 준목 시절 시무했던 독일 프라일라싱 교회의 예배 모습. 이말테 교수 제공
독일 신학생들은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뒤 2년 반 동안 준목 과정에 들어간다. 개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정기적으로 2∼3주간 목회신대원에서 목회 실천이론과 실제를 배운다. 그 시기에 나는 특별한 교회로 파송됐다. 오스트리아 국경에 위치한 프라일라싱 교회였다. 성령 충만한 교인이 많았다. 방언하는 신자가 많았고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인 청년이 기도 덕분에 회복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두 가지 경험을 했다.
먼저 나에 대한 미움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난 나를 사랑하지 못했고 남을 사랑하기보다 비판하곤 했다. 목회신대원에서 어느 동료 준목이 내게 말했다. “말테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유치한 말은 하지 마!” 하지만 그는 또 그 말을 했다.
다시 프라일라싱 교회로 돌아간 어느 날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다.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내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장실에서 난생처음 내 얼굴을 평온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 눈을 보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난 내게 친절하게 인사했다. “안녕, 말테!”
깜짝 놀랐다. 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인데 왜 갑자기 나를 사랑하게 됐지? 누군가 나를 최면에 빠지게 했나? 하지만 누군가 들어왔다 나간 흔적은 없었다.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인사했다. 이전엔 예의상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하루 종일 사랑이 넘쳤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추측해 봤다. 하나님이 내가 굳은 마음으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모양이다. 천사를 보내셨는지 성령님을 보내셨는지 모르겠다. 난 그 일을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하나님이 내 소프트웨어를 바꾸셨다. 하드웨어는 그대로인데.” 나도 루터와 비슷한 해방 체험을 한 셈이다.
몇 달 뒤 또 다른 경험을 했다. 청년회 기도회에 초청받았는데 대다수가 방언으로 기도했다. 난 일반 언어로 기도했다. 당시 방언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내가 목회자가 되게 하시려면 나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바로 그 순간 매우 강한 은사를 받았다.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일부는 빛 안에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 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영적으로 뜨거워졌다. 문득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전에는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없었다. 며칠 뒤 뮌헨으로 갔다. 기차로 가면 1시간30분쯤 걸린다. 기차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한 10분 정도 기도했다고 생각해 눈을 떴다. 뮌헨역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갈등도 많았다. 그때부터 내게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았다. 난 경험이 부족했고 성숙하지 못한 젊은 준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힘들어요. 이 은사를 다시 거둬 가시면 안 되나요?” 그 순간 그 은사가 없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그 은사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다. 누가 교리적으로 잘못된 말을 하거나 설교할 때 견디기가 어렵다. 심각하면 몸이 아프다.
이 두 가지의 영적 체험으로 인해 목회자의 길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 동료 준목과 프라일라싱 교회의 하르트무트 한 목사는 내 은인들이다. 프라일라싱 교회에 매우 감사하다.
***[역경의 열매] 이말테 <6> 독일 온 장모님, 교회 성찬식 때 해프닝
개인 잔 아닌 공동 잔 포도주 반절 마시고 하루종일 취해
이말테 교수의 아버지(오른쪽)와 장모가 2004년 독일 베를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이말테 교수 제공
준목 과정은 목회학 석사 졸업시험과 함께 끝났다. 첫 목회지 파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뮌헨에서 박사논문을 작성 중이었다. 속히 결혼하지 않으면 헤어질 가능성이 높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지금 결혼하지 않을 거면 아예 결혼을 하지 말자고 말했다. 우리 둘은 결혼에 동의했다.
당시 목사 후보생들은 결혼 상대자를 교단 총회 본부의 교회 지도자에게 소개해야 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총회 본부를 방문했는데 대성공이었다. 에큐메니컬 국장이 아내에게 원하면 언제든지 기독교 바이에른주 루터회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제안까지 했다.
나는 도나우뵈르트시 목회지로 파송됐다. 아내는 기차로 한 시간이면 뮌헨에 갈 수 있었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다. 목회 시작까지 몇 주밖에 남지 않아 급하게 결혼을 준비했다. 장인께서는 처음에 국제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러나 장모께서 내가 곧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사실을 듣고 장인을 설득했다. 결혼식에 처가 부모님들을 독일로 초청했는데 비자가 제때 안 나왔다. 먼저 독일에 있는 친척들을 초청해 시청에서 결혼을 하고 약 6개월 후 한국 부모님이 오셨을 때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다.
결혼 약속을 하기 전 아내가 한 가지를 요구했다.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살자는 것이었다. 난 그러자고 했다. 아내는 수 년 동안 독일에서 살았기에 독일 문화를 알고 나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국을 전혀 모르는 내가 아내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간 일은 우리 부부의 삶에 큰 도움이 됐다. 국제결혼을 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방법이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독일과 한국 문화의 차이는 크다. 파트너의 문화로부터 배울 만한 것도 많다. 예를 하나 들겠다. 아내가 독일에서도 십일조를 내곤 했다. 아내가 내게도 십일조를 내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한 번도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돈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돈 욕심이 나를 맹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엔 십일조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발견했는지 모른다. 십일조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치료법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인과 장모를 처음 만난 날 서양식으로 바짝 껴안으며 포옹했다. 두 분 다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한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미리 말씀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 년 뒤에 또 그렇게 하셨다. 장인은 그때도 좋아하시지 않았지만 장모께선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친절을 받아주셨다.
장모님이 내가 목회하던 교회의 부활절 예배에 참여하신 적이 있다. 성찬식 때 제단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서 있는 신도들에게 공동 잔으로 포도주를 분배했다. 장모님이 공동 잔을 받으실 때 포도주를 여러 모금으로 거의 반 잔을 비우셨다. 개인 잔을 나눠주는 한국식 성찬에 익숙해져서 다 마셔야 하는 줄 아셨던 것이다. 장모님은 평생 술을 마시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좀 취한 상태로 지내셨다. 수년 뒤 “독일 성찬식이 너무 좋다”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다. 알코올의 영향을 성령 충만함으로 착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역경의 열매] 이말테 <7> 결혼 약속 지키려 한국 보내 줄 선교회 찾아
1992년 한국 도착하니 민주화운동 한창… 한국어 배우며 대학서 독일어 강의 준비
이말테 교수(뒷줄 화살표)가 1998년 한국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사 홈커밍데이’ 행사에서 선교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말테 교수 제공
1990년 여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매일 독일 장벽이 무너지고 열리는 장면이 방송됐다. 한반도가 곧 통일될 것이라는 희망이 넘쳐흘렀다. 난 곧 한국을 무척 좋아하게 됐다. 독일로 돌아간 뒤 결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를 한국으로 파송해 줄 선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1991년 베를린 선교회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과 결혼했음에도 비자를 받지 못했다. 기장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독재타도 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베를린 선교회는 1980년 사형 선고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당시에는 한국에 가는 희망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신대학교에서 나를 독문학과 객원교수로 초빙하는 메일이 왔다. 다시 비자를 신청했다. 두 달 후 비자가 나온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1992년 5월부터 베를린 선교회에서 일하며 한국으로 파송받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과정은 특별히 없었다.
다만 우리는 영국 버밍엄에서 영어 훈련을 받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가 되기 위해 선거운동 중이었던 콘라드 라이저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손자도 만났는데 그가 무서운 말을 했다. “중국에선 생명의 가치가 낮다(Life is cheap in China).” 한국도 그런지 궁금했다.
1992년 8월 중순 한국에 도착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었다. 연세대 앞에는 학생들이 거의 매일 데모하다시피 했다. 시내는 최루탄가스 냄새로 가득 찼다. 아내와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걱정 없이 정치 이야기를 했지만 친구들은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사람들의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희망으로 가득 찬 느낌이 났다. “미래가 밝다”는 말이 유행했다. 난 군사정권 말기만 경험한 셈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만난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했던 활동을 이야기해줬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것 같아 아쉬웠다.
나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테라스하우스에서 사는 꿈을 꿨다. 실제로는 서울 상도동 처가 근처에 106㎡(약 32평형) 신축 빌라 하나를 구했다. 좁았지만 많은 손님을 초청했다.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집 뒤에 사자봉이 있었다. 새벽마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기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나중에 새벽기도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먼저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연세대 어학당에 다녔다. 거기에서 일본 대만인을 비롯해 여러 한국 교포와 함께 배웠다. 서양인은 거의 없었다. 가르치는 속도가 매우 빨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1993년 봄학기부터 독일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다른 어학원으로 옮겼다. 이제는 닷새가 아니나 사흘만 수업을 들으면 됐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는 서양인이 배우기에 참 어렵다. 머리가 많이 빠졌고 남은 머리도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이 고생 덕분에 내가 지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역경의 열매] 이말테 <8> 기장 교회 사역하다 한국에 남고 싶어 선교사로
1994년 무렵 민중신학 공부에 열심… 이후 재한독일어권교회 목회 맡아
이말테 교수(뒷줄 가운데)가 2003년 서울 재한독일어권교회에서 입교식을 진행하고 있다.
1993년 3월부터 한신대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다. 94년 여름부터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 본부 해외선교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 94년에는 서울 구로동 신명교회 소속 목사가 됐다. 그 교회도 민중교회였다. 민중신학을 공부했다. 안병무 박사님 댁을 몇 차례 방문하며 민중신학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됐다. 96년에는 소속을 가리봉교회로 옮겼다. 이 교회는 규모가 컸기 때문에 폭넓은 경험을 했다. 기장이 통일에 관심이 많았던 교단이라 통일과 관련된 발표도 많이 했다.
기장과의 계약은 2000년 끝났다. 기장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 아직도 기장 목사와 교수들 중 여러분과 연락하며 교제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기장!”
기장과의 계약 만료 이후 아내와 나는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내는 협성대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나도 아직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00년부터 독일 기독교 전국연합회 파송으로 재한독일어권교회 목회자가 됐다. 독일 기독교바이에른주 루터회 선교회인 ‘미션 원 월드’ 파송으로 기독교한국루터회(LCK) 선교사로도 일하기 시작했다.
나는 LCK에서 일하는 역사상 첫 독일 선교사가 됐다. LCK는 미국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LCMS)를 통해 생긴 교회다. 그러다 보니 독일 루터교회보다 보수적이다. 하지만 LCK는 LCMS보다 더 개방적이고 에큐메니컬하다. 1958년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들에게 루터교 선교를 시작했던 선교사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회 지도자들은 나를 2년간 살폈다. 독일 루터교 입장에서 내가 괜찮은지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는 LCK에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힘과 시간을 내가 섬기고 있던 재한독일어권교회를 위해 쓸 수 있었다. 그 열매로써 그 교회가 회복되고 부흥했다고 생각한다.
그 교회는 기장 소속이다. 해마다 경동교회와 한·독 연합예배를 드린다. 성찬식도 나눈다. 교인 수가 많아 교인들이 두 줄로 나와 떡을 포도주에 찍었다. 강원용 목사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 목사님은 당신 차례가 되면 떡을 찍는 식으로 하지 않고 큰 그릇을 손으로 잡고 직접 마셨던 것이 기억난다.
경동교회의 건축법을 보며 매우 인상 깊다는 생각을 했다. 밖에서 보면 도성 같은데 예배당 안에 들어서면 밑으로 내려가도록 설계돼 있어 동굴에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위에 가로로 큰 뼈 같은 지주(支柱) 혹은 부벽(扶壁) 아치가 보인다. 요나처럼 물고기 배 속에 있는 느낌이 난다. 그래서 기도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생긴다. 예배당을 나갈 때는 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입구에 십자가가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때 문이 열린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부활해 무덤에서 새 삶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처럼 교회를 건축할 때 신학 개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이말테 <9> 한국루터회에 몸담으며 목회·강의 함께 맡아
교회로 돌아오는 가나안 교인들 보며 한국교회 다시 부흥할 것으로 믿어
이말테 교수(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2002년 경기 용인에 위치한 로스기념관에서 열린 제1회 루터교 교회성장연구소 콘퍼런스에 참여해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이말테 교수 제공
기독교한국루터회(LCK)가 나를 이리저리 살핀 지 2년이 지났다. 2002년 봄 한국인 최초의 루터교인으로 ‘아시아의 루터’라고 알려진 지원용 박사님은 원래 살고 있던 미국이 아닌 루터대에 계셨다. 나의 선교회 아시아 담당자도 한국에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지 박사님은 지도층 모임에서 “지금부터 이말테 선교사가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게 출발 신호였다.
총회장은 내게 LCK 교회개발원을 설립하라는 중책을 맡겼다. 그곳에서 2005년까지 원장으로 활동했다. 예배 세미나, 루터교 정체성, 교회력, 전도 등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어린이 찬송가 절기편을 출판했다. ‘독일과 스위스 종교개혁지 탐방’과 ‘독일 교회의 날’ 등 단체여행들도 진행했다.
2005년에는 루터대 실천신학 교수로 임명됐다. 처음에는 예배학을 가르치다가 나중엔 점차 영성신학과 설교학, 목회학 선교학 종교학 강의도 하게 됐다. 나는 학기가 시작될 때 오리엔테이션에서 설명하는 게 있다. “좋은 학생은 질문하고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질문을 던지면 교수가 귀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하면 학생에게 더 많은 과제를 주는 교수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처음에는 날 신뢰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다 나중에 열심히 질문하고 토론한다. 인문학은 남의 사상을 그냥 복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해석한 뒤 자신만의 의견을 생각해 내놓는 것이 목적인 학문이다. 학생들은 이것을 처음에는 힘들게 배웠는데 요즈음 내용을 스스로 해석하는 것을 매우 잘한다.
나는 학교 발전을 위해 독일 목사와 학자들에게 발표와 강의를 부탁하며 한국으로 초청했다.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 세계 최초의 기독교 대학인 마르부르크대 조직신학 은퇴교수인 한스-마르틴 바르트 교수 부부를 초청했다. 바르트 교수는 세계적인 석학이며 루터 전문가다. 그가 루터신학에 대해 집중 강의를 했고 그의 아내가 목회자들을 위해 신앙세미나를 인도했다.
LCK에는 교수가 반드시 목회자로 일해야 한다는 전통이 있다. 교수들은 최소한 설교를 해야 한다. 선교사인 나는 더 그렇다. 여러 교회에서 협력목사나 동역목사로 소속했다. 처음으로 참석했던 한국루터교 예배는 중앙루터교회였다. 8년 동안 장로교회의 예배에 익숙해졌는데,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이 났다. 내게 익숙한 전통적 예배 의식의 멜로디와 달랐지만 그 멜로디와 내용이 깊은 의미를 가졌기에 은혜가 넘쳤다.
지금 나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중앙루터교회에 소속해 있다.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은 내게 정말 즐거운 일이다. 중앙루터교회도 얼마 전까지 다른 한국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다시 부흥하고 있다. 특히 젊은 가족들과 지식인들이 중앙루터교회 담임인 최주훈 목사를 좋아한다. 이렇게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교회에 다니다가 한때 출석을 포기했던 ‘가나안 교인’이었던 성도들이 많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 목사가 제대로 신학을 공부했고 설교를 잘 준비해 기독교사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준 높게 선포하면 한국교회도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이말테 <10·끝> 하나님 인도하심으로 27년째 한국 생활
한국교회 위계질서 극복이 과제… 생각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필요
이말테 교수(오른쪽 두 번째)가 지난해 11월 서울 중구 장충동 그랜드앰버서더호텔에서 한국교회 개혁상을 받고 있는 모습. 이말테 교수 제공
2012년 루터대가 주관하는 종교개혁지 탐방을 인도한 적이 있다. 탐방에 참여한 이들의 직분과 소속 교단, 나이가 다양했다. 평가회에서 그들은 한국교회가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와 부정적인 차원에서 공통점이 많다는 말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요소는 절대적인 위계질서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다른 생각을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습니까” 하며 화를 냈다. 진리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서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언젠가 한 목회자 콘퍼런스에서 젊은 개척교회 목사들과 나이 든 중대형교회 목사들 사이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젊은 목사가 재미있는 제안을 하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사가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목회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더 많은 목사의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그는 젊은 목사에게 질문했다. “목사님께서 목회하는 교회에 교인이 몇 명이 있는지요” 그 목사는 자랑스럽게 답했다. “이미 80명 정도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나이 든 목사는 “제 교회 교인 수는 3000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나오면서 토론은 끝났다. 그 이유는 기복 사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 든 목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더 좋아하시는 목사에게 사람을 더 많이 보내시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가 교인 수가 더 많기 때문에 자신의 목회와 신학사상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양적 진리 이해이다. 교인 수가 더 많은 목회자가 옳다는 양적 진리 개념으로 큰 교회 목사가 작은 교회 목사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목회자들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만 모이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양적 진리 개념은 반드시 극복돼야 한다.
진리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화해야 한다. 장로교인들이 감리교인들과 그리고 루터교인들이 순복음 교인들과 대화할 필요가 있다. 경건파가 정치파와 대화해야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경건파가 사회를 변혁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정치파가 기도와 성령의 역사하심을 발견해야 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중심에 위치하는 진리를 향해 함께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해야 양적 성장도 가능할 것이다.
나는 25살 때까지만 해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가서 살게 될 것은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1992년 한국에 와서 이렇게 오래 살 거라고는 꿈에도 예측하지 않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어느 캐나다 선교사의 30주년 축하예배가 있었다. 나는 그 예배를 드리면서 ‘어떻게 외국 사람이 30년이나 한국에 살 수가 있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27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애든 인류의 역사든 끝을 봐야 그 삶의 특징과 의미가 나타난다. 내가 한 일들은 처음부터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씩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전혀 알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인도하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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