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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와 그 주변의 암자들을 찾다보면 참 재미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큰집 격인 은해사는 마치 대도시의 대형 문화 공간 같은 느낌이다.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본다면 대형 놀이동산이라고나 할까? 무엇인가 볼거리가 많은 것 같은데 하루 종일 놀고 돌아오면 딱히 남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은해사 주변에 있는 암자들. 백흥암, 운부암, 중암암, 묘봉암, 거조암, 이들 암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만의 곱고 고적한 색깔을 간직하고 있다. 너무나 대조적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바로 옆이다. 집 앞을 나서면 이렇게 대비되는 공원이 있다. 놀이동산의 담장에 붙어서 밖으로 동네 어린이들의 공간인 작은 놀이터가 있다. 서울의 어린이대공원은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가보고 싶은 선망의 공원이지만, 이곳 능동의 어린이들에게는 마을의 놀이터가 더 현실적이다. 마을 놀이터의 시설이라고는 미그럼틀과 그네와 작은 모래밭이 전부이고, 둘레에 심어놓은 몇 그루의 나무와 그 아래에 놓인 벤치 몇 기가 아늑함을 더해줄 뿐이다. 그러나 이 작은 놀이터에서 마을 어린이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동심을 키워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잠시 짧은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바로 앞의 담장 옆으로 난 대공원의 문을 지나면 커다란 공원이지만 항상 큰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일년에 석가탄일 등 불가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만 일반에 공개되는 백흥암을 찾기 위해 마침 연휴가 닿아 벼르던 탐방 여행을 나섰다. 주 목적지는 백흥암이지만, 그리고 전에도 찾은 적이 있지만 은해사와 주변의 암자들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어 모두를 다시 찾아 나섰다. 초파일이니 다른 절집들과 마찬가지로 인파가 넘치고, 모든 것이 풍성하다. 인심도 더없이 좋다. 물론 끼니 걱정도 없다. 큰집인 은해사는 하루 종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평소에 한적한 주변의 암자들도 오늘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여기서도 차이가 확연하다. 큰집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나, 주변 암자들은 오후부터 거의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이것이 대소의 차이인가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이 말에 꼭 맞는 곳이 은해사권이다. 은해사는 종교적인 이유를 빼고는 별로 찾을 것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기행문 책자들이 짚고 넘어가는 것이 법전에 걸린 편액을 꼭 거론한다. 추사의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번 초파일(2009.5.2)에 개관식을 가진 성보박물관이 있어 그 부족했던 것을 채워주고 있다. 은해사가 이렇게 문화사적으로 빈곤한 것은 물론 역사속의 재난을 겪은 탓이다. 모든 법전이 근래에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옛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주변의 암자들을 찾게 되고 다행히 이들 암자를 찾아서 은해사 방문에서 부족했던 것을 채워갈 수 있다.
◇ 중암암
은해사에서 가장 산중으로 높이 올라가야 하는 중암암을 찾았다. 중암암은 돌구멍절, 돌구무절 등으로 불린다. 은해사로부터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차량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등산삼아 가면 오래도록 걸어서 팔공산의 중턱 이상을 올라 암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암자 앞의 작은 주차 공간을 지나면 소운당이란 작은 부속 건물을 지나 절집의 일주문 역할을 할 곳에 커다란 바위기둥이 서로 기대고 있는 돌구멍이 나타난다. 한 사람이 빠져날 공간이다. 별명을 붙여 돌구멍일주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中巖’이란 편액을 단 작은 법당이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법당 옆에는 김유신장군이 소년화랑시절에 마셨다고 전해지는 장군수란 약수도 있으나 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돌구멍 밖으로 다시 나와 오른쪽으로 계단길을 오르면 삼층석탑이 있고, 그 위에 이른바 ‘극락굴’이 있다. 이 극락굴이 이곳 돌구멍절의 추억의 장소이다. 자연의 바위군이 얽혀진 형태가 ㅁ 자 로 이루어진 바위 틈새인데, 이 틈새를 한바퀴 돌아 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틈새의 간격이 몸 관리의 척도가 된다고나 할까? 비대한 몸을 가진 이는 통과할 수 없다. 찾은 사람들이 돌아 나오는 모습에서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즐거워한다. 여기에 더하는 시원한 맛이 하나 더 있다. 앞으로 보이는 팔공산의 아름다운 장관이다. 중암암을 찾는 부처님의 선물이 이런 즐겁고 장쾌함이 아닌가 싶다.
극락굴을 내려와 다시 주차장 앞에 이르면 작은 요사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 해우소가 바위 벼랑 위에 앙증맞게 세워져 있다. 이 해우소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절집에서 소개하고 있다.
해인사, 통도사, 중암암에서 온 수행스님 세 분이 한자리에 있었다. 스님들이 자기가 머물고 있는 절에 대하여 자랑을 한다.
먼저 통도사 스님 왈
“우리 절의 법당 문이 얼마나 큰지 한번 열고 닫으면 문지도리에 서 쇳가루가 한 말하고도 세 되가 나옵니다.”
해인사 스님은
“우리 절은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동짓날 팥죽을 쑬 때 가마솥이 너무 커서 배를 띄워 저어야합니다.”
라고 허풍이 대단하다. 중암암에서 온 스님은 뭐라고 딱히 자랑할 것이 없자 말하길
“우리 절의 해우소는 그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동짓날 볼일을 보 면 다음해 섣달그믐날에나 떨어집니다.”
라고 응대를 했다.
중암암이라고 하는 천혜의 쉼터에서 재미있게 쉬어갈 수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너무도 진솔하게 담겨 있다.
그랬다. 오늘 초파일을 맞아, 아니 전에 특별한 날이 아닌 어느 날의 방문 때에도 그랬다. 본사인 은해사는 위 이야기에 나오는 스님들의 자랑처럼 대단하다. 부처님오신날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인파가 구름 같다. 그러나 이곳 중암암은 돌구멍을 빠져나올 수 있는 소시민들 얼마간이 와서 즐거워하고 있다. 대시민은 멀고 험한 이곳 해우소가 불편할 뿐이다. 하긴 너무 많은 인파가 이곳에 모여든다면 그들이 돌구멍 체험을 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위험도 따를 것이다. 지금의 이 모습이 단촐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어서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은 정말 자비심이 가득하시고 중생들에게 평등한 사랑을 베푸시는 아름다운 분이시다.
스님들도 사람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깨우침을 얻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일념으로 세속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 득도하지 못한, 배움이 따르지 못한 스님들은 세속의 묵은 사고가 남아 있을 터. 어찌 세상의 흐름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그저 바라는 것은 많은 스님들이 더 많이 깨달음을 얻어 승단에 아름다움만이 더욱 넘쳐나길 기다려본다.
◇ 백흥암
중암암에서 재미있는 체험을 하고 상쾌한 기분을 간직하고 내려온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백흥암을 찾아간다. 얼마나 별러온 곳인지 모른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평소에 개방하지 않으므로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 그래서 그런지 더욱 간절하게도 가보고픈 절집이었다. 개방 여부 보다는 사진으로만 보아온 극락전의 수미단을 직접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오늘의 탐방도 사실은 실패나 다름없다. 개방은 하였으되 초파일의 넘쳐나는 인파와 사찰의 봉축행사로 극락전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수미단의 아름다움을 예술품으로 대하고 감상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아니면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달리 자세히 볼 수가 없다. 달리 생각하면 이런 통제로 인하여 백흥암의 극락전 건물과 수미단의 아름다움이 고이 간직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떻든 오랜 기다림이었던 하나를 오늘 미흡하지만 풀었으니 이를 기쁨으로 간직해야 할 것 같다.
백흥암의 보물은 극락전의 수미단에 있다. 극락전 전각 자체가 보물(제790호)이고, 그 안에 있는 수미단은 별도로 보물(제486호)이지만 수미단이 백미이다. 수미단에 꾸며진 목부조가 너무도 아름답다. 다른 사찰의 수미단에도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되어 있지만 이곳의 수미단은 보물로 지정될 만큼의 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수미단을 직접 눈에 넣어보고자 천리 길을 달려온 것이다.
수미단이 무엇인가? 법당에는 불보살상을 봉안한다. 대좌를 설치하고 그 위에 불상과 보살상을 모신다. 대좌를 가려주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을 놓은 자리를 만들기 위해 대좌 주위에 사각의 단을 설치하는데 이 단을 수미단이라 한다.
수미산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산이다. 수미산의 높이는 16만유순(十六萬萬由旬 : 1유순은 7㎞)이나 되며 그중 8만 유순(56만km)이 물 위로 솟구쳐 있는데, 그 솟구친 부분의 중심을 둘러서 사방에는 네 개의 대륙이 존재한다고 한다. 남쪽 대륙이 인간이 거주하는 대륙인 섬부주(贍部洲)이다. 섬부주 아래에는 지옥이 있고, 수미산에는 곳곳에서 신들이 거주하는데 중턱의 천계인 사왕천에는 사천왕이 있고, 정상에는 여러 신들의 왕인 제석천(인드라)이 거주하고 있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낙원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수미산을 상상의 산이 아닌 실재하는 산으로 본다. 티벳 서쪽에 있는 카일라스산을 수미산으로 보고 있다. 히말라야의 한쪽에 있는 산으로 해발6714m에 이르며, 일년 내내 흰눈이 덮여있다. 또 이 산의 물이 녹아 흘러내려 만들어진 마나사로바라는 이름의 큰 호수가 있는데 해발 4500m에 위치한 산정호수이다. 간지스강의 발원지로 여기고 있다. 인도인들은 생전에 카일라스 산을 순례하고, 하늘호수라 불리는 마나사로바에서 목욕하는 것을 일생의 꿈으로 여긴다고 한다. 마야부인이 이곳에서 목욕으로 몸을 정화한 뒤 아들을 잉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곳을 찾아 순례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매체를 통하여 접하는 인도인들의 간지스강에서의 목욕 모습이 이 산과 호수의 신령스러움을 믿는 풍습임을 알 수 있다. 윤회설을 따라 업장을 소멸시켜 준다는 확실한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산의 실제 모습을 사진으로만 보아도 눈 덮인 피라미트 모양으로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불교에서 천상의 세계가 수미산 정상이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다. 부처님을 모셔놓은 수미단을 화엄장식으로 장엄하게 꾸미는 것은 당연한 공간 구성이다. 그래서 법당의 수미단 장식이 화려하다. 백흥암의 수미단은 우리나라 어느 사찰의 그것보다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법당 건물과 별도로 수미단이 국가의 보물로 지정되었음을 실제로 대하고 보니 충분히 공감이 간다. 실은 공감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반해버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오랜 시간을 갖고 사람들이 없는 틈에 혼자 수미단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보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여는 절집의 법당에서는 충분히 만들 수 있으나 이곳은 개방 자체가 극히 제한적이고, 그런 시스템에 공감하는 나로서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아쉬움을 털어버리고 이미 사진 자료 등 공개된 것으로 수미단의 아름다운 꾸밈을 감상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대신하면서도 감상의 기쁨에 만족한다. 이것이 답사 여행의 맛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의 대략적으로 살펴본다. 단의 구조는 상,중,하로 나누어 하대는 기단부라 할 수 있고, 상대는 덮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대는 3단으로 나누었다. 중대와 상대 사이에는 보탁을 설치해서 각종 공양물을 올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 상대에는 안상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하대의 양쪽 끝에는 도깨비 얼굴을, 가운데 부분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몸체가 되는 중대의 3단은 정면은 세로로 5칸을 나누어 15칸이 되고, 양쪽 측면은 2칸으로 나누어 한쪽에 6칸씩 12칸이 되어 모두 27개의 구획으로 나뉜다.
정면으로 보이는 면의 구성을 살펴본다. 하대는 5칸으로 나누고 가운데 3칸에는 용을, 양쪽 두 칸에는 도깨비 상을 넣었다. 중대의 하단에는 모란꽃을 넣고 사이사이에 사자, 기린, 코끼리 등의 동물상을 넣었다. 중대의 중단에는 연꽃, 용, 물고기등이 있고 특히 동자상이 가운데 부분에 있다. 용두어(용머리에 물고기모양)가 특이하다. 국화 등도 보인다. 중대 상단에는 모란꽃 속에 학이 날고, 봉황이 마주하고 있으며 국화와 함께 공작새가 놀고 있다. 전체적으로 개괄해보면 보면 불교에서 상징성을 갖고 있는 꽃들과 육지동물, 날짐승, 물에 사는 동물, 상상의 동물 들이 모두 망라되어있다.
수미단의 좌우측 단을 살펴본다. 단의 구성은 정면과 마찬가지이다. 수미단을 바라보아 왼쪽의 단에는 용, 복숭아를 들고 있는 가릉빈가, 기이한 동물, 연꽃 등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도 왼쪽과 비슷한 구성이다. 연꽃 모란 물고기, 기이한 모습의 상상의 동물 등이다.
수미단에 생겨진 각종 동식물의 모습이나 상상의 동물 등이 모두 놀라운 솜씨로 표현되고 있다. 또 새겨진 주체들이 각각 불교 또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된 유교적인 상징물 등도 나타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의 상징성, 부처님을 수호 하는 역할의 것들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미단에 표현된 각각의 상징물의 의미와 성격 등을 새기면서 부조된 작품을 감상한다면 더없이 그 깊은 의미에 감상의 재미를 더할 것이다. 특히 부조된 하나하나가 각각 매우 정교하여 당시의 작품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래도록 조용히, 그리고 편안하게 앉아 작품 세계에 빠져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이 그럴 수 없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이렇게 아쉬워하면서도 백흥암 수미단이 지금같이 잘 관리 보전되어 오래오래 이 나라의
귀한 보물로서의 가치를 간절하게 기원해 본다.
백흥암의 극락전과 수미단이 잘 지켜지고 있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현재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 까닭이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요즈음의 관리 모습이다. 이렇게 오래도록 잘 보존되어온 다른 이유는 왕실의 비호를 받은데 있다고 한다.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의 태실이 백흥암의 뒷산에 있었고 이로 인해 은해사가 왕실의 원찰이 되면서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고 보호되었다고 한다. 이후 태실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일제 시대에 옮겨졌다. 이런 과정을 연결 지어 보면 백흥암이 잘 보전되어온 것이 결국은 어떤 과정을 거쳤든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문화재의 현주소를 깊이 생각하고,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 운부암
운부암은 신일지에서 갈라진다. 신일지는 팔공산 자락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길을 막아 생긴 저수지로 주변이 호젓하여 쉼터로서도 그만이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백흥암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운부암은 오른쪽으로 2.5km 정도를 더 올라가야 한다.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에 아담한 정자를 만들어놓았다. 차량이 다닐 수 있게 시멘트포장을 한 길이지만 은해사의 부속 암자들을 찾는 이들이 아니면 차량 통행도 많지 않을 것이고, 도보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등산객 정도일 것이다. 걷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할 것 같다. 은해사에서부터 이곳까지의 거리가 적지 않으니 잠시 쉬어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위치이다.
신일지에서도 한참을 올라가야 운부암 주차장에 이른다. 암자까지 가는 길이 호젓하여 걸어볼만한 길이다. 발에 밟히는 느낌이 흙길이 아니어서 부드럽지 못한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산책하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좋은 코스이다. 이런 길을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호젓하게 여유를 갖기에는 더없이 좋다. 그렇다. 절집을 찾아가는 것이 어찌 불교도만이겠는가. 하루하루를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다 가끔은 쉬고 싶을 때 절집을 찾아 한적한 주변의 모습에 취해보는 것은 고급스런 쉼이 아닐까 싶다. 갖고 있는 종교와 무관하게 말이다. 우리네의 쉼의 방식 가운데는 쉬고 나서 더 피곤함을 가져오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쉼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함께 쉴 수 있는 쉼의 방식을 찾아보자. 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절집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곳의 하나가 이곳 운부암을 찾아가는 것이 될 것 같아 강조해본다.
암자에 이르면 낮은 언덕 같은 느낌을 주는 암자의 건물들이 포근하게 둘려지고 그 아래로 ‘연지’라 이름 붙인 예쁜 연못이 맞는다. 연못에는 달마상을 세워놓았다. 다른 절집에서의 느낌과 다소 생소하기는 하다. 이 연못에 다가와서 위로 올려 보이는 암자의 전체적인 모습이 한적함을 느끼게 한다. 오랜 시간을 속세의 바쁜 삶의 어지러움을 훌쩍 벗어버리고 다가와서 앞에 보이는 암자의 겉모습을 바라보면서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나는 마치 오랜 시간을 떠돌다 고향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운부암을 찾아오는 보상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연못에서 돌계단을 오르니 계단마루의 양 옆에서 잘 생긴 사자상이 손님을 맞는다.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앞으로는 보화루란 편액을 건 건물이 경내로 드는 현관 역할을 하고 있다. 편액의 글씨가 범상치 않다. 해관 유한익(海觀 劉漢翼)의 글씨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의 편액도 해관의 글씨이다. 2층 건물인 보화루의 아래를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법당 앞마당에 이른다. 중앙에 법전인 원통전이 있고 좌우로‘운부난야’, ’우의당‘이란 편액을 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원통전에는 보물 제 514호인 청동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고려말의 전통적인 양식을 띠고 있다. 석가탄신일의 봉축행사로 자세히 살펴보기가 어려워 포기하고 말았다. 오래 전에 방문했을 때 살펴본 적이 있다.
법당을 바라보아 왼쪽에 ‘운부난야(雲浮蘭若)’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난야는 비구의 수행처란 뜻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선원이다. 이곳 운부선원은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예전에 북쪽에는 금강산의 마하연선원이, 남쪽에는 팔공산의 운부선원이라고 할 정도로 선원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경허, 만공, 향곡, 청담, 성철 스님 등 근래의 고승으로 알려진 많은 분들이 이곳 선원을 지나갔다고 한다. 오랫동안 선원의 문이 닫혀 있다가 10여 년 전부터 다시 선방이 열려 참선도량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모두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일반인의 눈으로 보아도 선방으로서의 위치는 참 좋아 보인다. 일반인들이 휴식 공간 삼아 잠시 쉬어가기에 더없이 적당한 곳이 아닌가 싶다.
운부사에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를 모두 보고 난 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돌린다. 저녁에 수련등을 띄우는 행사가 있다고 안내를 한다. 행사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울 것 같다. 운부암의 규모가 작은 탓인지 봉축법회에 참여한 신도의 수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아래 큰절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런 곳에서의 소박한 점등행사가 더욱 정겨울 것 같다. 소망을 담아 수련등의 촛불을 밝히는 밤의 행사를 보고 싶으나 일정이 빠듯하여 아쉬움을 뒤로한다.
운부암에서 자세히 살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 보화루와 우의당 건물을 잠시 언급한다. 두 건물이 모두 우리의 전통 한옥 건축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미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내가 오늘 운부암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카메라를 들이댄 곳이 보화루 앞마당에서 바라본 우의당의 옆모습이었다. 요사채로 쓰이는 이 건물에서의 첫 느낌은 절집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리네 옛 마을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넘치는 정든 고향집을 만난 그것이었다. 요사채 부엌의 문얼굴이라든지 살창 등이 많이 보았던 그 정겨움이다. 특히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지었다. 지형이 비스듬한 것을 두고 지형에 맞게 기둥의 높이를 달리하여 건물의 균형을 이룬 것은 우리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인데 이를 절묘하게 살리고 있다. 자연 친화적인미적 구성이다. 보화루의 기둥도 아래층은 원기둥이고 위층은 모기둥이다. 이층의 바라지창이라든가 천장의 들보등 가구의 구성이 그대로 드러나 숨김이 없다. 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보화루 루에서 편하게 쉼을 갖고 가면 가슴 속의 번뇌가 깨끗하게 씻어 내릴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절집이 모처럼 왁자한 날이 아닌가. 너무 이기적인 욕심일터이다.
그렇다. 운부암은 그 이름이 갖고 있듯 구름 위에 떠있는 그 이상향의 절집이다. 오늘같이 사람들이 넘쳐나는 날도 무엇인지 집어내기는 어렵지만 가슴속이 편안하다. 이 좋은 쉼터를 가끔 찾아들면 세상살이의 힘든 짐을 잠시 또는 가끔은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을 덜어놓고 가겠다고 할 때 원통전의 보살님은 모두모두 받아주실 것이다.
◇ 거조암
이상향의 놀이터를 뒤로 하고 집단으로 나한님들이 수행하시는 거조암으로 찾아든다. 은해사의 말사이지만 이상의 다른 암자들과 달리 은해사를 나와서 의성 방향으로 길을 달리 잡아야 찾아갈 수 있다. 하긴 은해사보다 거조암이 창건 역사가 더 오랜 절이다. 국보(제 14호)인 영산전이 이를 말하고 있다. 전에는 거조사란 사명을 갖고 있었는데 은해사의 말사로 지정되면서 암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거조암은 우리나라의 많은 암자들 가운데 가장 고품격을 지니고 있는 암자가 아닐까 싶다. 거조암의 상징은 영산전과 전각 안에 모셔진 500나한상이다. 이 건물과 나한상을 보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다. 전에 이미 찾아본 절집이지만 팔공산 자락을 지나칠 때는 언제나 찾고 싶은 절집이다. 오늘 부처님오신날은 더없이 붐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세히, 그리고 편안한 안정된 마음으로 이 절집의 귀중함을 담아갈 수는 없으나 그래도 좋다.
거조암 영산전은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수덕사 대웅전(1308년, 국보 제 49호),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국보 제 18호), 부석사 조사당(1377년 국보 제 19호)과 더불어 고려의 손길이 남은 몇 안 되는 목조건축물이다. 영산전의 건축연대가 1374년이라고 하니까 두 번째로 오랜 건축물인 것이다. 700년이란 오랜 세월을 잘도 버텨온 귀중하고도 고마운 건물이다. 건물이 이렇게 오랜 세월을 지내온다는 것도 그렇지만 더구나 목조건축물로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귀중한 보물이니 자꾸 만나고 싶어 찾는 것이 아닌가. 특히 이들 귀한 보물들에게는 우리의 선조들의 이어지는 숨결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정감이 간다. 저 영산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초기 건축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으면서 본래의 기본 모습을 지켜왔을 것이다. 비록 어느 인연인지 짚어 말할 수는 없으되 끊임없이 이어진 조상님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나도 역사의 한 점을 흔적 없이 남길 수 있다는 것에서 역사의 유물을 대하는 보람을 갖기도 한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광경을 묘사한 불전을 말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 제자나 16나한을 모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곳과 같이 500나한을 모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500분이나 되는 나한상을 조성한다는 것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나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단계로 구분하여 묘사한 팔상도를 봉안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팔상전(八相殿)이라 부른다.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이 유명하다. 나한전, 응진전이라는 편액을 걸기도 한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 Arhan)'의 줄임말로 부처의 제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대중들로부터 공양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란 뜻에서 ‘응공( 應供)’ 또는 세상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응진(應眞)을 갖고 있는 이들임을 나타낸다. 석가모니부처님시대의 제자들이니 당연한 숭모의 대상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입멸하시고 가섭이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때 모인 비구가 500여 명이다.
이곳 영산전에 모셔진 나한상은 526 분이라고 한다. 석조상으로 빚어진 한분 한분의 조각상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불상이나 보살상과는 달리 상을 조성하는데 정해진 틀은 없다고 한다. 나한상의 모습이 하나같이 각각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참선수행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수행 모습을 표현한 것이리라. 영산전에서 500 분이 넘는 모두에게 삼배의 예를 올린다면 1500배가 넘는 것이다. 지극한 불심으로 모든 나한에게 예를 올리는 신도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불자가 아닌 나이지만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진지하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심(下心)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리라. 하심이 진정한 아름다운 마음이란 것을 말의 뜻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내 마음 속에 불심이 같이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떤 까닭일까? 아마도 교만으로 가득한 모자란 인물인 것일 것이다. 모르겠다.
거조암을 찾은 까닭은 물론 영산전에 있다. 오늘 사람이 많이 붐비는 특별한 날이니 사진으로 담기도 어렵고 자세히 살펴보기도 쉽지 않으나 이 귀한 건물을 대충 보고 넘어가서는 아니 될 일이다. 사실 이곳에서 영산전 말고는 특별할 건물은 없다.
외부 모습의 대강을 살펴본다. 기단은 장대석과 잡석으로 높이 쌓았다. 정면7칸, 측면 3칸에 7량 건물이고 맞배지붕의 주심포건물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약하게 있는 원주이다. 중앙의 어간에 출입문을 내고 양 끝으로 두 칸씩 네 칸은 붙박이로 살창을 내었다. 건물의 옆면에도 살창을 아래위로 두 개씩 내었다. 처마는 홑처마이다. 공포가 단순하다. 단청이 없는 백골집이다. 건물의 규모가 장대하면서도 간결한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오늘 절 마당에 걸린 연등으로 수수한 색시가 모처럼만에 꽃단장을 한 것 같다.
내부의 가구를 보자. 2고주에 5량 건물이다. 중앙의 고주 위에 대들보를 가로 지르고 마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고 있다. 중앙간을 형성하는 고주(高柱)와 앞뒤로 이어지는 평주(平柱) 사이에 높이가 확연하게 차이가 많이 난다. 고주와 평주는 퇴보로 연결되고, 평주 위의 간결한 주심포양식의 공포에 의하여 퇴보 안 끝이 받쳐져 주심도리를 받고 있다. 마루도리는 사람인자형(人)의 소슬합장으로 받쳐지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건물의 안에서 보는 느낌도 밖과 마찬가지로 수수하면서도 무게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간결함이 주는 편안함을 더한다. 여타 사찰에서 오늘 같은 경우 연등으로 내부의 모습으로 살피기 어려운데 이곳에서는 연등을 모두 건불 밖에 별도로 매달아 더욱 좋다.
영산전의 모습을 안팎으로 살펴보고 나서 밖으로 나와 발길을 돌리려니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절 마당의 한적한 곳에 앉아 거조암 방문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500 분이 넘는 나한상에 일일이 정성으로 예를 올리는 그들의 모습을 돌이키며 하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부처님을 찾아온 이들은 절집의 방문에서 발길을 돌려 나갈 때까지 절로 시작하여 절로 끝낸다. 그래서 사찰을 절이라고 한다고도 한다.
하심(下心)? 하심의 실천은 부처님 전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절을 한다. 절을 하면 하심이 되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사실 불상은 물리적으로 상을 이룬 물체이다. 돌덩어리거나 쇳덩어리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의 상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조성한 것이 불상이라는 조형물이다. 그래서 돌덩어리를 향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하심의 방법에 대한 고승의 법문을 정리해서 요약하여본다. 불교에서 수행은 어리석음을 물리쳐 지혜를 일구는 것이다.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아상과 교만을 지우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탐․진․치라는 삼독을 버려야 한다. 삼독을 버리는 것이 곧 비움의 삶을 갖는 것이다. 자신을 바로 볼 때 비움이 이루어질 수 있다. 비움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이 곧 하심이다. 아무리 원력을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수행을 한다고 세상의 진리를 어찌 모두 깨우칠 수 있으리. 그것이 곧 부처의 길이데. 그렇지만 부처의 길을 가지는 못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지혜의 길을 걷는 것일 것이다. 그 하나의 방법이 오늘 오백이 넘는 나한상에 정성으로 예를 올리는 마음과 실천하는 행동이 곧 하심이 아닌가 싶다. 바르게 이해나 하고 주절거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절집다운 절을 찾아 나선 길이 은해사 주변의 암자 방문이다. 그 어는 절집에서 보다도 찾아온 소득이 뚜렷이 남는다. 오늘 발길이 닿은 네 암자는 모두 각각의 아름다움을 특색 있게 갖고 있다. 비움의 잔잔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교만의 나에 대한 반성을 잠시라도 해보았다. 혹시 너무 건방진 모습이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긴 이런 태도가 곧 아상을 지니고 있는 그 어리석음 자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