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의 나그네라고 합니다. 공간을 이동하는 의미 보다 시간 속을 한 방향으로 지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순례는 공간과 시간, 같이 지나는 나그네 길을 걷습니다. 세상 창조에서 종말까지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지구가 생겨나 겪어왔던 지난 날은 지질시대라는 이름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도 그 지질 시대 위를 잠깐 지나가고 있습니다. 너무도 짧은 시간만 허락된 인간의 삶입니다.
VF (Via Francigena) 순례길이 지나가는 켄트 지방은 노스 다운 (North Down)이라고 부르는 백악(chalk) 지층 위 평야 지대입니다. 여기서 다운(Down)은 고대 영어에서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일대의 바닷가는 하얀 백악 바위 절벽입니다. 영국 동남부 해안지대의 특징 있는 지질 때문입니다. 땅 속에 백악층이 있습니다. 공룡들이 판 치던 쥐라기 시대 (Jurassic) 다음 백악기 시대 (Cretaceous), 백악기 말에 공룡들이 자취를 감춥니다. 대략 1억 5천만년 전부터 6천만년 전까지 시기에 형성된 지층입니다.
백악기에 많은 바다 생물들의 석회질 분비물과 죽고 난 시체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쌓여 하얀색 석회암 지층이 생겼습니다. 이 석회암을 백악이라고 합니다. 가끔 그 지층에서 당시 생물 화석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수백 미터 두께의 지층을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작은 개체들이 살다가 갔는지 의아하고 놀랍기만 합니다. 그 후 지각 변동으로 바다 밑이 뭍으로 드러났습니다. 아프리카 지각 판이 알프스를 밀어 올릴 때 지금 켄트 지역의 바다 밑으로 땅 주름이 잡히면서 육지가 되었습니다. 도버 해안 하얀 절벽은 백악질 지층이 노출된 결과입니다. 바다에서 보면 이 하얀 해안 절벽이 성벽처럼 보입니다. 영국이라는 거대한 성의 성벽.
이 노스 다운 평야지대는 지표에 모래 자갈, 그 밑에 진흙, 그리고 더 밑에 백악 층입니다. 교실에서 쓰던 분필이 백악 성분입니다. 칠판에 글씨를 쓸 때마다 분진이 떨어지던 분필. 쉬는 시간이면 분필 가루를 뿌리며 장난질 쳤던 중학시절. 분필가루는 폐에 들어가 많은 선생님들이 폐병을 앓게 했습니다. 순례길 발 밑에 거대한 분필 덩어리가 있다는 생각에 그걸 어디에 무슨 글자를 쓸까 해 봤습니다. 지금은 스크린에 비친 글자가 칠판 글씨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못 사는 나라 학교들조차 하얀 플라스틱 판에 굵은 펜으로 쓰고 지웁니다. 백악을 파내 팔던 사업 역시 시들었습니다.
이곳 지질은 빗물은 잘 스며들어 물이 잘 고이지 않고 나무보다 풀이 더 잘 자라는 곳입니다. 백악도 암반이어서 쉽게 침식되지 않았는지 옛날 바닷속 급한 굴곡 없는 부드러운 표면 상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노스 다운 평야에서 바다로 흘러 드는 강이 더(Dour) 강입니다. 지하수가 갑자기 솟아서 흐르는 샘 하천(chalk stream)입니다. 지표에는 상류 흐름이 없습니다. 석회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천 발원입니다. 절개지라면 그런 샘이 여럿 있고, 많든 적든 흘러나온 물이 모여 강물이 됩니다. 더 강이 흐르면서 물길에 침식작용을 일으켜 남동 방향으로 길이 약 7km의 골짜기를 만들었습니다. 바다 쪽으로 갈수록 깊어지는 그 골짜기 끝에 바위절벽이 갈라져 틈새를 만들고 거기에 도버 항이 있습니다.
도버 쪽 절벽 해안에 배를 댈 만한 곳이 더 강 하구 밖에 없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도 항구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시대에 로마군이 영국으로 들어오면서 더 강 어귀에 군사기지를 세웠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더 강 하구는 유럽 대륙과 오가는 물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로마가도는 더 강을 따라 내륙으로 뻗었습니다. 항구에 배가 접안하도록 시설을 설치하면서 자연스레 강물의 유속이 느려 지고 토사가 쌓였습니다. 강은 좁아지고 강 따라 길게 도시가 들어섰습니다. 강을 따라 작은 마을들이 생겼으나 도버가 팽창하며 흡수해 갔습니다.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마을들의 흔적은 향수였습니다. 인구 31,000명의 도시가 현재 모습입니다. 향토사학자 Lorraine Sencicle 여사는 도버 역사에 관한 소중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1]
나폴레옹의 유럽침공 시에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방어하는 최전선 요새였습니다. 영국의 사활이 걸린 전략요충지로서 역할은 대륙으로 통하는 지형적 관문이어서 그렇습니다. 지금은 평화 시기이니 그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2007년에야 이곳 군사기지가 폐쇄되었습니다. 유럽과의 긴장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영국이 유럽연합 탈퇴하면서 유럽 대 영국의 대립과 갈등이 이곳을 다시한번 긴장하게 할 것입니다.
Dover라는 이름은 프랑스 이름 Douvres에서 유래했습니다. 강 이름 더 (Dour)에서 따온 것입니다.. 대부분 인구가 항구 관련된 직업으로 먹고 사는 곳입니다. 프랑스로 가는 터널이 뚫리자 항만 화물 물동량이 현저하게 줄어 페리 사업이 사양 길로 들어서긴 했습니다. 일자리가 줄어드니 좋아할 턱이 없었습니다. 주민들의 저항은 2012년 항구의 민영화 계획을 무산시킬 만큼 강했습니다.
펑퍼짐한 노스 다운 평야를 지났습니다. 넓은 초원은 2차 세계대전 때 군용 비행장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런던을 폭격하러 오는 독일 폭격기를 요격하는 전투기의 발진 장소로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활주로 대부분은 농토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글라이더 연습장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로마가도가 영국 내륙으로 연결되는 휫필드(Whitfield) 마을은 인구 5,000명입니다. 도버의 변두리로 보기에는 어정쩡합니다. 항구와는 다른 나름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마을 부근을 지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됩니다. 더 강 골짜기로 바로 가지 않고 길은 완만한 경사지에 들어선 주택가를 파고 듭니다. 고층 건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강에 가까울수록 나무들이 많습니다.
빅토리아 풍의 주택들이 경사진 도시에 켜켜이 서 있었습니다. 더 강에 근접한 거리가 가장 낮은 도로였습니다. 오가는 차량으로 번잡해도 교통체증은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젊은 아이들이 떼 지어 다니는 모습도 있었습니다. 교통 요지였지만 이제는 관광객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동네였습니다. 숙박업소, 음식점 등이 다른 도시보다 많습니다. 도버 경찰서 옆 싸구려 호텔은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으로 알려온 번호 키를 써서 드나들었습니다. 더 싼 숙소는 도버 항 부두 가 골목에 배낭여행자 호스텔이 있습니다. 요즘 같은 코로나 환난 와중에도 손님을 받는 곳입니다.
참고문헌
[1] Lorraine Sencicle, Dour River – Part I an Historical Overview, https://doverhistorian.com/2016/06/25/dour-river-part-one-an-historical-overview/, downloaded on Aug. 15,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