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남북의 갈등을 유발한 요인은 경제정책이며 그 중에서 첫 번째는 보호관세라는 견해가 있다. 경제학자 토마스 J. 딜로렌조 교수의 <링컨의 진실>을 비롯한 그런 견해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북부와 남부의 총소득은 독립 직후 100 대 165로 남부가 우세했으나 남북전쟁 직전에는 100 대 79로 역전되었다. 건국 이후 70년간 북부의 경제는 3.2배 성장했고 남부의 성장은 1.5배에 그쳤다. 북부의 고속성장은 산업화로 인한 것인데 이를 뒷받침한 것이 보호관세였다.
해밀턴파가 1828년에 제정한 관세법은 최고 관세율이 200퍼센트에 달했고 평균 관세율은 50퍼센트였다. 엄청난 과세였다. 관세법으로 북부의 제조업자들은 큰 혜택을 받은 반면 관세의 대부분은 남부인들이 부담했다. 제조업이 취약한 남부는 공산품의 대부분을 북부나 유럽에서 들여왔기 때문이다. 1860년 당시 연방 세입의 90퍼센트 이상이 수입관세였고 그 대부분은 남부에서 나왔다. 관세율이 점차 인하되어 1857년에 최고 관세율이 24퍼센트로 내렸음에도 이런 실정이었다.
1860년 북부 인구는 2,210만 명이었고 흑인은 1퍼센트에 불과했다. 남부 인구는 백인이 560만 명, 흑인이 350만 명이었다. 남부는 북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구로 연방 세입의 87퍼센트를 부담하고 있었다. 1860년 미국의 수출 총액에서 남부의 비중은 72퍼센트였다. 남부는 주로 면화, 담배, 사탕수수 등을 노예노동으로 경작하여 유럽으로 수출했다.
보호주의는 수출에도 적용되었다. 선박 부족으로 수출품의 선적은 언제나 지체되었으나 북부의 조선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에서 제조된 선박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외국 해운업자가 미국 내 해운업자보다 낮은 운송비를 제시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북부의 해운업을 보호했다. 이로 인해 남부는 국제 기준보다 비싼 운송비를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남부의 해안지역 주민들에게는 등대와 항구의 유지를 위한 특별 세금이 부과되었고 혜택은 주로 북부의 해운업자들이 누렸다.
연방정부는 주로 남부가 부담한 세입의 대부분을 북부에 지출해서 철도와 운하를 건설하고 뉴잉글랜드 어부들에게 장려금을 지급했다. 이 결과 1860년 철도의 총연장은 남부가 8,800마일인데 북부는 21,800마일이나 되었다.
1840년 미국의 운하망
미국의 철도 건설
북부가 남부를 희생시켜서 엄청나게 거대해지고 있으며, 북부는 남부인에게 온갖 세금을 부과하여 착취하고 있다는 불만이 남부에 팽배했다. 보호관세는 사실 북부인들이 남부를 수탈하기 위한 도구였다. 남부인들은 연방정부가 오래 전부터 헌법을 위반했다고 여겼다.
1860년 5월,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은 수입관세를 3배 인상하는 <모릴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남부인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해 11월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상원마저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함에 따라 링컨과 공화당이 남부를 약탈하는 정책을 밀어붙일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다음해 2월 1일까지 남부 7개주가 연쇄적으로 합중국에서 탈퇴했다. 남부 7주는 남부연합을 결성하고 2월 18일에 제퍼슨 데이비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7개 주의 민주당 소속 연방의원들 역시 연방의회를 떠났다.
남부의 탈퇴로 자연스럽게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공화당은 민주당 소속인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거부권을 의식하여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1861년 3월 2일 상원에서 <모릴 관세법>을 통과시켰다. 그 이틀 뒤에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1861년의 형세
붉은색 - 남부연합 최초 결성 7주
주황색 - 남부연합 추가 가입 4주
노란색 - 남부연합 미가입 노예주
푸른색 - 북부연방 자유주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일어난다.
남부인의 입장을 옹호하는 <링컨의 진실>은 남부의 일방적인 희생을 해밀턴파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보호주의 정책이 시행된 대부분의 시기에 집권세력은 제퍼슨파인 민주당이었다.
북부를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하는 해밀턴파가 집권한 시기는 1797년~1801년, 1825년~1829년, 1849년~1853년이었다. 1841년 3월 4일 취임한 휘그당의 윌리엄 해리슨 대통령은 한 달 후에 사망하고 민주당 소속 부통령인 존 타일러가 승계했다. 이 12년 1개월과 조지 워싱턴의 8년을 제외하고 52년을 민주당이 집권했다. 연방의회 역시 대부분의 시기에 민주당이 다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 1860년 당시 남부는 사실상 북부의 반식민지 상태였다. 남부를 대변한 것으로 알려진 민주당의 장기집권 하에서 미국 경제는 북부가 원한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민주당이 장기집권하면서도 남부인들이 증오하는 1828년의 관세법을 폐지하지 못하고 30년에 걸쳐 점진적 인하에 그친 이유가 무엇인가? 남부에 불리하게 작용한 조선 및 해운 정책이 유지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민주당이 철도나 운하 건설을 위한 국고보조금 지급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철도가 남부에 비해 월등하게 확장된 이유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역사책에서 이런 의문에 대한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실들을 스쳐가듯이 언급할 뿐인데 남부의 탈퇴를 결정적으로 촉발시킨 <모릴 관세법>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링컨의 진실>도 사실의 나열에 그칠 뿐 위의 의문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이 없다.
남부의 희생을 강요하는 정책들이 집권당인 민주당의 동조 없이 장기간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남부인들이 그토록 장기간 희생당하고 착취당한 것에 대한 책임은 민주당에 있으며 북부인들을 탓할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민주당의 경제정책이 남부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전통적인 학설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캔자스-네브래스카 지역의 노예제 허용 여부를 주민 투표에 맡긴 것, 대륙횡단철도 건설과 중앙은행 설립이 민주당의 반대로 지지부진했던 것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이 북부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단지 몇 가지 때문에 링컨이 헌법에 불만을 품었다는 주장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경제정책에 대한 남부의 불만을 전쟁의 원인으로 보는 관점에는 전쟁의 책임을 남부에게 돌리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모릴관세법에 대한 링컨의 비타협적 태도로 인하여 남부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며 이를 기화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링컨의 의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노예제나 보호관세 등을 둘러싼 갈등을 일반 대중들도 심각하게 의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856년까지 20년 동안의 선거에서 남북의 지역적 대립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제에 반대했다는 북부에서도 민주당 지지가 매우 높았고 경제적 측면에서 피해자의 입장이었던 남부에서도 휘그당에 대한 지지가 만만치 않았다. 남북 대립은 1860년의 선거에서만 확연하게 드러날 뿐이다.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민심과 실제로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존재하는 사실에 관해서 아직 별다른 연구를 접하지 못했다.
[ 미국 대통령선거 주별 우세 지역 ; 1836~1860 ]
1836년
1840년
1844년
1848년
1852년
1856년
18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