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태준 옛집(수연산방)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전통 찻집이다. 원래는 <황진이>, <왕자호동> 등을 집필한 작가 이태준의 고택이었으나,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상허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상지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25년 단편 <오몽녀>로 데뷔하였으며, 잡지 <개벽>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구인회 동인과 문학잡지 <문장> 출간 등으로 순수문학 계열에서 활동했다. 작품의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 박태원과 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낙향하여 철원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많지 않은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이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작품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생가는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고 생가는 현재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 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이 수연산방은 고풍스런 한옥 앞 작은 뜰과 상허가 쓰던 책장 등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2. 만해 한용운 심우장
누구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마음으로 읊조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85번 버스 종점에서 내려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을 50㎙ 쯤 오르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ㆍ1897~1944)이 만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을 만난다. 총독부를 마주보기 싫어 북향으로 앉혔다는 이 집은 만해 생전에 불을 땐 적이 없다.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인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히 지내겠느냐’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마당 한켠 만해가 직접 심은 향나무에서는 옛 주인의 꿋꿋한 절개가 느껴진다.
한성대입구역에서 20분쯤 길을 걷다보면 왼쪽에 '심우장 가는 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이 작기 때문에 눈을 크게 뜨고 잘 봐야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좁은 비탈길이 시작된다.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울에 여태 이런 골목이 남아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겨운 골목길이 나타난다. 사람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법한 골목길이지만 나지막한 돌담과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수세미들이 한 장의 그림엽서처럼 소담한 멋을 풍긴다.
비탈길을 5분여쯤 오르면 오른쪽에 심우장이라는 현판이 쓰인 작은 집이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만해 한용운의 생가 심우장이다. 보통의 한옥은 남향으로 짓지만 심우장은 북향으로 지은 것이 특이하다. 남향으로 지을 경우 조선총독부를 마주보기 때문에 선생이 일부러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북향집이기에 겨울에 유난히 추워 고생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일까. 마루에 앉으니 서늘한 기운이 전해진다. 이 서늘한 기운에 선생의 꼿꼿한 기상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마당 너머 한 눈에 들어오는 성북동 전경은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낮은 지붕이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 너머로 재벌가 건물들이 마주 보인다. 마당에는 선생이 손수 심은 향나무(사진 왼쪽)가 곧게 뻗어 있고 마당 너머 성북동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마당의 향나무는 만해가 손수 심은 나무다. 곧게 뻗은 나무줄기에서 선생의 올곧은 정신이 느껴진다.
3. 성북동 이재준가
골목을 나와 성북동 길로 50㎙ 쯤 내려가면 덕수교회 안에 조선 근대 전통가옥 이재준가(李載濬家)가 있다. 마포에서 새우젓 장사로 갑부가 된 이종석이 1900년대에 지은 건물로 나중에 소설가 이재준이 살았다. 183평의 터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안채, 행랑채가 회색벽돌 담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4. 비둘기길
이재준가를 나와서 한성대 입구 방면으로 내려간다. 가는 길의 왼편으로 <간송미술관>을 알리는 표지가 보인다. 식민지시기에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기 위해서 간송 전형필이 전 재산을 털어 사들인 귀한 유물들이 전시된 곳이다. 길을 조금 더 내려가면 <선잠단지>가 나오고, 왼편으로 길을 꺾어 올라가면 나오는 도로가 <비둘기길>이다. 성북동을 노래한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나온 이름이다.
성북동 비둘기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968년)
시인 김광섭은 평소 “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해서 시를 쓴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시인이 1974년 8월에 <심상>지에 발표한 <작가의 말>에서 시창작 경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뇌출혈로 메디컬센터에 입원하여 오랜 혼수상태를 겪으면서 사경을 헤맸어요. 그 후 성북동 나의 집 마당에 자리를 펴고 있는데, 따스한 훈풍이 불고 꽃이 피어 있었어요. 뇌일혈이란 말을 듣고 내 시적 생명은 끝났다는 절망감을 안고 있었지요. 그 때, 하늘을 바라보다가 아침마다 하늘을 휘익 돌아 나는 비둘기 떼를 보게 되었어요. <성북동 비둘기>의 착상은 거기에서였지요.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줄 것인가, 둘 깨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80년대 성북동은 민주화 투쟁과 민중문학 속에서 계층의 벽을 상징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어디로 가나 바위와 숲을 만날 수 있던 성북동의 언덕길에 하나 둘씩 자리 잡은 커다란 집들의 풍경은 우리 현대사의 여러 가지 풍경들을 우리 앞에 다시 들려주고 있다.
5. 길상사
길상사의 역사는 매우 짧으면서도 그 설립계기가 특이해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찰은 19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80년대 말까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성북동 깊숙한 산자락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1916 ~ 1999, 법명 길상화)가 7000여 평의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 원대의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년 6월 13일 법정 스님에 의하여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되었고 1997년에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는 바로 1930년대를 풍미한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백석은 연인인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에칭을 지어주고 항상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김영한이 쓴 <내 사랑 백석>이란 백석 평전에는 저자의 이름이 ‘김자야’로 되어 있다. 천재시인 백석(白石, 1912년∼1963년)은 1935년 시<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사후, 모던 보이(modern boy)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 받던 백석은 같은 해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일하게 된다. 백석과 김영한의 극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에서 이루어진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 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이러한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해준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 앉았다. 그는 여러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과 동기가 순수했다고 한다.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 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다 와중에 진향은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근무하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어느 날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기생의 위치로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하여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은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 둘이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우곤 했다. 어느 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 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린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연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을 보면, 백석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함흥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백석은 조선 축구 학생 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 시켜놓고 자신은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 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도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시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 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 정도이다.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백석은 어느 날 이 시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 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시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역시 ‘사랑’은 힘들었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결혼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와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이 괴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 업무에 종사하는 일을 하기도 했는데, 광복이 되자 북한에 눌러 앉게 되었다. 그리고 분단….
김영한은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하고 고급 요정 <대원각>의 여주인이 됐다. 제3공화국 군사정권 시절 밀실정치의 본산이었던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으로 꼽히며 승승장구했다. 김영한은 넉넉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7월 1일 백석의 생일날이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그를 기렸다.
백석문학상을 제정해 지속적으로 후원하며 백석을 향한 그리움을 표현했던 김영한은 이후 대원각 시주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당시 시가 천억 원에 달하던 대원각이었지만 김영한의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외려 문제는 시주를 받지 않겠다고 거절한 법정 스님이었다. 10년 간 계속 된 끈질긴 실랑이는 결국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김영한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얻게 됐다. 이후 김영한은 큰돈을 기부한 것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다시 태어나면 시를 쓰고 싶다”고 답했다. 김영한은 “백석의 시를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며 “나에게 그의 시는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9년 세상을 떠났고 한 줌의 재가 되어 길상사에 뿌려졌다.
첫댓글
4월 5일(화) <우리옛돌박물관 - 길상사>를 다녀왔습니다만.
성북동은 <성북동 사랑길>이라는 주제로
1. 이태준 옛집(수연산방)
2. 만해 한용운 심우장
3. 성북동 이재준가
4. 비둘기길(김광섭 시인)
5. 길상사
<걸어서 서울> 답사 코스입니다.
이렇게 올려 주시니 다시 답사 가면 더욱이 기억에 남을것 같습니다
선생님~~감사합니다 ~🙏
사랑길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훈의 사랑에 대한 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김훈, <바다의 기별> 13쪽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김훈, <바다의 기별> 21쪽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링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귀절에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답사 길
안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