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 스무 해,
'참회·감사와 자비 서원의 길'
1. 오는 11월 1일이 보광사를 개산 창건한지 20주년되는 날이다.
통상적으로 산중(山中)에서 절을 창건한 날을 개산(開山)일이라 한다.
큰 절에서는 이 날에 개산대재를 지내며 기념하고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해서, 매 10년마다 나는 이 날을 기념하고 있다.
2. 현 보광사는 2006년 10월 중순에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 아미산(비슬산 줄기)' 아래 허술한 초암으로 년세를 얻어 절문을 열었다.
삼존불 점안한 날을 11월1일로 한 것은 天地人(천지인) 삼재ㆍ삼귀의ㆍ삼보ㆍ삼 세판 等(등)의 길상수이기 때문이다. 비슬산을 母山(모산)으로 당시 소쿠리 모양의 절 뒷산을 아미산(아미타불을 연상하여)으로 이름지어서 매일 축원시 고(告)했다.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세음ㆍ지장보살상을 좌우에
모시고 기도 수행한지가 어연, 20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3. 기념 수건을 제작하여 신도들께 나누어 드리고, 시외에 거주하는 분들께는 커피 교환권을 감사의 선물로 카카오톡으로 보내고 있다.
돌아보니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주년이 되었고, 내 나이도 이제 72세 고령으로 가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4. 처음 출가하여 은사님이 계시는 군위의 야산아래 절에서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절 주변을 돌면서 목탁을 치면서 도량을 한 바퀴 도는것으로 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
법당으로 들어와 아침예불한 뒤, 우리말 금강경을 독송하고 108배 참회절을 하면서 이 공덕을 나의 조상님들을 비롯한 인연 영가님들이 다 천도되기를 영가단에도 축원드렸다. 당시의 초발심은 뜨겁게 불타 있었으며,
나는 우선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 왕생극락부터 서원하여 1년이상 새벽부터 아침 동이 틀때까지 2시간씩 이 기도를 해 왔었다.
은사님 절에서 행자시절을 지내고 사미계를 받은 후, 대구시 달성군 비슬산 용문사와 인연이 되어 기도승으로 가게 되었다.
5. 그곳에서는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아침예불과 종성을 하며, 우리말 금강경 독송 ㆍ108배 참회정진과 영가단까지 축원으로 하루를 열었다.
지금은 절아래 '화원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아침 운동객이나 산악자전거 타는 분들이 절이 종착지라 새벽에 법당에 올라오기도 하였다.
그 분들이 새벽에 종소리와 목탁 염불소리를 듣고, 하나 둘 법당에 들러서 참배하고 가곤 하였다.
게 중에 어느 분은 주소와 생년ㆍ성명ㆍ소원을 쪽지에 적어서, 기도하는 내 자리에 두고 가기도 하였다.
그 종이를 보고 나는 축원을 올렸었다.
그런 분들이 조용할 때, 내 방에 찾아와서 보시와 기도 의뢰를 하고 가기도 하였으며, 아침 참배객들이 자연스럽게 초하루ㆍ보름법회에 나오는 계기도 되어 신도수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시에는 새벽 기도시에 108배 참회절을 즐거운 마음으로 가볍게 해 왔었다.
6. 어느날 길을 걷다가 실족하여 발목을 삐어 한의원에 다니면서 나은 뒤, 다시 절하고 또 삐고 좀 나으면, 다시108배를 하여 발목에 무리를 줌도 모르고 참으면서 하였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어 늘어난 발목인대로 10여년이 지난후에 결국은 발목인대 접합수술을 받았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몸을 소중히 함에 지혜롭지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용문사에서 1년 6개월쯤 지나서 다른 절에 관리주지로 가게 되었다.
7. 아는 스님이 나를 추천하여 인연이 된 것이다. 그곳은 어느 불자분이 만든 개인 절에 관리주지로 절의 운영을 맡게 되었다.
대구공항뒤 지저동쪽에 약 300평 정도 되는 터에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하천 뒤로는 팔공산이 보이는 곳이었다.
'도동 측백수림 군락지(천념 기념물)'가 가까이
있는 곳이라 절이름을 '향림사'로 부르고 있었다.
이 '측백수'를 향나무라 부르기도 해서 절 이름을
향림사로 정했다고 하였다.
이곳에서도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아침예불과 우리말 금강경 독송과 108배와 축원으로 시작하였다.
새벽기도가 끝날 쯤, 날이 새며는 아침공양을 한 뒤에 산책을 하면서 체육공원에서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아침을 맞이 하였다.
향림사에서도 새벽기도와 사시마지(불공)에 동참하는 신도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8. 사미계(정식 승려)를 받은 후, 첫 수행처인 용문사에 이어 이곳에서도 사주공부와 더불어 주역(周易)공부ㆍ사서(四書)를 배우러 부지런히 교육원과 서원을 다녀었다. 그러면서 신도들과의 인생상담을 사주풀이로 하기 시작하고, 그 덕분에 기도나 재불공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어 신도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금전출납부를 기재하면서 법당의 시주비를 철저히 관리했었다.
화주보살(절 창건주)이 매달 수입의 반을 주겠다고 하셔서, 이 금전출납부를 기준으로 매달 수입의 반을 통장으로 넣어 드렸고, 장부를 보여드렸다.
첫달에만 한번 집에가서 보신 뒤에 돌려주면서 "스님을 전적으로 믿어니 앞으로 안 보여주셔도 된다"고 하였지만, 나는 정직하게 법당에 들어온 시주금은 전액 수입으로 장부에 그대로 기재하고 통장에 다 넣어두었다.
그리고 절 운영비는 사실 그대로 써고 기재하였다.
부처님전에 올라오는 시주돈을 깨끗하게 관리하며 쓰겠다고 약속을 하였기에 내 양심에 걸림이 없이 관리했었다.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금전출납부는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기재 관리한지가 20여년이 지나고 있다.
화주보살도 내가 매달 보낸 보시금을 한 푼도 쓰지않고 다 모아두고 있었다. 아마 절을 위해서 쓰려고 모아둔 것이니 공사가 분명한 분이셨다.
화주보살은 발이 넓어서 인지, 아는 분들을 절에 많이 모셔오고, 스님과의 상담으로 연결을 자주 시켜주어 신도수가 날로 늘어나고 절은 발전 되어갔다. 절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음양으로 많이 도와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욕심을 내게된 화주보살의 제의에 따라 1년만에 이 절을 떠나게 되었다.
9. 그리하여 찾은 곳이 지금의 달성군 논공읍 삼리동네의 허름한 초암이었다.
옛집을 보수하여 어느 스님이 토굴로 수행하며 절을 열었던 도량이었다. 그 스님은 신도수가 늘어나고 발전되어 시내에 큰 포교원으로 옮겨가고, 그 초암을 년세로 놓아었다. 그곳을 세로 얻어 2006년 11월 1일에 보광사라는 절을 창건하여 오는 11월1일이 만20년 되는 날이 된다. 처음 문을 연 보광사는 마을이 있는 동네안이라써 새벽예불 기도로 옅집의 항의를 많이 받아왔다.
그래서 조금 늧추어서 새벽 5시반에서 6시경쯤, 아침예불을 시작하기로 하였고, 이후는 묵인을 해 주어서 넘어갔다. 이곳에서도 아침기도시 우리말 금강경ㆍ108배 참회정진은 계속 이어져 갔다.
차차 신도는 늘어나고 인생문제 등의 피상담자도 차츰 늘어나서 사주나 주역풀이로 감정하면서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도로 연결되거나 신도가 되어 하나 둘 신도들이 늘어나는 촉매가 되었다.
난방 보일러가 없어서 겨울에는 수도가 얼어서 윗집 할머니집에 가서 물을 얻어와서 가스렌지에 데워서 세수하곤 하였다. 겨울에는 외풍심한 골방에 전기판넬 난방으로 두꺼운 이불덮고 잠을 자도 마음은 편하게 지냈다.
그런 세월을 2년 몇 개월이 지나면서 절은 발전되어 갔다. 내 절을 갖게되는 시절 인연이 왔다.
10. 부동산 소개하는 어느 거사님의 소개로 옥포읍 설티고개의 한옥(92평)을 구입하게 되었다.
대출을 半(반 )가까이 하여 겨우 얻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한옥을 개조하여 법당을 만들고, 10년간 열심히 포교하면서 기도도 정성 다해서 하다보니 절은 발전되어 갔다. 그동안의 부채도 6,7년만에 완전히 다 갚았다.
그러나 현풍에 테그노단지가 생기고 새 길이 나고, 이곳도 달성공단 넘어가는 2차선길이 4차선으로 바꾸면서부터 절을 찻는 상담객이 줄어가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이곳 설티고개 좌우에는 국수집 等(등)의 식당이 성업중이라, 절에도 사람들이 수시로 와서 사주상담을 보고 갔었다. 식당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오가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불경기가 지속되어 가니, 읍내 중앙으로 절을 이전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10년만에 이곳 화원읍 중심지로 옮겨왔었다.
그 곳은 세를 주고 빠져나왔다.
11. 이곳은 상가 건물 2층에 실평수 50평 규모인지라,
넓게 법당을 만들고, 여러 개의 방도 갖추어 생활하기에 편리하다.
2009년 7월 하순에 이곳으로 와서 지금까지 월세를 주고 있다. 이듬해 코로나19라는 어려움이 닥쳤지만, 다행히 잘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찰은 조금씩 발전해 왔다. 이곳에 와서는 인터넷의 사주 전문 상담 소개 사이트를 통해 전화 상담을 많이 진행하였다. 또한 주역·사주 무료 상담 밴드를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밴드에 올라온 문자 상담 내용을 보고 전화 상담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가지 매체를 통해 만난 이들과 인생 상담을 나누면서 기도를 청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늘어났다. 그중에는 정식으로 신도에 가입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지금은 가입한 신도들과 단체 대화방을 통해 꾸준히 소통하고 있으며, 기도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연들이 쌓이면서 사찰 운영 또한 한층 안정되어 가고 있다.
12. 보광사 창건 2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불보살님의 가피와 시주자들의 은혜 속에서 살아온 감사한 나날이었다.
이제는 그 은혜를 자비행으로 갚으며, 남은 생을 회향의 삶으로 살아가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시주와 도움으로 받은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고, 내가 베푼 것은 물 흐르듯 흘려 보내며, 감사하는 마음과 자비행의 실천으로 살아가리라.
매일 아침에 참회하고 감사올리고, 그리고 형편되는대로 나누는 삶으로 회향하리다.
一心盡誠敬(일심진성경), 한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을 다한다는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생을 마치는 날까지 기도와 축원에 최선을 다하리라.
첫댓글
보광사 20년을 만화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불자로서의 20년 인생행로를 글 하나에 담았네요..
스님의 진심을 보는 듯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늘 좋은 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