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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순종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하는 달☜
생명의 양식(진리의복음)을 등한히하면, 사탄에게 영생(永生)의 기쁨을 빼앗기게 됩니다.
눅15:17-32절) 돌아온 탕자(蕩子)
이 세상의 인간관계 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 父母와 子息관계입니다. 자식은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식입니다. 만약 자식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집을 나간다면, 부모는 그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Ⅰ.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회개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세상 욕심 때문에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이 자신의 비참한 모습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회개(悔改)일 것입니다.
회개(悔改)라는 것은 자기가 잘못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올바른 위치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 해서 다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비참한 상태에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후, 아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15:14-16절)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 아들은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탕진하고, 다른 사람 밑에서 무보수(無報酬)로 돼지 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돼지 먹이인 쥐엄 열매도 부족하여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다. 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7절)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 집을 뛰쳐나와서 열심히 노력하면, 굉장한 부자(富者)가 될 줄 알았는데, 실상은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보다도 못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진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를 객관적(客觀的)으로 판단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恩惠)입니다.
그러나 호4:14절)........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3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 마음에 성령이 임하실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하고, 병든 모습인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둘째.아버지 앞에서 행동한 것이 잘못이었다. 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8절)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왜 이 아들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까? 그는 겸손하게 아버지의 교훈(敎訓)을 귀담아 들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통해 아들을 가르치고, 통제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교만하여 아버지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뜻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아버지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拒逆)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이 세상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것이 큰 죄(罪)입니다.
인간에게 죄(罪)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큰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세상 모든 것들의 주인(主人)이시므로 감히 늘 감찰(監察)하시는 그 앞에서 죄(罪)를 범할 순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여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거역(拒逆)하면서, 무한정으로 돈만 벌려고 애를 씁니다.
딤전6:10절)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셋째.작은 아들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 했습니다.
19절)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존심(自尊心)이었습니다. 즉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전에 큰 소리를 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쫄딱 망했으니, 도대체 무슨 낯으로 아버지께 가겠습니까?
그러나 이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가 행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는 더 비참해질 것을 알았습니다. 이 아들은 지금 아버지가 마음이 상하셨고, 자기가 돌아가서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자식으로써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자기가 전에 가졌던 신분(地位)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했고, 자기 욕심을 따라 아버지 유산을 미리 다 챙겨서 집을 떠날 때는 이미 자신의 신분(身分)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회개(悔改)란 성령님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의(義)로우심과 자비(慈悲)하심을 믿었기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무조건 받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버려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존심(自尊心)입니다. 찬송가 273장 *나 주를 멀리 떠났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요, 내가 비참한 중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회개가 시작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으나,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心情)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비참한 상태에 있어도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복음(福音)을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福音)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죄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선포(宣布)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복(福)된 소식이 복음(福音)입니다.
Ⅱ.나간 자식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놀라운 것은 비록 집을 나간 아들이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잊지 않고 항상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O절)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부분은 우리들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감히 아버지를 무시(無視)하고, 돈을 챙겨서 달아난 아들을 용서할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惻隱)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유는 자기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하나님을 대적(對敵)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실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죄인(罪人)들이 돌아오기만을 언제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가 525장 *돌아와. 돌아와*
사실 아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아버지 집에 있을 때의 행복했던 기억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의 품꾼들은 아무도 굶주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의 양심을 노크(knock)하는 부르심입니다. 또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고,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복음(福音)을 듣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방탕하게 살면서 지은 모든 죄(罪)를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告白)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입술로 자백(自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섭섭하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지, 굳이 말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더라도 입으로 자백(自白)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다윗 왕은 전쟁을 수행하던 중, 충신(忠臣)의 아내(밧세바)와 간음(姦淫) 죄를 범하고, 그의 남편(우리아)를 전쟁에서 전사(戰死)하도록 한 죄를 범한 후,
시32:3-4절)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이때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5절)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절)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어떻게 대(對)하셨습니까?
22-23절)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온 이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여기서 좋은 옷이란 *새로운 신분*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종이 아들이 될 때, 새 옷을 입혔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종이 아니라, 아들의 지위(地位)를 얻게 됩니다.
롬8:15절)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靈)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靈)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또 발에 신을 신게 했습니다, 발에 신이란 *죄에서 자유*의 표시입니다. 고대에는 노예나 종은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들에게는 발에 신을 신기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가락지 끼웠습니다. 가락지(斑指)란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의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반지(斑指)가 도장(圖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이 아들에게 지위(地位)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특권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믿고 부르고, 우리들에게 아들의 지위(地位)와 특권을 주셨습니다. 즉 그(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할 지위(地位)와 특권(特權)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14:13절)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약속(約束)하셨습니다.
그러면 집을 나간 이 탕자는 누구일까? 이는 타락(墮落)하여 하나님의 법도(法度)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말씀으로 초청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約束)하셨습니다.
요1:12절)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던 자들이었습니다. 즉 우리는 영적 사생아(私生兒)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허여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영적 출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천국(天國)의 주역(主役)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탕자 때문에 덩달아 믿게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잔치로 말하면 *초대받지 않은 자*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엡2:12-13절)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4절)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엡2:1절)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이 탕자의 잘못한 것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그(탕자)의 못된 것들은 다 지워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의심(疑心)을 줄 때, 우리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 믿을 때, 한 번 죽었고, 또 나의 모든 죄가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다시 죄(罪)로 책잡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손가락에는 하나님의 자녀(子女)라는 표(斑指)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받고. 또 우리의 발에는 신이 신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예(종)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을 하라* 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가장 멋진 의(義)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신 옷입니다. 우리가 많은 것들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돌아온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요, 하나님의 축복(祝福)인 것입니다.
Ⅲ.불평하는 큰 아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 *형과 동생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 중 제2부입니다. 즉 제1부는 *잃은 아들의 비유*라면, 제2부는 동생이 돌아온 것을 보고 화를 내며, 불평하는 *큰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동생이 방탕 생활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이 아들을 환영하고, 축하 잔치를 한 사실을 듣고, 굉장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큰 아들이 동생이 돌아왔을 때, 기분이 나빠했던 것이 무엇일까?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큰 아들은
①방탕 생활하던 동생이 환영을 받는 것은 공의(公義)가 아니라. 는 것입니다.
15:25-28절)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죄를 지은 자는 벌(罰)을 받아야지 환영받으면, 그동안 바르게 살려고 애 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즉 그동안 자기는 헛고생만 한 것이 아니냐? 는 것입니다.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가출한 동생이 다시 돌아오면, 자기 몫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타당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재산(財産)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동생이 아무리 많이 가져갔더라도 형의 몫은 결코 줄어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두 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여는데, 밭에서 일하던 큰아들에게 알리지 앓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큰 아들이 모르고 있다가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기뻐하지 앓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큰아들에게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큰아들은 크게 화(禍)가 나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기쁨의 잔치에서 스스로 소외되어 기뻐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둘째. 큰아들은 아버지가 공정(公正)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15:29-30절)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불공평(不公平)하다는 것입니다.즉 아버지의 재산(財産)을 가지고 창녀(娼女)와 방탕하게 생활한 동생은 벌(罰)을 받고, 굶주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고 착하게 산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라도 주지 않은 아버지가 죄를 지은 아들은 환대(歡待)하고, 송아지까지 주시는 것은 의(義)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가진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인과응보(因果應報)법칙이었습니다. 즉 의(義)롭게 산 사람은 복(福)을 받고, 죄(罪)를 지은 사람은 심판(審判)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罪人)을 영접(迎接)하고, 환대(歡待)하시니, 하나님이 불의(不義)하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그는 아버지를 오해했습니다. 즉 자식이 죽도록 밭에 가서 일을 해서 수입이나 좀 더 올리는 것을 좋아하시는 아주 이기적(利己的)인 아버지로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일을 잘하는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 모두 다 아버지에게 반항적이고, 아버지를 닮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즉 큰아들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아버지를 멀리했고, 또 작은 아들은 노골적으로 아버지께 반항적으로 아버지를 멀리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더 아버지를 멀리했을까? 물론 재산(財産)을 챙겨서 집을 나간 아들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버지를 거역(拒逆)한 것은 두 아들 모두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했다면, 큰아들은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세리나 다른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많이 불순종했습니다. 아예 보란 듯이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불순종하는데, 아주 지능적(知能的)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宗敎的)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하나님 앞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 죄였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인(罪人)인 줄 아는 자와, 죄인(罪人)인 줄 모르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이 큰아들의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닮았더라면. 이 잔치를 보고 크게 놀라면서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전혀 기뻐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아버지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작은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화를 낸 두 번째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을 물질적(物質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5:31-32절)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니라”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급(賞給)은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를 늘 가까이 하면서 아버지를 닮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축복(祝福)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인격(人格)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무었을 얼마나 받았느냐? 는 관점에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을 다 가져갔으니, 이제부터 남은 것은 모두 자기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주 오해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무조건 물질적(物質的)인 축복(祝福)으로 환산(換算)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물질적(物質的)인 축복(祝福)을 보고, 자신은 그 이상의 복(福)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祝福)은 하나님을 앓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되고, 더 큰 능력을 받게 됩니다.
마치 믿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credit card)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복(福)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급(賞給)은 하나님을 배움으로 얻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시기(猜忌)하거나 질투(嫉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크기 때문에 동생을 위해서 살진 송아지 한 마리를 잡는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많은 축복(祝福)을 받는다 하더라도 나의 몫이 줄어드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물질(物質)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방탕하게 사는 바람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금전적(金錢的)손해가 있었는지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는 *한 생명(生命)을 천하(天下)보다도 더 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주(宇宙)만물의 주인(主人)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너무나도 부자(富者)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한 생명(生命)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은사(恩賜)를 부어주신다 해도 나에게 올 것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나는 내 것 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의 재산(財産)은 어마어마하게 많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 때문에 큰아들을 잔치에 초청하고 있습니다.
15:32절)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
큰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느라고 아직 잔치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 있습니다. 큰아들이 잔치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큰아들에게는 이런 잔치가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당연히 잔치에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던 큰아들은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과 잔치를 하면, 체면(體面)이 깎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감사함으로 먼저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천국(天國)백성이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주역(主役)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主人公)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종교적(宗敎的) 의인(義人)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罪人)임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사모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작은 은혜(恩惠)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신은 똑똑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시시한 은혜를 받을 생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천국(天國)에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큰아들은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아버지를 닮지 않았으냐? 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큰아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감사(感謝)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날마다 성숙하려면,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늘 감격(感激)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 감격(感激)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아무리 목사(牧師)나 장로(長老)가 된다 해도 전혀 하나님의 닮지 못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존 뉴톤』이 지은 찬송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찬송을 항상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존 뉴톤』은 *나는 영원히 멸망(滅亡)할 수밖에 없는 죄인(罪人)이었는데, 하나님이 크신 은혜로 구원을 주셨다*고 찬송했습니다.
『존 뉴톤』은 아주 어린 시절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는데, 여섯 살 때, 고아가 되어 기독교 가정이 아닌 친척집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기독교가 놀림을 받고, 그는 핍박을 받게 되어, 이런 가정환경에서 탈피하기 위해 그는 바다로 도망쳐 영국 해군의 견습 선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떠나 아프리카로 달아났고,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인 노예상인과 협력하였으나 그의 집에서 매우 잔인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젊은 뉴톤은 이 같은 대접을 피해 해안으로 달아나 구조를 요청하는 불을 피웠고, 마침 영국으로 돌아가던 노예 선에 발견되어 그 배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조차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항해 중에 그는 럼주를 보관해둔 창고에 몰래 들어가, 그것을 선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 취하게 되었습니다.
인사불성이 된 그는 바다에 빠지게 되었고, 선원 중의 한 사람이 작살로 그를 찔러 건짐으로써 겨우 익사 상태에서 구조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의 넓적다리에는 주먹 크기의 흉터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톤이 타고 있던 배가 스코틀랜드 근처에서 항해가 거의 끝날 무렵 큰 폭풍을 만나 배는 항로를 벗어나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배가 가라앉아 물에 빠져죽고 말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때 그는 어린 아이였을 때, 배웠던 생명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생명의말씀들을 떠올렸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이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존 뉴톤이 다음의 찬송가를 지었습디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구원은 그것을 받을 만한 공로가 없는 이에게 그러므로 바로 당신과 나에게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항상 이런 감격(感激)이 있어야겠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로 인해 큰아들을 초청합니다. 이것은 *이제 너도 정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지금이 바로 너 자신이 깨져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 갈 때, 아마도 자기 자신이 결혼하던 때를 생각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큰아들은 작은 아들의 잔치를 보면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봤어야 했습니다.사실 큰아들도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단지 동생은 몸으로 떠났고, 형은 마음으로 퍼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은 이제 동생처럼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초신자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罪人)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둘째 아들을 보면서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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