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부(2) † 여섯 번째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다윗의 열쇠(계3:7-13)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좋은 지식은 없다. 이것이 바로 요한 서신의 요점이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요한일서 2장 13절은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그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태초부터 계신 그분을 아는” 아버지(아비)들은 사람들에게 진실된 그리스도가 과연 어떠한 분이신지를 말해 줄 수 있으며, 그들은 그분께서 거룩하시고 진실하심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기이하고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그 처음부터 계신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의 순수함으로 돌아가 그분이 성경에서 어떠한 그리스도인지를 아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의 필요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결코 교회 역사와 오늘날의 세대에 의해 발명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신 분이다. 만일 우리 마음이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면, 우리가 현재 사랑하는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우리를 맞으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진실로 기록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다른 살아 있는 그리스도는 없다. 누구나 그분이 계시하신 진리에 순복하고 또 그분을 가까이하지 않고는 그분이 미워하시는 죄악으로부터 분별되어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분별시키며 또한 온전케 하기 때문이다. 거룩은 진실 앞에 있다. 많은 때 진실은 있지만 거룩은 자주 잊어버린다.
만일 어떤 믿는 이가 진리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것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믿는 이는, 일의 진상을 분별하고 알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야 함에도, 현실은 잠시도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
이럴 때 그의 양심은 아마 활동은 하겠지만 도리어 혼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믿는 이들도 주님을 따르기보다 사람을 따른다. 그렇지만 주님은 거룩이 진리의 보증이라고 여기신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말한다.
교회가 세상에 속하고 황량할 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새롭게 생명을 얻게 하여 그들의 태도를 바꾸게 하겠는가? 주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주 예수님의 신분은 이 책에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전반부에서는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보여 주셨고, 후반부에서는 세상을 떠나신 주님이 주신 보혜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셨다.
이 책은 시작부터 우리에게 모든 것이 흑암이라고 말한다. 곧 “비록 참 빛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이 빛이 바로 사람들의 생명이다.” 인간 세상의 황량함이 어떤 지경에 달할지라도, 주님 자신은 여전히 빛이시며 여전히 생명이시다. 비록 사데 교회에도 행위가 정결한 사람이 있었지만, 여러 일들에서 모두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완전히 그리스도를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 죄악은 그분을 가로 막지만, 그분은 지금 도리어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다. 무릇 그분을 보고 안 사람은 다 기쁨으로 그분을 섬길 것이다. 빌라델비아 믿는 이들의 특징은 비록 그들에게 큰 역량은 없지만 주님 자신과 아주 친밀하다는 것이다.
요한 서신 안에서의 아비(아버지)의 특징은 바로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이다. 현재 빌라델비아 안에서는 비록 모두가 적은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그분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여기서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지, 결코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비록 오늘날의 시대는 요한 서신의 때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미 황량하여졌고 악한 영이 곳곳에서 설쳐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가까이하는 것만이 오히려 모든 위험으로부터의 보장이다.
물론 우리는 초대 교회의 능력과 은사를 회복하는 것이 소망 없는 일이라고 느끼며 안다. 그러나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성이다. 우리 믿는 이들은 비록 모두 실패했을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단순하고 깨끗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5: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요일2:20). 이 거룩하고 참되신 분이 교회의 실패의 날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이 말씀은 계1:18절의 그분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다윗의 열쇠”란 무엇인가? 창세1:26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가지고 그분을 대표할 수 있도록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성전은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그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쥐고 있던 열쇠는 하나님의 전체 통치권에 대한 열쇠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온 우주, 특히 인류를 포함한다. 이 통치권은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위해 전쟁을 치르고 성전을 위해 준비물들을 마련했던 사람에 의해 소유된 열쇠이다. 이 사람의 이름이 다윗이다.
외관상으로는 성전이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지만, 사실은 다윗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성전 건축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땅 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의 열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의 예표일 뿐 실제는 아니었다. 참 다윗은 그리스도, 곧 더 큰 다윗이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 곧 개인적으로는 믿는 이의 영 안에, 그리고 단체적으로는 교회를 지으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웠던 분이다. 더 큰 다윗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곧 참 성전을 건축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이 왕국, 곧 그분이 하나님을 대표하기 위해 전권을 행사하는 통치 영역을 세우셨다. 이처럼 그분은 다윗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다윗의 열쇠는 하나님을 위해 온 우주를 열 수 있도록 하나님을 대표하는 그 무엇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쥐고 있는 다윗의 열쇠이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심을 상징한다. 그분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분이시요, 하나님의 지배 영역 안에서 모든 것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이라고 말한다. 이사야22장 22-24절은 다윗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다. 이사야 22장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집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은 결국 새 예루살렘에 대해 말한다. 빌라델비아에 있는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성전은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확대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 22절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왜냐하면 영원 안에서는 성전이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은(21:16) 지성소의 확대판인 성(城)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이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열쇠를 쥐고 계시고, 하나님을 위해 전쟁을 하시고,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서 열고 닫으시는데, 이는 우리가 거룩하거나 신령하게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건축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은 이른바 거룩함이나 영성을 주의하지 않으신다. 거룩함과 영성은 둘 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기둥들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거룩함이나 영성의 이름이 아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거나 신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 예루살렘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를 거룩하거나 영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어 건축될 수 있도록 우리를 다루시기 위해 다윗의 열쇠를 쥐고 계신다.
주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주관하시는 것은 바로 믿는 이들의 주가 되시고 왕국의 왕이 되시기 위한 것이다. 주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주관하시는 것은 바로 믿는 이들의 부활의 주가 되시고 왕국의 왕이 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음부의 문은 그분의 의도와 권위에 따라 닫힌다.
예수님은 음부를 다스리시고 사망의 권세를 잡은 사탄을 이길 완전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연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그분을 필요로 하게 한다. 우리는 무력하고 문조차 열 수 없지만,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문을 열어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광활하고 제한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곳은 우리의 목적지인 새예루살렘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