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절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열반 후의 부처가 아닌 아내와 아이와 손을 잡고 있는 인간 고마타 싯타르타 태자의 일대기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스리랑카인들의 조상인지도 모르겠다. 다고바에 많이 조각되어 있는 볼이 오동통하고 팔다리가 짧은 사람들. 하,안 언니 머무는 민박집의 딸래미가 딱 요렇게 생겨 조각 속에서 튀어나온줄 알았다고 했다.

신발 속에 갇혀있던 발이 모처럼 해방되어 맨바닥의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수 있어 참 좋았다. 덧버선과 물티슈로 무장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사모님들이다. 난 맨바닥이 좋던데, 사람마다 다른가보다. 생로병사, 윤회를 나타내는 문스톤 위에 선 막내



종교가 현실을 회피시키는 아편일지 몰라도, 스리랑카 사람들의 신실함은 나까지 경건하게 만든다. 맨바닥에 앉아 경을 읽는 처녀들의 옆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마지막 남은 폴라로이드 필름으로 인화하여 처녀들에게 전했더니 많이 기뻐했다. 나도 기뻤다. 처녀들을 사원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헝클어진채 콜롬보를 떠났을 것이다. 정말 고맙다.

막내도 처녀들처럼 오래 오래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달동안 무방비로 노출됐던 덕지 덕지 낀 기미와 흰머리 때문에 막내는 자신의 옆모습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예쁜걸.

칼피티야에서 자전거 타다 넘어진 상처는 아직도 자국이 있고, 콜롬보의 살인적 매연이 시커멓게 다리에 내려 앉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을만큼 너무 힘들고, 콜롬보에 실망했었다. 사기꾼에 공해에 소음에 거지에... 그런데 강가라마 사원의 처녀들이 모든걸 치유해줬다.
<너무 복잡한 콜롬보에 조금은 실망, 여기오니 다시 행복한 마음 새록새록, 또 다시 감사함을 느끼게 합니다.> 막내가 먼저 썼다. 나도 처음으로 뭔가 쓰고 싶어졌다.
<한 달간의 스리랑카 여행의 마침표를 이곳 강가라마 사원에서 찍었다. 복잡한 콜롬보와 사람에 잠시 멀미를 냈으나, 이곳에 오게되어 행복하고 감사하다.> -2012.01.24(화)
스리랑카 콜롬보 강가라마 사원
강가라마란 물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으로 1885년 스리랑카 불교 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웨 스리 나야카 스님에 의해서 세워진 사원이다. 히카두웨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맥이 끊어져 타이, 버마 스님들로부터 수계를 받는 굴욕적 사건을 경험한 뒤,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벌이신 분이다.
그는 1873년 남부 해안지에 학교를 설립해 단지 7명 밖에 안 되는 학생들에게 불교 철학, 산스크리트, 팔리어 및 스리랑카 전통문화를 가르친다. 그리고 학비를 전액 지원하는 학교를 콜롬보에 설립하여 스리랑카 불교의 전성기를 이끈다.
만년에 그가 머물고 경전을 간경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강가라마 사원은 비록 역사는 100여 년 밖에 안되었지만 꺼져가는 스리랑카 불교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던 모태가 되는 성스러운 장소이다. 현재 이곳엔 대법당과, 역대 조사스님들의 흉상과, 유물이 보존된 박물관, 그리고 부도탑과, 세계 각국의 귀중한 불교 문화재가 소장된 보물관이 있다.
이 보물관에는 성스러운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매년 2월 보름날 ‘나밤 페라헤라’라는 큰 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기간 중에는 캔디의 페라헤라 축제처럼 코끼리 등에 부처님 사리를 얹고 시가 행렬을 벌인다. -인터넷 자료를 정리함
첫댓글 사원에서 마음이 많이 회복되었나 봐요..^^
사원 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문스톤의 문양이
선명하게 보이네요..
생로병사, 윤회의 한 모퉁이에서
어떤 것이 가치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 스스로의 자정능력이 사원안의 경 읽는 소리에 반응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멋진 여행을 해놓고 짜증이라니 하는 알아차림? 그땐 싸띠를 모르던 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