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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제목에 꽂혀 산책이다. 고대사에 관한 이런 명제형 제목은 내 눈길을 잡는 경향이 있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겨레 구성과 그 겨레들의 이합집산과 이동에 관한 내용의 책들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런 내용의 상상을 할 때는 언제나 즐겁다.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은 사실은 저자가 생각하는 일반적 내용을 중국의 대표적 인물을 예로 들어서 만든 명제일 뿐이다.
저자는 고대에 중원은 한어(漢語)의 조상어를 쓰던 종족(민족으로 표현하기도 정확하지 않고 앞으로는 ‘겨레’라는 표현을 쓴다.)들만 산 것이 아니라 알타이 어족 중 퉁구스어족, 몽골어족, 투르크어족의 조상들도 중원에서 살며 혈통과 언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본다. 그 후 이들 알타이어족 겨레들은 중원을 떠나고 남은 겨레들은 한어의 조상어의 어족으로 흡수된 것이라는 이론이다.
저자는 지명, 인명을 분석해서 진시황의 진나라가 출발한 지역 역시 퉁구스어족의 조상 겨레, 몽골어족의 조상 겨레들이 살던 지역인데 혈통학적으로는 퉁구스어족의 조상 겨레의 혈통이 강하고, 주변 환경을 볼 때 언어는 몽골어의 조상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데 이것을 책의 제목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북방아시아의 모든 겨레들은 중원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이 책을 번역한 이는 중원이 북방아시아 겨레들의 지배를 받았다고 봐야 하는데 중국인답게 중화주의적 사고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저자는 고대의 문헌에 있는 한자를 의미로만 해석하려는 한계에서 벗어나 고대 북방민족의 언어를 음차해서 적었다고 보는 시각으로 사고를 전환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일부 내용은 상당히 가능성이 많은 내용이라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저자가 인명, 지명 등의 발음에 존재하는 작은 유사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자신의 논리를 펼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또 어느 민족의 조상 겨레에 대한 연구는 언어 외에도 고고학적 근거, 문화 전승, 유전자 구성 등 여러 증거들이 종합되어야 하는데 언어만 가지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론을 한 가지 제안으로 받아들인다면 인류학 연구의 아이디어로서의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고대의 문헌에 있는 한자를 음차 한 것으로 보고 풀어보는 방식은 권장할 만한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 중에 솔깃한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한다.
사기 오제본기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한다. “태사공이 말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이 오제를 거론하는 일이 많은 것은 (그들을) 추앙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상서’에서는 요 이후만 수록하고 있고, 백가에서는 황제를 언급하면서도 그 문장이 아름답지도 입에 맞지도 않은지라, 학자나 사관들도 말하기를 꺼린다.
太史公曰 學者多稱五帝 尙矣 然尙書獨載堯以來 而百家言黃帝 其文不雅馴(訓) 薦紳先生難言之”
라는 문장을 저자는 아순(雅馴)을 아언(雅言) 곧 중국인이 자신들의 한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그래서 오래된 문헌은 당시의 학자들조차 아언 즉 중국어가 아니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아(爾雅)라는 문헌에 “재(載)란 세(歲)를 말한다. 하나라 때에는 세(歲)라고 하고, 상나라 때에는 사(祀)라고 하며, 주나라 때에는 년(年)이라고 했으며, 당우(唐虞) 때에는 재라고 한 것이다.-載歲也夏曰歲商曰祀周曰年唐虞曰載-”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표현을 해(year)를 나타내는 북방민족의 현대어 발음과 관련지어서 추정한다.
오늘날 몽골어에서 해는 ziil(지일)이므로 이와 유사한 발음의 재(載)라고 표현한 당우 시기의 주도 세력은 몽골어의 조상어를 쓰던 겨레, 오늘날의 만주어에서 해는 anen(아넨)이니까 이와 유사한 년(年)이라고 표현한 주나라의 주도 세력은 만주어의 조상어를 쓰던 겨레, 또 만주어에서 해를 ser(세르)라고도 하므로 이와 유사한 발음인 사(祀)라고 표현한 상나라(은나라) 시기의 주도 세력은 만주어의 조상어를 쓰던 겨레, 오늘날 볼가강 유역의 추와시족은 해를 sul(슬)이라고 하는데 이와 유사한 발음인 세(歲)라고 표현한 하나라의 주도 세력은 추와시어의 조상어를쓰던 겨레라고 보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고려를 숙량합(肅良合)으로 불렀다. 명대의 등단필구(登壇必究)의 몽고역어(蒙古譯語)에서는 쇄롱혁(瑣瓏革)이라고 했다. 현대 몽골어에서는 한국(북한 포함)을 Solongho(무지개라는 의미)라고 부르는데 위의 숙량합, 쇄롱혁은 솔롱고의 음차일 것으로 본다. 청나라의 팔기만주씨족통보에 등장하는 인명 중 살랑아(薩郞阿), 색릉아(索凌阿)는 숙량합의 또 다른 전사형태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공자의 부친 이름이 숙량흘(叔梁紇)인데 이 역시 무지개란 의미의 동호-선비-몽골족의 솔롱고에 해당하는 말을 음차한 것일 것으로 보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어종(語種)의 대량 소멸로 상고시대 족명의 원래의 의미는 상당수 잊히고 말았다고 본다. 과거 동북아시아의 겨레 이름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독음과 의미가 다 온전하게 남은 족명은 애신(愛新, 금), 몽고(蒙古, 은), 질노(叱奴, 늑대), 호연(呼延, 양), 질라(叱羅, 돌) 등이고, 족명의 의미만 전해지는 경우로는 임호(林胡), 산융(山戎), 황우(黃牛), 백마(白馬) 등이 있으며 의미는 알 길이 없고 발음만 남은 경우로는 돌궐(突厥), 선비(鮮卑), 여진(女眞), 화하(華夏)족 등이 있다고 본다.
각 겨레의 이름을 한자가 차음을 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설명이다. 또 과거 중국에는 두 자의 한자로 성씨를 쓰는 복성(復姓)이 많았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 77명의 성씨를 봐도 상당수가 복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복성은 상당수 없어지고 거의 한 자로 표시하는 성씨로 바뀌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원래 성씨가 자신의 출신 부족명의 발음을 차음한 경우가 많았는데 - 공손씨는 오손족(烏孫族), 하후(夏候)씨는 회흘족(回紇族) 등 - 중원 지역이 차츰 한어를 쓰는 사람들 위주로 재편되면서 단음절을 특징으로 하는 한어에 맞춰 자신의 성씨 두 자 중 한 자를 버리거나 의미를 찾아 한 자로 된 다른 성씨로 바뀐 것으로 본다.
저자는 이 외에도 한자의 고대 발음을 참고로 해서 고대의 여러 인명, 지명을 북방민족의 겨레명과 연결하는데 언어학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언어-역사-고고학자들이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아이디어는 될 수 있을 것 같고 그 과정에서 찾아낸 중국의 인명, 지명 자료들과 몽골어, 만주어, 투르크어의 어휘들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서문은 주책종이라는 대만의 학자가 썼는데 서문에서 소개한 그의 이론도 재미있다. 갑골문자의 족(族)은 깃발 아래 한두 개의 화살이 더해진 모양이라고 한다. 따라서 겨레(族)라는 개념은 가족, 씨족을 중심으로 한 군사조직이라는 것이다. ‘만주족의 청제국’에서 만주족의 중국 통치 방식이 팔기(八旗)라는 군사, 행정 조직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팔기의 기(旗)라는 말이 깃발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하부조직이 니루(Niru)라는 조직이다.
만주족은 300명을 하나의 niru(牛錄)로 편성했는데 niru는 만주어로 큰 화살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갑골문자에서 겨레(族)란 최고 통치자로부터 화살을 받은 사람이 다스리는 단위라는 의미다. 구당서 돌궐전에 “그 나라는 열 개의 부락으로 나누고, 각 부락은 한 사람이 통솔하는데, 이를 열 명의 설(十設)이라고 한다. 각 설에게는 화살을 한 대씩 하사했기 때문에, 열 대의 화살(十箭)로 부르기도 하였다. … 그 후부터 때로는 화살로 부락을 지칭하기도 했는데, (이 때) 큰 화살은 대수령을 가리킨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최고통치자가 하부 통치자에게 신임의 표시로 화살을 하사한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공통된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이 부분은 일본에 있는 칠지도가 백제에서 하사했는지 상납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이 화살이란 말의 우랄-알타이어족의 언어별 발음을 찾아보면 헝가리어는 nyil(뉘일), 헝가리어에는 nuoli(누올리), 에스토니아어에서는 nool(누울), 만주어 niru(니루)라고 한다고 한다.
저자는 원래 물리학자였다. 어떤 일을 계기로 몽골 대사관의 참사관으로부터 헝가리어와 몽골어가 유사하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영-헝 사전과 영-몽 사전을 비교하던 저자는 완전히 일치하는 단어들이 수백 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를 발표하려던 저자가 다시 우연한 기회에 금사(金史)를 읽게 되었는데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있던 77개의 여진어가 몽골어보다 헝가리어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마자르(Magyar)족의 족명이 여진-만주족의 조상인 말갈족(靺鞨族)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1997년 ‘마자르족 극동 시원론’을 완성하면서 역사 연구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전환하였다고 한다.
책에는 저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1986년 헝가리 학자가 우루무치에서 동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곳에서 1,200기에 이르는 묘지를 발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출토물들이 9~10세기의 헝가리 묘장품들과 유사했다고 한다. 무기의 배치, 매장의 방식, 문자 사용방식이 모두 일치했다고 한다. 감숙성에 소재한 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9,000명 정도의 유고족이 있는데 민요 73곡이 전부 5음계로 구성되어 있고 이 유고족의 무당이 사용하는 주문은 11세기 이전 기독교로 개정하기 전의 헝가리에서 널리 행해지던 것이라고 한다. 헝가리도 아시아 국가들처럼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뒤에 쓰며, 주소도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국가-도-도시-동네-집의 순서로 쓴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갈족의 일파인 마자르족의 유럽 이동을 저자는 고구려-당나라 전쟁이 기원이 되었다고 본다. 고구려와 함께 당나라와 싸우던 말갈족은 최종적으로 당나라에 패한 후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200년이 지난 유럽에 도착했다고 본다. 원래 마자르족은 아시아 겨레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언어학적 접근으로 말갈족이 그 기원이라고 본 저자의 발상에 감탄을 하면서도 그 이동 과정에 대한 해석에는 찬성하기 힘들었다. 고구려 멸망 후 말갈족은 발해 건국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말갈족이 만주에 남아 발해 건국에 참여했는데 유독 마자르족의 조상들만 유럽까지 먼 길을 간 데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할까? 차라리 발해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망한 후 서쪽으로 진출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말갈족은 내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겨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 보면 백제와 신라에 시도 때도 없이 말갈족이 쳐들어온다. 중국 역사서의 표현대로라면 고구려 북쪽에 있어야 할 말갈족이 어떻게 백제와 신라로 쳐들어왔을까? 여러 가설이 성립할 수 있겠다. 말갈족이 고구려를 구성하는 한 분파로 고구려의 지시에 따라 쳐들어왔을 가능성, 말갈족이 한반도까지 분포하고 있었을 가능성, 말갈족이 빠른 기동력으로 고구려의 정규군이 없는 지역을 통해 왔을 가능성, 백제와 신라도 당시에는 만주에 존재했을 가능성(적어도 신라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대당 전쟁에서 말갈족은 왜 그렇게 고구려 편을 들어 당나라와 싸웠는지 의문이다. 당태종이 쳐들어왔을 때 안시성 싸움에서는 군사의 수도 고구려 정규군보다 많았던 것 같다.
말갈족이 너무 열심히 싸운 나머지 당태종은 고구려 포로는 살려주었어도 말갈족 포로들은 학살했다고 한다. - 저자는 당태종이 (양만춘이 아닌) 말갈족의 화살에 맞았다고 이해하고 있다. - 저자는 마자르족이 말갈족 마가(馬加)의 후손이라고 보는데 혹시 말갈족이 고구려를 구성하던 5부 중 한 부족은 아니었을까?
요즘 헝가리가 재정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저자의 생각대로 헝가리 주민이 말갈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면 우리 민족과도 상당한 양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고 봐야 한다. 이를 외교나 무역에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고구려와 발해의 많은 주민이 우리 민족의 구성에 기여하였고 그 중에는 당연히 말갈족도 많았으니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헝가리 주민들과 우리 민족은 혈통적으로 아주 가깝다. 터키가 단지 동북아에서 살았고 한때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하물며 같은 고구려의 후손들끼리야 더하겠지. 삼성이나 현대에서 이것을 이용해 한-헝 공동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면 가전제품과 자동차가 대박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난 “산동 반도까지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식의 고대사에 대한 일부 이론을 믿지도 않고 그리 관심도 없다. 하지만 이런 역사 이론과는 별개로 “산동 반도 일대가 고대에 동이족이 주로 살던 영역이고, 은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 정도의 이론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고고학적 발굴들은 홍산(紅山), 하가점(夏家店), 삼성퇴(三星堆)의 고대 문화 유적들, 진나라의 발상지인 감숙성(甘肅省), 장가천(張家川)의 고대 유물 등이 있다. - 동이족이라면 알타이어족 중에 퉁구스어를 쓰던 겨레들의 조상에 해당하는데 이들 중 절대 다수는 말갈-여진-만주족으로 내려오는(물론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축이라고 생각한다.
대당 전쟁의 기록을 살펴볼 때 고구려의 구성 겨레들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겨레는 말갈족이었다고 봐야 하는데 말갈족이 이 축의 중심이었고, 부여를 구성하는 겨레들이 말갈족과 구별되는 겨레였는지(숙신 등) 동일한 겨레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여의 경우도 지리적, 문화적 양상으로 봐서 말갈-여진-만주족의 조상 겨레가 세운 나라라고 보는 것이 과학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읍루족도 이 축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본다. 고조선도 조선이란 표현이 숙신(肅愼, 쥬신, 여진 등과 유사 발음이라고 한다.)이란 겨레 이름을 한자로 음차를 하고, 음차를 하면서 좋은 뜻을 골랐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역시 이 축의 겨레가 중심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이 동이족의 유전자를 상당히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동이족의 일부였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민족의 혈통적 조상은 말갈-여진-만주족의 축으로 내려온 겨레와, 퉁구스계 언어를 쓰던 동이족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삼한의 겨레(들), 이 두 축이 우리 민족의 주요 조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알타이 어족 중 몽골어족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선비족 계열이나, 한어를 쓰던 남방계 혈통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고 극소수의 다른 혈통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나도 평소 고대사와 관련지어 생각하던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신라의 거서간(居西干), 마립간(麻立干) 같은 호칭은 동북아시아의 몽골어 계통이나 투르크어 계통에서 공통적으로 쓰던 군장의 호칭인 ‘칸’ 앞에 수식어를 붙인 것이라고 본다. 징기스칸이 전 세계의 군주란 의미이듯이 거서간이나 마립간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혹 거서간은 크신 칸, 마립간은 마루(최고) 칸이란 뜻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많은 부장품을 껴묻은 왕릉들은 거서간, 마립간이란 호칭의 왕들 시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민족 조상의 주류에 관한 유전학 연구는 북방계라는 설과 남방계라는 설이 대립한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거서간, 마립간이란 호칭을 쓰던 시대의 지배세력은 북방계임이 확실하다.
평소 생각하던 다른 생각을 소개하면 중국 사서에서 흉노족의 수장을 선우(單于)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이 단간(單干)의 오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북방 민족들이 대부분 자신들의 수장을 칸으로 호칭했는데 유독 흉노족만이 선우라고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선우의 선(單)자도 단(單)자와 같은 한자를 쓴다. 문서가 오가는 과정에서 간(干)의 끝이 휘어지면서 오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다.
위서(魏書) 관씨지(官氏志)에도 간(干)자를 우(于)자로 잘못 적은 기록이 있다고 하니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면 선우(單于)도 결국 단간(單干)이란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조선의 단군과도 비슷한 발음이 되는데 단군도 원래는 단칸이었는데 뒤에 음차를 하면서 좋은 뜻의 한자를 골랐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저자처럼 생각하면 군(君)이란 한자 자체가 원래 북방민족의 칸에서 왔을 수도 있다.
고대사를 소재로 한 대중서적은 이렇게 여러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이런 상상이 역사학자가 쓰는 논문이 아닌데 굳이 사실 여부를 따져가며 증명할 일도 없다. 그래서 혼자 수천 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런저런 상상을 마음껏 할 수 있다. 고대 중원에서 한동안 잘 놀았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