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없이 두들겨 맞아 엉망이 된 얼굴인지라 그 웃음마저
비참해 보였다.
“흠, 네놈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이보게. 집법당
주!”
“예, 가주님!”
당문천의 부름에 허리를 깊게 숙이며 당일기가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자네가 수고를 해 줘야겠네. 이놈이 무슨 목적을 지
니고 왔는지, 어디에 속한 놈이지 자세히 알고 싶으이.”
“알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알았네. 그럼 자네를 믿고 일의 결과를 기다려 보겠네.”
당문천은 허리를 숙이는 당일기를 바라보다 여전히 소문을 노
려보고 있는 당소희를 불렀다.
“소희는 나와 함께 나가도록 하자꾸나. 과히 보기 좋은 장면만
은 아닐 게다.”
“아니요. 저는 이놈이 어떤 말을 하는지 보고 싶습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쯧쯧,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소희의 심기를 건드릴게 뭐
란 말이냐? 알고 있는 사실을 빨리 털어놓으면 혹시 모를까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는 아마 병신은 고사하고목숨 구하기가 싶
지 않을 것이다.’
당소희의 당찬 말에 평소에는 인정도 많고 착하지만 한번 눈에
벗어나거나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에게는 야차(夜叉)와
같이 돌변하는 딸의 성정(性情)을 잘 알고 있는 당문천은 비
록 적이 보낸 첩자였으나 그런 소문이 불쌍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혀를 차며 밀실을 나섰다.
“흠, 가주께서 나에게 모든 걸 맡겼다네. 그건 어떤 방법을 쓰
던지 자네의 입을 열라는 것이지. 하지만 난 자네에게 고통을
안겨 주기는 싫다네. 그러니 서로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진실
을 말해보게. 그래 패천궁에서 왔는가?”
“…….”
“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일은 해결되지 않네. 그건 오
히려 자네에게 고통만 안겨줄 뿐….”
“다시 한번 묻겠네. 패천궁에서 왔는가? 아니면 지옥벌, 음자
문?”
“…….”
소문이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자 부드럽게 말을 하던 당일기의
표정이 점차 살벌하게 변해갔다.
“자네에겐 잠시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 시간을 줄 테니 잠시
생각을 해보게. 언제든지 털어 놓을 마음이 생기면 말을 하게.”
당일기는 검은 천을 소문의 머리에 뒤집어 씌었다.
‘응? 뭘 하려는 것이지.’
그 와중에도 당일기의 행동에 의아심을 가진 소문이었지만 생
각은 오래 가지 않았는데 검은 천을 뒤집어씌운 당일기가 아
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이 소문의 전신을 난타(亂打)하기 시작
한 것이다. 조금 전에 당소희의 매질이 솜방망이라면 당일기
의 매질은 쇠몽둥이였다. 온 몸 구석구석 가리는 곳 없이 전
신을 강타하는 그의 손속엔 거침이 없었다.
“크악! 으악!”
당일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소문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얼마를 그렇게 맞았을까 잠시 매질이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멈추었다 다시 매질을 하기를 수차례. 소문
의 입에선 이제 신음성도 나오지 않았다. 무려 반시진이나 계
속된 당일기의 매질이 멈춘 것은 결국 소문이 정신을 잃은
다음이었다. 당일기는 소문에게 씌웠던 천을 벗기고 준비해 놓
은 물을 뿌렸다.
“크으….”
비명인지 신음성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정신을 차린
소문의 얼굴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런, 내가 얼굴은 피한다고 했지만 그게 잘 안된 모양이군.
쯧쯧쯧, 그래 이제 말을 해볼 의향이 생기는가?”
당일기는 소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안쓰럽다는
듯 말을 했다.
“도,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마, 말이 무엇이…인가?”
소문의 입에 귀를 댄 당일기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터져버린 입술에서 새어나오고 당일기는 회심의 미
소를 지었다.
“오! 이제 말을 할 의향이 생기는 모양이군. 내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자네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네. 어떤가 말을 해 주겠
는가?”
“나, 나는 장백산에서 정혼녀를 만나기 위해 중원에 온 을지소
문이오. 물론 약간의 착…오가 있기는 했지만 당신들이 말하는
첩자는 아니오.”
“닥쳐라! 네놈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차마 악독한 할아버지에게 속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저 자
신의 착각이라 말을 한 소문이었지만 듣고 있는 당소희나 당
일기에는 씨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소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에 발끈한 당소희가 당일기가 미처 만류할 사이도 없이 매질
을 시작했다.
퍽! 퍽!
어차피 죄의 추궁은 시작됐고 당소희의 성격도 익히 알고 있는
당일기인지라 조금 전처럼 만류도 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당소희가 제풀에 지쳐 들고 있던 몽둥이를 바닥에 던질 때까지
매질은 계속됐다. 소문은 그녀의 매질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정신을 잃은 상처였다.
촤악!
또 한번 물이 뿌려지고 눈을 떠도 이미 정상이 아닌 소문이 정
신을 차렸다.
“그러게 거짓을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라 하지 않았나.”
“나, 나는 으…을지소…문일뿐 그 누구도 아…니다.”
“…….”
당일기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굳어졌지만 소문의 말은 계속됐다.
“비, 비러머글 영감탱이… 하…할 짓이 없어 사기를… 크크
크… 하긴 정혼녀라는 말에 좋…다구나 하고 당한 내가 바
보지….”
“뭐라 지껄이는 것이냐?”
“눈을 가리고 두들겨 팬다… 아주 좋더군. 겁도 나고 말이야.
좋은 걸 배웠어. 크크크!”
당소희의 외침에 약간은 정신이 돌아온 듯 아까보다는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한 소문은 당일기를 바라보았다
“훗, 그래? 여유가 있어서 좋구만.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감탄을 하기는 이르지.”
당일기는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소문의 손목을 잡아갔다. 그리
고 또 한번 소문의 고통은 시작되었다.
“하나!”
“크악!”
“둘!”
“크윽!”
숫자를 세는 당일기와 그에 발맞추어 소문의 비명이 들려오고
그들의 발밑으로 이제 막 뽑혀져 나온 손톱이 나뒹굴었다.
“인간의 몸은 말이지.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야. 칼로 난자(亂
刺)를 당하는 것 보다 이렇게 조그마한 것이 다치는 것을 더
고통스러워 하니 말이야.”
“크으윽!”
“게다가 이렇게 몇 가지를 더 첨부하면 효과가 더욱 좋아진다
더군.”
부드러운 웃음을 지은 당일기가 소문에게 보여준 것은 소금이
었다. 바가지에 하나 가득 들어있는 소금을 본 소문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으아악!”
지금까지의 어떤 소리보다 큰 비명을 지른 소문은 바가지에서
손을 빼려고 발버둥 쳤지만 묶여 있는 그로서는 헛된 발악이
었다. 소문의 손을 바가지에 들이밀고 있는 당일기의 얼굴에 어
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옆에서 보고 있는 당소희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소문의 고통을 너무나 당연시 하
는 얼굴로 바라보다 한마디를 툭 내던졌다.
“흥, 빌어도 당치 않을 놈이 감히 어디서 여유를 부리는 것이
더냐.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말투마다 하나 가득 들어 있는 비웃음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났
는지 고개를 숙이며 고통의 비명을 지르던 소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윽! 빌어먹을… 좋다. 그래. 아무리 내가 실수를 했다지만
어찌 사람을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이냐? 크크크! 패천궁의
첩자? 네 년 놈들은 모르겠지만 그들과 나는 이미 처절한 싸움
을 벌인 사이거늘… 크크크, 암왕이라는 영감은 이렇지
않았는데… 그 자손은 정말 멍청하고 독한 인간들만 있었구나
… 크크크! 좋아. 네 년 놈들 마음대로 해 보거라. 하하하!”
더 이상의 비명은 없었다. 이미 감각도 없었지만 더 이상 비참
한 꼴을 보이기 싫었던 소문인지라 이를 악물고 튀어 나오려는
신음성을 목구멍 깊숙히 밀어 넣었다.
당일기의 수법은 점점 잔인하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
로 심하게 그 강도를 더 해가고 있었다. 이미 소문의 양쪽 팔과
손가락은 모두 부러지고 몸 곳곳에 난자된 상처에는 조금의
틈도 없이 소금이 채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소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당
일기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지독한 놈. 이쯤 했으면 무슨 말이라도 하련만은….’
무심한 소문의 눈을 보며 소름이 끼친 당일기는 약간 당황했
다. 사실 말은 그럴 듯 하게 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고문(拷問
)의 수법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사용
할 수법이 남아 있지 않았건만 소문에겐 도무지 통할 것 같지
가 않았다.
‘오냐. 네놈이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안색을 잔뜩 찌푸린 당일기는 밀실에서 나가더니 잠시 후 조그
만 병 하나를 들고 왔다.
“아저씨 그건!”
당일기가 들고 온 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 당소희는 자신
도 모르게 당일기를 불렀다.
“흥, 어쩔 수 없구나. 나도 이것까진 사용하긴 싫었지만 저놈
이 저리 완강하게 버티니 어쩌겠느냐.”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당소희를 비껴서 당일기는 소문
에게 다가갔다.
“소희에게 말을 했지만 난 이것을 사용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
만 네가 이리 버티니 이제 나도 어쩔 수 없다.”
당일기가 병을 기울여 보여준 것은 소문이 처음 보는 자그마한
벌레였다. 연한 나뭇잎 색을 띠고 있는 그 벌레는 조금의 미
동도 없었다.
“네놈에게 이 녀석의 이름까지 알려줄 건 없겠지. 다만 이 녀
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간단하게 설명은 해 주마. 나는 이제
이것을 네 입속에 집어넣을 것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두시진
이 지나 네 스스로 몸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처음엔 아무런 이상도 고통도 없지만 두시진이 지나면 네 몸
속에 있는 영양분을 먹고 알을 낳은 녀석의 새끼들이 부화(孵
化)하여 움직일 터. 그놈들에게 서서히 몸이 갉아 먹힐 것이다
. 그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것. 그렇다고 빨리 죽는
것도 아니라 그런 고통이 삼일 밤낮은 계속 될 것이다. 너무
나 잔인하고 지독한 수법이기에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방
법이지만 가문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라 어쩔 수가 없다. 중
요한 것은 이놈을 한번 집어넣으면 다시 꺼내기가 요원(遙遠)하
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편안한 죽
음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솔직히 말을 하거라.”
약간은 진심이 깃든 당일기의 말에도 소문은 콧 웃음을 쳤다.
“크크, 고양이가 쥐 생각을 하는 구나. 난 쥐가 아니니 고양이
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겠지. 어차피 네놈들 손에서 살수 있
다는 생각을 한 내가 아니다. 벌레보다 못한 네놈들 보다는
차라리 벌레에게 죽고 말겠다. 헛소리 하지 말고 먹이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흠, 어쩔 수 없지. 그리 말을 했건만 이건 네가 자초한 것이
니 날 원망하지 말아라!”
당일기는 한쪽 손에 장갑을 끼더니 병 속에 들어 있던 벌레를
잡아들었다. 벌레는 당일기의 손에 잡혔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한발 두발 조심스fp 소문에게 다가가던 당일기는 갑
작스레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언가에 깜작 놀라 잡고 있던 벌레
를 놓치곤 뒷걸음질 쳤다.
“면피야!”
소문은 언제 쓰러져 있었냐는 듯 당일기에게 매섭게 달려드는
철면피를 보고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날개를 다쳤는지 제대로
날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마치 닭과 같은 움직임으로 당일
기를 공격하는 철면피의 모습은 너무나 처절했다.
“감히 미물 따위가!”
무공이 약한 당일기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
자 옆에 서있던 당소희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하늘의 제왕
이고 많은 약을 먹어 보통의 새와는 다른 힘을 지니고 있다하
더라도 철면피는 한낱 매에 불과 했다. 사람에게, 그것도 당
소희처럼 무공을 익히 무인에게 덤빈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꾸루룩!”
당소희가 아무렇게나 펼친 일장에 소문이 묶여 있는 벽에 내쳐
진 철면피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면…피야….”
어디를 다쳤는지 온 몸이 피로 물든 철면피는 악착같이 움직이
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철면피는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놈의 새가!”
어느새 다가온 당일기는 바동거리는 철면피의 목을 밟더니 처
음 잡힐 때 다친 날개를 분질러 버렸다.
우두둑!
듣기에도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철면
피는 뭐라 소리를 지르는 듯 했지만 그나마 목이 밟혀 있어
밖으로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어디 다시 한번 덤벼 보거라.”
우두둑!
악이 받친 당일기는 그나마 성한 다른 날개마저 분질러 버렸
다. 너무나 힘없이 부러진 날개는 밑으로 축 처져 버리고 철
면피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간간히 가슴께가 부풀
어 오르는 것을 보니 아직은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만, 그만해라!”
첫 번째 날개가 부러질 때 이미 외치기 시작한 소문의 말은 두
번째 날개마저 부러지자 거의 비명에 가까게 변해 버렸다.
“그만 해라. 더 이상 면피를 괴롭히지 마라!”
“호오, 주인과 새의 정리(情理)가 이리 각별할 줄이야! 하지만
내가 네놈의 말을 왜 들어야 하는 것이더냐?”
순간 소문의 약점을 파악한 당일기는 발을 뻗어 죽은 듯이 쓰
러져 있는 철면피의 날개를 지그시 밟아버렸다.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철면피가 고통에 몸부림 쳤지만 그건 당일기의 발아래에
서 꿈틀거림에 불과 할 뿐이었다.
“그만해라. 네놈들이 원하는 것은 다 해줄 테니 이제 그만 괴
롭혀라.”
어느새 소문의 말투는 사정조에 가까웠다. 득의에 미소를 지은
당일기는 철면피를 밟았던 발을 거두고 다시 부드러운 얼굴과
음성으로 소문을 대했다.
“허허, 진즉에 그랬으면 이런 고통과 새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것을… 아무튼 지금에라도 말을 하겠다니 다행이네.”
“…….”
소문은 물끄러미 당일기를 노려보았다.
“험험, 그래 말을 해보게나.”
“그럴 것 없이 네놈들이 궁금한 것을 물어 보거라.”
“그래? 그것도 좋겠지. 그래 너는 패천궁에서 온 것이냐?”
“그렇다고 해 두지.”
“흠, 무엇 때문에 당가에 침입한 것이더냐?”
“훗, 뻔 한 것 아니더냐? 당가를 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감히 네놈들이!”
갑자기 옆에서 듣고 있던 당소희가 당가를 친다는 말에 발끈하
여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참으라는 당일기의 눈빛에 입술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당소희가 물러나자 당일기의 질문
은 계속 되었고 그때마다 소문은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
는 대로 지껄였다.
“흠, 상황이 아주 안 좋군. 역시 예상대로 놈들이 가까이 왔구
나. 빨리 가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구나.”
잠시 후 모든 질문이 끝났는지 당일기는 당소희를 바라보며 만
족스런 웃음과 약간은 긴장한 표정을 동시에 나타나며 말을
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소문을 바라보았다.
“너를 어찌 처분하실 지는 가주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다. 아마
도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그때까지는 편하게 해 주마.”
“아저씨!”
“괜찮다. 저런 몸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그리고 이 곳은 따로
지킬 사람이 있으니 너무 염려 하지 말고 너는 나와 가주님께
가도록 하자꾸나. 빨리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당소희의 만류에도 당일기는 소문을 결박하고 있던 자물쇠와 쇠
사슬을 풀어주었다.
떨썩!
자신을 지탱해주던 자물쇠가 풀리자 소문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버렸다. 그리곤 천천히 기기 시작했다. 마음이야 반장도
안 되는 곳에서 간간히 움직이고 있는 철면피에게 어떻게든
지 빨리 가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 철면피에게 다가가는 순간 당소희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흥, 내손을 이리 만든 놈을 내 가만히 놔 둘 줄 알았더냐?”
“안돼!”
소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소희의 발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퍼억!
공력이 가득 담긴 당소희의 발길질은 소문의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나 쉽게 철면피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한쪽 벽에 날아가
부닥친 철면피의 몸은 말 그대로 피떡이 되버렸다.
“며, 면피야….”
한번의 발길질로 철면피를 절명(絶命)시킨 당소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저씨 저놈의 발톱을 뽑아 오세요. 날카로운 것이 제법 쓸만
하겠군요.”
당소희는 좀 전에 철면피를 격퇴(擊退)시키는 순간에 입은 손
등의 상처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외쳤다. 그런 그녀의 손등에는
세 줄기 상흔(傷痕)이 날카롭게 패여 있었다.
“흠, 알았다.”
당일기 또한 철면피의 발톱으로 인해 목에 깊은 상처를 입은
지라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피떡이 된 철면피에게 다가가 양쪽
발목을 잘라 들고는 당소희에게 걸어왔다.
“네 말대로 제법 괜찮은 물건이 되겠다. 내가 잘 다듬어서 돌
려주마. 이제 가주님께 가자꾸나. 너무 늦었다.”
당소희와 당일기는 바닥에 누워 꼼짝하지 않는 소문에겐 눈길
조차 주지 않고 밀실을 빠져 나갔다.
철면피의 죽음을 본 소문의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주
어렸을 적 자신과 장백산을 헤집고 다녔던 철면피의 늠름한
모습만이 맴돌고 있었다.
‘면피야….’
넋이 나갔던 소문이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
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조그만 동작
에도 전신에 쏟아지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소문은 기어
코 철면피의 곁으로 다가갔다. 벽에 부딪친 멀리는 그 형체
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고 그나마 성한 몸통
에서도 다리는 중간마디에서 깨끗하게 잘려 있어 차마 말을
할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크크크! 꼴좋다. 이 놈아! 그러기에 나서길 왜 나서냐? 멍청
한 놈 같으니… 앞뒤 안 가리고 나서면 내가 좋아할 줄 알
았냐. 행여나 내 입에서 고맙다는 말을 소릴 기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쁜 놈 같으니라고….”
마치 철면피가 앞에 살아있는 것처럼 실실 웃으며 퉁명스런
말투로 지껄이는 소문의 눈에선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내며 땅에 흩어진
철면피의 살점들을 모두 모은 소문은 이미 옷이라고도 할 수
없이 찢어지고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윗옷을 벗어 힘겹게
모은 철면피의 사체(死體)를 수습했다. 그리곤 철면피를 수
습한 옷가지를 품에 안고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너는 결국 죽은 것이구나! 이제 다시는 여행(旅
行)도, 사냥도 함께 할 수 없는, 넌 그렇게 나만 남겨두고
먼저 떠난 것이구나. 면피야….”
옷가지를 품에 안고 한참을 침묵하던 소문의 입에서 조용하
면서도 정감(情感)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잔잔히 흘러 나왔다.
“하지만 말이지… 난 죽을 수가 없어. 나마저 죽으면 누가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니? 살아야지. 이대로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멀쩡히 놔두고 내가 먼
저 죽을 수는 없지. 안 그래? 철면피!?”
소문의 말투가 점점 싸늘해지며 전신에선 엄청난 살기가 피
어오르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당일기나 당소희가
있었다면 소문의 눈빛만으로도 심장이 멎고 그 자리에서 죽음
을 생각할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몸이 이러니…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
선무겠지.”
현재 소문의 몸에서 멀쩡한 곳이라고는 두 눈과 귀뿐이었다.
전신은 이미 난도질당하여 소금에 재어진지 오래고 두 팔은
어깨에서부터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무수한 매를 견디
고 칼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뼈마디는 무사한 두 다리가 소문
에겐 유일한 위안이었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곧 소문이 걸을 수도
있고 뛸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이 밀실만
벗어나면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탈출도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우선은 조금이라도 내공을 모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소문은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을 누이고 무위공을 운기하기 시
작했다. 상식을 깨는 운기법! 무위공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신공(神功)이었다.
당일기와 당소희에게 그렇게 당하면서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동안 회복해 놓은 내공은 아무런 이상도 없이 단전에 그
대로 남아 있었는데 소문이 운기를 시작하자 그것이 바탕이
되어 보다 빨리, 그리고 편하게 내공이 모이기 시작했다.
단 한번의 운기로 상당한 내공이 모인 것을 느낀 소문은 감
았던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쉽구나! 시간만 좀더 주어진다면 보다 많은 내공을 되찾
으련만….”
몸을 일으킨 소문의 얼굴에 절로 안타까운 빛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깐의 운기로 어느 정도 내공을 모았다고
하지만 과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내공엔 차마 견주기가 부
끄러운 그런 미약한 수준이었다.
“아니지. 지금 이 상황에서 이정도의 내공을 모은 것도 어쩌
면 기적일 수도 있음이니….”
계속해서 운공을 하여 보다 완벽한 내공을 되찾고 싶었지만
시간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순간 당소희와 당
일기가 들이닥칠지 모르는지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는 것
은 너무나 큰 모험이었다.
“이제 이곳을 빠져 나갈 차례인가?”
그러면서 소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
이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역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구나!”
당일기의 보고를 받는 당문천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
나왔다.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을 조금 서두르심이….”
설명 도중 당문천을 바라본 당일기는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첩자의 말로는 이미 저들이 성도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 합
니다. 하지만 그자도 공격이 언제 시작 되는지는 모르고 있어
적의 공격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당문천은 식솔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
시키고 이제 막 세가로 돌아온 당문영에게 눈을 돌렸다.
“얘기는 들었을 테니 알 것이고,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당문천의 질문을 받은 당문영은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
을 열었다.
“그 첩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대한 서둘러 성도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자가 세가에 그렇게 무리하여 잠입(潛入)한
것도 공격의 시점을 잡기 위한 정탐(偵探)이라 생각됩니다
. 소희의 말로는 그자를 철저하게 감시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감시망(監視網)으론 저들이 보내는 소식을 차단할
수는 없습니다. 세가의 누구도 모르게 많은 정보들을 파악
했을 것이고, 모르긴 몰라도 세가의 자세한 동향(動向)이
적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적들은 이미 자신들이 보
낸 첩자가 저희에게 발각된 것도 눈치 채고 있을 것입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못 마땅한 얼굴로 듣고 있던 당소희가 퉁명스레 질문을 하였
다.
“흠, 그건 네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첩자들의 행동양식을
잘 모르는 것이다. 첩자는 정해진 시간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연락을 취하도록 되어있다. 만일 두 번 이상 정해
진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취해지지 않으면 첩자를 보낸 자
들은 자신들이 보낸 첩자의 정체가 들어난 것으로 간주(看做)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엔 연락이 오더라도 그 정보가 제대로
된 것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철저히 무시한다. 역정보(
逆情報)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그들만의 자구책(自求策)이
라 할 수 있는 것이지. 말을 들어보니 그자를 포박(捕縛)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고 하니 그를 보낸 자들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문영은 당소희에게 주었던 시선을 거두고 한층 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튼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저들도 이미 저희
가 세가를 등지고 떠날 것을 예상하고 있을 것이고 이미 확
인을 했을 것입니다. 파견(派遣)한 첩자가 발각된 사실을 안
이상 저들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미 공격
이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생각은?”
“바로 떠나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당문영은 단호하게 말을 했다.
“나 또한 아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네. 저들의 의도가
들어난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겠지. 자네는 즉시 정도맹
으로 떠날 준비를 하게. 서둘러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당문영은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갔다.
“그놈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신가요?”
“응?”
“그놈 말입니다. 밀실에 갇혀 있는 첩자 말입니다.”
당소희의 냉랭한 말에 당문천은 슬쩍 당일기를 바라보았다.
소문의 상태를 알고 싶다는 무언(無言)의 표현이었다.
“그대로 놔두면 며칠 못가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
가가 비워지고 적들이 온다면 그를 살리는 게 불가능한 일
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와 당가를 농락한 놈입니다!”
당소희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당문천을 바라보았다.
“흠, 알았다. 그 문제는 집법당주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당소희와 당일기
는 대답과 동시에 방을 나섰다.
‘네놈이 나를 우롱한 대가가 어떤 것이지 보여주마!’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약간은 외진 곳에 위치한 집법당으로
걸어가는 당소희의 얼굴엔 싸늘한 웃음과 함께 살기가 물씬
풍겨났다.
“그 사이 죽지는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 상처가 심해 피를 많이 흘렸으니. 하지
만 아직은 살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죽는 것이 그놈에게 편할 수도 있겠지.’
당일기는 앞서 걸어가는 당소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
들었다. 자신도 독하기로 세가에서 유명하지만 평소엔 흠잡을
데 없는 성품의 당소희가 한번 화가 나면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이 독랄해진다는 말이 정녕 사실인 모양이었다. 자
신은 이미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앞서 집법당으로 들어갔던 당소희의 외마디 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당일기도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언뜻 보기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첩자를 가두어 두었던 밀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제자둘이 쓰러
져 있는 것이 보였다.
쓰러져 있는 제자들의 상태는 실로 처참했다. 한명은 목이
부러져 즉사한 모양이었고 다른 한명은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신음성을 내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이냐?”
당소희에게 그들이 쓰러지고 생명이 경각(頃刻)에 달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농락하고 고운 손에 상처까지
입힌(물론 소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첩자 놈이 도망을
친 것이었다.
당소희의 외침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한 사내가 그들에게 일
어난 일을 떠듬떠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버티느냐다.’
소문은 결정을 내렸다. 그가 탈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 밀실의 문이 열려야 했다. 그런 후에야 싸우든 도망을
치든 할 텐데 밀실의 문을 여는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소문이 택한 것은 목숨을 건 일종의 도박(賭博
)이었다.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을
, 밀실에 놓여 있는 의자로는 어림도 없는 높이의 천장 기둥
에 묶는 것부터 소문에겐 고역이었다. 거의 사용할 수 없는
팔을 대신해 입으로 쇠사슬을 물고 그나마 양호한 다리의
도약력(跳躍力)을 이용하여 쇠사슬을 걸고자 노력했다.
그때마다 덜렁거리는 팔에 밀려오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소문은 결국 몇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기둥에서 튀어나온
모서리에 쇠사슬을 고정시키고 늘어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올라 위에서 내려온 쇠사슬에 목을 집어넣었다.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버틴다고 치자. 이 몸으로
그들을 제압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자신의 팔과 만신창이 된 몸을 보는
소문의 눈에서 초조한 빛이 흘러나왔다.
‘반드시 해야 한다. 이 길만이 내가 이곳을 벗어나고 면피의,
나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이다. 반드시!’
마음의 결심을 굳힌 소문은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당소희! 당일기! 이 더러운 년 놈들아! 너희들에게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겠다. 하지만 명심하여라. 내
비록 여기서 죽을지는 모르나 귀신(鬼神)되어서라도 반드
시 너희 년 놈들의 목숨은 가져가리라! 크하하하!”
‘면피야! 나를 도와 주거라!’
소문은 자신을 받치고 있던 의자를 걷어 차버렸다.
우당탕!
의자는 굳게 닫혀 있던 밀실의 문을 두들기고 쓰러졌다.
“응? 이게 무슨 소린가?”
“놔두게. 저놈이 고통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는 것 아닌가?”
당일기의 명을 받아 밀실을 지키던 두 명의 사내는 한참동안
당문에 닥친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말을 하다 갑자기 들려
오는 소리에 의아해 했다.
“흠, 하지만 밀실을 나가시던 소희 아가씨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자네도 듣지 않았나. 저놈의 목숨은 아가씨 것이라고.
혹여 저놈이 문에 머리라도 들이박고 죽어버리면 우리만
죽어나는 것이네. 어쩌면 소희 아가씨의 분노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올지도 모르지.”
“하긴 자네의 말이 맞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당소희가 자신들에게 당부한 말을 떠올린 그들은 당황한 표
정을 지으며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곧바로 밀실의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우선 문의 상부(上部)에 위치해 있는 조그
만 관찰창(觀察窓)을 열고 안을 살펴보았다.
“뭔가 보이는가?”
“가만 있어보게. 아직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이
런!”
“왜 그러는가?”
안을 살펴보던 사내가 화급히 눈을 떼고 말을 했다.
“저, 저놈이 목을 맸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질문을 하면서 관찰창을 살펴보던 사내 또한 짧은 신음성을
내뱉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석에 조용히
처박혀 신음해야 할 놈이 쇠사슬로 목을 매고 공중에 대롱대
롱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어서 문을 열고 저놈을 살리세. 저 미친놈이 누굴 잡으려
고!”
앞서 밀실을 살핀 사내는 허겁지겁 밀실의 문을 열려고 했
다. 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동료의 제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기다리게. 어쩌면 저놈이 수작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네도 저놈이 얼마나 심하게
당하는지 보지 않았나? 저놈은 지금 고통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이네.”
“하지만! 만약 이게 저놈의 수작이라면 저놈이 죽어 나가는
것 보다 우린 더 큰 문책(問責)을 당할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게.”
“하, 하지만….”
동료를 말린 사내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밀실을 살
피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동도 하지 않던
소문의 몸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역시 저것 보게. 처음엔 미동도 없다가 우리가 놈
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자 이제야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구만.
어리석은 놈! 우리가 네놈의 잔재주 따위에 넘어갈 줄 알
았더냐! 어디 그렇게 버텨 보거라!”
사내는 소문의 행동을 한껏 비웃었다.
“자네의 말이 맞았네. 휴~ 하마터면… 그런데 저러다 정말
죽는 것이 아닌가?”
“이 친구 참 걱정도! 염려하지 말게. 잠시 후면 죽음을 앞둔
놈의 움직임이 미약해질 것이네. 그때 내려주어도 생명엔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이네.”
계속해서 소문의 상태를 살피던 사내는 소문의 움직임이 눈
에 띄게 약해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제 되었군. 문을 열게.”
끼기깅!
쇠로된 문 특유의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밀실의 문이 열리
고 밀실을 지키던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게.”
“하하! 걱정하지 말게. 자네 말대로 이놈은 죽기 일보직전
아닌가? 하하…끄윽!”
매달린 소문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비웃던 사내의 말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사내의 목은 공중에 매달린
소문의 다리사이에 끼여 있었고, 그걸 느끼는 순간 그의 목
은 벌써 꺾여 부러지고 말았다. 절명이었다.
“저, 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지켜볼 수밖에
없던 사내는 당황한 몸짓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목이 부러진
사내가 쓰러지기 전에 그를 받침대로 하여 쇠사슬에서 목
을 뺀 소문은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뒤로 물러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무기도 있었고 소문처럼 다치지도 않은
건강한 몸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소문이 발하는 살기에 압
도당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맹수같이 달려드는
소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크악!”
소문이 달려가는 힘을 이용해 그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아
버리자 밀실을 울리는 비명이 들리고 사내는 얼굴을 붙잡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몇 번의
발길질이 이어지고 사내의 움직임이 멈추고 나서야 소문은
움직임을 멈췄다.
“켁켁!”
허리를 굽히고 거칠게 숨을 쉬는 소문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놈들…,”
자신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밀실의
문이 열리고 자신을 감시하던 사내들이 들어왔다. 단 한번의
기회를 멋지게 성공시킨 소문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 했구나!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이겠지. 사느냐 죽느냐는 모두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자신을 감추어주는 적절한 도구가 될 어둠을 향하여 소문은
지체 없이 밀실을 벗어났다..
“이, 이런 멍청한 놈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당가의 무인이란
말이더냐?”
사내로부터 대충의 사정 얘기를 들은 당소희는 그가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도 잊고 호통을 쳤다.
“그만 하여라. 중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가는 이런 놈들은 살아있
을 가치가 없습니다.”
“우선은 도망가는 그놈을 잡는 것이 중요하지 않더냐? 네가
우선 놈을 추격하거라. 나는 우선 가주께 이 사실을 알리고
세가의 무인들과 뒤를 따르마.”
“알겠습니다. 어차피 그런 몸을 하고 도망을 해 봐야 독안에
든 쥐지요.”
살기로 가득 찬 눈을 번뜩이던 당소희는 소문이 도망친 흔적
을 찾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제기랄!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당가를 벗어난 소문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혹시 몰라 인적
이 없는 산길을 택해 도망을 치는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지리(地理)에 어두워 산에서 헤매는 것은 둘째 치고 다른 곳에 비
해 다리만큼은 성하기에 소문은 비록 조금이지만 단전에 모인
내공을 이용해 충분히 출행랑을 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절대적인 오산(誤算)이었다. 경공이라는 것이 그저
두 다리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몸의 균형상태
와 적절히 조화가 되었을 때 비로소 최상의 자세가 나오고 제
대로 된 경공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난자당한 몸 상태
는 고사하고 덜렁거리는 두 팔은 소문이 속력을 내는 것에 지장
을 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빠르게 뛸라치면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이만하면 제법 오랜 시간을 달려온 것 같은데….’
최소 몇 백년은 묵었을 것 같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은 소
문은 흩어진 숨을 고르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겐 그럴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응?’
비록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늑대들과 싸우며 익힌 감각
(感覺)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는 소문이었다. 뭔가 끈적끈적한
느낌에 저절로 몸이 반응했다.
‘살기!’
은연중 느껴지는 살기에 소문은 바싹 긴장을 하며 살기가 풍겨
나오는 곳을 관찰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껏 자신이 도망쳐 온
길로 붉은색 경장을 입은 당소희가 뛰쳐나왔다. 진한 살기를
내뿜으며 나타나는 당소희, 한손에는 날렵한 검을 들고 사방을
쏘아보는 그녀는 소문에겐 진정 마귀 같은 모습이었는데 어두운
밤과 어울린 그녀의 붉은 옷은 살벌한 그녀의 기운을 더욱 부각시켰다.
‘빌어먹을 년! 기어코!’
혹시나 했지만 이렇게 빨리 뒤를 밟힐 줄은 몰랐다.
‘제길, 어쩐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년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
이 예사롭지 않은데….’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자신의 흔적을 찾는 당소희를 주시하는 소
문의 마음은 착잡했다. 철면피를 죽이고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넣은 당사자였다. 무공이 반이라도 회복했다면… 아니 그
반만이라도 회복했다면 당장 달려들어 자신과 철면피가 당한 만
큼 돌려줄 수 있을 텐데… 지금 그의 처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놈의 팔만 멀쩡했어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을 것을….’
그 와중에도 덜렁거리는 팔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소문에게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아가씨!”
숲의 왼편에서 당소희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마다 한손엔 검을 다른 한손엔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있었는데 중간에 당일기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소문의 소식을 들은 당문천이 대노하여 파견한 당가의 무인들이었다.
“아직 멀리는 못 갔어요. 틀림없이 이 근처에 있을 것입니다.”
헉헉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당일기에 간단하게 말을 한 당소
희는 그를 따라온 세가의 무인들에게 명을 내렸다.
“놈은 이 근처에 있다. 감히 당가를 농락하려 했던 놈이다. 반드
시 찾아야 한다. 발견 즉시 머뭇거리지 말고 공격을 해라. 단,
잠깐 동안이라도 목숨은 부지하게 만들어라. 그놈의 숨통을 끊어
놓을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 점을 명심하고… 찾아라!”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당소희의 명령에 당가의 무인들은 사방
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힘들게 됐구나. 잠깐이라도 쉬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해 본들 때는 늦어 버렸다. 이제 그에겐 두 가지 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나는 이대로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죽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전력을 다해 도주(逃走)를
하는 것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문제는 출행랑을 얼마나 시전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몸이 버텨
내느냐 인데….’
지금껏 도망 오면서도 가급적 출행랑의 시전을 자제했다. 자신이
지닌 무공 중에서 출행랑이 가장 적은 내공을 필요로 한다지만
그나마 지금의 내공으론 그 마저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방법이 없었다.
‘까짓것 해보는 거다.’
잠깐의 머뭇거림에 당가의 무인이 어느새 삼장까지 접근했을 때
였다. 몸을 일으킨 소문은 그들의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다! 잡아라!”
제일먼저 소문을 발견한 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소문을
뒤쫓았다.
‘크윽!’
출행랑을 시전 했으나 출행랑이 아니었다. 소문이 생각하기엔 굼
벵이가 기어가는 듯한 속도에도 온몸이 찢어 질 듯 엄청난 고
통이 느껴졌다. 비단 부러진 팔뿐만이 아니라 몸에 난 상처들이
일시에 폭발하는 듯 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으아아아아!!!”
엄청난 고통에도 발을 멈출 수 없었던 소문이 할 수 있는 것이
라고는 천지가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것 뿐이었다. 다행히 출
행랑의 속도가 당가에서 파견된 무인들의 경공을 압도한 것은
아니지만 좀처럼 따라잡히지도 않았다. 출행랑을 시전하면서 자
연스럽게 일어나는 살기, 더구나 지금은 소문의 고통과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에 그 위력은 평소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아무런 무기도 무공도 없이 달아나는 소문에게는 천만다행한 일
이었다. 하지만 그 살기도 단 한사람에게는 예외였다.
“머저리 같은 놈들!”
소문의 몸에서 일어나는 살기에 그를 추격하는 무인들이 계속해
서 멈칫거리자 분통이 터진 당소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책망(
責望)을 하고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소문과는 약간 성격이 다른
살기를 내뿜으며 뒤를 쫓는 당소희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
고 있었다. 소문의 뒤를 바로 쫒게 되자 왜 세가의 무인들이
멈칫거렸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하지만
한낱 살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에게 더 화가 난 당소희는 이
를 악물고 소문을 쫒았다.
‘큰일이다.’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얼마나 도망을 쳤을까? 더 이상 출행랑을
사용하는 것이 무리라는 신호가 몸 곳곳에서 나타났다. 우선 내
공이 바닥을 드러냈고, 심하게 움직인 몸은 이미 사람의 몸이
아니었다.
‘겨우 탈출에 성공했는데…안돼! 조금만 조금만 더!’
자신의 몸이 조금만 더 버텨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문은 출행
랑을 멈추지 않았다.
‘어리석은 놈! 이 길의 끝은 장강의 지류(支流)로 이어지는 절벽
일 뿐이다. 이놈!’
소문과는 달리 이곳의 지형을 꿰뚫고 있는 당소희는 이제 곧 나
타날 절벽과 막다른 골목에 몰린 소문을 상상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런 지루한 줄다리기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절대로 그냥 죽이진 않을 것이다.”
싸늘한 냉소와 함께 발걸음을 빨리 하는 당소희의 곁에는 아무
도 없었다. 소문의 살기를 두려워한 당가의 무인들이 어느새 한
참을 뒤처졌기 때문이다.
“이, 이런!”
갑자기 숲이 사라지고 나타난 절벽! 밑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절벽이 드러나자 갑자기 몸을 멈춘 소문은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 절벽이라니….’
“호호호! 어디 더 도망을 가보거라!”
갑자기 들려오는 비웃음에 소문의 고개가 돌아가고 어두운 숲에
서 오연히 걸어 나오는 사람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을 지닌
당소희였다.
“더 도망을 가래두. 어째서 그러고 있는 것이냐?”
들고 있는 장검(長劍)을 빙글빙글 돌리며 다가오는 당소희를 당
장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 소문에겐 그나마 있던 내공도 다
소진해 버렸고 몸도 말이 아니었다. 이제 다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살수 있을까?’
소문은 다가오는 당소희와 절벽아래에 흐르고 있는 얼마나 넓은
지 깊은지도 가늠이 안 되는 물을 바라보며 갈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흐흐흐, 내 지금은 힘이 없어 네년에게 당하고 있지만 어디 두
고 보거라. 그 낯짝에서 웃음이 지워질 날이 있을 것이다.”
“흥, 곧 죽을 놈이 말은 많구나. 오냐. 어디 그리 한번 해 보거
라! 하지만 그 전에 내 칼이나 받아 보거라!”
당소희는 소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땐 이미 소문의 몸
도 허공을 가르고 있을 때였다. 소문은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마침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네, 네놈이! 흥, 어디 네놈 뜻 데로 될 성 싶으냐!”
공격의 대상을 잃자 일순 당황한 당소희는 들고 있던 검을 암기
삼아 이미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소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검은 정확하게 소문의 몸을 관통했다. 자신이 던진 검이
정확했음을 확인한 당소희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추락하고
있던 소문의 고개가 들렸다. 소문의 절벽위의 당소희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칫!
왜 그런지는 모른 체 당소희는 갑자기 밀려오는 소름에 기분이
상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꺼져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