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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산에서 고덕산으로
처음 산행을 시작하면서 가까이 있는 산부터 밟아나가다 보니 서울시와 인접 시 경계가 상당 부분 산 능선으로 이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경계 능선들을 다 밟아보리라 생각하고 하나하나 밟아나가 이제 서울시와 하남시 경계 능선만 남겨두고 있었는데 오늘(2009. 1. 10.) 드디어 마지막 남은 일자산 능선을 밟게 되었다.
10:20경 올림픽공원역을 나와 둔촌사거리를 돌아 강동대로를 따라 서하남 입구를 향해 내려가는데, 둔촌(遁村) 이집(李集) 선생(1327-1387) 집터라는 표석이 나온다. 선생이 공민왕 때 신돈의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로 피난하여 숨어 사셨다고 하네. 둔촌이란 호도 이곳 마을에 숨어 산다고 하여 둔촌이라고 지은 것이 아닐까? 당연히 둔촌동이란 지명도 선생 때문에 생긴 것일 테고...
거여동길과 만나는 서하남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하남시 감북동으로 넘어가려는데 길가에 '강동 그린웨이'라는 커다란 조형글자가 눈길을 끈다. 옆의 안내판을 보니 일자산 능선에서 명일 근린공원 - 방죽 근린공원 - 샘터 근린공원 - 고덕산으로 이어지는 녹색축을 따라 산책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은 길이 고덕산에서 멈추지만 강동구에서는 2010년까지 다시 고덕산에서 암사역사생태공원 - 한강 - 성내천 - 강동대로로 하여 이곳까지 녹색길을 이어 강동구를 크게 도는 생태 산책길을 완성하려고 하고 있다. 안내판을 보니 여기서부터 내가 오늘 목표로 한 암사역사생태공원까지는 12.4km. 강동구에서 이런 멋진 시도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는데, 그런데 이왕이면 그린웨이라는 생경한 외국어보다는 녹색길이라든가 푸르름길 등의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강동 그린웨이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나 나는 하남시 감북동으로 좀 더 들어가보련다. 나에겐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감북동은 1989년 하남시로 승격되기 전에는 광주군 서부면이었다. 내가 아내와 결혼하기 전 아내의 집이 바로 이곳 서부면의 서울시 접경지역에 있었다. 1980년대 초만 하여도 이곳은 완전 시골이라 아내가 늦은 시간에 집에 가려면 버스도 별로 없고, 또 길에서 처갓집으로 오르는 길은 한쪽가에만 집들이 좀 있었을 뿐 맞은편쪽은 그대로 밭이었고, 길은 어둠컴컴하였지.
그러니, 어떡하는가? 밤에 아내와 데이트 하다가 헤어질 때 아내를 그냥 홀로 집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거금을 들여 택시로 아내를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보광동 우리집까지 또 먼 길을 가야 했었지. 나는 이 길 저 길을 기웃거리다가 이 길이 바로 그 길이라 생각하고 한 오르막길을 오른다. 그 때 밤에 이 길을 아내와 같이 오르다가 어둠컴컴함을 이용하여 아내에게 첫키스를 하던 곳이 이 근처 어디일 텐데...
그런데, 오르막길이 다 되어가는 데도 옛날 처갓집과 비슷한 주택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길을 잘못 올라왔나 몇 번 살펴보았다. 분명 이 길 같은데... 그러나, 처갓집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1980년대 후반기에 장인 어른이 집을 팔고 서울로 들어오셨고, 그 후에 이곳이 개발되면서 워낙 옛날 모습을 잃어버려 아쉽게도 찾을 수가 없구나.
나는 어림잡아 옛날 처갓집이 있던 장소를 두리번거리고 10:58경 바로 뒤의 일자산으로 오른다. 예전에도 처갓집 바로 뒤가 산이라 한번은 아내와 같이 뒷산에 밤 늦게까지 있다 내려오다가, 걱정되어 대문 앞에 나와 계시던 장모님한테 혼난 적도 있었지. 그 땐 이름 없는 동네 뒷산으로만 알았지 이게 일자산이란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었다.
오솔길을 헤치며 올라가니 금방 강동 그린웨이와 만난다. 11:06경 갑자기 길 오른쪽이 환해진다. 이곳에 공동묘지가 있었나? 서울과 구리시 경계능선을 걸을 때는 당연히 망우리 공동묘지를 지나갈 것을 각오했었지만, 이곳에서도 공동묘지를 만날 줄은 몰랐다.
공동묘지 한 가운데에는 밭도 좀 있고 비닐하우스와 사람이 기거할 수 있게 만든 움막도 있다. 움막이라... 설마 공동묘지 한 가운데에서 잠을 잘 만큼 강심장은 없겠지? 묘지 군데군데에는 노간주나무가 서있다. 왜 무덤 앞에는 노간주나무를 심을까?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이 없으니 건너편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으로부터 뻗어져 내려오는 능선이 잘 보인다. ALP 동기 백상무와 같이 저 능선을 타고 내려온 것이 벌써 재작년 12월 하순이었던가? 그 때 저 능선을 계속 타고 내려가다가 중부고속도로에 의해 능선이 잘려나간 앞에서 망연자실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들을 내려다보았지.
청량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는 내 뒤편으로는 둔굴이 있었다. 이집 선생이 이곳에도 일시 은거하여 이름을 둔굴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 마을에 숨어 산다고 하여 둔촌이라고 호를 지었나 했더니 안내문에는 은거(隱居) 동안의 고난을 자손 후세까지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둔촌이라고 하였다네. 둔굴은 광주 이씨 대종회가 전액 사업비를 지원하여 쉼터로 잘 정비하였다. 자랑스러운 선조의 일이니까 기꺼이 지원하였겠지. 옆에는 보물 1218호로 지정된 태종 10년(1410) 간행된 이집 선생의 시집 둔촌잡영(遁村雜詠)에 나오는 시 한 수가 나무판에 새겨져 있다.
寄寧州琴李兩先生 영주(천안)의 금, 이 두 선생에게
昔守天安日 예전에 천안에서 재임했을 때
高風見兩生 두 선생의 높은 가르침을 보았네
讀書知力學 책을 읽어 노력하여 배우며
營業事躬耕 생활 또한 힘써 게을리 하지 않았네
嗟我頭將白 아 내 머리 세어 갈 때까지도
聞君道益明 그대에게 더욱 도를 밝혀 들었네
何時再會面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
南北未休兵 남북엔 아직 병화가 끝나지 않았네
이집 선생이 천안에 재임했을 때 흠모했던 금씨와 이씨 두 선비는 누구일까? 그런데, 남북엔 아직 병화가 끝나지 않았다는데 그 당시에 어떤 전란이 있었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말하나? 그리고, 둔굴이라고 하였으니까 뭔가 굴이 있었던 모양인데 도대체 어디에 굴이 있는 것이지?
다시 길을 걷는다. 군데군데 강동구가 걷기에 최적이라는 문화일보 기사를 크게 하여 붙여놓았다. 이는 한국생활안전연합이란 곳에서 서울 25개 자치구의 보행환경 실태를 조사한 것이라는데 강동구가 1위로 나왔다는 것이다. 기사를 그대로 확대하여 싣다보니 '중랑구 최악'이라는 기사 제목도 함께 눈에 띈다. 이거 강동구가 자기네 자랑하면서 동시에 중랑구가 형편없는 동네라는 선전도 함께 하네. 중랑구민들이 보면 기분 안 좋겠는데?
가다보니 둔촌 선생이 후손에게 이르는 말씀을 멋진 조각돌에 새겨놓았다.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준다 해도 경서 한권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는 말씀. 지극히 옳으신 말씀. 나는 판사로서, 변호사로서 재산 상속 문제 때문에 자손들이 싸우는 것을 많이 보와 왔기에 둔촌 선생의 말씀에 공감이 가는 것이다.
맞은편에도 뭔가 돌비석을 세워놓았다. 1994. 5. 21.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면서 강동의 최고봉인 이곳 일자산(一字山) 정상에 해맞이 광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곳이 정상이야? 그럼, 20여분 만에 정상까지 온 것이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정상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산 자체가 一字로 쭉 늘어선 능선이기에 정상이라고 해봤자 고만고만한 능선줄이 이어져가고 있는 중의 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뿐. 그런데, 강동이 낮기는 낮구나. 해발 125m의 일자산이 강동의 최고봉이라니...
그린웨이 군데군데에는 우리가 알만한 시인들이나 강동문인회 회원들의 시가 있다. 그중에 제일 마음에 와 닿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읊어보자.
== 풀꽃의 노래 ==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굳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도 좋아
바람이 날 데려가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
하고 싶은 모든 말들
아껴둘 때마다
씨앗으로 영그는 소리를 듣지
너무 작게 숨어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오래전부터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풀꽃의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쉽고도 우리 마음에 젖어들게 쓰셨을까?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어렵지 않은 일상의 말을 그대로 시로 옮겨놓은 것 같으면서도 시에 수녀님의 순수함과 세상을 보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배어나오는 것 같아 참 좋다.
가다보니 어느 나무 앞에 가죽나무라는 이름표가 세워져 있다. 가죽나무? 이 나무 가죽으로 뭔가 하나? 그 가죽이 아니라 가짜 죽나무라는 뜻이란다. 참죽나무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쓸모가 거의 없어서 가죽나무란다나? 그래? 그런데, 가죽나무의 영어이름은 'Tree of Heaven' -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자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는데, 아무래도 가짜 죽나무와 천국의 나무라는 이름은 극과 극이 아닌가? 서양에서는 천국의 나무라고 높여 부름을 받다가 이곳에 와서 '이 가짜 죽나무야!'라는 소리를 들으니 이 친구 기분이 안 좋겠는데?
12:04경 일자산을 내려오는데, 앞으로 바라다보이는 것은 하남시 건너편으로 예봉산과 적갑산. 고개를 오른쪽으로 좀 돌리니 검단산. 천호대로를 건넌다. 산에서는 계속 보이던 명일근린공원 안내판이 길을 건너면서 사라졌다. 어디로 가야하나? 정작 중요한 데서 안내판이 없군. 할 수 없이 개를 앞세우고 입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달려오는 남자에게 물었다. 이거 달리는 리듬을 깨뜨려서 좀 미안한데... 그 남자의 안내로 명일공원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명일동(明逸洞), 고려 성종 11년(994) 이곳에 明逸院이라는 숙박소를 두고 출장하는 관리나 여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해 준데서 명일동이라고 하였던가? 홍제동에도 홍제원이 있었고, 장호원, 퇴계원, 사리원 등이 모두 예전에 이런 숙박소가 있어 생긴 지명이렸다?
일자산에서는 그렇게 오가는 사람들이 많더니만 지금부터는 한적한 숲속 산책길이다. 조금 올라가다보니 '이 식물은 유해 외래식물'이라며 꼭 제거해야 한다는 팻말이 있다. 서양등골나물이라는 식물인데 워낙 번식력이 강하여 주위의 모든 식물들을 죽이고 자기들 천지로 만든다고 한다. 이 자식! 이름 그대로 남의 나라에 와서 우리 얘들 등골을 완전히 파먹는구먼.
명일공원에서 내려오니 앞에는 지하철 5호선이 지나가는 고덕동길. 시간은 이미 1시를 향해 가고 있어 여기서 점심을 해결해야겠다. 왼편으론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이, 길 건너편에는 이마트가 크게 자리 잡고 있고, 이마트 오른편으로 고덕역이 보인다. 덕이 높은 동네(高德洞)이니 이 동네에는 모두 인격이 고매한 사람들만 모여 사나? 고려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과 그의 동생 암탄(岩灘) 이양몽(李養蒙) 형제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태조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하자 절의를 지키며 이곳에 은거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단다.
그런데, 이양중과 태종 방원은 원래 친구 사이였단다. 하루는 태종이 양주에서 군사 사열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이양중을 만나 같이 술 한잔 하면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청하나 이양중은 완곡히 거절. 궁에 돌아와 신하들은 이양중을 처벌하자고 하나, 태종은 “무릎을 맞대고 술을 마신 것은 우정의 두터움이다. 자고로 왕자에게는 굳은 친한 벗이 있느니라”하면서 그의 높은 덕망을 기려 이곳을 高德으로 이름 짓도록 하였단다. 태종은 치악산으로도 은거한 스승인 운곡 원천석을 찾아갔다가 운곡이 피하는 바람에 허탕을 쳤다고 하지. 태종이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스승이 은거하던 곳을 향해 예를 갖춰 절을 했다는 곳은 배향산이라고 한다는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고,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죽이고, 세종의 장인인 자기의 사돈 심온을 죽인 태종도 권력욕을 떠나서는 이런 인간적인 구석이 있었군.
점심을 먹고 길을 건너 방죽공원으로 오른다. 공원이라 하니 언뜻 이러저러한 공원시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좀 전의 명일공원이나 이곳이나 다음에 나타날 샘터공원이나 단순한 녹지공간에 단순히 강동그린웨이만 나 있을 뿐. 방죽이라... 이름대로라면 옛날 이곳에 방죽이 있었을 것 같은데... 이름 유래를 어디 눈에 띄는 곳에 적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방죽공원에서 샘터공원 넘어가는 길은 다행히 다리로 이어져 있다. 샘터공원이니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싶으나 강동그린웨이 지나가는 주위에선 샘터를 볼 수가 없다.
1:54경 샘터공원을 내려와 고덕산으로 오른다. 오르다보니 한 나무 하나가 밑둥에 커다란 옹이를 두르고 있다. 줄기에 큰 상처가 나 그리로 진액이 빠져 나오면서 이렇게 상처를 두르는 커다란 옹이가 되었을 것. 누가 그런 흉터를 냈을까? 저렇게 커다란 옹이를 안고 살아야 하는 저 나무가 안스러워 보인다.
2:23경 응봉을 지나 고덕산 정상에 오니 바로 발밑으로는 올림픽대로로 차들이 바삐 지나고 있다. 아하! 올림픽대로로 암사동에서 고덕동으로 고개를 넘어갈 때 바로 오른쪽에 보이던 조그만 봉우리에 지금 바로 내가 서있는 것이구나. 정상은 높이 86.32m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봉우리이지만 바로 한강 앞에 서있어 2006년에 서울시에서 우수조망명소로 선정할 만큼 경치가 좋다.
내 앞으로는 지금 한강이 흐르고 있고, 그 한강을 가로지르는 강동대교 너머로 고종과 순종의 무덤(홍릉, 유릉)을 품고 있는 백봉과 그 뒤로 하늘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뾰족하게 솟아올랐다는 천마산이, 또 그 왼편으론 철마산이 보인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니 왼편으로는 워커힐부터 솟아오른 아차산과 망우산이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며 이곳까지 오고 있다. 한강을 앞에 두고 뒤에서 산들이 구리시와 남양주시의 벌판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예전부터 누군가는 이곳을 화폭에 옮겨 담았을 것 같은데...
내려오는데 등산로만 빼놓고 철제 울타리가 산을 두르고 있다. 안내문에는 이곳은 사유재산이므로 무단출입시는 형법에 의거 처벌을 받게 된단다. 그러면서, 등산객들의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등산로를 막아 죄송하다며 이 산은 개인 소유의 산이며 광주 이씨 종친회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단다. 산주(山主)가 이 울타리를 두를 때에는 아무도 출입을 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결국 등산객들과 지역주민들의 원성에 못 이겨 등산로를 열어준 모양. 산주가 누군진 모르지만 이 산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하였단 말인가? 아까 일자산 둔굴 정비한 곳은 토지 소유주 김태수, 문흥근, 윤용선님이 기꺼이 토지 사용 승낙을 해주어 시설이 설치되었는데, 이곳 토지 소유주는 자기 땅을 남과 같이 사용하기가 아까웠던 모양이다. 조금 더 내려오니 종중 선산 묘역으로 꾸며져 있는 게 광주 이씨 선산 같아 보이는데 아까 산주는 광주 이씨 종친회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니 뭔가 복잡한 속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선산 묘역 바로 밑으로는 약수터가 있다. 바로 위로 묘역이 자리 잡고 있지만 수질검사 증명서에는 합격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약수터 이름은 광릉(廣陵) 약수. 나는 처음에 광릉은 남양주시 진접에 있는데 왜 이곳 약수터를 광릉약수라고 하였을까 의아해하며 약수를 마셨다. 그런데, 약수터 밑으로 웬 비각이 보여 내려가보니 이곳 선산이 광주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이다. 설명을 보니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는 세종 때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임금을 모시고 영의정까지 한 선비로 비각 안의 신도비는 이극배가 죽은 후 신숙주의 손자인 예조참판 신종호가 쓴 것이라 하는데, 원래 비석만 있던 것을 비석이 오래되어 보호 차원에서 비각을 씌운 것. 그러고보면 둔촌 이집도 광주 이씨이고, 석탄 이양중, 암탄 이양몽 형제도 광주 이씨이니 이곳 강동구 일대가 광주 이씨의 텃밭이었군.
이극배의 묘소는 비각에서 직각으로 꺾여 조금 오른 것에 모셔져 있어 약수터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보통 비각은 묘소 앞에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옆으로 꺾여있지? 나는 묘소 위에까지 올라가 보았다. 바로 묘소 발밑까지 암사 아리수 정수센터가 들어와 있는 것이 비각도 이 때문에 옆으로 옮긴 것이 아닐까? 광주부원군으로서는 자기 발밑까지 후손들이 정수장을 만든 것이 불만일수도 있겠지만 정수장은 후손들의 생명을 위한 것이고, 또 바로 발밑까지 차들이 24시간 몰려다니는 성종 임금(선릉)보다야 조용하고 넓은 정수장 잔디밭이 앞에 있으니 이게 훨 나은 것이겠지.
아리수 하니까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고구려 때는 한강을 아리수라고 불렀다는군. 아리수라... 한강이 오랫동안 우리 입에 밴 익숙한 이름이긴 한데, 운치는 아리수란 이름에 더 있을 것 같다. 팔당에서 끌어오는 한강물만으로는 서울 시민들을 다 마시우게 할 수 없어 이곳 암사동과 노량진에서 취수하는 한강물을 섞는다는데, 우리 집에 들어오는 한강물에도 이곳 물이 섞여있지 않을까? 아리수 정수장은 서울시민의 생명수를 만드는 곳이라 이곳은 어느 군부대 못지않게 이중 철조망에 감시초소까지 있다.
3시에 고덕산을 벗어난다. 강동 그린웨이는 현재로서는 여기까지이다. 앞으로 내년까지 여기서 아까 출발한 일자산 입구까지 강동 그린웨이를 마저 이을 것이라고 하니 그 때 다시 일자산까지 걸어볼 일이다. 나는 그린웨이는 끝났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신석기 시대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암사역사생태공원가지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고덕뒷길을 따라 선사주거지를 향해 걷는다. 왼편으로는 롯데캐슬이 바로 길옆까지 다가와 자기 키높이를 자랑하고 있다. 가뜩이나 키가 높은데 돌축대 위에 서서 자기 키를 자랑하니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진짜 성(castle)이라고 할 만하군. 태양마저 이들이 가리고 있으니 몸은 더욱 움츠러드는 것 같다.
3:20경 나는 표를 끊고 암사역사생태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암사선사주거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 유적중에는 최대의 마을 단위 유적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이런 큰 신석기 시대 마을이 있었는지는 1925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럼 1925년에 어떻게 여기에 이런 신석기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바로 그 유명한 을축년 대홍수다. 큰물이 쓸고 가니 땅속에 묻혔던 신석기 시대 유적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을축년 대홍수는 여기뿐만 아니라 바로 조금 하류의 풍납토성도 때려 많은 성벽을 부수고 땅 속의 백제유물을 드러냈지.
그런데, 대홍수가 쓸고 간 뒤라 유적지는 모두 파괴된 것으로 생각하고 간단한 지표조사만 하였단다. 그러다가 장충고등학교가 1960년대에 이곳에 야구장을 만들려다가 많은 빗살무늬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어 1966년에 정식 발굴이 시작되었다는군. 그렇지, 내 어릴 때만 하더라도 장충고교가 야구로 유명하였었지. 그 후 여러 차례 발굴이 이루어졌고, 올해 제5편의 발굴보고서를 출간함으로써 이곳 유적 발굴의 대미를 보았단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다니, 아득한 선조의 일이라고 너무 발굴에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것 아냐?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선사주거지를 재현한 움집들. 이곳에선 모두 29채의 움집터가 발견되었다는데, 신석기 시대 선조들은 깊이 50cm ~100cm로 땅을 둥글게 파내고 그 위에 이엉이나 억새풀, 갈대 등을 고깔 모양으로 덮어 씌워 이렇게 움집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사셨나보다.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 한 움집 안으로 몸을 굽혀 들어가니 안에는 까마득한 신석기 선조의 한 가정이 불 앞에서 단란한 한 때를 즐기고 있다. 머리 위로는 그물추가 늘어져 있고, 아빠는 서서 창대에 창 - 당연히 돌창이겠지 - 을 묶고 있고, 엄마는 돌칼로 고기를 썰고 있다. 이곳이 강가이고 저기 그물추가 걸려 있다는 것은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많이 했다는 것.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는 저 선조들이 밖에 나가면 아직 맹수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문화적 여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참 빈한한 삶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행복이 있지 않았겠는가? 지금 이들에게는 이 시간이 그 행복의 시간이리라.
이제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보자. 안에는 이곳 암사동 유적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고, 그래서인지 이곳 저곳에서 초등학생들이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함께 와 열심히 설명을 듣고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그렇지.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아이들 숙제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
이곳의 대표적인 유적은 빗살무늬 토기. 아무리 보아도 빗살무늬가 토기의 효용성을 더 증가시키는 구실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먹고 살기에 바빴던 신석기 시대 선조들에게도 예술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아니면 종교적 행위와도 관련이? 혹시 선조들이 많이 먹던 생선 가시를 보고 생선이 많이 잡히라는 소원을 담고 빗살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은 아닐까? 예전에 역사를 배울 때 빗살무늬 토기의 밑바닥이 원추형으로 뾰족하게 되어 있어 왜 바닥에 세우기 어렵게 밑을 이렇게 뾰족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이는 바닥의 흙을 파고 거기에 토기의 아랫부분을 묻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아무래도 바닥을 파다보면 원추형으로 파이게 되니까...
암사선사주거지를 나와 오면서 생각해본다. 한강 유역을 접하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서울시민들은 오늘을 살아가기에 급급하여 과거의 한강을 잊고 살고 있지나 않는지... 기껏 생각해봐야 한강을 도읍지로 한 조선만 생각하고, 그 이전에 백제는 이곳에 도읍지를 정하고 50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았으며, 또 그 이전의 우리 신석기 조상들도 이 한강을 생명의 젖줄기로 살아왔다는 사실은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암사역까지 1km가 넘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간다. 암사(岩寺) - 바위절이라... 아까 본 암사정수장 서쪽 언덕에 3국 시대에 절이 9개나 있어 구암사라 하였고, 속칭 바위절이라 - 절 있는 곳에 바위가 많았었나? - 하던 것을 한자로 암사라 하여 동네 이름도 암사동이 되었다는군. 실제 1987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바위절터 발굴에서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유물이 발견되어 절이 있었음은 입증이 되었으나 3국 시대 유물은 발견하지 못했단다.
이제 암사 전철역의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가 시야에 들어온다. 오늘 16km 가까이 강동을 빙 둘러 걷고 나니 비록 추운 날씨에 얼굴은 얼얼하지만, 서울시 경계 능선중 마지막 남은 능선 하나를 마저 밟고, 강동그린웨이를 통하여 한강까지 와서 신석기 시대의 선조들의 생활모습까지 들여다 본 뿌듯함이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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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또 보람된, 멋진 산행이 되셨군요,, 부럽습니다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 전국 명소 안가시는곳이 없으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