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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 (1964~)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한평생 -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도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도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 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고요 - 반칠환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욱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너 오실라나
토옥---- 톡!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어머니 5 - 반칠환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 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 바라보신다
칠십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누나야 - 반칠환
누나야
다섯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갔다가
땀뻘뻘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아닌
냄새 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가뭄 - 반칠환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갈 수 없는 그곳 - 반칠환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에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 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질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지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 속도에 대한 명상 10 반칠환
서울에서 부산까지
노란 실선을 긋는 것이 직업인 그 사내는
보았다
길 왼편의 암컷에게 가지 못하고
길 오른편에서 울부짖고 있는
오소리를, 개구리를, 도마뱀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앙 분리대를 쌓으며 가던 그 사내는
보았다
생명을 싣고 달리는 바퀴들이
생명을 밟고 다니거나
생명을 내동댕이치기도 하는 것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스콘을 새로 깔며 가던 그 사내는
들었다
수십 번의 봄이 지나갔으나
잎이 되지 못하고, 줄기가 되지 못하고
웅크려 앓고 있는 씨앗들의 음성을
그 사내 어느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둘둘둘 아스팔트를 말며 간다
젖은 흙살 위로 쏟아지는 저 붉은 햇살!
사내는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무를 심으며 온다
발자욱마다 질경이 돋고
민들레 다시 핀다
꼭꼭 숨어 있던 동물과 곤충들
멸종 도감의 원색 화보를 밀치며
하나씩 둘씩 달려나온다
물결
그랬구나! 가슴의 통증이 가시고 눈앞이 환해진다.
어리석고 아둔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굽은 어깨와 허리가
매화 등걸처럼 휘영청 내걸리고 가슴마다 꽃이 핀다.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끌마저 모두 꽃핀다.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곳에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걸려 있다니,
가슴에 박힌 대못은 상처인가 훈장인가?
언제나 벗어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통증과 치욕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으며,
가슴 속 잉걸불에 묻어둔 뜨거운 열망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을 것인가?
봄날 새순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피며,
손가락 잘린 솔가지는 관솔이 되고,
샘물은 바위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내 근심이 키우는 것이 진주였구나,
네 통증이 피우는 것이 꽃잎이었구나.
바퀴
- 속도에 관한 명상 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어떤 채용 통보
아무도 거들떠보도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은행나무 부부
십 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 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자벌레 - 반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 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흩트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영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아륙할 열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살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업시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지금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매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고 한다.
다국적 똥 - 반칠환
또 배탈이군. 한때 돌조차 삭이던 위장이었는데. 그렇지, 장모가 전라도 배추를 경상도 고춧가루로 버무린 탓일 거야. 아냐, 맥도널드 햄버거에 우리 밀빵을 함께 먹은 탓인지도 몰라. 아니, 방부제와 잔류 농약이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방제하는 날일까? 쯔쯧, 세계화 시대에 이렇게 편협한 국수주의자의 내장을 가지고서야. 신토불이? 우린 모두 지구촌 읍민이니 지구에서 나는 모든 음식이 신토불이인 거야. 저녁엔 다시 캘리포니아 쌀에 중국산 콩을 놔 먹어보자. 끄억 --. 미제트림에 중국산 방귀를 뀌어볼까나. 비록 제3세계의 셋방에살지만 오늘도 난 다국적 똥을 눈다.
먹은 죄 -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삶 - 반칠환
벙어리의 웅변처럼
장님의 무지개처럼
귀머거리의 천둥처럼
* 노랑제비꽃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
* 가뭄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 호두나무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 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과자는 정말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나무 가로수 下 칠십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과자 먹다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
* 웃음의 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 언제나 지는 내기
소나무는 바늘쌈지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마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 여름 없이 달이 뜬다 *
* 장미와 찔레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봄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 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 목격 -속도에 대한 명상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 바퀴 -속도에 대한 명상 5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 먹은 죄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갈치조림을 먹으며
얼마나 아팠을까?
이 뾰족한 가시가 모두 살 속에 박혀 있었다니
* 멸치에 대한 예의
큰 생선은 머리 떼고, 비늘 떼고, 내장 발라내고, 지느러미 떼면서 멸치를 통째로 먹는 건 모독이다 어찌 체구가 작다고 염을 생략하랴 멸치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 낮달
울 어매 얇게 빗썰어 놓은
무 한 장
* 목숨
그럴 분이 아닌데
손가락도 열 개
발가락도 열 개
이빨은 젖니 한 벌
영구치 한 벌
참 꼼꼼하신 분인데
가장 소중한 목숨이
하나뿐이라니
*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 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 웅켜쥔 주먹을 펴라
보리 한 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 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 감꽃
장독대 위에 감꽃이 지네
투욱ㅡ
이승에서 저승으로
장맛이 익는 사이
* 어떤 기구(祈求)
제단에 돼지머리를 바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 공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사람이 노래하자
제초제가 씨익 웃는다
* 이기주의
'나는 너, 너는 나 우리는 한몸이란다'
설법을 듣고 난 동승이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스님일 때보다
스님이 나일 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 팔자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경이롭잖은가
저마다 가장 무거운 걸
젤루 잘 휘두르니
* 시치미
저 해 맑은 거짓말 좀 보게나
치악산 능선마다
새똥, 곰똥, 달팽이 오줌
다 씻어 내린 계곡물이
맑다
반칠환
1963년 충북 청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누나야]
숲 속 식구들은 모두 돕는다
나는 종종 배낭을 메고 산으로 향한다. 바람에 하얗게 뒤채는 앞산의 저 이파리들은 갈참나무들이다.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저것은 은사시나무들이다.
해마다 바라보는 엄연한 일이지만 올해도 믿을 수 없었다. 겨우내 벌거벗고 선 앙상한 겨울 산들을 점묘법으로 칠하겠다고 나선 봄바람을 보고 코웃음 쳤었다. 하지만 눈에 띌 듯 말 듯 나뭇가지마다 쌀알만 한 초록 점을 찍던 봄바람은 마침내 온 산을 다 가리고도 남는 녹색 차일을 쳐 놓은 것이다. 물론 폭죽처럼 터지는 봄꽃들의 축제도 빼먹지 않았다.
지난가을, 멋모르고 벚나무 우듬지에 새 집을 지은 까치 부부가 꽃불에 눈이 멀어 망연히 앉아 있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오월의 녹음은 봄꽃에 눈먼 새들의 시력을 되찾아 주는 명약이 분명하다. 봄새들의 울음과 여름새들의 울음이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은 한 마리 짐승이다. 나는 그 짐승의 푸른 터럭 속으로 들어간다.
아까시나무, 밤나무, 쉬나무, 피나무, 신나무, 국수나무, 잣나무, 생강나무, 백당나무, 광대싸리, 조록싸리…. 나는 언제나 자리를 바꾸지 않고 서 있는 이 산의 나무들을 순서대로 다 욀 듯하다.
작년부터 '숲 생태'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계곡을 낀 등산로에 피어 있는 들풀들도 낯설지 않다. 20여 분 더 올라가다 보면 언제나 감탄하며 바라보는 나무가 하나 있다. 아름드리 갈참나무 한 그루가 그것이다. 나를 가르쳐 주신 숲 선생님에 따르면, 오직 참나무 한 종만을 생명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명이 무려 5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참나무 한 종이 산에서 사라지면 이들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나무의 잎과 열매를 먹이로 하거나, 껍질을 집으로 삼거나 하는 그 50여 종의 생물은 또 각각 얼마나 많은 다른 나무와 짐승과 곤충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 그 관계의 그물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나 또한 이 참나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임을 새삼 생각하여 보곤 한다.
요즘 들어 부쩍 나무와 들풀에 관심을 갖고 산과 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생태적 감성이 요즘의 유행이라서? 맛있는 나물로 웰빙 식단을 차리려고? 약용 식물로 불치의 지병을 고치기 위해서?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저 나무와 들풀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것이 '숲의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을 당기는 '숲의 구심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숲은 우리를 부른다. 그러나 단지 그늘에 와서 쉬고, 꽃구경을 하고, 맛난 열매를 실컷 따 먹으라고 부르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가만히 귀기울여 보면 '나는 너다, 너는 나다'라고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숲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상호 연관성이다. 숲 속의 어떤 식물도 저 홀로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없다. 모두 저 아닌 것들의 도움으로 한껏 저다운 꽃을 만발해 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파편화되어 있다. 오늘 아침 내가 먹는 음식, 내가 마시는 물, 내가 입는 옷이 어떻게 얻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과정은 모두 숨어 버리고 오직 현금으로 교환되는 물건만 오고 갈 뿐이다. '너와 나 사이, 관계의 길'이 막혀 있는 세상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광우병 소만 해도 그렇다.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야만적인 축산과 상거래가 일어나는 것이다.
갈참나무가 수많은 제 이파리 경전을 부채 삼아 부쳐 주며 말한다. '너를 나로 생각한다면 공경하지 않을 대상이 어디 있겠느냐'고. '우리가 서로 연관된 존재라는 걸 망각하는 순간 병이 든다'고.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갈참나무 아래에서 물병을 마저 비우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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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18.03.12시를 잘 쓰시는군요. 재미있는 시들이 많습니다.
답댓글송태한|18.03.13선시를 닮은 듯 하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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