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힘 / 최미숙
6월부터 전남 교육청의 핵심 사업인 ‘공존 교실(공부하고 존중받는 교실 수업으로 實맺는 교육)’이라는 프로그램 강사로 근무한다. 학급 교사와 협력 수업을 하고, 교실에서 적응하지 못해 수업 방해하는 학생의 학습 활동을 돕는 역할이다
이제 학급 담임은 안 하고 싶다. 옛날과 달리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설렁설렁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설 아이들 한글 수업하는 날이 있어 전일제는 못 하고 시간제(1주 열네시간 근무)로 가기로 했다.
면접을 하고 첫 출근날, 신청 학급 담임들과 인사를 나눴다. 1학년 한글 해득이 안 된 아이 둘(일반 아이와 특수아)과 5, 6학년 남학생 한 명씩 총 네 명이 시간을 나누어 오기로 했다. 그중 유명 인사 5학년 남학생 정수(가명)가 있었다. 에이디에이치디(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앓으며, 유치원 때부터 툭하면 아이들을 때리고 싸우는 일이 잦아 학부모 민원을 많이 받는 바람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담임은 내게 며칠 만에 그만둘지도 모르겠다며 걱정까지 한다. 오전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자다, 정신이 들면 친구들과 다투는 일이 허다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날마다 교감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담임 때문에 프로그램을 신청했다고 들었다. 아이는 피해의식으로 다들 자신만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했고, 일이 터지면 주로 남 탓을 했다. 그 정도면 교사와 반 학생, 정수도 숨 쉴 공간이 필요했다.
정수가 왔다. 체구는 중간 정도로 예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 평범했고 심지어 고분고분했다.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도 아침부터 와 교실로 갈 생각을 안 했다. 반 친구들의 매서운 눈 화살을 피할 곳이 필요할 것 같아 제지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학력을 점검하니 2학년 실력에 머물러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5학년 과정을 듣느라 하루하루가 고역이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그래도 학원은 다니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공부라는데 강요할 수 없어 원하는 것(색종이 접기와 쓰리디 프린팅 펜 이용해 만들기) 위주로 하게 했다. 교실에서 잠만 자던 아이가 집중할 수 있는 게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기본(시계 보기, 더하기 빼기, 곱하기, 영어 알파벳)을 못하면 남이 무시하니 그거라도 하자고 타일렀더니 조금씩 손을 댔다.
어쨌든 아이에게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게 친구 관계다. 친한 친구 한두 명만 있어도 학교 생활이 즐겁다. 그런데 사고뭉치로 낙인찍힌 정수에게 친구가 있을 턱이 없다. 축구공을 가지고 와도 같이 놀 애가 없어 그물망을 풀지도 못하고 가져갔고, 매미 허물과 거미알을 찾으러 혼자 운동장을 배회하는 아이를 보면 참으로 안됐다. 부모님이 아이의 생활을 세세하게 알면 얼마나 마음 아플까 안쓰러웠다. 가끔 내가 동행해 주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정수에게 좋아하는 친구 있으면 데려오도록 했더니 같은 반 상준(가명)이를 불러왔다. 짙은 쌍거풀에 큰 눈이 인상적이었다. 정수와 마찬가지로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인성은 바르게 보였다. 중간 운동 시간에 같이 놀고, 체육 시간이 되면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후 상준이는 공존 교실에 자주 들러 놀다 가곤 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니 일찍 온 정수가 책상에 엎드려 죽을상을 하고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상준이가 절교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상준이에게 재산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화를 내고 앞으로 놀지 않겠다고 했단다. 근래에 정수 가족이 이사한 아파트를 보고 사람들이 부자라고 한다며, 그 말이 좋은지 내게도 몇 번 이야기했다. 초등학생이 억대가 넘는 돈 이야기 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상준이에게 은근히 과시하고 싶었던 듯하다. 먼저 사과하라고 하니 받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시간이 지나면 풀릴 테니 기다리라고 해도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며 세상 걱정을 다 품은 표정이다. 밤 열한 시가 넘도록 카톡으로 사과 문자를 수없이 했는데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며 안달복달이다. 그런 행동은 사과가 아니라 강요라며 상대가 싫어할 수도 있으니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타일렀다. 문자도 그만하라고 했다.
다음 날, 상준이를 불렀다. 아이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절교한 이유를 물었다. 예상대로 자기를 무시했고 알지도 못하는 재산을 물어 사생활 침해라며 친구로 인정할 수 없고, 그동안도 많이 참았다며 단호했다. 아이들의 그런 행동이 귀여워 웃음이 나오는 걸 꾹 참고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가 하는 말에 공감해 주며 어깨를 다독였다. 정수에게 다시 사과하고 앞으로는 그런 말 안 한다고 다짐하게 했다. 그리고 상준이에게 집에 가서 깊이 생각해 보고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말해 달라며 보냈다.
이틀 후, 아침에 교실에 들어서니 먼저 와 있던 정수가 밝은 얼굴로 인사한다. 드디어 상준이의 사과 문자를 받았다고 좋아한다. 다시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했단다. 앞으로는 친구들에게 억지 부리지 말고 먼저 양보해야 좋아한다며 타일렀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 날 상준이가 찾아왔다. 사과 받아 줬다고 말하며 큰눈으로 웃는다. 그리고는 걱정 끼쳐서 죄송했고, 신경 써 줘 고맙다는 말까지 하며 나를 감동하게 했다. 어린 녀석이 말도 어른스럽게 한다.
정수와 만난 지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지면에 다 옮기지 못했지만 그동안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그래도 주변 선생님들이 눈꼬리에 힘이 풀려 순진한 인상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교실에 가라면 온갖 상을 다 찌푸리더니 요즘은 스스로 찾는 일이 잦아졌다.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친구와 다투면 폭력 말고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걸 서서히 알아 가고 있다. 그래야 인정받는다는 것도. 특히 공존 교실에 온 후로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분노 조절이 안 되면 자리를 피하고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숨을 크게 다섯 번만 쉬라고 말했더니 집에서 연습한다고 했다. 본인 스스로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굳어진 일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아이의 손을 잘 이끌고 있는지 되묻는다. 아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데 어떤 게 정답인지는 모른다. 처한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 교실에는 정수와 같은 아이가 많다. 문제아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꽃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많이 남았다. 부디 보이는 행동만으로 눈길조차 거두지 않기를 바란다.
아침 산책길, 아파트 옆 초등학교 놀이터에서 학생들이 미끄럼틀을 타며 조잘거린다. 요즈음 보기 드문 광경에 가던 길을 멈추고 쳐다봤다. 깔깔거리며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에서 희망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