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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朝鮮經國典
1. 예(禮)란?
마을 공동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겠다. 한 벌거숭이 중년이 다가와서 “여쭐 것이 있습니다. 아들이 결혼하는데 며느리가 될 신부는 20세 때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모 밑에 있는데, 청첩장에 어떻게 써야합니까? 누구의 질녀라 써야 하는지?”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부모님의 이름을 써라. 거기에 ‘고(故)’니 ‘망(亡)’을 붙이지 말라. 부모는 생사여부를 떠나 부모임이 틀림없다. 돌아가신 것만 해도 슬픈 일인데 왜 못 밝히느냐? 단 청첩인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하면 될 것이다.”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맞습니다.” 했다.
혼인청첩장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름을 못 밝힐 하등의 이유가 없다.
부모님은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변치 않는 부모님일 뿐이다.
살아있는 청첩인만 따로 밝히면 된다.
예(禮)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항상 변하는 것이다.
2. 공자의 예(禮)
공자가 나이 50세 전후해서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는, 지금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벼슬을 한다.
공자가 성장한 곳 : 산동성 곡부(曲阜)
대사구(大司寇) 추관(秋官) 법무장관에 해당.
공자는 정공 14년(56세)에 노나라의 대사구가 되었다.
공자는 예(禮)에 밝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논어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공자가 태묘를 들어가는데, 매사를 물었다. 오른쪽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왼쪽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술을 몇 번 따라야 하는지 등 매사를 물었다.
태묘(太廟) 주나라의 시조격인 주공(周公) 단(旦)과 그 아들을 모신 사당. 이 사당이 노나라에 있기 때문에 공자는 주나라의 적통인물로서 자처했다.
子入太廟(입태묘), 每事問(매사문).
그랬더니 거기서 제사 지내던 제관들이 째려보면서, 누가 저 추인지자(鄒人之子)가 예를 안다고 했냐고 한다.
或曰(혹왈): 就謂鄒人之子知禮乎(취위추인지자지례호)?
여기서 추인지자는 공자의 아버지가 추나라에 가서 무관 벼슬을 했었기 때문에 부른 이름이다. 그런데 추나라는 독특한 나라라서 경멸하는 톤이 들어가 있다. 저 사람이 예에 밝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태묘에 들어와서 매사를 묻는 걸 보니, 아는 게 없는데, 누가 저 사람이 예에 밝은 사람이라고 했느냐고 경멸하는 것이다.
入太廟(입태묘), 每事問(매사문)
그때 공자가 그 말을 듣고, 한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시예야(是禮也)이다.
이 말은 내가 묻는 것이 곧 예라는 뜻이다.
묻는 것이 예이다. 우리는 예(禮)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지만, 예라는 게 그런 게 아니다.
아까 내가 청첩장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이 나한테 물은 게 예이다. 예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다.
예(禮)란 묻는(問)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예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며, 예가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
끊임없이 예는 변하는 것이고, 정답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데 예가 없을 수 없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과거가 아니다. 고정되어 있는 예의 덩어리가 아니다. 어른한테 인사하는 게 예의 모든 것이 아니다.
예는 공자로부터 시작하는데, 공맹지도에서 공자는 스스로가 ‘나는 예가 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단지 묻는 게 예라고 하고 있다.
제관들 보기에, 주공의 태묘에 들어와서, 그 나라의 예를 대변하는 법무장관이며, 예의 전문가라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해야 하는데, 예를 묻고 있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묻는 것이 바로 예라고 하고 있다.
子問之, 曰 : “是禮也.”
<논어 팔일>
묻는다는 것은 제관들에게 예를 표명하는 것이고, 행여 내가 틀린 것이 있느냐고 묻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상대의 의견을 듣는 게 바로 예라는 것이다.
예는 항상 동적인 과정(Dynamic Process)이다.
Dynamic Process 동적 과정
예는 동적인 과정이다. 예는 명사가 아니고 동사이다.
그러니깐 전통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동적인 과정이다. 우리 젊은 학생들도 이런 강의를 통해서, 뭔가 우리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해주었으면 하는 아주 절박한 심정에서 이 강의를 하고 있다.
3. 맹자의 민본 사상(盡心章句下 제14장)
맹자 사상에서 민본사상을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문구가 있다.
▶ 孟子曰(맹자왈): 民爲貴(민위귀), 社稷次之(사직차지), 君爲輕(군위귀).
[맹자 왈, 백성이 가장 존귀하고,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
우리가 옛날에 국가를 이야기할 때, 종묘사직이라는 말을 쓴다. 종묘와 사직이라는 것은 정도전이 설계하고 만들었다.
주례에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 좌묘우사(左廟右社)
왕이 앉은 자리에서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 사직을 둔다.
- 주례, 고공기
경복궁에 왕이 남면(南面)을 하고 앉는다. 왕이 앉는 곳에서 좌편에 종묘가 오고, 우편으로 사직이 오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종묘는 왼쪽에 있고, 사직단은 오른쪽에 있다.
‘사직공원’이라는 말은 굉장히 불경스러운 말이다. 일본놈들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말살시키려고 그렇게 고친 것이다. 사직단으로 고쳐야 한다. 일본놈이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창경궁에도 동물원을 만들었다.
사직단을 사직공원으로 부르는 것은 로마의 성(聖)베드로사원을 베드로공원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일본 식민지의 조선 얼 말살정책의 악습이 남아있는 폐해이다.
사직(社稷)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과 똑같은 위용을 가지고 지냈다. 종묘가 수직적이라고 하면, 사직은 평면적이다.
종묘 조상숭배 수직적 Vertical
사직 국토숭배 수평적 Horizontal
옛날에는 땅의 신이 중요했다. 인간이 먹는 것은 땅이다. 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근원적으로 유지시켜주는 신이다.
社 = 示(신)+土(땅):땅의 신.
민가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으뜸가는 신은 땅의 신이었다.
땅은 우리에게 생명의 근원이다.
우주 생명이 곧 하느님이다.
사직단은 우리 민족 최고의 성전(聖殿)이다.
사직이라는 것은 엄청 중요한 것이다.
사(社) 땅의 신,
직(稷) 곡식의 신
직(稷)에는 벼 화(禾)가 들어가 있다. 즉 곡식이라는 말이다.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이다.
사직은 옛날 동양인에게 최고의 신전이었다. 로마에 가면 베드로 성당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만, 조선조의 사직은 그와 똑같은 것이다. 그 정도로 권위와 위풍이 서려 있던 곳이다.
사직이 최고의 신전이었기에 우리가 나라를 ‘종묘사직’이라고 부른 것이다.
유교국가의 국교를 말한다면 사직 이상이 없다.
로마의 국교 기독교
조선의 국교 사직단(社稷壇)
사직은 대단하게 알아야 하는 건데 지금은 사직에 대한 존엄성이 너무 없어졌다.
맹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是故得乎丘民(시고득호구민), 而爲天子(이위천자),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얻은 사람만이 천자가 되고,]
▶ 得乎天子(득호천자), 爲諸侯(위제후),
[천자의 마음을 얻은 자는 제후가 되고,]
▶ 得乎諸侯(득호제후), 爲大夫(위대부):
[제후의 마음을 얻은 자가 대부가 된다.]
▶ 諸侯危社稷(제후위사직), 則變置(諸侯)(즉변치제후),
[만약 제후가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곧바로 제후를 갈아 치울 수 있다.]
임금이나 제후를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다. -맹자-
▶ 諸侯無道(제후무도), 將使社稷爲人所滅(장사사직위인소멸), 則當更立賢君(즉당경립현군), 是君輕於社稷也(시군경어사직야)
[제후가 무도하여, 장차 사직이 남들이 멸하는 바가 되면, 마땅히 현군으로 바꾸어 세우니, 이는 임금이 사직보다 가벼운 것이다.]
▶ 犧牲己成(희생기성), 粢盛旣潔(자성기결), 祭祀以時(제사이시),
[사직에 희생을 차려놓고, 곡식들을 깨끗하게 담아놓고, 제사를 때맞추어 지냈는데,
희생이란 양고기, 소고기, 닭고기 같은 것을 잘 담아놓는 것이다. 지금도 10월에 사직대제가 열린다.
▶ 然而旱渴水溢(연이한갈수일), 則變置社稷(칙변치사직)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나면 사직도 갈아 치워라!]
맹자 사상은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신도 효험이 없으면 갈아 치우라고 했다.
맹자는 종교의 최고신도 갈아 치울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예수건, 알라건, 야훼건 재미없으면 갈아 치우라는 것이다. 이것이 민본위 사상이다. 제후도, 임금도, 사직도 갈아치울 수 있다. 그러나 백성은 갈아치울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의 변치(變置)의 논리는 백성(民)을 갈아 치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4. 유교의 합리주의
과거 유교의 합리주의가 얼마나 무서운 합리주의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신도 갈아치우라는 것이다.
유교의 합리주의(Confucian Rationalism)는 모든 종교적 권위에 불복하는 민본사상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를 구실 삼아서 백성의 위대함을, 종교를 가지고 억압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 항상 위정자들의 사기(詐欺)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권력자들은 종교를 빙자해서 백성들을 기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지혜를 가지고도 백성들을 기만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유교는 통치자들이 종교를 빙자하여 백성을 기만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유교는 윤리이며, 교육이며, 상식의 합의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게 종교라고 사기를 치지만, 유교의 기본은 종교조차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유교적 상식을 가지면, 일요일 교회에 가지 않고도, 절간에 가지 않고도 편안히 살 수 있다. 종교라는 조직에 의거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인간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얼마든지 인간이 위대하게 살 수 있고,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얼마든지 종교적으로 살 수 있다.
바로 유교의 위대성이라 하는 것은 나같이 모든 종교에 구애 없이 사는 사람들, 일요일 발 뻗고 자는 사람들, 그리고 북한산의 산천초목을 보면서 그 산들바람에 도취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신념을 주는 것이 바로 유교이다.
제도적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닌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뛰어 넘는 상식의 종교다.
오늘날 우리나라처럼 극성한, 과격한 온갖 종교가 다 들어와 있지만, 종교분쟁도 종교전쟁도 없는 나라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이다.
한국인의 극단적 종교 성향에도 불구하고 종교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것은 유교적 합리주의의 상식적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도올-
우리나라가 이렇게 위대한 이유는 바로 정도전이 건국한 조선왕조가 모든 종교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상식적 유교문화를 확립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이다. 며느리는 교회에 가고, 시어머니는 절에 가도, 모이면 유교적 덕성 위에서 한 집안 식구로 평화롭게 같이 살 수 있다. 유교라는 상식(Common Sense)이 없다면 매일 집안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계급이 없는 사회를 꿈꾸었고,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지만, 삼봉 정도전이 만들려 했던 조선왕조는 종교가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칼맑스 계급없는 사회(Class-less Society)
정도전 종교없는 사회(Religion-less Society)
종교라는 위선과 기만이 없는 사회, 종교를 빙자해서 인민을 억압하고, 백성들을 뜯어먹지 않는 사회, 종교가 없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여기에 유교 혁명의 무서운 혁명적 본질이 있는 것이다. 유교가 말하는 민본주의가 얼마나 무섭고, 치열한 정신의 민본주의인가를 알아야 한다.
정도전 등이 14~15세기에 달성하려 했던 그 민본주의는 오늘날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이다.
유교적 합리주의는 과거가 아니라 인류의 영원한 과제상황(Perennial Theme)이다.
전 인류가 종교적 차별이나 기만성 없이 평화롭게, 도덕과 인륜적인 것만 가지고 평화로운 질서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사회, 이것이 유교가 꿈꾸었던 사회이다. 그것을 정도전은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맹(孔孟)의 사상을, 조선왕조를 통해서 철저하게 실험하려 했다. 그 실험의 결과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그 바탕 위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5. 정보위 1.
군주가, 이 세계를 다스리려는 자들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들이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보위에서 말하기를 “사사로운 마음으로 구차하게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말라.”고 했다.
▶ 然所謂得其心者(연소위득기심자), 非以私意苟且爲之也(비이사의구차위지야),
[그렇다면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서 구차하게 백성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구차하다 : 고전한문의 용법인 구차(苟且)에서 온 우리말이다.
신문, 뉴스를 보면, 왜 그렇게 구차한지 모르겠다. 개인으로서 사사로이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하기 위해, 당선되기 위해서, 전부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서 구차스럽게 지랄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非以違道于譽而致之也(비이위도우예이치지야):
[도를 어기면서까지 명예를 구하는 그런 치사한 짓을 해서도 안 된다.]
내가 선거 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게 조선 왕조의 헌법이다. 조선 왕조의 헌법이 오늘날 읽어도 이렇게 재미있다. 바른 말을 하고 있다.
익이라는 신하가 순임금한테 한 유명한 말씀 중에 하나가 도를 어기면서까지 명예를 구하는 그런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유명한 서경의 말을 정도전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익(益)은 순(舜)임금의 명 신하였다. 이 구절은 <서경 대우모>에 나오는데 익이 순임금에게 간언한 말이다.
정도전은 <주역> <서경> <시경> <맹자> 등의 문헌에 이렇게 밝을 수가 없다. 그 분의 저작을 보면, 명 문장가였고, 존경스럽다.
▶ 亦曰仁而已矣(역왈인이이의),
[역시 인밖에 없다.]
결국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인(仁)한 마음을 가지는 것밖에는 없다.
▶ 人君以天地生物之心爲心(인군이천지생물지심위심),
[인군은 천지생물지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고,]
인(仁)하다는 것은 천지생물지심이라고 했다. 천지가 모든 만물을 생하는 마음으로써 내 마음을 삼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깐 대의를 위해 살아야지, 사의를 가지고서 구차하게 구걸이나 하고, 도를 어기면서까지도 그렇게 명예를 구하고, 이래서 되겠냐는 것이다.
지배자의 인(仁)한 마음 = 천지의 생물지심(生物之心)
▶ 行不忍人之政(행불인인지정):
[사람이기 때문에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행하여야 한다.]
길거리에 아름다운 꽃이 있을 때, 그 꽃을 꺾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의 꽃꽂이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을 꺾을 수 있냐는 것이다. 不忍은 차마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불인(不忍)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마음
6. 맹자집주 공손추 상 제6장
맹자의 유명한 말로, 인간들은 모두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있다고 했다. 인간에게는 차마 이러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다.
▶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인개유불인인지심),
[맹자 왈,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성선을 증명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말이다.
유자입정(孺子入井) 맹자가 성선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 예
어린아기가 아무 생각없이 우물로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갑자기 보았다면, 그때 가슴이 흠찟 놀라게 된다는 이야기다.
▶ 所以謂 人皆有不忍人之心者(소이위인개유불인인지심자),
[사람마다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하는 까닭은]
▶ 今人 乍見孺子 將入於井(금인 사견유자장입어정),
[이제 어떤 사람이 문득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져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 皆有怵惕惻隱之心(개유출척측은지심),
[모두 깜짝 놀라서 측은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니]
▶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비소이내교어유자지부모야),
[그런 측은지심이 나는 것은 그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도 아니고,]
▶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비소이요예어향당붕우야),
[향당의 명예를 얻기 위한 것도 아니고,]
▶ 非惡耳聲而然也(비오이성이연야):
[잔인하다는 명성이 싫어서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程子曰(정자왈): 滿腔子是惻隱之心(만강자시측은지심),
정자가 말하길 : 인간의 창자에는 가득 찬 것이 측은지심이라고 했다.
7. 정보위 2.
▶ 使天下四境之人(사천하사경지인), 皆悅而仰之若父母(개열이앙지약부모),
[천하 사경의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기 부모를 믿고 따르듯이 우러러 보면서 기뻐할 것이다.]
▶ 則長享安富尊榮之樂(칙장향안부존영지락), 而無危亡覆墜之患矣(이무위망복추지환의)
[그렇게 되면, 안부존영지락은 길이길이 누리게 될 것이요, 꺼꾸러지고 넘어져서 실추하는 그러한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 守位以仁(수인이인), 不亦宜乎!(불역의호),
[위를 인으로써 지킨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恭惟(공유) 主上殿下(주상전하), 順天應人(순천응인), 驟正寶位(취정보위):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백성들의 요구에 응하여 보위에 올랐다.]
8. 순천응인
여기서 중요한 말은 순천응인이다.
순천응인(順天應人) 조선왕조의 혁명이 무력적 전복이 아니라 합법적 절차에 의한 순리적 정권이양이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구문
정도전 등은 공민왕 때 정계에 진입한 사람들이다.
@ 공민왕(恭愍王, 1351~74재위)
고려 제 31대왕으로서 개혁에 힘썼으나 집권말기에는 실정을 거듭하였고 퇴폐적인 삶을 살다가 불행하게 살해되었다.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는 몽골태생의 원나라 여자였다.
@ 노국대장공주
공민왕의 정비 인덕왕후 몽골여자. 본명은 보탑실리. 1365년 애낳다 죽음
노국공주는 사막의 강인함과 싱싱함이 있었을 것이다. 굉장히 이국적이고 잘생긴 여자였을 것이다.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정말 사랑했다. 노국공주는 아기를 낳다가 비극적으로 죽는다. 노국공주가 죽고 공민왕은 정신이상증세를 보인다. 이 사람이 일종의 호모였다. 동성연애를 했다.
공민왕은 귀족의 아들로 구성된 자제위 소속의 김홍경, 홍륜 등과 변태적인 난잡한 음행을 일삼았다.
동성연애로 그친 게 아니라, 자신의 동성연애자로 하여금 자기 부인을 강간하게 한다.
익비 한씨는 공민왕의 협박 하에 홍륜, 한인에게 강간당하여 아기를 낳는다.
말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났다. 고려왕조가 그 지경까지 갔다. 자기 부인을 들여서, 자신과 놀아나던 젊은 아이들에게 강간을 시켰다. 그리고 아이를 배면 좋아했다. 그런 와중에 치정에 얽혀 추저분하게 살해를 당한다.
익비의 아이를 자기 자식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그들을 해하려 하자, 내시 최만생, 홍륜 일당이 침전에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살해한다.
여기서 순청응인이라는 말은 조선왕조의 개국은 무력적 혁명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려 왕조가 썩을 대로 썩어서 이미 통치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종묘는 조선조 왕의 위패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공민왕의 묘가 있다.
공민왕의 사당이 조선왕조의 종묘안에 모셔져 있는 것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고려왕조의 선양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1392년 공민왕의 부인 정비(定妃) 안씨가 이성계 옹립의 전교를 내렸다.
우왕 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다. 명나라를 치러 보낸 것인데 이성계는 명나라를 치러 가는 게 가당치 않았고 보았다.
@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1388)
이성계가 명나라를 치러갔던 10만 대군을 철수시킨 사건. 이로써 고려왕조 멸망의 대세가 결정되었다.
명나라가 새로 일어나는 나라인데 그걸 쳐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당시 10만 대군을 몰고 갔다. 평안도로 해서 압록강 넘어가서 갔다. 그때가 4월이었다. 농번기였다. 그런데 10만 명을 차출해 갔으니, 국민의 원성이 높았다.
이성계는 일단 명나라를 치는 게 명분에 합당치 않다고 보았다. 망해가는 나라의 말을 듣고, 새로 일어나는 나라를 치는 게 합당치 않다고 보았다. 이건 외교정책상 오류라고 생각했다. 또한 농번기였고, 역병이 돌아서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라가 비면 왜구들이 침범하기 때문에 도적을 부른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위화도에서 회군을 해서 돌아온다. 회군이라는 것은 군대를 철수해서 개성으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 위화도 회군의 4대 이유
1. 명(明) 대항은 외교적 오판.
2. 농번기
3. 왜구 침임을 유도
4. 전염병
생각해보라! 10만 명의 장정들이 부모의 품에 살아 되돌아왔을 때, 백성들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이성계는 이때 민심을 크게 얻었다.
그러니깐 이건 반역이다. 회군으로 최영 장군은 실각하게 되고, 우왕이 끝나고, 창왕으로 넘어간다.
이성계의 혁명성공은 고려왕조의 실정에 항거한 농민군사의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농민봉기이기도 했다.
그 후, 정몽주와 이방원의 아슬아슬한 이야기가 있고, 결국 왕조가 바뀌게 된다.
당시 공민왕의 정비 안씨가 살아 있었다. 그러니깐 그때는 대왕비였다.
@ 정비 안씨(定妃 安氏)
죽성군 안극인의 딸. 공민왕이 강간시키려 했지만 자살로 위협하여 몸을 지켰다.
그리고 선양의 전교를 내렸고 조선왕조 개창 후에도 살아남았다.
정비 안씨가 공양왕한테 교지를 내린다. 더 이상 너희들은 통치능력이 없으니 이성계에게 왕위를 주라고 한다. 즉 선양의 형태를 취한다. 옛날에 왕조가 바뀌는 건 두 가지 방법뿐이었다. 방벌(放伐)이 아니면 선양이었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형식상 선양으로 된 것이다.
조선왕조의 혁명은 방벌(放伐)이 아닌 선양(禪讓)이었다.
이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50여명의 신하들이 이성계한테 가서 왕위를 받으라고 한다. 당신이 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정도전, 조준, 남은 등 50여명의 대소신료들이 공양왕으로부터 옥새(玉璽)를 받아내어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가 보위에 오를 것을 간청한다.
이렇게 선양의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성계는 3번이나 사양을 한다. 난 자격이 없다. 내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이성계는 상당한 덕장이었다. 계속 사양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추대를 한다.
그 다음에 도평의사사라는 곳에서 그것을 정식적으로 비준한다. 고려의 최고 정무 기관에서 정식으로 의결을 하는 것이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고려왕조의 최고 정무기관. 여기서 이성계의 추대를 인준했다.
결국, 선양에서 추대로, 다시 인준이라는 합리적 절차를 거쳐 왕조가 바뀌었다. 세계 역사상 이렇게 조직적으로 무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선양 --> 추대 --> 인준
영국사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한국역사는 더 대단하다. 중국에서도 혁명은 어떤 걸출한 개인이 나타나서 말을 타고 싸움을 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조선왕조 혁명의 특징은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한 사람이 아닌 지식인 집단이 집단적 행동으로 모든 절차를 밟아서 물러나는 자에게는 선양(禪讓)의 명분을 주고, 그 정권을 새롭게 얻는 자에게는 추대(推戴)의 형식을 갖추어서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밀려난 자에게는 선양의 명분을!
오르는 자에게는 추대의 형식을!
그러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출발은 세계 정치사상 유래가 없는 아주 합리적이고 멋있는 절차를 밟았다. 이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이성계는 옥좌(玉座)에 앉았다.
조선왕조의 개국과 같이 무혈혁명으로 이렇게 조직적으로 혁명이 이루어진 유례는 세계정치사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 이야기를 너무 좋게만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실제적으로 세계 모든 역사를 적나나(赤裸裸)하게 까놓고 볼 적에, 우리 역사의 진행방식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너무 몰랐을 뿐이다.
조선왕조의 성립은 권력의지를 가진 개인의 혁명이 아니라 사회개혁의 시대적 요구를 실현한 사상가그룹에 의한 집단적 혁명이다.
이렇게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집단적인 지식인의 혁명이 성공한 유례가 없다.
그래서 주상전하는 순천응인(順天應人)했다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9. 정보위 3.
▶ 恭惟主上殿下(공유주상전하), 順天應人(순천응인),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에 따르고 백성들의 요구에 응하여]
순천응인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최초 헌법에 이것을 박은 것이다.
▶ 驟正寶位(취정보위),
[빠르게 그 보위를 바르게 하셨으니,]
▶ 知仁爲心德之全(지인위심덕지전), 愛乃仁之所發(애내인지소발)
[인이 심덕의 온전함이 되는 걸 알고, (모든 백성을) 아끼는 것이 인을 발하는 바이니,]
애(愛)는 원래 고전에서는 사랑 애가 아니라 아낄 애이다. 부인을 아끼는 것이 사랑한다는 말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고 아낀다.
애(愛) 사랑한다(X)
아낀다(0)
▶ 於是正其心以體乎仁(어시정기심이체호인), 推其愛以及於人(추기애이급어인),
[이에 그 마음을 바로잡아 인을 체화하고, 그 아낌이 백성들에게 이르렀음을 헤아릴 수 있다.]
▶ 仁之體立而仁之用行矣(인지체립이인지용행의),
[인의 본체가 서고, 인의 쓰임이 행하여졌다.]
민본 사상의 가장 핵심은 인이다.
체용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많이 쓰던 말인데, 이것이 주자학이나 성리학같은 신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되어 있다.
체(體) : 본체적 측면
용(用) : 기능적 측면
체는 본체적인 것이고, 용은 기능적인 것을 말한다.
▶ 嗚呼!(오호)
[오호라!]
감탄사이다.
▶ 保位其位(보위기위), 以延千萬世之傳(이연천만세지전), 詎不信歟(거불신여):
[그 위(位)를 보지하여 천만세로 뻗어 전해지리라는 것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리오!]
조선왕조는 이렇게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맹자의 민본 사상을 기초로 해서, 고려 말 사회의 여러 가지 어려웠던 사회적 질병을 고쳐가면서 이렇게 발 빠르게 그 보위를 바르게 함으로써 조선왕조가 성립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앞으로 천만세를 가리라고 확신을 하고 있다.
정도전의 왕조에 대한 하나의 신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0. 혁명의 시대
조선왕조의 헌법인 <정보위>에 담긴 정도전의 꿈은 500년을 지속하였다. 인류사상 500년을 유지한 왕조는 없었다. 조선왕조는 인류사상 가장 장수한 왕조이다.
왕조의 장수를 좋다, 나쁘다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역사는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기 어렵다. 임란 때 한 번 바뀌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500년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다.
그렇게 많은 환란이 있었지만 조선왕조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썩은 놈들이 잘도 버텼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500년을 유지하는 그 내면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자정 능력과 메커니즘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왕조의 500년 장수(Longevity)는 단순히 행운의 결과는 아니다. 그 내면에는 장수를 가능케 한 합리적인 질서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왕조의 이러한 패러다임은 500년 동안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잘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그 패러다임이 지난 19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여 지금 끊임없이 변해가는 변혁의 시기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대 변혁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정도전이 고민했던 그와 같은 혁명의 기운이 지금 우리사회에도 똑같이 있다고 생각할 적에, 앞으로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어떠한 철학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가 개척해 나갈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위대한 과업을 위해서 과거 이러한 분들의 생각을 한번 더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혁명은 이루어지고야 만다! 21세기 개벽의 새 날이여!
다음 시간에는, 오늘도 종교적 주제가 나왔지만, 정도전이 구체적으로 불교를 어떻게 비판했는지 살펴본다.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종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고려라고 하는 썩은 체제를 유지했던 모든 부패세력의 근원으로서의 불교적 사유를 근원적으로 바꾸어버리지 않으면 조선왕조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불교 이론 그 자체의 부정이 아니아. 불교를 비판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는 도래할 수 없었다. 그의 불교 비판은 곧 그의 정치혁명이다.
그 사람의 불교 비판 속에서 그 사람이 실제로 지향하려 했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사람이 구상했던 정치체제는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을 보다 본질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이렇게 개명한 시대의 깨인 눈을 가지고 봐도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매우 유익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본다.
다음부터 <불시잡변>이라는 정도전이 죽기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그의 유고에 해당하는 위대한 논술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