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5월 18일 목요일
김남주 평전
김미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인 김형수가 쓴 김남주 평전을 읽었다. 김남주는 내가 대학 때부터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던 시인이었다. 내 서재에 그의 시집이 제일 많이 꽂혀 있다. 이 평전은 예전에 사고 싶었으나 그때는 절판이었다. 아쉬웠으나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남편이 문학 평론가 김형수의 글발에 감동하여 내게 선물했다.
나는 김남주 시인이 시인인 줄만 알았다. 어렴풋이 우리 사회에 변혁을 꿈꾸는 혁명적 시를 주로 쓰는 민중문학 시인이라 생각만 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위해 몸과 정신을 모아 치열하게 생각하고 실천한 인생이었다. 삶의 고비고비가 시로 나타난다. 그의 시가 민중가요로 만들어져 시위할 때마다 눈물로 불린 걸 기억한다. 말이 없고 부드러운 표정 사이에 어쩜 그렇게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는지~~ 시 한 편 한 편 마다 찡한 눈물과 함께 퍼런 소름이 돋는지~~ 네루다, 카프카, 체 게바라, 프란츠 파농, 노자, 김수영 시인, 신동엽 시인, 김준태, 문병란, 황석영, 고은, 이시영, 윤상원, 이 강, 이학영, 지선 스님, 박석무, 염무웅, 임헌영 신경림, 백낙청, 문익환 목사, 윤한봉 황지우 시인, 안치환 등 내게 익숙한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여 그의 인생을 따라가기가 무척 쉬었다. 시도 자주 읽었던 터라 두꺼운 책이지만 빨리 읽었다.
* 196 쪽 ㅡ 굳이 논하자면 이를 20세기의 혁명가 정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혁명가란 '전망' 을 두고 싸우는 자를 말한다. 조직도, 체계적 대안도 없는 망이 ㆍ 망소이의 항거에 어떤 변혁적 세계가 기대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노래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러니까 김남주가 생각하는 최선의 상태는 언제나 '싸운다' 이고 그것은 결과가 이니고 과정으로 존재하는 동사적 상황이다. 생명은 언제나 과정 속에 놓여 있다. '과정' 이라는 강물 속에는 물살을 헤치며 사는 생명체도 있고 그것을 포기할 죽은 물체도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 245 쪽 ㅡ 그의 눈빛은 '구체적으로 세계를 살아내는 순간' 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지식과 교양으로 무장된 화려한 허영의 세계를 과시하는 장면을 보면 그걸 둘러싼 상류 문화의 거짓 아우라를 단숨에 벗겨버릴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고는 했다.
*440 쪽 ㅡ 나는 당시에 이 같은 청산유수를 20세기의 마지막 고비를 넘는 혁명적 김삿갓의 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토록 힘들이지 않고 시를 쓸 수 있을까? 아마도 이렇게 명쾌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는 허구의 필요성이 없으며 또 이토록 풍부하게 시적 관능이 살아 있는 자는 어떤 소재도 굳이 시화 (詩化)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공상의 기록자들과 정반대라고 해도 된다. 그에게 시는 상당히 단순한 어떤 것이고 , 문학이란 현실의 정밀한 추후 서술이거나 뼈를 깎는 정신적 노고 없이도 이루어지는 모사(模寫) 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남주는 초월적 공간에서 애써 이미지를 조립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인류 공동의 대지에서 보고 듣는 말로 범속한 인간 심정의 내부를 헤치고 들어가 그곳에서 대답하고 모험적인 갱도를 설치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그가 짧은 시간에 분출한 문학적 현상은 태풍에 비견할 만했다. 양도 놀라우나 질은 더 놀라웠다. 다음은 그런 비결을 알리는 창작론을 시로 쓴 것이다.
* 474 쪽 ㅡ김남주는 적어도 전사가 되겠다고 나선 뒤부터는 늘 자신을 다스리는 몇 가지 다짐 항목을 정해두고 있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 충분한 삶이 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도 먼저 질서와 체를 세우고 침착,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할 것, 어떤 일에서나 자주적인 입장과 창조적인 입장이 있다는 걸 알고, 불굴의 의지와 초지일관의 신념과 수만 고비 시련의 늪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낙관성을 가질 것,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관계, 사물과 사물관계에서 어떤 운동, 어떤 행동,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반드시 모든 관계를 일면적으로 보지 말고 전면적으로 고찰하여 판단하고, 일을 실행할 때도 스물 네 가지 측면에서 검토할 것,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칠 것, 한 인간의 능력이란 우주의 그것 앞에서는 실로 보잘 것 없나니.
* 사랑은
김남주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 잿더미
노예라고 다 노예인 것은 아냐
자기가 노예라는 것을 알고 그게 부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고 주인에게 대드는 자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닌 거야
보라고 옛날 옛적 고려 적에
칼을 맞아 죽을지언정 항복은 하지 않겠다
기어코 개경까지 쳐들어가
관권들의 목을 베고 빼앗긴 재물들을 도로 찾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들고 일어섰던 망이와 망소이를 보라고
( ㆍㆍㆍㆍㆍㆍ) 착취와 억압을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게 부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싸우는 자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닌거아
해방자인 거야 해방자!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 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 ㆍㆍㆍㆍㆍ)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 손
열여섯 살까지였던가 웃마을 고씨 집을 꼴머슴으로 와서 잔뼈가 굵었고
스무 살 훨쩍 넘어서까지 저 아래 기와집 상머슴이었다네
밤과 낮의 눈코 뜰 새 없는 노동이 그의 하루하루였고
제 앞으로 땅 한 뙈기 가지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다네
그 꿈은 이루어졌다네 나이 서른둘에
늦은 장가와 함께 이루어졌다네 (ㆍㆍㆍㆍㆍ)
자네는 볼 수 있을 것이네 아침에 일어나면
일분일초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이 손을
금방까지 싸리비로 안마당을 쓸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손은 뒤란에서 장작을 패고
쇠죽솥에 불을 때고 있었는데 또 어느새
변소에 가서 합수와 보릿대를 만드네 (ㆍㆍㆍㆍㆍㆍ)
그러나 나는 보지 못했네 아직
이 손의 주름이 부자들의 웃음처럼 퍼지는 것을
제 노동의 주인이 되어 이 손이
제 입으로 쌀밥을 가져가는 것을
* 이버지의 무덤을 찾아
추수가 끝난 들녘 나는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밤길을 걷는다
마른 옥수숫대 사이로 난 좁다란 발길이 끝나고
어머니의 그림자가 논길로 꺾이는 어귀에서
나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논 가에 쓰러져 있는 흰옷의 허수아비를 일으켜 세운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절 받으세요
그동안 숨어 살고 갇혀 사느라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그러나 허수아비는 대답이 없다
아야 거그서 뭐하냐 어서 오지 않고
저만큼에서 어머니가 재촉하신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래요 어머니
가뭄의 논바닥에 물을 댄다고 아버지와 같이 여기서 이슬잠을 자다가
새격에 내가 피뚱을 싸는 배를 앓았어요
니도 알고 있어야 그해 가을 일을
그때 느그 아부지 놀래가지고 너를 업고
어성교 약방으로 달려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야
그날 새벽에 니가 꼭 죽는 줄 알았어야
나는 다시 어머니의 등불을 따라
도랑을 건너고 솔밭 사이 황톳길로 들어선다
다 왔다 저기 저것이 느그 아부지 묏등이어야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넘어 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너머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러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 노래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시를 쓸 때는
시가 슬슬 나오구나
거미줄이 거미 똥구멍에서 풀려나오듯이
막힘없이 거침없이 빠져나오는구나(ㆍㆍㆍㆍㆍㆍ)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나 같은 놈에게
멋도 없고 가락도 없고 서정도 없는 엉터리 시인에게
이런 일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일까 벽이
내 귀를 막아주어서 그러는 것일까 (ㆍㆍㆍㆍㆍㆍ)
시인이에 박해가 극에 달해있어 아슬아슬
백척간두에 모가지를 걸고 있는 자유대한의 시인이여
전후좌우 살피지 말라 시를 쓸 때는
시를 쓸 때는 어둠으로 눈을 가리고 써라
공포탄으로 귀를 막고 침묵 속에서 써라 내일 아침이면
뜨는 해와 함께 밑씻개가 되기 위하여 오늘밤에 써라
쓰는 족족 어둠으로 지워가면서 써라 찢어가면서 써라
사후의 부활? 아나 천주학쟁이 너나 먹어라 내던져주고 써라
사후의 평가? 아나 비평가 너나 처먹고 입심 길러라 하고 써라
* 길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이 길 어디메쯤 가면
낮과 밤을 모르는 지하의 고문실이 있고
창과 방패로 무장한 검은 병정들이 있이 길 어디메쯤 가면
바위산 골짜기에 총칼의 숲이 있고
천길만길 벼랑에 피의 꽃잎이 있고
* 시를 쓸 때는
네가 쓴 시가 깜부기가 될지 보리밥이 될 지 그것은 농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꼴뚜기가 될지 준치가 될지 그것은 어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황금이 될지 똥금이 될지 그것은 광부에게 맡기고 써라
네가 쓴 시가 비싸게 팔릴지 싸게 팔릴 지 그것은 임금노동자에게 맡기고 써라
* 김형수 평론가의 말 ㅡ 이제 최중 결론을 짓고 끝내자. 내가 김남주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감동한 점은 그가 이웃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일상의 경쟁에서 언제나 '자발적 무능' 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를 추적하는 형사조차도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묻게 만들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김남주 같은 정신들이 싸워서 지켜온 인간의 존엄성을 물려받아 지상의 가치들을 학대하거나 탈진하기 일쑤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김남주의 글이, 실로 설명하기 어려운 생의 기슭에서 거듭 '21세기의 인류는 타자 앞에서 무능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치러야 한다' 고 생각했다. 우리는 동물들 앞에서도, 저 말 없는식물들 앞에서도 지금보다 훨씬 무능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누군가가 이 문명이 가져온 엄청난 손실을 감당할 내공을 기르지 않으면, 대지가 더는 인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 김남주는 아주 대단하고 위대한 시인이다. 평전을 읽으면서 그의 삶이 내뿜는 불굴의 의지와 뜨거운 인간의 사랑을 배웠다
첫댓글 김남주 시인을 검색해 보다가 선생님의 알토란같이 글을 읽게 되어 가입했습니다.
식물의 위대함, 인간의 미약함을 실감하며 가난한 빈 마음으로 호미 한 자루 쥐고 흙과 함께 무능하게 살아 가는 농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