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29권 / 윤음(綸音) 4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을 성전(聖殿)에 올려 배향하는 데 관한 윤음 시행하지 않았음
왕은 이르노라. 문묘(文廟)는 예의(禮義)가 이로부터 비롯되는 곳이자 사전(祀典)이 이로부터 본보기를 삼는 바이다. 부자(夫子)를 모시고 유선(儒先)들을 차례대로 배향하였으니, 덕행을 상징하고 공적을 보답하는 것이 이에 달려 있고 고상한 덕행과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실천이 이에 달려 있으며 학술을 바로잡고 법도를 밝히는 것이 또한 이에 달려 있다. 비록 오르내리며 읍양(揖讓)하는 것이나 의물(儀物)과 도수(度數)의 미미한 형식과 자잘한 절차에 있어서도 오히려 예전의 잘못된 것을 따라 고식적으로 하여 예를 삼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위서(位序)의 상하나 향사(享祀)의 선후에 있어 터럭만큼이라도 구차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평음후(平陰侯) 유자 약(有子若)을 무(廡)에서 제사하는 것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여기고 널리 상고하여 항상 개연하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대개 문묘에 배종(配從)하는 데에는 세 등급이 있다. 정전(正殿)에 배향(配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사성(四聖)이 그것이다. 또 동서서(東西序)에 종향(從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자 문하의 십철(十哲)과 송조(宋朝)의 육현(六賢)이 그것이다. 그리고 동서무(東西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자 문하의 여러 제자 이하에서 본조(本朝)의 여러 유선(儒先)에까지 이르는 것이 그것이다.
십철의 명목은 누가 처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데, 다만 《논어(論語)》 가운데 네 가지 명목으로 나눈 말로 인하여 그 사람들의 수를 세어 철인(哲人)이라 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논어》의 이 말은 진(陳)ㆍ채(蔡)에서 따르던 사람만을 가지고 이렇게 나누어 소속시키는 명목을 만들어 성인 문하의 인재가 성대하였음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도통(道統)을 전한 아성(亞聖)인 증자(曾子)도 거기에 끼이지 않았으니, 이로써 성인 문하의 현철(賢哲)을 다 포괄하고자 한다면 실로 지극히 옹색하지 않겠는가. 이 이후로 문묘의 사전(祀典)은 또한 십철로 굳게 정해졌는데, 공자 문하의 고제(高弟)인 안자(顔子)를 올려 배향하게 되자 증자(曾子)로 보충하고 증자를 올려 배향하게 되자 자장(子張)으로 보충하여 마치 관직에서 대임을 보충하듯이 하였으니, 후대의 유학자들이 이를 비판하는 논의를 분분하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자(程子)는 “네 가지 명목은 곧 진(陳)ㆍ채(蔡)에서 부자(夫子)를 따랐던 자들을 놓고 말한 것이니 문인 가운데 현자(賢者)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그러므로 십철은 세속의 논의임을 알 수 있다.” 하였고, 진정우(陳定宇)는 “유약(有若)과 같은 현자도 이 행차에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열에 끼이지 못하였다.” 하였고, 김인산(金仁山)은 “유약은 성인과 비슷하였으니, 안자를 올려 배향하게 되었을 때 증자로 보충한 것은 괜찮다 하더라도 이 유자(有子)를 놓아두고 자장을 취한 것이 될 일인가.”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은 십철이 본래 숫자에 구애될 것이 없다는 것인데, 또한 유자가 백세토록 추중(推重)되어 왔음을 대략 알 수 있다. 또 더구나 《논어》의 첫머리에 유자의 말을 기록한 세 군데에서 모두 증자와 아울러 특별히 자(子)를 칭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이 미칠 수 없는 바였다. 《예기(禮記)》에, “애공(哀公)이 공자(孔子)를 위하여 뇌문(誄文)을 내리고 도공(悼公)이 유약(有若)을 위하여 뇌문을 내렸다.”고 하였는데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노(魯) 나라 사람들에게 높이 예우받았음을 또한 증명할 수 있다. 게다가 《맹자》에, “유약이 공자와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인과 비슷하다고 하였으니, 그 언행과 기상이 감히 부자(夫子)에게 비교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인의 경지에서 멀지 않았던바 그 뚜렷이 드러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사마씨(司馬氏)가 떳떳하지 못한 설을 억지로 끌어대어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였던 것이라 억측하여 단정해서, 함순(咸淳 남송 도종(度宗)의 연호) 연간에 제사 지낸 술 한 잔을 자장(子張)에게 올리고 유자 약을 배제하게끔 하였다. 육상산(陸象山)은 돈오(頓悟)의 법문(法門)으로 유자의 효제(孝悌)를 가르침이 지리(支離)하다고 있는 힘껏 배제하였는데, 심지어 육상산을 종주로 하는 무리들이 천 년 뒤에 와서 이따금씩 공격해 대기 시작하여 지금에는 번수(樊須)ㆍ무마시(巫馬施)와 함께 겨우 동서무(東西廡) 사이에 끼여 있으니, 사전(祀典)에 있어서 흠이 되고 사림(士林)들이 탄식하는 바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아조(我朝)의 문묘는 한결같이 중국 조정의 위차(位次)를 따랐는데, 우리 숙묘(肅廟) 갑오년에 이르러 송조의 육현(六賢)을 아울러 올려 십철과 위차를 같이하도록 하였으니, 또한 중국 조정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던 바였다. 근래 중국 조정의 《회전(會典)》을 상고해 보건대, 유자(有子)와 주자(朱子)를 대성전(大成殿)에 올려 배향하여 십이철(十二哲)로 하였는데, 유자는 선현(先賢) 복자(卜子 자하(子夏)를 말함)의 다음에 있고 주자는 선현 전손자(顓孫子 자장(子張)을 말함)의 다음에 있다. 그러니 지금 중국 조정에서도 미처 시행하지 못한 것으로 널리 오현(五賢)을 거행하면서 중국 조정에서 이미 시행한 것으로 도리어 유자를 빠뜨리고 있으니, 유독 무슨 이유란 말인가.
혹 말하기를, “양서(兩序)에 종향하는 것은 모두 공작(公爵)에 봉해져야 하고 양무(兩廡)에 종사하는 것은 모두 후백(侯伯)에 봉해져야 한다. 유자를 서(序)에 올리려면 반드시 공(公)으로 올려 봉해야만 예에 맞을 것이다.” 하는데, 이는 또한 그렇지 않다. 전손자는 오히려 영천후(潁川侯)라고 불렸는데도 서에 올랐으니, 어찌 반드시 유자의 경우에만 고쳐 봉해야만 된다는 것인가. 전기(傳記)를 상고하면 덕행을 징험하여 믿을 만한 것이 이와 같고, 성인의 문하를 참작할 때 의논(議論)으로 추중받은 바가 이와 같으며, 후세 사람들의 추론하는 논설이나 중국 조정의 정리된 법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올려 배향할 만하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다시 고식적으로 예의(禮義)가 어떠하다느니 하며 운운하니, 또 어찌 사전(祀典)을 중히 하는 바이겠는가.
지금 문묘의 제사를 앞두고 속히 예조로 하여금 아울러 평음후 유자 약을 성전(聖殿)에 올려 배향하는 예를 거행하도록 하고, 그 올린 바의 위차(位次)를 기일에 앞서 고유(告由)하고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서 응당 행해야 할 바를 알려 주는 일 등은 맡은 관사에서 고사(故事)를 가져다 상고하여 상세히 갖추어 아뢰도록 하라.
기억하건대, 예전에 송조의 육현을 무(廡)에서 서(序)로 올릴 때 지금의 예조 판서의 증조(曾祖)인 고(故)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예조 판서로서 실제로 그 일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일을 당하여 지금의 예조 판서가 마침 이 직임을 맡고 있으니,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지 않다. 아, 그대 예조 판서는 그 직사를 공경히 맡아 그 의식을 잘 치러 내어 밝은 시대의 헌장(憲章)을 크게 드러내고 그대 조상의 공적을 더럽히지 말도록 하라. 힘써 노력할지어다.
[주-D001] 《논어(論語)》 …… 명목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나오는 말로, 진(陳)ㆍ채(蔡)에서 공자를 따르던 문하의 제자들을 네 가지 재능으로 나누어 열거한 것을 말한다. 덕행(德行)에는 안연(顔淵)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 언어(言語)에는 재아(宰我)ㆍ자공(子貢), 정사(政事)에는 염유(冉有)ㆍ계로(季路),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지목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 (역) | 1998
平陰侯有若陞配聖殿綸音 姑未施行
王若曰。文廟者。禮義之所從出。而祀典之所由楷範也。臨以夫子。第以儒先。象德報功之在玆。高山景行之在玆。正學術明道法之亦在玆。雖於登降揖遜。儀物度數之微文瑣節。猶不當循舊襲謬姑息以爲禮。况於位序之上下。享祀之先後。其可一毫苟然已乎。予以平陰侯有子若之祀于廡也。心積疑異。博考而常有慨焉者。蓋文廟腏食。凡有三等。正殿配享一也。顔曾思孟四聖是也。東西序從享一也。孔門十哲宋朝六賢是也。東西廡從祀一也。孔門諸子以下至本朝諸儒先是也。十哲之目。不知創自何人。而特因論語中四科之語。數其人而謂之哲。然論語此說。只就從於陳蔡之人。而爲此分屬之科。以見聖門人才之盛而已。夫以曾子傳道統之亞聖。而亦不與焉。則欲以此蔽聖門之賢哲。固矣哉。不綦陋乎。自是以來。文廟祀典。又以十哲。硬定孔門之高弟。顔子升侑。則以曾子補之。曾子升侑。則以子張補之。殆若官職之充代。而後儒譏切之論。不得不紛然競起。程子曰。四科乃從夫子於陳蔡者。門人之賢者固不止此。故知十哲世俗論也。陳定宇曰。如有若之賢。亦以不從此行而不在列焉。金仁山曰。有若似聖人。則顔升而曾補可也。舍有子而取子張可乎。卽此諸說。十哲之本不必拘於數。而有子之爲百世所推重。槩可見矣。又况論語篇首。記有子之言者三。皆與曾子特稱爲子。則他門人之所不能及也。記云。哀公誄孔子。悼公誄有若。而餘子不聞焉。則其爲魯人之尊禮之者。又可據也。且孟子不曰有若似孔子。而曰似聖人。則其言行氣象。雖不敢比倫於夫子。而其不遠於聖域。則何如其較著也。乃司馬氏以傅會不經之說。臆斷以貌肖孔子。致使咸淳間一祭酒。進子張而絀有子若。陸象山以頓悟法門。方排有子孝悌之訓爲支離。甚至宗陸之徒。往往刱攻於千載之下。而秖今與樊須,巫馬施輩。僅列於兩廡之間。其爲祀典之欠缺。士林之歎惜。果如何哉。我朝文廟。一遵中朝位次。而逮我肅廟甲午。幷陞宋朝六賢。與十哲同位。則又中朝之所未遑者也。近閱中朝會典。陞配有子,朱子於大成殿。爲十二哲。有子在先賢卜子之次。朱子在先賢顓孫子之次。則今以中朝之所未遑者。遍擧五賢。而至若中朝之所已行者。反遺有子。抑獨何說。或曰。兩序從享。皆封公爵。兩廡從祀。皆封侯伯。如陞有子於序。則必陞封公。然後爲叶禮。此又不然。顓孫子尙稱潁川侯。而亦陞於序。則何必至於有子而改封云爾乎。稽之傳記。德行之徵信也如此。參之聖門。議論之推重也如此。以及乎後人尙論之說。中朝釐正之典。而無往非可陞之的證也又如此。如此而猶復姑息。禮義之云何。而亦豈所以重祀典也哉。今因有事文廟。亟令儀曹。幷擧平陰侯有子若。陞配聖殿之禮。其所陞位次。前期告由。八道,四都。應行知委等節。所司取考故事。詳具以聞。記昔宋朝六賢之自廡陞序也。今之宗伯之曾祖故判書閔鎭厚。以宗伯。實典其事。當此盛擧。今之宗伯。適叨是任。事若有不偶然者。咨爾宗伯之臣。其欽乃職事。條厥儀式。以丕飾昭代之憲章。以無沗乃祖之績庸。勖哉可不懋乎。